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지리 동부폐사지,점필재(김종직)길,미타봉,독녀암(노장대)

꺼비♡꺼비 2020. 10. 6. 13:46

 

# 언제: 2020년 10월 04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智異의 미타봉,좌선대,소림선방 과 점필재(김종직)길 품속으로

# 산행거리: 13.57Km 10시간03

# 산행코스: 엄천교 - 적조암 - 산죽비트(갈림길) - 박쥐굴 - 지장사터 - 헬기장 - 상대날등 - 금낭굴 - 선열암

                유슬이굴 - 선녀굴 - 의논대 - 고열암 - 점필재길 - 전망대 - 일강바위 -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Back) - 미타봉삼거리 - 향로봉(오뚜기바위) -  와불산 - 통락문(안락문) - 독녀암(노장대) - 신열

                암(Back) - 환희대 - 적조암   

 

 

두류산을 유람하기로 하다[엄천-고열암]

 

1472년 8월 14일 봉덕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 동강교를 건너 당산나무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이곳에서 지장사 갈림길까지는 유두류록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구시락재거머리재를 넘어 적조암을 지나 지장사 갈림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다. 지장사 갈림길은 현재 노장대 마을 돌배나무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지장사 터는 돌배나무에서 북동 쪽으로 직선거리로 180m 지점에 있다. 김종직 선생은 이곳에서 말에서 내려 짚신을 갈아 신고 환희대를 거쳐 선열암신열암에 들렀다가 독녀암으로 가는데, 선열암과 신열암에서 승려를 만나지 못했고 해걸음에야 고열암에 도착한다. 김종직 선생 홀로 의논대를 다녀오는 것으로 하루의 산행을 마친다. 김종직 선생은 고열암에서 머물면서 선열암과 의논대, 고열암 등 주옥과 같은 4수의 기행시를 남긴다. 유두류록에서 '향로봉이 발 아래에 있다.'라는 내용은 유람록의 오류로 생각한다.

 

☞ 코스 :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 갈림길→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의논대→고열암(宿)[함양독바위는 산청독바위처럼 근거가 없음]

 

* 조위(曺偉, 1454~1503)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 유호인(兪好仁, 1445~1494) : 본관 고령.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㵢溪) * 한인효(韓仁孝, ?~?) 자는 百源, * 임대동(林大仝, 1432~1503) 字는 정숙(貞叔)羅州人。號는 매헌(晦軒), 임정숙은 유람록 서두에 이름이 나오나 산행을 했는지 의문(?)  -퍼온글- -도솔산인님-

 

 

 

동부5암자 폐사지 - 점필재(김종직)길

1472년, 조선의 지성 김종직은 4박5일 일정으로 지리산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의 지리산 문화를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인 지리산 산행기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김종직은 조선 초기 성리학의 대가로 함양태수 시절, 지리산을 늘 가슴에 담고 동경하다가 마침내 산행을 감행했다. 그의 산행기록을 보면, 함양관아를 출발해 엄천을 건너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자락의 지장사, 묘정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5개의 암자의 기록이 되어 있다. 5개암자를 들렀다가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을 돌아보고 인근의 고열암에서 첫날 밤을 보낸다. 이후 그는 새봉, 청이당, 영랑재,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윗 글에 동부칠암자 폐사지 및 함양독바위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동부칠암자 폐사지는 동부5암자 폐사지로,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로 바로 잡았으면한다. 

 

그의 기록을 보면 지장사, 묘정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청이당(당집), 성모사(사당), 향적사, 영신사 등의 여러 암자가 등장하는데 이 중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위치조차 가늠하기 어렵거나 폐허가 되어 기와 파편만 흩어져 나뒹굴 뿐이다.

 

 

지리 공부 하며 내 자신을 채찍질 해본다. 산행하기 전날 지인들과 약주를 하고, 새벽에 광주에서 출발해 05시 30분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엄천교 도착 차 창 밖은 어둠다, 술 깨어야 할텐데, 몸도 피곤하다, 한숨 자자, 잠을 취해본다. 함께 할 산행 지인 배완식님 06시30분 깨워주어 대충준비 하고 점필재 길 지리의 품속으로 들어가 걷는다,엄천교, 당산나무(점필재가 쉬어간 곳), 구시락재, 들리고 적조암 주차장에 주차후 산행준비해 걷기 시작한다. 채찍질 너무 약주 과음으로 걷는데 흐르는 땀 주체 할수 없다, 그리고 걷기 시작해 1시간 가량 알바 체력소진으로, 산행 길 걱정을 해본다. 산행 전날 약주는 아니다. - 채직질 해본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서 풍장+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우리 죽을 때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며...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꺼비- 

 

# 산행지도

 

 

 

 

 

# 산행사진

 

花巖(巖:산봉우리암)은 꽃봉산을 가리킴(연꽃의 형상임)

 

꽃봉산은 花巖이다. 花巖은 꽃봉산 아래 특정한 바위가 아니고 꽃봉산 이름이 花巖이다.

巖은 바위라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라 산봉우리의 뜻도 있다.

花巖에서 巖은 바위가 아니고 峯을 뜻한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엄천교

 

 

 

 

당산나무(점필재가 쉬어간 곳)

 

 

1472년 8월 14일 봉덕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 동강교를 건너 화암(花巖) 아래 당산나무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구시락재

 

 

 

 

 

 

 

 

 

 

 

 

적조암 주차장

 

 

적조암

 

 

 

 

 

 

 

 

 

 

적조암 위의 독가(獨家)의 옆으로


 

 

 

 

 

산죽비트(노장대골) - 박쥐 굴 - 갈림길

박쥐굴 걷는 중에 님은 어디로 갔는지 한시간을 알바 환쟁이골을 너무 치고 올라가 버린 것이다. 산행 전날은 약주 금지...ㅎㅎㅎ


 

힘들게 찾아 온 박쥐 굴 - 잠시 쉬며, 내 자신 채찍질 해본다...ㅎㅎㅎ

 

 

박쥐 굴 내부...박쥐 정말 살고 있다.

 

 

 

 

 

 

 

 

우린 지장사 터로 알고 있었다 - 이곳도 지장사터 추정 - 지장사 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야묘(野廟) 터로 본다. 야묘(野廟)는 마을 사람들이 토지 신에게 祭를 지내는 사당이다. -도솔산인님-

 

윗글 앞전 산행에 기록 했던 글이다. 이번 산행에 우린 지장터로 알고 있던 장소 탐방 주변을 들러보니 너무 넓은 터다. 앞전 산행에 살피지 못한 곳 까지 주변을 탐방 했다. 터 넓다 지장사 터 아닐까? 근데 여긴 확실이 지장터 아니다 한다.

 

 

 

 

상대날등 - 헬기장1


 

상대날등 - 헬기장2


 

금낭굴

 

 

주변에는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금낭굴 큰 암석으로 되어 있다?


 

 

 

 

 

금낭굴 내부

 

 

 

 

 

 

 

 

 

 

 

 

 

 

 

 

 

 

 

 

 

 

 

 

 

 

 

 

 

 

선열암 가는 길 찾았다...흐뭇...ㅎㅎㅎ

 

 

 

 

선열암 가는 길에 어마, 어마한 암석...

 

 

 

 

끝부분 가면...

 

 

이런 조그마한 석굴에 있더라...아이고 허리야...ㅎㅎㅎ

 

 

그리고 오르막 로프...

 

 

 

 

선열암,先涅庵


 

선열암터 암석


 

 

 

 

 

선열암 촉촉수

 

 

 

 

선열암 촉촉수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雲根矗矗水冷冷 :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운근(雲根)은 공기가 차가운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생기고 물방울이 맺히는 커다란 바위를 뜻하고
촉촉수(矗矗水)는 높은 곳에서 톡톡(촉촉 : 의성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인데 절묘한 시어입니다.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퍼온글- -도솔산이님-

 

 

 

 

 

 

 

 

 

 

 

유술이굴 - 860m


 

함양군수로 재직중이던 1472년(성종 3년) 점필재(김종직) 선생이 이곳 폐사지를 거쳐 천왕에 올랐다는 자료가 유두류록에 남아 있다하는데, 두류는 지리의 옛이름.


 

한국전쟁 중엔 빨치산의 근거지로?

 

 

 

 

 

 

 

 

유슬이굴에도 주변에는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유슬이굴을 떠나 횡으로 이어지는 자락길, 10여분이면 선녀굴 초입, 솔봉능선 사거리에 이른다.


 

 

 

선녀굴 - 폐사지 중 한 곳 - 자세히 관찰해 보면 폐기와를 쉽게 찾을 수 있음?  - 폐사지 입에도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생포직전까지 즐겨 이용했던 곳으로 (1963년)직전까지, 바위비트로 더 알려짐?


 

 

 

 

 

 

 

정순덕, 마지막 빨치산들은 선녀굴에서 은거 하며, 좌측 거암의 사면을 보면 모진 지리산의 추위를 피하기 위한 흔적이 지금도 생생남아있음,  한낮에 돌을 미리 데워두었다가 껴안고 자거나 이처럼 바위를 데워 그 열기로 겨울을 지냈다는 말도있음?

 

 

 

 

선녀굴 석간수 샘 - 온화한 양지에 뒷편으론 거대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사계절 마르지 않은 석간수 샘이 존재하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세입니다.

 

 

 

 

 

 

갈림길 - 선녀굴, 유슬이굴, 의논대, 솔봉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퍼온글-  -도솔산인님-

 

 

 

의논대 멋진 소나무

 

 

일강(一岡)과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영랑대, 두류봉, 말봉, 영롱봉, 조망보이는 곳인데, 운무로 인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의논대 - 의논대는 주변의 암자 들, 신열암,선열암,고열암 등에 기거하던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불법을 논하던 곳이라고하여 의논대,의논대가 되었다고 한다.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金宗直, 佔畢齋)

病骨欲支撑,병골욕지탱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잠차포단숙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송도비명월 : 소나무 물결(파도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오의유구곡 : 국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부운복하의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야반폐암곡 :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유장정직심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당득산영록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고열암(古涅菴)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퍼온글- -도솔산인님-

 

 

 

 

 

 

 

 

 

 

고열암 샘

 

 

점필재 길 걷다보면 - 기나긴 시간,세월을 버틴 오래된 나무 조망터가 나온다.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가기전, 옛 와불산 정상석


 

옛 상내봉(와불산) 정상석 있던자리


 

 

소림선방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퍼온글- -도솔산인님-

 

 

소림선방 석굴 내부

 

 

 

 

 

 

 

 

 

 

 

 

조망터(좌선대)

 

 

 

 

 

 

상내봉 삼거리(이제는 미타봉 삼거리)


 

향로봉(오뚜기바위)

 

 

 

 

와불산 정상으로 표기 되어있다 - 앞주 20년09월27일 일요일 없었는데.

 

 

 독녀암(노장대), 베틀재, 공개바위, 갈림길

 

 

안락문,安樂門 (통락문) - 근심걱정을 넘어 안락한 세상으로 가는 문


 

 

 

 

 

 

 

 

생각에 잠기네...ㅎㅎㅎ

 

 

 

 

 

 

 

 

 

 

 

 

독녀암(노장대) - 독녀암(노장대)바위군(群), 또 다른 별세계 바위 숲, 거대한 암봉군의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 [옹암(甕巖),진주독바위], [하동독바위]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독바위로 불린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으로 등장하는데, 한 여인이 이곳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득도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돌기둥이 숲을 이룬 듯 솟아있다.


 

독녀암(노장대)석문

 

 

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이다.

 

함양독바위의 지명을 고문헌에 근거하여 독녀암(노장대)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한 분은 솔레이 이용훈 박사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노장대(老將臺)라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함양독바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세인들이 함양 독바위라고 하는 것은 지리산길 지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도 또한 지명의 정확성이 그 생명이다.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마.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원문]

訪新涅. 無僧. 亦負峭壁. 菴東北有巖. 曰獨女. 五條離立. 高皆千餘尺. 宗云. 聞有一婦人. 累石巖間. 獨棲其中. 鍊道沖空. 故爲號云. 所累石猶存. 柏生巖腰. 欲上者. 梯木挽其柏. 廻繞巖闕. 肯腹俱盪磨. 然後達其頂. 然不能辦命者. 不能上. 從吏玉崑聳山. 能上而超足麾手. 予嘗往來山陰. 望見是巖. 與諸峯角出. 若柱天然. 今而身跨玆地. 毛骨愯然. 恍疑非我也.

 

-퍼온글- -도솔산인님-

 

 

 

 

 

 

 

 

 

 

 

 

 

 

 

 

 

 

 

 

환희대1 -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1리쯤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라고 읽어 점필재가 지장사에 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환희대2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장사 터는 어디인가

 

 2008년 처음 지장사 터라는 곳을 답사하였을 때, 암자터가 아님을 직감하여 유두류록 원문을 다시 읽게 되었다. '지장사 갈림길' 부분에서 구두점의 오류를 발견하고 구두점을 수정하여,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1리쯤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라고 읽어 점필재가 지장사에 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돌배나무에서 직선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암자터를 지장사 터로 추정하는 것은 암자터의 여러 조건-노진의 '夜宿地藏庵' 시, 청자 편, 생초 백토 도기 편, 와편, 암자 뒤 암괴, 암자터 앞 2단 축대, 주춧돌, 샘터, 샘터 석축, 돌배나무 등-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선답자들이 발표한 지장사 터에 대하여 첫 답사 때부터 의문표를 던졌고, 의문은 계속 답사로 이어졌다.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샘물 소리가 이른 새벽 단잠을 깨우네.'라는 시구에 주목하였다. 마침내 지장사의 샘터와 지장사 객사 터를 확인하였다. 지장사에 관한 문헌의 자료가 희소한 상태에서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점필재와 옥계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이 지장사 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분명한 것은 1472년 8월 14일 점필재는 지장사에 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옥계 노진의 야숙지장암(夜宿地藏庵)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현재의 지적도를 보면 지금은 모두 지목이 田에서 林野로 바뀌었지만, 작은 필지의 임야는 옛날 전답으로 보인다. 지장사 터의 현 지번은 휴천면 운서리 산 1288번지(지목 임야) 인접 지번이고, 점필재가 지장사 갈림길에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간 위치의 지번은 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1327번지(지목 도로), 지장사 갈림길에서 지장사로 들어가는 지장사 길은 1324번지로 지목은 도로이다. 이 지적도는 일제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작성 당시의 노장동 마을의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휴천면 운서리 산 1288번지(지목 임야)와 인접한 지번을 지장사 터로 추정한다. 참고로 지적도에 면색(面色) 된 부분이 지장사 진입로이다.

 

앞으로 숙제다  - 지장사 터 - 퍼온글 - 도솔산인님 -

 

 

 

하산길에 걷다 바닦 암석에 새겨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