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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성모석상] 수난의 역사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0. 12. 28. 09:50
지난 1973년 8월 초순 까지만 해도 천왕봉 서쪽 1.5미터가량 떨어진 바위에는
합장하고 있는 높이 1미터의 성모상과 그 오른편에 높이 1,1미터 가량의 여신상을 새겨놓은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1959년 천왕봉에 있던 성모석상과 마애불(<김결렬>님 사진)
*1962년 천왕봉 산막의 <김순용>영감님과 성모석상과 마애불
*1973년도 사진 (<조박사>님 제공 <김결렬>님 사진)
가부좌를 한 듯 다소곳이 앉아 합장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석상으로
몸집에 비해 유별나게 얼굴이 크지만 어머니같이 할머니같이 포근하고 인자한 얼굴이다.
움푹 들어간 눈이 매혹적이고 햇볕에 눈이 시린 듯 눈가에 웃음이 배어 있다.
오뚝한 콧날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 언저리에도 미소가 흐른다.
쑥색 바탕에 흰 점이 박힌 이 석상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석이다.
돌 전문가들은 천축 땅의 것이라고도 하고 파미르고원 것이라고도 했다
천 년 전 신라 때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성모석상]은 신라 때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고려 대에서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려 오면서
민초들과 무속인들의 기복신앙 상으로 숭상 되어져왔다.
그런데 천년 동안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석상의 증발과 수난은 고려시대 이후로 근세에까지 한 두 번이 아니다.
첫 번째 수난은 역사 이래로 우리 민족에게는 만년 원수였던 왜인에 의해서였다.
고려 우왕 6년 (1380) 왜구들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가 인월에서 <이성계>에게 대패하고
지리산으로 도망했던 패잔병들이 분풀이로 천왕봉의 [성모석상]에 칼질을 내서
이마가 쪼개어져 나중에 사람이 알맞게 붙였다 한다.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두 번째는 불가의 한 스님에 의해서 봉변을 당해야 했다.
조선 선조때 인근의 백성들이 무당의 유혹에 의하여 생업을 작폐하고 오직 성모석상을 찾아 기복을 올리는 사람들이 천왕봉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천하의 명산 지리산을 더럽히는 관계로 나라에서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신장이 8척인 <천연>이라는 중이 지리산에 왔다가 천왕봉 음사가 영괴하여 지나는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몇 걸음 못가서 인마 모두 죽는다 하여
이곳을 지나는 데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로 천왕봉에 들러 성모사당을 부수고 신상을 불태우고 [성모석상]을 던졌다고 한다.
그때 <천연>의 행동에 대해 불가에서는 물론 많은 유생들은 칭찬을 하였고,
특히 <남명>선생과 <퇴계>선생은 성모석상을 부순 <천연>의 용감한 행동을 찬하는 헌시까지 보냈다고 한다.
(정홍명의 “기옹만필”에서)
이러한 소동에도 [성모석상]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째 수난은 1945년 11월 어느 날 [성모석상]이 삼장면 내원리의 한 농부에 의해 짚가마니와 새끼줄에 묶여서 산 아래로 끌어내려지게 되었다.
[성모석상]을 보쌈형태로 끌어내려 자기 집에 보관하던 중 성모상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때,
그 농부는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서 제발 옮겨 달라고 간청을 하기에 그랬다고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두어 달이 걸려서 [성모석상]은 제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김경렬저 ‘지리산다큐멘타리“ 에서)
그 후 좌측에 나란히 앉아 있던 마애불여신상과 함께 [성모석상]이 1973년 8월경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번이 네 번째로 당한 수난이다.
[성모석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자 뜻있는 지역민들이 주변에서 찾아 헤매었으나 이 석상을 본 사람은 없었다.
미신의 본거지라고해서 어느 뜻있는 단체에서 계획적으로 도륙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 석조물들이 없어진 것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
일각에서는 마침 그 시절에 정부에서 전국의 무당집이나 서낭당 산신각 등의 일체 철거령이 내려졌던 때라
[성모석상]의 증발은 어쩌면 관에서 행하여진 것인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저토록 인자한 얼굴의 [성모석상]이 왜 수난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토록 여러 번 수난을 당하고 증발 했었던 [성모석상]이 지금은 지리산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현재 지리산 천왕사에 모셔져 있는 [성모석상]
지난 1987년 1월17일 천왕사의 주지 스님이 꿈의 계시를 받고 진주 비봉산의 어느 과수원 장작더미 밑에서 머리부분을 찾았다고 한다.
오른쪽 어깨 밑으로 잘려진 몸통은 그해 5월 14일 어느 주민의 귀띔으로 지리산 통신골에서 찾아 원형대로 복원 했다.
지금의 자리에 모신 성모상이 16일 만에 또 없어졌으나 주지스님의 간절한 기도 끝에 선몽을 받아 그해 7월17일 절 앞쪽 대나무 숲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한때는 지역 주민들이 [성모석상]이 돌아오면 위리안치 시키려고 천왕봉에 쇠창살집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나
천왕사측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은 법정까지 가기도 했다.
중산리에 또 다른 [성모석상]이 만들어진 것을 보니 아마도 법정싸움에서 지역민들이 패한듯하다.
*2000년 8월 지역 주민들의 모임인 두류산악회에서 중산리에 복원해 둔 [성모석상] (<청산>님 사진)
기왕이면 본래의 [성모석상]을 모셨으면 좋았을 터인데
불교유물도 아닌 민속신앙의 유형물을 안치하고 있는 부처님의 도량 천왕사측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모석상]을 찾아낸 공로는 인정하지만 꿈의 계시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고,
과정이야 어떠하였던지 버려진 물건 주운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사실이다.
[성모석상]의 주인은 엄연히 지리산 천왕봉인데
주운 물건은 마땅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는가.'지리 박물관(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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