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산(상왕봉),입암산&몽계폭포 연계 우중산행
# 언제: 2020년 08월 28일 토요일
# 산행지: 전남 장성 (입암산,笠岩山&백암산,白巖山), 연계,조망,계곡산행
# 산행거리: 18.28Km 09시간23분
# 산행코스: 남창주차장 - 몽계폭포(Back) - 백암산&상왕봉(Back) - 사자봉(Back) - 남창탐방지원센터 -
새재갈림길 - 은선동삼거리 - 산성골 - 남문 - 옛산성마을터 - 북문 - 입암산(갓바위) -
등천리갈림길 - 은선골 - 삼나무군락지 - 은선동삼거리 - 남창주차장 - 원점회귀산행
입암산,笠岩山 해발: 654.3 위치: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입암로
입암산(654.3m)은 정읍시 입암면과 전남 장성군 북하면의 서부지역에 해당된다. 내장산 국립공원의 경계에 위치하고 주위에 축성한 백제 때의 입암산성과 더불어 내장 6봉, 백양 3봉과 함께 호남의 손꼽히는 명승지이다. 실제로는 내장산 11봉과 백암산의 6봉을 비롯해서 이 입암산 지역을 통틀어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일컫고 있으며 내장산과 백암산 못지않은 매력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각양각색의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와 소, 울창한 숲으로 천연의 신비경을 간직하고 있어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내장산에 못지 않는 가을단풍은 찾는 이의 발길을 붙들어두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답다. 입암산 서쪽 정상에 있는 갓모양의 바위를 속칭 '갓바위'라고 하는데 입암산이란 이름이 이 바위에서 유래되었고 북쪽 산아래 면 이름도 입암면이다. 이곳은 사직제,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봉수대로도 사용되었으며 제석암 또는 제석봉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 263위 여름: 223위 가을: 180위
정상의 바위가 갓을 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산 이름을 입암이라고 하였다. 입암산 정상과 갓바위를 잇는 능선상에 조선 효종때 개축한 입암산성이 있다.
전국에서 단풍으로 가장 유명한 산인 내장산, 백암산 능선 바로 서쪽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으로 내장산, 백암산의 위세 및 유명세에 덮여 이름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산이다.
산의 대부분이 산성으로 둘러 쌓여 있다. 백암산 상왕봉을 경유 순창새재에서 서쪽 능선길로 내려섰다가 장성새재로 올라가면 연속 등산이 가능하다. 일반 산행 자료는 내장산이나 백암산 자료를 참조하면 거의 해결이 된다.
백암산,白巖山&상왕봄 해발:741.2 위치: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백암산,白巖山 높이 741.2m. 백양삼봉인 백학봉(白鶴峰, 722m)ㆍ가인봉(加仁峰, 677m)ㆍ옥녀봉(玉女峰, 470m)이 북쪽ㆍ서쪽ㆍ남쪽을 에워싸고 있는 말굽형을 이루며, 천진암(天眞庵)의 계곡이 남동쪽으로 열려 있다. 일명 백암산이라고도 불린다.
지질은 복흥면과 백양사(白羊寺) 및 옥녀봉 일대에 분포하는 중생대 백악기(白堊紀)의 신라층군(新羅層群) 상부를 관입분출한 백악기 말의 산성화산암으로 되어 있다. 주요 암석은 안산암으로 절리(節理)에 따라서 암편(岩片)의 분리가 잘 되어 학바위와 같은 절벽이 산정에도 있다.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계곡의 물은 장성호로 흘러들어 황룡강(黃龍江)을 경유, 영산강의 상류가 된다. 약사암 주변에는 일본 남부에 분포하는 산곤약이 격리ㆍ분포하며, 백양사 근처에서부터 백학봉 서쪽 사면까지 비자나무 순림(純林)과 굴거리나무가 있는데, 내장산(內藏山)의 것들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내장산에는 약 600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진노랑상사화, 굴거리나무, 비자나무, 큰설설고사리, 만주바람꽃, 변산바람꽃, 민대극, 백양더부살이, 백양꽃, 옥녀꽃대, 뀡의바람꽃, 이나무, 단풍나무 등이 분포한다.
내장산, 백암산(백양산) 및 입암산의 30개 격자 중 7개 격자의 18개 방형구(20×20m)에서 실시한 내장산국립공원 자원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방형구별 주요 군락은 소나무, 비자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군락, 굴거리나무군락이다. 합다리나무, 나도밤나무, 검양옻나무 등이 나타나 식물구계학적으로 남부아구에 포함되었다.
#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110위) 봄:199위 여름:187위 가을:38위 겨울:153위
백암산은 사시사철 철 따라 변하는 산색은 금강산을 축소해 놓았다 할 정도로 아름답다. 백암산의 으뜸은 단풍이라 할 수 있다. 산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산을 물들이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백암산 단풍은 바위가 희다는 데서 유래한 백학봉의 회백색 바위와 어울려 독특하기도 하다.
백양산에는 학바위, 백양산12경, 영천굴 등 볼거리가 많다.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와 굴거리나무도 산 입구에 집단서식하고 있다. 동쪽으로 약수천을 따라 올라가면 남룡폭포가 있다.
#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백암산은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해발741.2m의 상왕봉을 최고봉으로 내장산 입안산 줄기와 맞닿아 있다. 옛 부터 봄이면 백양, 가을이면 내장이라 했듯이 산 하면 내장, 고적 하면 백암이라 할 정도로 백암산의 절경은 내장산에 뒤지지 않는다. 백학봉과 상왕봉, 사자봉 등의 기암괴석이 곳곳에 있으며, 산세가 험준한 편이다.
# 블랙야크 선정 100대 명산
입암산성(笠岩山城) 위치: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산20-2
입암산성(笠岩山城)은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해발 654m의 입암산 능선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초축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포곡식산성이다. 입암산성의 평면 형태는 북서-남동이 장축방향인 타원형에 가깝다. 성의 둘레는 성벽 외곽을 기준으로 약 5,200m이고, 총면적은 1,069,255㎡이다.
입암산성에 대해서는 1871년(고종 8)본으로 알려진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수록되어 있는 장성부읍지(長城府邑誌)와 입암산성진지(笠岩山城鎭誌)에 수축과정, 성내 시설물, 군제에 대한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암산성도(笠岩山城圖) 와 각종의 장성부지도(長城府地圖) 에는 입암산성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서적류의 관련 기록과 매우 흡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입암산성진지 공해조(公廨條)에는 진헌(鎭軒), 거안관(居安館), 안국사(安國寺), 군량고 7동, 군기고 5동, 소금창고와 장고(醬庫)가 각각 1개소, 연못 10개소, 우물 10개소 등 각종 시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함께 축성 속읍(屬邑)과 군기, 군량미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입암산성도 에는 연못 6개소가 표현되어 있다. 현재 사적 제384호로 지정되었다.
입암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에 등장하는데,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 장군이 주민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으로 대몽항쟁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의 기록에는 1410년(태종 10) 왜구(倭寇)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주변의 여러 성들과 함께 수축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연해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읍성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1434년(세종 16) 다른 산성과 함께 혁파되면서 폐성되었다.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인 1593년(선조 26)에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다시 수축하였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에는 1653년(효종 4)에 장성현감 이유형(李惟馨)이, 그리고 장성부읍지 에는 1677년(숙종 3)에 부사 홍석구(洪錫龜)가 각각 확장·개축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이후에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창계곡 위치: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남창로
높이 654여m의 입암산 기슭에 위치한 남창골은 국립공원 내장산 남부(남창 지구)에 속한다. 산성, 은선동 그리고 반석동(새재 계곡)등 6개 계곡으로 이루어졌다. 전남대 수련원이 있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우며 유명한 것에 비해 여름철 피서객들이 많이 붐비지 않고 물놀이를 할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아주 좋다.
유명한 백양사와 약사암, 영천굴 등의 암자, 장성호와 비자나무숲 등이 근처에 있고, 특히 계곡 상류에 위치한 입암산성은 삼한시대에 축성된 포곡식산성으로 국가사적 제384호로 지정되었다. 약 730m 정도의 남창계곡 자연관찰로에는 곳곳에 자연학습과 관련된 다양한 안내판과 체험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생태학습에 좋다. 자연관찰로를 따라가면 테마를 설정하여 탐방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길게 뻗은 삼나무숲도 볼거리이다. 가을철에는 계곡물에 떨어진 단풍잎과 단풍나무들의 조화가 이상적이다.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이 있어 산림욕을 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트레킹 코스이다.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몽계폭포,蒙磎瀑布
몽계폭포는 백암산 상왕봉과 사자봉 사이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합류하여 약 20m에서 덜어지는 폭포로서, 조선시대 학자인 하곡 정운용선생이 폭포의 이름을 명명하였으며, 바위에 “蒙磎瀑布” 라는 글을 새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蒙磎’는 ‘숨겨진 작은 폭포’ 라는 말.
인생은 한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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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인생처럼
모든 것에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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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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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이다..
연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
꼭! 한번 사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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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간 순간의 행복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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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많고
죽도록 일해도 형편 좋아지질 않는
인생이라도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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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인생의 마지막 삶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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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느끼며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처럼 순응하며
받아 들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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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웠다...중에서
# 산행지도
# 산행사진
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서면 등산로는 너덜바위들이 깔려있는 너덜길로 바뀌고 경사가 가파라지기 시작하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발한발 앞으로 전진한다. 고도가 높아 질수록 계곡의 물소리가 가깝게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몽계폭포 근처에 도달한다. 등산로에서 우측으로 50m지점에 있는 몽계폭포에서 잠시 쉬고, 산행 시작 등산로 조금 걷다보니 붉은색을 띤 바위절벽이 대형칠판처럼 일직선으로 서있는데 바위에는 수많은 한자들이 암각되어있다.
蒙磎瀑布 바위 각자 - 이는 몽계라는 이름을 지은 하곡선생의 글씨라고 전합니다.
몽계폭포에 들러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와 물보라를 바라보며 조선조 선조때 하곡 정운용학사가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몽계폭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몽계폭포 - 상단
몽계폭포 - 하단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바위절벽의 암석
하곡 정운용학사가 바위절벽에 쓴 글(몽계폭포의 이름을 붙인 학자)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자 해동 18현에 한 사람인 성혼은 일찌기 하곡선생과 변경윤의 아버지인 변이중과 함께
이곳의 유람하고 글을 남긴 성혼선생의 기행문
8월 5일에 장성(長城)에 사는 참봉(參奉) 정운룡 경우(鄭雲龍慶遇)와 박사(博士) 변이중 언시(邊以中彦時)가 나란히 말을 타고 찾아와서 하루 저녁 유숙하고 갔다. 정운룡과 장성과 정읍(井邑) 두 고을의 사이에 있는 노령의 산중에서 경치 좋은 곳을 찾는데, 시냇물을 따라 산속으로 10리쯤 들어가면 온통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으며 물과 돌이 깨끗하고 그윽하였다. 채 3리를 못가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이곳에 이르면 북쪽과 동쪽, 남쪽은 모두 푸른 절벽이 천길 높이로 서있고 서쪽에는 석문이 있으며 동쪽 절벽 위에는 큰 시냇물이 흘러내려 20길 높이의 폭포가 쏟아진다.
북쪽 절벽에는 돌길이 나있어 동쪽 절벽 위에 이를 수 있으며, 동쪽과 북쪽의 절벽은 모두 바위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 돌 하나가 펑퍼짐하여 수백 명이 앉을 만하였다. 물이 이 사이로 흐르는데 옥처럼 깨끗하고 빛나서 손으로 공중에 솟구쳐 나는 물을 희롱할 수 있다. 작은 암자가 북쪽 절벽 아래에 있는데 양지바른 곳에 있어 습하지 않고 밝으며 동쪽으로 7, 8십 보 지점에 폭포가 보인다.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데 그윽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고 경치가 빼어난 것을 말로 다 기술할 수가 없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며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인적이 드물지만 사방의 산이 그리 높지 않아 추운 겨울이라도 암자 앞에는 눈이 먼저 녹는다. 암자의 이름은 하곡서실(霞谷書室)이고 시내의 이름은 몽계(蒙溪)인데, 이는 모두 정운룡이 이름 지은 것으로 정군이 거주하는 장성의 개계촌(介溪村)과는 20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우계집)
몽계의 계단을 타고 넘는다. 몽계교 건너 이어지는 산길은 완만하고 평탄했다. 평지를 걷는 것과 같이 쾌적한 산길이다. 쾌적한 길 지나 산길이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죽 길 어른 키만한 시퍼런 산죽이 울창하다 그리고 여름 산행 길 덥다 온몸에 구슬 같은 땀 흘러 내린다 그렇지만 내 나름 여름 산행 즐긴다, 좋다, 흐뭇하다.
아 몸계교 지나 약의 산죽 길 있다 산죽 길 걷다 여기서 뚜벅기님 땅벌에 당해 눈썹주변에 한방 맞잣다 이후 눈 밤땡이가 되어 버렸다...ㅎㅎㅎ
산허리를 돌아가는 산길에 가파르고 긴 계단을 하늘을 치고 있었다. 백암산 능선 사거리에 오르는 마지막 힘든 코스, 온몸에 땀이 흐른다. 백암산 - 백양사 - 사자봉 갈림길 이다.
백암산(상왕봉)도착 계곡의 산길과는 달리, 능선에는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사자봉 도착 여기서 부터 오늘의 우중 산행 시작
산행 길 너무 아름답다 - 걷는 즐거움에 행복
주차장에서 산행 시작해 몽계폭포 - 백암산(상왕봉) - 사자봉 - 원점회귀 산행 후 입암산 산행 이다리 지나면 삼나무 굴락지 쉼터 이다.
삼나무 굴락지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은선교, 은선동 삼거리 지점.
남문 도착하기 전 계곡치기를 하다 알탕하며 시원 막걸리 한잔 - 이후 계속 계곡치기를 할려 했는데 우중산행에 소나기 안전이 우선 정규 등산로 길 변경 산행 길 걷는다.
남문도착 국립공원 관리공단 놈 들 돈좀 썻네...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기록이 없으나 삼한시대의 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 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골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 것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기초부분에 종출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된 점 등에서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를 엿볼수 있다. 서쪽의 갓바위에서는 남쪽으로 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고, 사방이 높고 중간은 넓어 외부에서 성안을 들여다 볼수 없는 천혜적인 요새지다.
고려말 몽골에 대항할 때에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국난극복의 요충지로서 효종 때에는 성을 개축하여 둘레 길이가 2795보에 달했다. 또한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성내에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진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을 더 파서 물걱정이 없게 되었다.
성안에는 6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장 1명을 두었으며, 각종 무기를 두는 군기고와 군량 7천석 이상을 비축할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은곳이 많은데다 남북의 두문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매우 유서깊은 호국유적이다. 지금은 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곽과 윤진의 순의비가 있다.
이경국 · 이안국 정유재란 순절비
증 형조판서 이덕붕의 아들인 이경국과 이안국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에 왜란이 발발하자 두 형제는 의병을 모아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별장 윤진을 도와 성곽을 수비했으며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경국 · 이안국 정유란 순절비 비문
오호라 옛적 임진란을 막고자 일문 형제가 육력 분전하다가 순절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격암공(格菴公) 휘 경국(敬國)과 기제(其弟) 석암공(石菴公) 휘 안국(安國)이시다. 제공은 경주인이니 신라 개국공신 휘 갈평의 후손이며 고조(高祖)는 조정암 선생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피화(避禍)하여 나주에서 고부로 은둔 정착한 이래 증 형판(刑判) 휘 덕붕공(德鵬公)의 4남 중 2남과 3남으로 태어났다.
격암공은 자품(姿禀)이 준위(俊偉)하고 용력이 절륜하여 만력 계유에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에 부임하여 군기를 엄정하게 집행하니 권귀(權貴)의 시기를 당하고 석암공은 결성현감으로 구폐를 혁신하니 간신들의 무고를 당하여 퇴임하고 있을 때 임진에 왜구들이 대거 침입하여 국토가 초토화되고 생민(生民)이 어육이 되매 격암공이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위급한데 어찌 생명을 아끼겠는가 하고 아우 영국(榮國)과 가동 수십 명을 인솔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으니 이 사실을 들은 전라도백 이정암이 기뻐하고 이제 충신을 보았다 하고 이공 형제를 입암산성의 수장(守將) 윤진 의여소(義旅所)로 보내니 공들은 임무를 수행 중 정유년 9월 8일 밤에 왜적은 성을 포위하고 육박하여 옴에 윤진 장군은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함에 공들은 더욱 격분하고 육박전으로 적 수십 급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는 중 화살이 떨어지고 활시위가 끊어져 중과부적이라 어찌할 수 없는 천운이라고 통곡하고 계속 격전 끝에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하게 양공이 같이 순절하였다.
아우 영국과 가동 용금(龍金)은 적탄을 무릅쓰고 시신을 안고 돌아와 안장하다. 격암공의 부인 송씨 또한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 끝에 부군의 뒤를 따르니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격암공은 병조판서 석암공은 사복시 정 영국공은 무과(武科) 부정(副正)을 추서하다. 단기 4266년 계유에 오산창의사에 추배하였다. 이제 본 창의사에서 뜻을 모아 이곳에 전적비를 세워 양공의 정충탁절을 위와 같이 약기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다.
단기 4323년 경오 3월 오산창의사 근찬 격암공 외예(外裔) 성균관 전학 의령(宜寧) 남대희 근서
임진왜란 때 장성 입암산성(長城笠岩山城, 사적 제384호)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윤진(尹軫 1548~1597)을 기리는 비석이다. 1742년(영조 18) 장성부사 이현윤(李顯允)이 조정의 명을 받아 세웠다.
윤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남문(南門) 창의(倡義)에 참여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가족과 함께 입암산성에 들어갔다. 입암산성 별장으로서 수백 명의 의병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다. 이때 처 권씨가 자결하였고, 아들 윤운구는 칼에 맞아 절벽으로 떨어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조정에서 입암산성에 순절비를 세우게 하고, 쌍려문(雙閭門)을 내렸다.
높이 118cm·폭 58cm·두께 20cm로, 앞면과 뒷면에 전서(篆書)로 ‘증좌승지 윤공 순의비(贈左承旨尹公殉義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은 이현윤이 썼고, 글씨는 전라도관찰사 권적이 썼다. 화려한 장식 없이 몸돌 위에 지붕돌이 얹혀 있으며, 지대석은 땅에 묻힌 상태이다.
윤진
윤진은 사간 윤강원(尹剛元)의 아들로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장성에 은거했다. 윤진은 임진왜란 발발 후 장성 남문 창의에 참가했다.
일본군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해 올 것을 예견한 윤진은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에게 입암산성 수축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공사의 책임자가 되어 군량을 비축하기 위한 창고를 짓고 포루도 새로 구축했다.
입암산성은 고려시대에 몽골군을 막아낸 일이 있는 산성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져 있던 것을 다시 쌓아서 쓰려고 한 것이다. 윤진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곽 수축 공사를 마무리하여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호남지역으로 진군해 오면서 주요 도시인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자 관리들은 대부분 도피했다. 윤진은 입암산성 수장(별장)이 되어 인근 4개 읍의 수령들, 의병 수백 명과 함께 산성 방어 임무를 띠고 성에 들어갔으나 전세가 불리함을 알게 된 다른 수령들은 피신한 상태에서 윤진은 9월 8일 남아 있는 의병들과 성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부인 권씨는 품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했고, 아들 윤운구는 칼에 맞아 절벽으로 떨어졌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윤진의 충성심과 공로를 인정하여 좌승지 벼슬을, 그의 부인에게는 정려를 명했다. 지역 유림에서 그의 위패를 받들어 봉암서원에 배향했다.
우중산행중 비 잠시 소강상태 여기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 점심 식사 후 어마어마 한 장대 비 그리고 천둥소리...
장대비에 흠뻑 젖으면서 산행 - 오랜만에 우중 산행 - 흐뭇한 시간.
입암산 갓바위 도착 할때까지 장대비 속의 우중 산행 - 정상석에서 사진 담고 - 그 칠 줄 모르는 비 님
입암산(笠岩山 638m)은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하며 호남평야와 나주평야를 가르는 호남정맥이 서남쪽으로 벋으면서 생긴 산이다. 정상의 갓바위가 마치 갓(笠)을 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과 백암산 능선 서쪽에 있으며, 내장산이나 백암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산행도 백암산 상왕봉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고, 순창새재에서 서쪽 능선길로 내려가다가 장성새재로 올라가는 연속등반을 하는 등산객이 많다.
등산로 초입에 폭포와 기암괴석이 즐비한 남창계곡이 있고, 산의 8부 능선에는 입암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높이 3m, 길이 약 5km의 포곡식산성으로, 성벽을 협축식으로 쌓았다.
고려 고종 43년(1256년)에는 이에서 송군비(宋君斐)장군이 원나라 군사를 물리쳤으며, 임진왜란 때는 관군과 승병, 의병들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조선 선조 26년(1393년)에는 현감 이귀(李貴)가 이곳에 포루와 군량창고를 쌓았고, 효종4년(1653년)에는 이유형이 성벽의 폭과 둘레를 늘렸다고 한다. 성곽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훼손되어 장성군에서 복원중이다.
전남과 전북의 경계인 이 산은 정읍시 입암면을 가로질러 해발 276m의 노령(갈재)을 넘다보면 좌측으로 보이는 산이 입암산이다. 정읍벌의 평야지대와 대조를 이루며 우뚝 솟아 있기에 그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또한 골짜기 깊숙한 곳이 분지를 이루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지목되기도 했다. 특히 정상부에 위치한 입암산성은 조선 효종때 개축한 것으로 사적 384호다.
입암산은 옛부터 왜적의 침입을 막던 항쟁의 장소였다. 고려 송군비장군이 몽고의 6차 침입을 맞아 이곳에서 몽고군을 물리쳤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윤진이 소서행장과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다.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하는 백암산(741m)은 호남 최고의 단풍 명산으로 꼽히며 전국에서 단풍나무 종류가 가장 많다.
아기단풍, 당단풍, 좁은단풍, 털참단풍, 네군도단풍 등 모두 13종의 단풍나무가 섞여 있으며 내장단풍이란 고유종도 있다. 단풍잎의 크기가 어른 엄지손톱에서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다양하면서도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특히 인공미가 가미되지 않은 이곳의 자생 단풍은 일명‘애기단풍’ 으로 불릴 정도로 작지만 색깔이 진하다. 단풍은 회백색의 바위와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초록색의 비자나무 숲, 잎이 떨어져버린 검은색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홍시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백암산은 단풍이 물든 가을은 물론 새순이 돋는 봄에도 싱그러움을 한껏 발하는 아름다운 산이다. 남창계곡은 산성골, 운선동계곡, 반석동계곡(새재계곡), 하곡동계곡, 자하동계곡, 내인골 등 6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지며,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자리잡고 있다. 등산로로 이어지는 은선골은 울창한 숲과 작은 폭포가 많아 여름철 피서지로 적당하다.
하산 길에 남창계곡의 물 줄기, 물 소리, 너무 아름답다 - 알탕 한번 할까 했는데 계곡 물이 무섭게 흘러 내린다.
바위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산판일을 하던 소림소삼랑(小林小三郞)과 우편국장이었던 송정행삼랑(松井幸三郞)이 자신들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새긴 불망비로 나라를 빼앗기면 민족정기뿐 아니라 자연도 무분별하게 훼손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松井幸三郞 不忘碑(송정행삼랑 불망비):송정행삼랑을 잊지 않는 비.
松井 明義(송정 명의):송정은 밝고 옳으며, 小林 積德(소림 적덕):소림은 덕을 쌓았다.
小林小三郞 頌德碑(소림소삼랑 송덕비):소림소삼랑의 덕을 칭송하는 비. 昭和 四年 六月 日(소화 사년 육월 일):1929년 6월에 새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