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재,문수대(문수암),왕시리봉,선교사별장
# 언제: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성삼재,문수대(문수암),왕시리봉,선교사별장) 지리 품속으로
# 산행거리: 17.97Km 08시간 39분
# 산행코스: 성삼재 - 노고단(KBS방송국송신탑) - 문수대(문수암) - 질매재 - 질등 - 문바우등 - 느진목재
왕시리봉 - 선교사별장 - 왕시루봉 - 토지소망교회
지리산 예로부터 '사람의 산, 역사의 산' 으로 여겨진 지리산은 흔히 어머니의 산이라 불린다. 백여 리의 주능선과 15개의 지능선의 생김생김이 어머니의 넓은 푸과 같이 포근해서일 것이다. 높이 만큼이나 큰산으로 여겨지는 지리산 과 더불어두꺼비의 떼의 울음으로 왜구를 막았다는 전설로 '두꺼비 섬' 자를 붙여 이르지어진 섬진강의 오백리 물길은 지리산을 끼고 굽이쳐 흐른다. 굽이치는 물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왕시리봉이 손꼽힌다. 노고단에서 구례군 토지면을 향해 뻗어내린 능선의 정점이다. 정상부가 펑퍼짐하고 두리뭉실하게 생겨 마치 큰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 하여 왕시리봉(1,243m)이라 이름지어졌다. 발 아래 섬진강이 흐르고 백운산과 마주보고 있어 수려한 경관은 비길 데 없이 좋다.봄엔 철쭉이, 가을엔 정상부 초원이 온통 억새밭 으로 변한다.
정상부가 펑퍼짐하고 두리뭉실하게 생겨 마치 큰 시루를 엎어놓은 것과 같다 하여 왕시리봉이 아니고, 왕시리봉의 유래는 어떤지도에는 왕시루봉으로 표기하여 왕시리봉의 모습이 펑퍼짐하여 떡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왕시루봉이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니고,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우리 옛말 " 살 " 에서 유래한다고, 초기 삼국시대 관직에 백제의 달솔, 신라의 수마로, 고구려의 욕살 등에서 나타나며, 정수리란 의미도 "살"로 삼아 발달한 단어라고, 살 - 술 - 술이 - 수리 - 시리 또는 시루 등으로 변천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그리고 다시 스스로는 멀고 외딴 곳에 있는 절간의 낡은 향로와 같이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구례 시외버스 터미널 - 08시20분 버스 타고 성삼재 출발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성삼재까지 - 옛적에는 07시 출발도 있었는데 이제 07시 출발 버스는 없다.
성삼재 도착해 지리 품속으로 들어 간다.
성삼재 - 성삼재 의 유래 성삼재는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와 구례군 광의면 사이의 고개이다.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정상에 지방도 제861호선의 휴게소인 성삼재휴게소가 위치해 있다. 대체로 지리산의 절인 천은사와 성삼재휴게소까지의 구간을 성삼재라고 하며 높이는 1,102m이다. 성삼재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노고단 등 지리산의 주요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마한 때 성씨가 다른 세 장군이 지켰다고 하여 성삼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달고미 우릴 방긴다.
종석대 - 무넹기 사이의 코재 전망대 에서 내려다 봅니다 - 월령봉능선과 차일봉 능선 사이로 화엄계곡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약간 미세먼지 끼어 흐릿한 가운데 멀리 구례를 돌아 나가는 S라인의 섬진강이 아련합니다. 우리나라 강 중에서 가장 와 닿은 섬진강. 그리고 운무...
코재
성삼재 대피소
월령봉능선과 차일봉능선 사이에 자리 잡은 화엄사계곡
전망데크 삼거리 지나, 문수대(문수암)가자면 KBS송신탑 정문 앞 까지 가야한다. - 가기전 감시용 카메라 설치 되어 있다. 광주문화방송송신소와 KBS 전주방송총국 노고단중계소, - 종석대와 노고단을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차지하고 있는 셈인데, 바로 정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문수암으로 내려가고...
문수대(문수암) 가기전 너덜지대에서 조망되는 오늘 걸어 가야할 문바우등, 왕시리봉, 조망된다 - 멀다.
큰 암석도 지나가고.
인공구조물 인듯한 방공호도 지나가고.
문수암文殊庵 도착 - 스님은 아니 계시고 대문은 가로막혀 있습니다. - 실례를 무릅쓰고 빗장을 풀었습니다. - 문수암의 소박한 돌천왕문을 통과 합니다.
언듯 첫 느낌은 토굴이랄까 - 아니 토굴로 보여 집니다. - 이곳에 그냥 가만이 있어도 수행이 될 것 같은. - 이곳이 바로 은둔이네요.
문수대 - 문수대는 정남향이었다. 고도계는 해발 1310 미터를 가리켰다. 왕시리봉을 바라보고 있다.
지리 10대 기도처 - 우번대, 문수대, 묘향대, 서산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금강대
지리 반야 5대 - 우번대, 문수대, 묘향대, 서산대, 무착대
왜 문수대일까. 문수대가 자리한 노고단은 예전에 길상봉으로도 불렸다. '(묘)길상'은 문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암자가 있는 골짜기도 문수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이 일대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것이다. 문수(文殊)란 무엇인가. 이름 그대로 지혜를 상징한다.
백두산이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원래 대지문수보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와 '리(利)'를 따왔다고 한다. 중생을 제도하는 문수 보살의 지혜가 깃든 산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지리산은 지혜의 산이다.
뒷편 문수대에서 떨어지는 석간수를 모아 나오는 약수도 한사발 하고...오늘 점심 라면 끊이리기 위해 물도 채우고...
앞으로 가야 할 질매재, 왕시루봉 능선도 조망하며...
최치원이 887년에 쓴 진감선사비와 893년에 세운 실상사의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에는 지리산이 '知異山'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地理山'으로, <고려사>에는 '智異山'으로 씌어 있다. 이로 보아 삼국시대에는 '地理山', 통일신라시대에는 '知異山'으로, 고려시대에는 '智異山'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 불교가 꽃피던 통일신라시대에 지리산은 '지혜롭고 신령스러운 산', 불국토가 된 것이다.
경주 남산이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이 살던 왕경의 불국토였다면 지리산은 지방 호족과 민초들의 불국토였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천지편'에는 신라 승려 의상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청구기>에 '두류산(지리산)은 1만의 문수보살이 머무는 세계'라는 내용이 있다고 했다. 1472년에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은 지리산에 4백 개에 이르는 절이 있다고 했다. 18세기의 고승 응윤 스님도 <지리산기>에서 '옛날에는 이 산 주위에 팔만 아홉 곳의 절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다소 과장된 이야기이기는 하나 지리산은 그 자체로 부처의 몸이었다. 그 몸에 수백의 도량이 깃들어 있었던 불국토였던 것이다. 천왕봉, 반야봉 제석봉 등의 봉우리와 문수대, 영신대, 금강대, 세존대, 묘향대 등의 대(臺)는 부처가 되고, 그 품에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벽송암, 칠불암 등 이름난 사찰과 암자가 들어서 있다. 지금도 지리산 일대의 사찰과 암자, 토굴 등을 합치면 100여 곳에 이르니 지리산 자체를 장엄한 수행도량 지리산 총림으로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다.
문수암의 아픈 역사
예부터 지리산에는 '8대(臺)'니 '10대'니 하여 전망 좋은 곳이 있다. 금대, 마적대, 문수대, 연화대, 묘향대, 만복대, 종석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서산대, 불일대, 상무주대 등이다. 이곳들을 올라야 지리산을 제대로 안다고 했다. 노고단 주변에도 종석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 이름난 곳들이 있다. 이런 곳들은 모두 풍광이 좋을 뿐만 아니라 기운이 모인 곳이라 수도처로도 알맞은 곳이다.
문수대는 50m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육산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골산에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이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했으니 문수대는 육산인 지리산의 바위 벼랑 아래의 부드러운 대지에 터를 잡았으니 애써 명당이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물도, 땅도 넉넉하니 예부터 수도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지금도 화엄사의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 중이다. 이곳에 암자가 처음 들어선 건 1803년 경 화엄사의 초운대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 고요한 암자도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문수대는 항일 의병 운동의 본거지였다. 문수대가 역사에 드러난 건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때문이다. 한때 의병부대가 1700명에 달했던 의병장 김동신이 이곳 문수대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과 피의 맹세를 한 김동신은 영호남의 여러 군을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전개했고, 두 차례에 걸쳐 지리산에 들어왔다. 1907년 9월 18일, 화개를 출발한 김동신 부대는 반야봉을 거쳐 이곳 문수대로 왔다. 다음 날 문수골 아래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그 다음 날 새벽 구례읍을 습격해 읍내를 장악했다. 화개에서부터 김동신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의병장 고광순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연곡사를 기습 공격해 불태운 후 이곳 문수대마저 불태웠다. 김동신의 의병 투쟁은 1908년 6월 6일 대전 순사대에 그가 체포되자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제 갈 거나. 암자 뜨락에 무심히 놓인 돌 방석에서 무심한 허리를 세웠다. 뒤로는 은산철벽, 앞으로는 낭떠러지. 왕시루봉이 지척이고 저 멀리 흐르는 섬진강이 가뭇없다. 이곳 문수대에서 발원한 토지천 물 줄기는 산 아래서 섬진강을 만나 토지면 일대에서 풍성한 '구만들'을 이룬다. 노고단의 옥녀가 금가락지를 흘린 곳이 금환락지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이다.
해우소 가는 돌 계단
해우소는 어떻게 생겼나 구경도 하고 - 지리산 꼭꼭 숨겨진 은자의 장소. - 그 깊숙한 곳에서 불심을 느껴 봅니다. - 한참이나 문수암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왕시리봉 능선 가는 중 - 석축
삼거리 도착 - 갈림길 - 노고단, 돼지평전에서 내려오는 길
왕시리봉 능선 의 암석
질매재 - 피아골대피소 가는방향
문바우등 아래서 점심 식사
문바우등
반야봉 조망
내(안)당재 - 외(바깥)당재 조망
왕시리봉, 광양 백운산 조망
노고단, 종석대 조망
느진목재
오름의 연속이다
왕시리봉 오르며 석문
기나긴 생명
왕시리봉 오르전 조망터 - 저 멀리 농평마을 -외(바깥)당재 - 황장산 - 저멀리 촛대봉, 천왕봉까지 조망된다.
종석대, 노고단, 왕시루봉능선 조망
왕시리봉 도착
왕시리봉의 유래 : 어떤지도에는 왕시루봉으로 표기하여 왕시리봉의 모습이 펑퍼짐하여 떡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왕시루봉이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니고, "높음, 으뜸"을 나타내는 우리 옛말 " 살 " 에서 유래한다고, 초기 삼국시대 관직에 백제의 달솔, 신라의 수마로, 고구려의 욕살 등에서 나타나며, 정수리란 의미도 "살"로 삼아 발달한 단어라고, 살 - 술 - 술이 - 수리 - 시리 또는 시루 등으로 변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지리 천왕봉, 촛대봉, 내(안)당재, 외(바깥)당재 농평마을 황장산 조망
남부능선 - 삼신봉 조망
선교사 수영장
선교사 예배당
왕시리봉 동쪽 아래에는 '한국 주재 선교사 수양관촌'이 있다. 애당초 노고단에 있던 외국인 별장촌이 6.25전란 때 폐허화되고 또 노고단이 번잡스러워지자 1957년경부터 이곳 왕시루봉 일대로 옮겨와 자리잡게 되었다. 현재 외국인 개인별장 10 여 채와 테니스 코트, 간이 풀장, 탁구장이 있는 교회건물, 창고 등이 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20년때쯤에 홍콩처럼 99년간의 조차계약을 맺어 노고단을 미국 호주 등 외국인 선교사들 하계별장지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 계약이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유효한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짜 왕시루봉 - 표지석은 왕시루봉이고...지리산 지도는 왕시리봉이고..두가지 이름이 혼재한다.
하산 하며 아름다운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