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남원&경남함양 지리산 칠암자 길 & 삼정산'三政山 (해발1182m)산행-2018년05월27일(일요일)
#.지리산 칠암자길
#.산행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전북 남원 산내면 입석길 지리산 칠암자 길 산행
#.언제: 2018년 05월 27일 (일요일)
#.산행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전북 남원 산내면 입석길 지리산 칠암자 길 산행
#.산행거리: 16.26Km (06시간59분)
#.산행코스: 음정3거리 - 작전도로 - 도솔암 - 영원사 - 삼정산 - 상무주암 - 문수암 - 삼불사 - 약수암 - 실상사 - 입석리(마을주차장)
#.지리산 칠암자 길 위치: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전북 산내면 입석길
지리산 주능선 삼각봉(1,462m)에서 북서로 뻗다가 영원령(1,292m)에서 북동으로 휘어지며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이
삼정산(1,225m)능선으로 이 능선이 품고 있는 도솔암(약 1,165m), 영원사(약 895m), 상무주암(약 1,162m), 문수암(약 1,060m),
삼불사(약 990m), 약수암(약 560m),실상사(약 330m) 등 7곳의 암자와 사찰을 흔히 지리산 칠암자라 부른다.
도솔암과 상무주암, 문수암 등은 영원사에 딸린암자들로 수행 정진하는 청정도량답게 고산(高山)지대의 능사면과 기암절벽을 등지고
천왕봉을 향하고 있으며 막힘이 없어 조망이 뛰어나며, 삼정산능선 끝자락인 772봉 북동 방향의 아늑한 능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약수암은
실상사에 딸린 암자로 보광전의 목조탱화(보물 421호)가 유명하다.
[영원사]
영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45) 때 영원(靈源)이 창건하였다 전해지며, 1948년 여수·순천사건
당시 아군의 공격에 쫓긴 반란군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자 아군이 작전상 불태워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법당은 그 후 1971년에 중창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름난 수행처로서 109명의 고승이 안거하였다 하며, 이 사찰의 조실안록(祖室安錄)에따르면 영관(靈觀:1485∼1571),
휴정(休靜:1520∼1604), 인오(印悟:1548∼1623), 유정(惟政:1544∼1610), 상언(尙彦:1707∼1791) 등의 큰스님이 열거되고 있다.
건물은 인법당만 남아 있고, 암자는 도솔암과 상무주암(上無住庵), 문수암 등이 남아 있는데, 그중 도솔암은 인오가 수도하던 곳이고,
상무주암은 지눌(知訥)과 혜심(慧諶) 등이 머무르던 암자이며, 문수암 뒤에는 임진왜란 때 마을사람 천명이 피난하였다고 전해지는
천인굴(千人窟)이 있다. 유물로 영암(靈巖)과 상언, 중봉(中峰), 청계(淸溪), 벽허(碧虛), 인오의 부도 6기가 전해진다.
[실상사]
대한불교조계종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통일신라시대 828년(흥덕왕 3) 증각대사(證覺大師)홍척(洪陟)이 세운 절로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선종(禪宗)의 여러종파가 전국 명산에 세운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으뜸 사찰이다.
구산선문은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 형성된 선종(禪宗)의 아홉 갈래 선파(禪派)로 신라말에 이미 가지산(迦智山),실상산(實相山),
동리산(桐裡山),성주산(聖住山),사굴산(闍堀山),사자산(獅子山),봉림산(鳳林山) 등에 일곱 선파(禪派)가 있었고 고려 초 수미산(須彌山),
희양산(曦陽山)에 두 개선파가 세워짐으로써 구산선문이 형성되었다.
정유재란(1597)때 폐허가 되어 오래도록 방치되 다가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워 복구하였으나 1882년(고종 19)에 또다시
소실되어현재의 규모로 복구되었다. 국보와 보물 등 중요문화재 11점외에도 지방유형문화재외 중요민속자료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
약수암이 있다.
#.삼정산'三政山 높이: 1.182m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산 아래 마을인 하정·음정·양정을 합쳐 삼정(三丁)이라고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지도엔 삼정산'三政山 으로
표기되어 있다.
특징'볼거리
지리산 산자락에 있는 봉우리이면서 '봉(峰)'이 아닌 '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상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통상적으로 '봉'이라 부르고 있으며 주능선을 기점으로 써레봉, 삼신봉, 왕시루봉 등 동, 남, 서쪽의 곁가지 봉우리들도 모두
봉으로 부르고 있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북쪽 곁가지에 있는 봉우리는 삼정산 이외에도 '산'으로 표시된 곳이 많다. 백무동의 오송산(669.4m), 창암산(923.3m)이
있으며, 만복대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나간 줄기에 있는 세걸산(1,207m), 덕두산(1,114.9m) 등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 산자락의 봉우리만 '산'을
달고 있다.
뱀사골의 동쪽 산록에 해당되며, 만수천(川)과 덕전천(川)의 분수계를 이루는 봉우리이기도 하다. 산세가 부드럽고, 곳곳에 기암과
고사목·노송들이 어우러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함양군지에는 한자가 삼정산(三丁山)이라고 되어 있으나,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삼정산(三政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삼정산이란 이름은 동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하정,음정,양정이란 세 마을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지리산국립공원 내에는 20여개가
넘는 사찰과 암자가 있다.
삼정산 산기슭에는 그 중 3분의 1쯤 되는 7개의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산아래 부터 실상사, 약수암,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 영원사,
도솔암이 차례로 모습을 들어낸다. 실상사(實相寺)에는 보물 제33호인 능가보월탑을 비롯해 보물 8점을 간직하고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 견성골 문수암 암자 옆에는 임진왜란때 1천명의 주민이 난을 피했다고 하여 '천인굴'이란 이름이 붙여진
동굴이 볼 만하다.
삼정산 등반코스는 일명 '암자순례길'이라고 한다. 남원 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실상사 산내암자인 약수암을 거쳐 차례로 삼불사,
문수암, 상무주암에 이를 수 있고, 삼정산을 지나 영원령 쪽으로는 영원사·도솔암이 있다.
#.길이 많아도 종착지는 하나다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
선사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
어디서 오십니까 ?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자들은 흔치 않다.
때로 인간은 자신이 실종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길을 간다
인간은 대개 길을 가면서 동반자가
있기를 소망한다.
어떤 인간은 동반자의 짐을 자신이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짐을
동반자가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길을 가는 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장애물이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일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지혜로운 자의 길은 마음 안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
아무리 길이 많아도 종착지는 하나다.
-좋은 글 중에서-
#.산행지도
#.산행사진
#.실상사'實相寺 위치: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3외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하면서 창건하였다.
홍척은 도의(道義, 道儀)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다. 그 후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는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볼 때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秀澈)을 거쳐 3대조 편운(片雲)에
이르러서 절을 크게 중창하고 선풍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화재로 모두 불타버린 후 2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벽암(碧巖)이 삼창(三創)하였고, 1684년 계오(戒悟)가 현재의 극락전(極樂殿)인
부도전(浮屠殿)을 지었다.
1690년에 침허(枕虛)를 중심으로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또한 1821년에는 의암(義巖)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882년(고종 19)함양 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 출신 민동혁(閔東赫)에 의해
사찰건물들이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1884년에 월송(月松) 등이 중건하였다.
1903년(광무 7) 익준(益俊)이 승당을 지었으며, 1932년 칠성각을 세웠다.특히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 하여 일찍이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었다. 그 불상의 복장(腹藏)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문(願文)과 사경(寫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들어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高麗板華嚴經疏) 등 보기 드문 서적도 몇 가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1986년 요사로 사용 중인 선리수도원(禪理修道院)을 건립하였고, 1989년 천왕문을 세웠다.
1991년 범종각을 짓고, 1996년 화엄학림(華嚴學林) 강당과 학사를 건립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