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의 기도처 산행
# 언제: 2020년 06월 06일 토요일
# 산행지: 지리산 진정한 산꾼,산신령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의 기도처 산행
# 산행거리: 16.29Km 08시간08분
# 산행코스: 거림매표소 - 북해도교 - 거림옛길 - 거림골상류1기도처 - 거림옛길초막터2기도처 -
음양수3기도처 - 창불대 암봉4기도처 - 영신대5기도처 - 영신봉 - 세석펑전(잔돌고원) -
한신계곡 - 백무동주차장
지리산에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그러나 그 지리산 사람은 지리산 속으로 사라져 이제는 찾을 길 없다. 30여 년을 지리산과 함께 살아오면서 지리산을 집 삼아 살다간 이시대의 奇人으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가족은 있었지만 속세를 떠난 구도자의 수행길처럼 그는 늘 지리산 토굴과 움막에서 살다시피했다. 축지법을 쓴다거나 호랑이를 타고다닌다는 등의 숱한 소문이 항상 그의 주변에 따랐다. 그리고 19년여 전인 76년6월 어느날 "나를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긴채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지리산과 하나가 되어 좌화를 이루면서 지리산을 살다간 진정한 山사람. 우천 허만수.
지리산에는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지리산 사람들은 숱한 지리산과의 대화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숱한 지리산과의 대화은 또한 지리산과 우리 한민족의 관계를 깊이 조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상향의 목마름을 희구하던 수많은 시인묵객은 물론 수도자,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선조들은 지리산을 못내 사랑하며 지리산과 하나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일찍이 최고운은 산천을 누비다 지리에 들어와 이곳이야 말로 자신이 갈구하던 이상향임을 깨치고 지리산에서 살다가 궁극에는 지리산에서 신선이 되고자 했다. 孤雲은 주로 지리산 중에서도 하동과 산청 일원의 산 자락을 터전으로 삼아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기도해 왔었다. 지금도 고운의 족적은 지리산 신비경이 있는 곳마다 어김없이 남겨져 우리에게 선생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고운은 지리산 사람 가운데 유독 지리산과 하나가 되어 신선으로 승화한 유일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다.
고운의 지리산 삶은 다른 수많은 시인, 묵객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이상향을 찾아 지리산으로 향한 이들이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끝내는 그들이 갈구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만큼 지리산이 갖는 의미가 심오하고 범인이 접근하기 힘든 영산임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西山의 지리산 인연은 색다르다. 수행의 근거지를 지리산으로 삼아 서산은 지리산의 역사까지 고찰해 기록으로 남기는 배려까지 아끼지 않았다. 마한도성이 지리산에서70여년간 유지된 사실등을 우리에게 남긴 것은 큰 사료로 평가되고 있는 사실등이 그것이다.
지리산과 사람들의 인연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수많은 기행록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지리산 자락을 주변으로해 사상체계를 정립한 대유학자들이 배출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근세에 와서는 역사의 굴절과 더불어 수많은 지리산 사람들이 영욕의 삶을 살아왔다. 끝내는 지리산이 피로 얼룩지게 했던 빨치산의 처절한 삶과 양민학살등의 비극으로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렇듯 지리산 사람들은 역사의 부침과 함께 그 의미를 각기 달리하여 살아왔다.
그간의 수많은 지리산 사람 가운데 최근래에 지리산과 함께 살다 간 인물, 우천 허만수선생의 삶이 우리에게 의미 깊은 것은 왜일까. 아마도 지리산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도 자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자연에 순응할 줄 알았고 만고불변의 자연원리를 쫓아 살면서 자연과 하나된 그의 삶이 고귀했고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가 너무도 강렬했음이라 여겨본다. 아직도 우천의 생적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지리산 신령으로 승화돼 지리산속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하늘을 집 삼아 살았다는 뜻의 우천 선생은 1916년 진주시 옥봉에서 태어나 10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교시절 산을 알았고 그곳에서 경도전문대 철학과를 다니며 아름답고 순수한 삶을 살고자 모임을 만들어 일본의 유명산을 찾아 헤매며 인생의 의미를 깨우쳤다 한다. 일제에 강제 징집당했다가 광복후 진주로 돌아와서는 부인 전경림 여사와 결혼해 세딸(청자, 덕임, 영희)를 두고 서점을 운영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듯했으나 지리산에오른 뒤 스스로 "우천(宇天)"임을 자청하고 산으로 향하는 열정을 불태웠다. 세석고원에서의 움막생활을 시작으로 가끔씩 진주를 걸어서 들러는 것 외에는 오직 지리산을 사랑하는 산사람으로서의 일생을 걷게 된다.
산에 살면서 그냥 지내기보다는 당시에 산을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등산로를 만들기로 하고 험난한 곳에는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놓아 오르내리기 편하게 했으며 산을 멋모르고 찾았다가 낭패를 당하는 조난객들을 구하는 일까지 선생의 손발이 미치지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생기면서 지리산 등산로 주변의 안전시설이 정비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등산로 주변의 편의시설설치는 우천선생의 몫이었던 셈이다. 지리산에 살면서 가장 지리산을 아끼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려 했던 우천은 지리산 동물을 잡아가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사서라도 산에 고이 묻어 주고 지리산의 아름다운 꽃씨를 모았다가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며 심어 가꿀 것을 권하기도 했다 한다. 지리산을 자신의 신체와 하나로 여기고 있었음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은 또한 지리산을 아끼면서 어린이들을 아껴 모처럼 산에서 내려오면 곡점에 있는 국민학교에 들러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며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한다.
장터목 산장을 대를 이어 관리하고 있는 최진경씨는 "어릴적 선생이 운동장에서 함께 뛰어 놀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건네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아직도 산을 가다보면 선생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선생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선생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풍기는 인상이 비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발이 보이지 않는다" "산에 미친 사람" "축지법을 구사하는 사람" "호랑이를 휘파람으로 부르는 사람" 등등이 선생을 따라다니는 수식어였을 정도라 한다. 그 만큼 신비스런 삶을 지리산에서 보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선생은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지리산이 열리면서 등반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게 된 이후부터는 자연의 훼손이 눈에 띄게 늘어가 이를 제대로 수습하는데 한계를 느꼈음인지 인생과 사회에 대한 좌절감을 맛보고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묻힐 것이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했다한다. 그 후 잘아는 산악인들을 만나면 "지리산으로 영원히 들어갈 것이니 찾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 무렵이 76년 6월,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동안 선생의 자취를 보지 못하고 지내오다 기억을 더듬어 선생이 한말의 의미를 알고 뒤늦게 지리산을 찾았으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해 6월 어느날이 선생의 삶의 끝이라는 것으로 추정만 할 따름이다. 몇몇 그를 추모하는 산악인들이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칠선계곡을 찾아 흔적을 찾아보려 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후 진주의 산악인들은 고인의 높은 지리산 사랑을 기려 중산리 등산로 입구에 추모비를 세워 매년 철쭉제행사 때마다 이 곳에서 제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서 풍장+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우리 죽을 때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며...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꺼비-
# 산행지도
# 산행사진
거림에서 세석을 오르는 정규 등로 매표소에서 천팔교 지나 북해도교 도착...
거림계곡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본에서 수학하셨고 지리산이 좋아 가족(부인과 세 딸)과 생이별을 마다않고 산으로 들어와 잔돌평전(세석고원)에 터를 잡아 30년 동안 하늘을 지붕 삼아(아호 우천의 뜻) 생활하면서 칠선계곡, 한신계곡을 비롯한 다양한 코스의 등반로 개척, 조난자 구조, 등산로 정비 등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지리산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갖은 어려움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6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칠선계곡 어디 동굴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일 뿐입니다. 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하시겠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그야말로 지리산의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44년 전 유월에 신화가 되어버린 우천선생이 즐겨 다니시던 그 옛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지리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거림 옛길 와폭
지리산(해발 1915m)은 우리 영토 척추인 백두대간의 출발점이자 마무리 지점이며, 그 줄기는 진부령과 휴전선을 넘어 백두산까지 1400㎞를 힘차게 내달리며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다.
산행을하며 느낀 점 사실 흔적도 거의 없다. 선생이 살던 움막은 사라진 지 오래고, 남아 있는 것은 선생의 기도처가 전부이다. 오늘은 그 기도처를 차례로 돌아보고 선생의 숨결을 느껴보기로 한다. 탐방코스는 거림 옛길을 오르며 두 곳의 기도처를 돌아보고 음양수 바위와 창불대, 그리고 영신대 등 모두 다섯 곳의 기도처를 차례로 답사하며 산행...
거림골 상류 1기도처
등로는 산죽길이 많고 일부는 너덜길로 거칠지만 뚜렷한 등로가 있다. 한동안 너덜과 산죽길을 오르다 보면 허물어진 작은 기도처가 있다.
거림골 상류 1기도처에서 쉬는 시간을 가져본다...
황금너굴님
오르고님
정현님
멋진 유목님 대장님
배완식님
거림골 상류 1기도처에서 단체사진...
거림계곡 지나 거림옛길 2기도처로 걷는다...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 움막터
우천선생의 움막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산죽만 무성하고 잠시 위쪽으로 길을 이어가다 보면 우측으로 너럭바위가 보인다. 그 위에 우천 선생의 2기도처가 있다.
거림옛길,움막터, 2기도처
너럭바위에 올라 기도처를 둘러보니 조망 좋은 명당자리에 있다. 발아래 거림골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끝머리에 삼신삼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 낙남정맥이 흐르는 능선과 주산 줄기가 조망이될거고. 바로 아래에 우천 선생의 움막이 위치하며 아무래도 이곳이 우천 선생이 가장 많이 애용한 기도처로 보인다.
2020년 06월 06일 토요일 오늘 산행은 운무로 조망은 전혀 볼수없는 운치있는 산행이다...
쉬는시간과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2기도처를 떠나 작은 지계곡을 지나고 잠시 걸어 나와 음양수 샘 아래에서 남부능선길에 합류한다. 이곳에서 5분가량 세석방향으로 진행하면 음양수 샘에 도착하고 그 위 너럭바위에 우천 선생의 3기도처가 있다.
음양수 가지전 옛 산거촌락(散居村落), 화전민 터 자리에 있는 맷돌이 아닌가 하다...
음양수 도착해 바위틈의 석간수로 식수도 보층하고 음양수의 차가운 기운으로 몸의 열기를 식히고 발길을 기도처로 옵긴다.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음양수전설(陰陽水傳說)은 지리산 최초의 주민이었다는 남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의 이름은 호야이고 여자의 이름은 연진인데, 이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에게 단 한 가지 한스러운 일이 있다면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호야가 과일을 따기 위해 산골 깊이 들어간 사이에 검정곰이 연진을 찾아와 세석평전에 있는 음양수를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연진은 당장 그 샘터로 달려가 물을 마셨다.
한편, 평소 곰과 사이가 나빴던 호랑이가 곰과 연진의 대화 내용을 산신령에게 고해바치니, 산신령이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감금하고 연진은 세석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 철쭉꽃을 가꾸게 하였다.
꽃밭에 피눈물을 뿌리며 언제까지나 철쭉꽃을 가꾸던 연진은 그 뒤 촛대봉의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산신령을 향해 빌다가 망부석이 되었다. 산신령은 노여움을 풀고 기적의 샘 음양수를 인간에게 개방하여 그 혜택을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자녀를 원하는 많은 여인들이 이곳에 찾아온다고 한다.
음양수 3기도처(음양수바위)
이곳 역시 조망이 멋지다. 2020년 06월 06일 토요일 오늘은 운무로 조망은 볼수 없다.
음양수 3기도처(음양수바위) 기도발이 제대로 받을 듯한 명당 기운이 느껴진다. 저 멀리 삼신봉을 너머 악양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이 아스라이 조망지점은 3기도처 지리산 남북종주 길인 저 능선은 형제봉을 지나 악양 평사리 외둔에서 섬진강으로 스며들며 그 맥을 다한다.
정현님 여기가 3기도처 표시하는 손가락 세개...
맛있는 점심 시간을 가져본다...
음양수 샘의 3기도처를 돌아보고 또 다른 기도터가 있는 창불대로 향한다.
창불대 가기 전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푸른 남부능선이 남으로 장쾌하게 뻗은 모습이 조망지점...
시원한 남부능선 조망을 뒤로하고 음양수 샘에서 30여 분 거리의 창불대(唱佛臺)도착에 도착한다. 창불대 암봉에 올라 바라본 풍광은 압권일것이다. 오늘은 운무로 조망은 없다...
창불대(唱佛臺)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500년전 지리산 산행기인 겸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등장하는 창불대 명칭그대로 이곳에 올라 소원을 빌거나 인근에 존재했다는 영신사 스님들의 기도처였다고 광할한 천혜의 은신터였을 세석고원일대와 멀리 상봉 반야봉 등등 조망이 가히 압권인 천하의 명당지...
창불대(唱佛臺)에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본다...
창불대(唱佛臺)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출처: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中
창불대(唱佛臺)에서 순간 보여주는 병풍바위
창불대(唱佛臺) 4기도처
영신봉과 촛대봉, 시루봉 자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초록의 바다 세석평전, 병풍바위와 자살바위, 그리고 큰세개골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창불대를 내려서서 바로 옆의 우천 선생 4기도처가 있는 조망대에 도착한다. 이곳은 아늑하고 풍광 좋은 다른 기도처와 달리 벼랑 위에 있다. 좌우에 창불대와 자살바위가 있고 맞은편으로 병풍바위가 코앞이다. 발아래 큰세개골로 이어지는 협곡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처럼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다.
병풍바위
자살바위
빨치산 여성대원들이 국군에 포위되자 이곳 자살바위에서 대성계곡 방향으로 몸을 날려 생을 마감 했다는 이야기는 한국 근대사의 슬픈 이야기로 남아있다. 아마도 대성골 전투에 앞서 빨치산들이 모두 포위되고 대성골로 몰려 몰살을 당하자 빨치산 여성 대원들이 모두 이 바위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을 하지 않았나 싶다.
자살바위
4기도처를 빠져나와 영신봉 방향으로 10여 분 오르면 영신봉 자락의 주릉 길 조금 못 미친 지점, 좌측으로 영신대 내림길이 있다. 뚜렷한 등로를 따르다가 계곡을 타고 내린다. 낙차 큰 계곡바위 위에서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곧 영신대이다. 영신봉 자락 들머리에서 15분가량 소요된다.
영신대...한때 도인과 무속인에게 지리산 최고의 인기명소, 명당자리로 각광받아 붐비던 영신대였는데, 이제는 고요한 모습으로 산객을 맞이한다.
우린 이 지점 장소가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5기도처 인줄 알고 있다..아니다...이곳은 영신대 기받기 좋은곳...
여기는 기받기 좋은곳 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영험한 곳이라는 영신대는 기(氣)가 세어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곳이라고도 한다. 잡초 무성한 영신대를 돌아보고 최종 목적지인 우천 선생의 영신대 기도터로 향한다. 이곳 기도터는 여타와 달리 꽁꽁 숨겨진 비밀 기도터다. 계곡을 조금 내려서서 좌측 석벽의 석문을 통과하면 숨어 있던 기도터가 나타난다. 마치 절진을 펼쳐놓아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영신대 5기도처
석문으로 기어올라 그곳을 통과하면 진법이 스스로 풀린다. 아무도 찾지 못할 천하절진이 펼쳐져 있었지만 사람도 가고 세월도 흘러 이제는 효력이 다했는지, 누구나 쉽게 파훼할 수 있는 평범한 진으로 변했다. 잡풀 우거지고 볼품없는 작은 공터에 불과하지만 별세계의 안온한 느낌이 든다. 옆에는 샘터도 있다.
은둔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인 곳이다. 석문이 속세와 피안의 별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인 셈이다.
우천 선생의 생애와 그분의 지리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생각하며 기도터를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목례를 올린다.
정현님 여기가 5기도처 표시하는 다섯 손가락...
이계곡은 큰 세개골 발원지다...
영신봉靈神峰 해발: 1652m
한편 영신봉에서 좌측으로 늘어지는 능선. 바로 낙남정맥입니다. 이 영신봉이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가지를 치는 분기점인 것이죠, 좌측으로는 세석천 약수가 거림골이 되어 흐르는 물은 내대천이 되어 시천천(살천)으로 합류가 되겠군요. 그러고는 결국 남강-낙동강으로 합류가 되겠고, 우측으로 흐르는 물은 세석골로 시작하여 한신계곡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다 백무동 계곡이 되어 임천으로 합류가 되겠죠, 그러고는 남강-낙동강으로 합류가 되니 결국 좌측 세석골-살천으로 가는 물이나 우측 한신 계곡-임천으로 흐르는 물이나 다 남강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 조화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산경표인 것입니다.
세석평전(細石平田)&(잔돌고원)
주변에 자그마한 돌들이 많아 잔돌평원이라 불리다가 세석평전이란 한자식 이름이 붙여졌다.
6경 - 세석철쭉(細石)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해발 1,600m의 세석평전은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이름 그대로 잔돌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평전에는 수 십만 그루의 철쭉이 5월초부터 6월말까지 꽃망울을 터뜨리며 한바탕 흐드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피빛처럼 선연하거나, 처녀의 속살처럼 투명한 분홍빛의 철쭉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지는 절정기에는 산악인들의 물결로 세석평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시인 김석은 세석 계곡 훈풍이 꽃 사이로 지날 때마다 꽃들의 환상적이고 화사한 흔들림, 그것은 남녘나라 눈매 고운 처녀들의 완숙한 꿈의 잔치라고 이곳의 철쭉을 노래하기도 했다. 지리산 철쭉은 조정래의 태백산의 처절하도록 서럽게, 그러나 꺾이지 않는 의지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진달래와 더불어 봄의 지리산을 단장하는 명물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