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점골이라는 숨은 골짜기가 있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아마도 가장 깊고 깊은 곳에 숨어있는 계곡으로 짐작된다. 그 빗점골은 또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절터골과 산태골, 온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더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놓고 있다.
지리산의 빗점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남부군,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을만한 빨치산의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기에 이곳 빗점골이 갖는 한국 현대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할수 있다. 이른바 빗점골 회의를 갖고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며 그리고 그 자신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은 빗점골의 너덜지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너덜지대는 "합수내 흐른바위"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빗점골이 다시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빗점골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기록은 당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경찰부태)의 "전투상보"와 이태의 "남부군"등에 비교적 소상하게 남아있는데 이러한 기록들과 증언들은 부분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기록 또는 증언으로 전하는 사실이 기록자의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즉 아전인수격으로 풀이했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시말해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경찰과 국군 토벌대, 그리고 토벌대상이던 빨치산, 또한 그 사건 이후 현지인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얘깃거리 등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의 매우 중요한 상황, 다시 말하면 이현상의 최후에 관한 정확한 사실이 아직도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제5지구당을 이끌고 벽소령과 토끼봉을 연결하는 주능선 사이의 골짜기인 빗절골과 절터골, 산태골 등을 빨치산 투쟁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 일대를 주요 거점으로 정해 칠불사 능선과 뱀사골, 광대골 등지로 진출하는 등 적절한 게릴라전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빨치산 수기와 현지인들의 증언 중에는 당시 빨치산들이 통신수단의 배터리 충전을 위해 절터골에서 수력발전 시설까지 갖추기도 했다는 부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이 일원이 그들 빨치산 최후의 항전무대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어떻든 쇠잔해가던 빨치산 무리들은 이곳에서 남로당 간부와 각 지구 유격대 사령관들이 최후의 회의를 열고 이현상이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그때가 1953년 10월 18일로 전해지고 있다.
빨치산 최후의 항전지였던 빗점골은 화개천을 거슬러 50여 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은 화개장터에서 의신마을까지 포장도로로 잘 연결돼 있으며 의신마을에서 삼정마을까지는 벽소령 작전도로를 정비한 비포장도로가 비교적 잘 연결된 덕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현지 주민들은 의신마을 상단부 계곡에서부터를 빗점골로 부르고 있는데 일부는 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으로 부른다.
의신에서 삼정까지는 3km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도로 변으로 좁은 계곡이 이어진다. 수만여평에 달하는 넓은 초지대를 염소방목장으로 활용하며 3가구가 살고있는 삼정마을을 지나 비포장도로는 2km남짓 더 계속된다. 이 도로는 벽소령까지 연결되는 작전도로를 마을 주민들이 보수, 정비한 것인데 이는 주민들이 고로쇠 수액 채취와 수송을 목적으로 보수한 것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삼정에서 7km지점인 벽소령 꼭대기까지 어떤 모양이던 도로가 정비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해 걱정이 앞선다. 이미 삼정마을에서 방목하는 염소무리들은 벽소령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그 활동 영역을 넓혀 놓고 있는 상태이고 보면 머지않아 차량까지 오르리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산너머 마천면 삼정에서는 등산객들을 상태로 지프형 택시가 10만원을 받고 벽소령 꼭대기까지 영업하고 있는 사실은 하동지역 폐도 역시 곧 인위적으로 보수될 것임을 예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정에서 조금 지나면 차량의 진입이 더이상 불가능하고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차가 언제든지 몇 대씩 세워져 있다. 이 주차장 조금 못 미쳐 계곡과 도로 사이가 꽤 넓은 곳이 있는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옛날 빗점마을이다. 빗점마을은 한때 지리산 화개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모두 이주하고 집터만 남아 있다. 전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당국이 삼정 또는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시켰다 한다.
의신마을에 사는 조봉문씨(39)같은 이는 어릴 적 빗점마을에서 산 기억을 갖고 있기도 하다. 빗점골은 빗점마을 위 주차장에서부터 본격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널따란 너덜지대가 나오는데 이곳이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합수내 흐른바위다. 합수내는 삼각봉과 연하천에서 흐르는 절터골과 명선봉(1586m)과 토기봉에서 흘러내리는 산태골, 완골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이다. 그래서 합수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빗점골에서 종주능선까지의 등산로는 물줄기와 같이 세갈래로 이어진다. 한 갈래는 절터가 있다 해서 이름 지어진 절터골을 따라 연하천 산장 또는 삼각봉까지 연결되는데 대략 8km에 이른다. 또 한갈래는 산태골을 따라 명선봉 꼭대기까지 또는 명선봉과 토끼봉 사이의 총각샘으로 연결되며 나머지 하나는 산태골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흐르는 왼골과 연결되는 등산로로 이는 토끼봉으로 연결된다. 이들 등산로 모두 찾는 이가 많이 없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데다 계곡이 너무 깊어 아예 길이 없을 것으로 보고 찾지 않고 있는 탓이다. 최근엔 고로쇠 수액을 받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자주 오르내려 등산로는 잘 이어진 편이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안내를 충분히 받을 필요가 있다.
세 갈래 등산로 모두 비슷한 산행시간을 요구하고 있으며 연하천 산장을 이용할 수 있고 또한 뱀사골 산장까지 산행도 가능한 만큼 1박할 수 있는 산장을 적절히 선택해 빼어난 계곡미와 종주능선의 운치를 즐길 수 있다.
빗점골 산행의 묘미로 지리산 한가운데 가장 깊숙한 골짜기를 시작으로 주변의 피아골, 뱀사골, 벽소령, 세석 등지를 적절히 즐길 수 있으며 빨치산의 행적을 되짚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최대로 손꼽힌다.
#목통골 - 옛 부터 목통골과 피아골을 넘나들던 고개가 화개재이다. 연통골로 불렸던 목통골은 목통마을 상부에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연통마을에서 유래 되었다는데, 특히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다.
먹통은 으름(어름)의 이곳 지방사투리로 으름이 많이 자생하여 먹통골로 불리다 행정구역 등재와 억양상 목통이 편했는지 목통마을로 불리기 시작했고 1960년대 사라진 연동마을이골 중류지점에 있었던 관계로 연동골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좌우에 불무장등과 토끼봉(범왕)능선을 거느리고 주능 삼도봉 화개재 토끼봉에서 흘러내리는 지류를 품고 있는 목통골...
옛 선인들은 소금 등을 지고 이고 지리 주능에서 가장 고도가 낮아장이 섰다는 화개재로 가기 위해 이곳 목통골을 오고 갔으므로 민초들의 고된삶과 애환이 서려있고 뱀사골의 간장소, 삼도봉 근처 소금쟁이무덤과 관련한 전설도 화개재에서 비롯되었으니 현대에 들어와 문전성시를 이루는 섬진강변 화개장터보다 진정한 영호남을 잇는 매개체는 옛선인들이 넘나들던 이곳 목통골과 화개재일겁니다.
# 칠불사,七佛寺 위치: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 반야봉(般若峰) 남쪽, 쌍계사 북쪽 30리에 있는 사찰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1568년(선조 1) 부휴(浮休)선사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 금담(金潭)과 그 제자 대은(大隱)이 중창하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완전 소실되어 오랫동안 재건되지 못하였다.
1978년 이후 문수전(文殊殿)·보광전(普光殿) 등이 중창되었으며, 1982년에 아자방(亞字房)건물이 복원되었다. 아자방은 온돌방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이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 선사(曇空禪師)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는데도 한 번 불을 지피면 49일 동안 따뜻하였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칠불선원(七佛禪院) 또는 칠불사라고도 한다. 이 절의 창건에는 몇 가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연담(蓮潭)의 칠불암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때 지리산 옥부선인(玉浮仙人)이 부는 옥적(玉笛)의 소리를 들은 일곱 명의 왕자가 입산하여 6년 만에 도를 깨닫고 이 암자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전(世傳)에는 옥보선사(玉寶禪師)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7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행하여 6년 만인 103년(파사왕 24) 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또 진응(震應)의 지리산지에 의하면 지리산은 칠불조사(七佛祖師)인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칠불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중 가락국 7왕자의 성불 및 창건설이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다. 또, 신라의 옥보고(玉寶高)는 이 절의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공부하고 30곡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고 하는데, 칠불암이 신라 음악의 중요한 요람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서 그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부휴(浮休)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에는 금담(金潭)과 그 제자 대은(大隱)이 각각 중창하였으며, 1907년에는 토비의 난으로 승려들이 흩어졌다가 1910년에 다시 선사(禪社)를 크게 열었는데, 이때 서기룡(徐起龍)은 이 절의 당우를 수리하였다. 그러나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김선신(金善臣)의 두류전지(頭流全誌)에 의하면, 당시 비로법전·고승당·약사석불·부휴조사치아탑·조능의 부도 등이 있었다고 하며, 11동의 건물이 잇따라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수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근년에 문수전(文殊殿)·보광전(普光殿)·선원(禪院) 등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이 중 선원은 亞자형의 온돌방으로서 아자방(亞字房)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것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화상(曇空和尙)이 아자형으로 축조하여 만든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지만 한번 불을 때면 49일 동안 따뜻하였다고 한다.
한번 불을 때면 일곱 짐이나 되는 나무를 세 개의 아궁이에 넣어 한꺼번에 땐다고 하며, 화도(火道)가 막히지 않고, 높고 낮은 곳이 고루 따뜻하였다고 한다. 1948년에 소실된 뒤 그 터만 함석으로 덮어 보호해 오다가 33년 만에 공사비 4,800만 원을 들여 1982년에 복원하였다. 이 절 150m 아래에는 영지(影池)가 있는데, 허왕후가 7왕자의 성불한 모습을 보았다는 자리이다.
말이 곧 인품입니다
말은 많아도 들을 말이 없다면
말은 해서 무엇하리
들은 말이라도 다 뱉을 말이라면 생각은 두었다 어디에 쓰리
향기 고운 말은 꽃을 피우고 가시 돋친 말은 상처를 입히니 말은 하되 생각을 먼저 하고 말은 듣되 새겨서 들음이라
하기 쉬운 말이라도 하고 나면 거둘 수 없고 듣기 좋은 말이라도 자꾸 들으면 싫증나는 법
말 많음의 경솔함이여! 말이 많으니 실수가 많고 실수가 많으니 신뢰가 없어라
말이 곧 인품인 것을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무책임하게 해 왔던가
이채의-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중에서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삼정마을 - 이마을 근처에서 정승이 3사람 배출대었기에 삼정마을이라고 부름...
#빗점골 가는길 -60년대와 70년대에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자주출몰 하던때 신속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당시 광주 상무대 공병대에서 만들어놓은 군용작전 도로입니다, 지금은 산사태로 여러곳이 크게파손 되었지만 거의벽소령 아래까지 연결된 도로입니다, 벽소령넘어 마천 음정으로 연결된 도로는 지금도 차량이 가능합니다, 현재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출입을 통제를하고 있습니다, 의신일대 주민들은 고로쇠철에는 화물차를갖고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