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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2024년 08월 06일 화요일
# 산행지: 1박2일 행복한동행 식구들 과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00.00km
# 산행루트: 백무동 - 장터목 - 천왕봉
구름은 산허리를 감아 물결처럼 넘어가고
바람은 땀방울과 함께 온데간데 없는데
오른 만큼 내려서는 암담함에 한기 느낄때
일몰은 핏빛 온기되어 가슴 속에 퍼지고
설화는 산호초 마냥 뽐내며 웃고 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朱木)을 새.기.라.고.천왕봉 일출
천왕봉, 늘 그 자리
흰 나래 너울대며 지리 요정 찾아들면
한줄기 가슴만은 찢기질 말아라
저토록 꿈속의 몽정에 시달린 고사목
그 사연 억겁을 목울대로 넘기는데
고해의 번뇌 만은 건져서 가라 요.정.들,
제 혼불마져도 이 땅을 지켜야거늘,
평상심 오직 그 화두에
중생은 땀 공양 수행이네.지리산(智異山, 1,915.4m)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로,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총면적은 440.4㎢이며, 전라북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덕평봉(德坪峰, 1,522m)·명선봉(明善峰, 1,586m)·토끼봉(1,534m)·반야봉(般若峰, 1,732m)·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보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돌"(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삼신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渤海彎)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이곳에 신선(神仙)과 불사약(不死藥)과 황금(黃金)·백은(白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 史記≫의 기록이 있는데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 신산(四大神山)이라 하고, 그에 구월산을 합하여 5대 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지리산을 신산(神山)으로 꼽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하였다. 또 ≪팔역지 八域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산수론(山水論)에서 지리산을 조선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되며 12종산(宗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호남읍지≫,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 山水考≫, ≪대동지지 大東地志≫ 등에도 모두 지이산(智異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류산·방장산·지리산(地理山)·남악 등의 이칭이 소개되어 있고, 두류의 류(流)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류(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두류산(頭留山)이라는 이칭이 하나 더 추가된다.천왕봉(天王峰, 1,915.4m)
지리산은 한반도에서 세 번째,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산(2,750m), 한라산(1,950m) 그다음이 지리산 천왕봉(1,915m)이다. 그러나 지리산은 단순히 해발 고도만으로는 다른 산과 비교할 수 없는 민족의 영산이다. 천왕봉은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을 얼마 두지 않은 곳의 최고봉이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근본 산줄기로,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백두산과 지리산을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다. 또한 지리산은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고, ‘멀리 백두대간에서 뻗어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면서 유람록을 남겼을 뿐 아니라 등산객들이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도착하는 곳이 천왕봉이다. 천왕봉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네 갈래이다. 대개 경남 산청군 중산리, 유평리 대원사 계곡, 경남 함양의 칠선계곡 그리고 제석봉 아래에 위치한 장터목 등에서 천왕봉으로 향한다. 천왕봉 정상은 크고 작은 암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는 근래까지 성모상과 성모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던 곳이다. 성모상은 여러 번 훼손되는 수난을 겪다가 누군가에 의하여 결국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현재 산청군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천왕봉 성모상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태고 시절 옥황상제가 그의 딸 마고에게 지리산을 지키라고 명한 후 후토지신(后土之神)이 신라왕의 꿈에 나타나 “경주옥돌로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상봉에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황적사를 지어 향화(香火)를 받들라”(손성모, 143) 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모상은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설, 석가여래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등이 전해온다. 설(說) 마다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지만 지리산을 수호하는 상징적 여신(女神)임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성모상은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숱한 수난을 겪는다. 고려 말에는 침입한 왜구가 칼로 석상을 내리 쳐 석상의 귀와 코가 떨어져 나갔는가 하면, 1970년대에는 누군가가 석상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두 차례나 사라진 적도 있었다. 1987년 진주에 사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중산리 천왕사에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천왕봉의 백미는 일출이다. 운해(雲海)를 헤집고 세상천지를 밝게 하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지 않고는 천왕봉을 제대로 올랐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천왕봉일출’이 ‘지리 10경’ 지리 10경은 1경 - 천왕일출(天王日出), 2경 - 노고운해(老姑雲海), 3경 - 반야낙조(般若落照), 4경 - 벽소명월(碧宵明月), 5경 - 연하선경, 6경 - 불일현폭(佛日顯瀑), 7경 - 피아골단풍(직전단풍, 稷田丹楓), 8경 - 세석(細石)철쭉, 9경 - 칠선계곡(七仙溪谷), 10경 - 섬진청류(蟾津淸流)이다.
중 제1경이며,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대에 걸쳐 덕을 쌓고 적선해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선인들도 비바람 속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일출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에도 동이 틀 무렵에는 천왕봉 정상에는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1월 1일 또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는 2~3,000명이 운집할 때도 있으며, 정상으로 오르지 못하고 주변 대피소 또는 등산로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정상에 오른 사람보다 더 많을 때도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 천왕봉 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눈비가 오거나 이슬 또는 운무(雲霧) 때문에 미끄럽다.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른 새벽 동틀 무렵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바다가 서서히 주황색으로 물들면서 그 속에 해가 솟는다.
천왕봉 주변에는 장터목산장 쪽으로 고사목 지대이자 구상나무 식재지인 제석봉(1,806m), 칠선계곡 쪽으로 마폭포, 치밭목산장 쪽으로 중봉(1,875m), 제석봉과 천왕봉 사이의 통천문, 로타리산장 쪽으로는 천왕샘, 개선문 등이 있다.천왕봉 정상석의 뒷면
현재의 표지석은 1982년 초여름 당시 경남 도지사 이규호씨와 민정당 실력자였던 권익현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상남도가 세웠다고 하며, 높이 1.5m의 자연석을 옮겨와 세운 이 표지석의 전면은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영남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되다를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로 언제부터인가 바꿔 새겨 놓았다.
예전의 정상석 뒷면에는 남명 조식선생의 시(詩)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請着千石鐘 (청간천석종) 청하여 천석종을 보니
非大叩無聲 (비대구무성) 큰 종채가 아니면 소리가 나지 아니한다네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만고의 천왕봉은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은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아니하네천왕봉을 힘겹게 올랐음에도 천왕봉일출을 놓친 산꾼을 위로라도 하듯, 동으로는 대구의 비슬산이 서로는 광주의 무등산이 그리고 북으로는 덕유산, 남으로는 남해도의 망운산까지의 장쾌한 조망을 선사하여 지친 산꾼을 감동케 한다.
일월대,日月臺 -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1643년-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나타나니,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하여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들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에 있는 일월대로 나와 앉아 피리 연주를 들으니 몸이 차고 혼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중국 당나라 현종과 월궁 양귀비의 놀이도 부럽지 않았다,
#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이라는 분이 남긴 [방장유록]의 일부에도 언급이 된다
당집(성모사당을 일컫음) 은 원래 일월대 위에 있었는데 어느 해에 일월대 아래로 옮겨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천왕봉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칠선계곡(七仙溪谷) 갈림길 시점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한국 3대 계곡의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의 원시림에 7개의 폭포수와 33개의 소(沼)가 천왕봉에서 칠선폭포를 거쳐 용소까지 18㎞에 걸쳐 이어진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골이 깊고 험해 죽음의 골짜기로도 불린다. 총연장 18㎞ 가운데 추성마을에서 천왕봉까지의 14km 정도가 등반코스에 해당한다.
계곡 입구의 용소를 지나 두지마을과 옛 칠선마을의 독가촌을 지나면 울창한 잡목 숲을 따라 전망좋은 추성망바위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험한 산길이 선녀탕까지 계속된다. 선녀탕에는 일곱 선녀와 곰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즐기던 일곱 선녀의 옷을 훔친 곰은 옷을 바위틈이나 나뭇가지에 숨겨 놓는다는 것을 잘못해서 사향노루의 뿔에 걸쳐 놓아 버렸다.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본 사향노루는 자기 뿔에 걸려 있던 옷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선녀들은 옷을 입고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는 칠선계곡에서 살게 해 주고 곰은 이웃의 국골로 내쫓았다고 한다.
선녀탕을 지나면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옥녀탕이 나오고, 벼랑을 오르면 비선담이 나온다. 비선담과 옛 목기막터를 지나면 청춘홀이라 불리는 굴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부터 경사가 더욱 심해지며 계곡을 상징하는 칠선폭포와 대륙폭포·삼층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합수골로 이어진다. 합수골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면 두 갈래의 물줄기가 만나는 마폭포가 나온다. 이 마폭포를 지나 원시림이 울창한 등산로를 3km 오르면 천왕봉이다.특별보호구 지정으로 출입이 금지된 칠선계곡을 제한적ㆍ한시적으로 탐방예약ㆍ가이드제를 시행하여 칠선계곡의 아름다운 경관 및 동ㆍ식물에 대한 해설로 국립공원의 새로운 탐방문화를 조성하고 있다.
통천문(通天門, 1,814m)
하늘로 통한다는 뜻을 가진 통천문 즉 이 문이 세상과 하늘의 경계인 셈이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의 지리능선의 비경에 흠뻑 젖어 걷다가 만나는 문이 통천문이다. 통천문은 그 자체가 천연암굴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을 못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은 철제사다리를 놓아 산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혹여나 부정하여 통과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통천문을 통과하여,
호구당(虎口堂)
호구당집이 있는 곳은)통천문과 제석봉 사이에 안온(安溫)하고 호랑이 입을 닮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움집 형태인 반지하...
출처 : 지리산 백무동 - 최석기
하익범_유두류록 1807년
향적사 옛 터에 이르러 조금 쉬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여섯 명의 남녀가 돌 위에 모여 앉아 있었다. 뭐하는 것이냐고 묻자 복을 구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능선을 따라 호구당(虎口堂) 역참에 이르는 길은 순탄한 길이었다. 고개에 올라 오 리쯤 가니 석문과 승운(昇雲) 사다리가 있었다. 벽을 기어올라 또 오 리를 가니 바로 천왕봉이었다.
역참은 사람의 왕래가 활발한 교통의 요지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 정황상 하익범이 말한 향적대 주변 능선상에 호구당 역참은 장터목이다.
박래오는 호귀당이라고도 불렀다니 호랑이한테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한 곳이 아닐까?제석봉
제석봉(帝釋峰, 1,806m)>
경남 함양군 마천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리산의 봉우리로, 제석신이 머무는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봉우리 아래에 제석단과 향적대가 있다. 불교에서 가져온 지명으로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주석하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볼때 제석(帝釋)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하므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 밑에 제석이란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작명인 것 같다. 옛날 민간신앙으로 제석천(帝釋天)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제석봉이라 한다.제석봉(帝釋峰)의 고사목지대
천왕봉(天王峰, 1,915m)과 중봉(中峰, 1,874m)에 이어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봉우리 근처에 산 신에게 제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고, 그 옆에 늘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명당으로 알려졌다. 제석봉 일대 약 33만㎡의 완만한 비탈은 고사목으로 뒤덮여 있으며, 나무 없이 초원만 펼쳐져 있다. 한국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아름드리 전나무·잣나무·구상나무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에 권력자의 친척이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리고 거목들을 무단으로 베어냈고, 이 도벌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 증거를 없애려고 이곳에 불을 질러 모든 나무가 죽어 현재의 고사목 군락이 생겼다고 한다.# 산향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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