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산,백운산,금대산,에서 놀다(경남 함양)

# 언제: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
# 산행지: 경남 함양(삼봉산,백운산,금대산)에서 놀다.
# 산행거리: 12.34Km 06시간 52분
# 산행코스: 오도재 - 관음봉 - 오도봉 - 삼봉산 - 큰깍음봉 - 등구재 - 백운산 - 금대봉 - 금대암
금계마을 - 함양군안내센터 주차장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삼봉산, 백운산, 금대산, 산행 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지안재 풍광 조망.
24번 도로에서 1023번 도로로 들어오는 입구에 지안마을이 있어 지안재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안재 - 옛날 내륙지방과 남해바닷가 사람들이 생필품 물물교환을 위해 넘어야 했던 고개로 제한이라는 마을이있었으며, 제한이라는 명칭이 지안재로 개칭되어 불리우게 되었으며, 내륙지방과 남해바닷가 사람들이 생필품 물물교환을 위해 하고자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 길.
오도재에서 바라본 함양군 에 걸처 있는 아름다운 산 들
오도재(悟道峙)-마천면 삼정리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靑梅) 인오조사(印悟祖師)(서기1548~1623년의 西山의 弟子)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오도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오도재(773m)는 삼봉산(1,187m)과 법화산(991m)이 만나는 지리산 관문의 마지막 쉼터로 예로부터 영남학파 종조인 김종직 선생을 비롯, 정여창, 유호인 선생, 서산대사, 인오조사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걸음을 멈추며 지리산을 노래했다.
지리산 상징물의 하나로 평가되는 지리산제일문은 성곽 길이 38.7m, 높이 8m, 폭 7.7m, 문루 81㎡ 규모로 웅장한 위용을 갖췄다. 특히 이 문에는 함양 출신 월정(月汀) 정주상 선생의 글을 포함해 유명 서각가 남사 송문영 선생이 새긴 대형 현판이 볼거리다. 오도재를 넘어서면 지리산 칠선계곡 및 추성골로 갈 수 있고 마천 면소재지를 지나 백무동에서 한신계곡, 하동바위 코스 등으로 등반할 수도 있다.
옛날 내륙지방 사람들이 남쪽 해안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위해 지리산 장터목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했 고개이다. 오도재의 오도(悟道)는 서산대사의 제자인 인오(印悟) 조사가 이 고개에서 득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산 주변엔 ‘흥부전’의 주무대인 성산흥부마을, (가루지기전)의 배경이 되는 등구마을,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仇衡)의 궁궐이 있었다는 빈대궐터 등이 있다.
이 고개는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접근하는 가장 단거리 코스로 우마차만 겨우 통행하던 길에 2004년 도로가 개통되었다. 뱀같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도로는 이제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오르는 길 주변에는 ‘가루지기전’의 전설을 상징하는 옹녀샘,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 이야기를 연출해 놓은 ‘남근석 조각 공원’도 조성돼 있다.
산행하기전 단체 사진
엄천사에서 자다[宿嚴川寺] - 김종직(金宗直)/점필재시집7권
엄천사 안에서 유군 임군과 나 세 사람이 / 嚴川寺裏兪林我
차 달여 마시며 청담으로 평소 회포 풀고서 / 煮茗淸談愜素期
하룻밤 동안 벼슬살이는 전혀 잊었었는데 / 一夜簪纓渾忘却
여울 소리에 놀라 꿈 깨어 문득 시를 찾누나 / 灘聲驚夢忽尋詩
엄천사에 낮잠을 자다[嚴川寺午睡] - 김종직(金宗直)/속동문선9권
보리가 익은들 교조 살피는 데 방해되랴 / 麥熟何妨省敎條
여가를 훔쳐 야승의 절에서 잠깐 쉬네 / 偸閑蹔憩野僧寮
어느새 낮잠이 들었으나 깨우는 사람 없고 / 翛然午睡無人覺
다만 숲 속에서 노파가 떡을 굽는다 / 只有林間婆餠焦
점필재(佔畢齋) 선생 김종직(金宗直,1431-1492)
오늘도 걸어 봅니다.
산행 길에 걷다 첫 완전체 조망이 눈에 들어온다 - 저멀리 가야산 과 황매산, 산청 왕산, 웅석봉, 그리고 지리 동부 능선, 가까이 법화산까지 조망 아름답다.
오도봉 해발:1.035m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완연한 겨울이다 산행 중 상고대...
삼봉산,三峯山 해발: 1.187m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경남 함양군 함양읍,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위치한 삼봉산(1,187)은 낮지 않고 호젓한 지리산 망대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있다.
함양군 마천면 촉동마을(삼봉산 남쪽)에 가면 옛날 가야 구형왕이 거주하면서 무기를 만들던 빈 대궐터(일명 빈대굴)가 있으며, 마천면 등구마을은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 마지막에 정착해 살던 곳으로 주변경관도 절정이며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목이다.
1200미터에 가까운 높이의 산임에도 뚜렷한 등산로가 없는 산이 있다. 지리산 북쪽, 함양과 남원의 경계에 자리잡은 삼봉산(1186.7m)이다.
이웃한 지리산의 유명세 때문에 아직까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하루에 빡빡할 만큼 알찬 산행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산로가 발달하지 않아 미지의 산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산이다.
겨울 삼봉산(1,186m)은 엄청난 눈이 쌓인 지리산, 덕유산, 백운산, 갓걸이산, 기백산을 바라보는 최고의 전망대 중의 하나로 손꼽는다. 산행은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인 팔령재에서 시작해 산자락을 휘돌아 감투봉을 올라 능선을 타면 정상이다.
삼봉산을 산행하기 전에 만나게되는 지명을 음미해 보는것도 역사공부와 함께 산행의 묘미를 더하게 될 것이다. 삼봉산을 찾아가다 보면 구만마을이 있다. 그 유래를 보면 옛날 가야국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양왕이라고도 불림)이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구만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 하여 구만마을이라 불리운다.
구만마을을 지나면 할개미고개가 있는데 구형왕이 활을 만들던 곳으로 활을 개민다(감는다) 뜻으로 활개미가 오늘날 음변화를 일으켜 할개미가 되었다고 전해지며, 할개미고개를 지나면 원구마을이 나오게 되는데 가야가 위기에 처하자 백제와 고구려에 원병을 구하러 병사를 보낸 곳이라 하여 원구마을이 되었다.
함양군 마천면 촉동마을(삼봉산 남쪽)에 가면 옛날 가야 구형왕이 거주하면서 무기를 만들던 빈대궐터(일명 빈대굴)가 있으며, 마천면 등구마을은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 마지막에 정착해 살던 곳으로 주변경관도 절정이며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목이다. 북쪽으로 하산하면 한 평생 민속의약으로 이름을 떨친 인산 김일훈 선생을 기린 민속의학연구소와 죽염공장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촉동과 등구를 거쳐 칠선계곡 입구로 하산하면 된다.
삼봉산에서
등구재,登龜岾 - 등구재는 이 부근에 있다 지금은 폐사된 등구사로 인해 생겨난 이름입니다.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 8월 14일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지리산 산행에 나섰습니다. 예전 말로는 유람이었지만 그 유람이 산으로 들어오면 현대어로는 등산, 천왕봉-영신봉 등을 들르고는 백무동으로 하산하였습니다. 선생이 훌륭하게 4박 5일 일정의 산행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 지났던 루트가 바로 이 길입니다. 등구재를 넘어 오도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점필재 김종직 제자인 조의제문 사건으로 35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탁영 김일손(1464~1498) 선생이 생각날 법도 합니다. 탁영 김일손은 1489년 4월 14일 정여창, 김형종 등과 함께 산행을 나섰습니다. 천령天嶺 그러니까 지금의 함양을 출발한 세 사람은 등구사에 도착합니다.불룩하게 솟은 산의 형상이 거북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우뚝한데 그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가 북쪽에서 그 속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우리는 동쪽 사찰에 묵었다. -14박15일 긴 일정을 소화한산행-
등구사 소고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함양군수로 있던 1472년 8월 14일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예전 말로는 유람이었지만 그 유람이 지금의 산으로 오면 현대어로는 등산 아니겠는가? 그들은 천왕봉~영신봉 등을 들르고는 백무동으로 하산하였다. 점필재가 훌륭하게 4박 5일 일정의 산행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 지났던 루트가 바로 이 길이다.
점필재는 일행들과 헤어져 등구재를 넘어 오도재를 거쳐 함양으로 돌아갔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부 김숙자에게 수학하여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절의節義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상은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김일손, 남효온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에게 학통이 계승되면서 점필재는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러나 1470년 12월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함양 학사루에 있던 유자광의 현판을 불태우게 되는데 이게 후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어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여러 가지로 유명한 인사이지만 이쯤 되면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으로 35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탁영 김일손(1464~1498)이 생각날 법도 하다. 탁영 김일손은 1489년 4월 14일 정여창, 김형종 등과 함께 산행을 나섰다. 천령天嶺 그러니까 지금의 함양을 출발한 세 사람은 등구사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는다.
그러고는 “등구사 터 아래로 양진재養眞齋가 있고 이는 옛날에 개암介菴 강익 선생이 살던 곳이다. 나는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등구사에 도착했다, 불룩하게 솟은 산의 형상이 거북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래된 축대가 우뚝한데 그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석간수가 북쪽에서 그 속으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위에 두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우리는 동쪽 사찰에 묵었다."고 등구사를 회고했다.
등구재에서 백운산 까지 올라오며 힘들었지만, 힘든 시간후 즐거움...?
백운산,白雲山 해발:930m 위치: 경남 함양군 산내면
삼봉산은 조망의 산이다. 함양에서 지리산을 잘 조망 할수 있는곳이 여러군데 있으나 그중 하나는 백전면 백운산 중턱의 상연대라는 고찰이고 더 가까이에서 볼수 있는산이 삼봉산이다.지리산 하봉에서, 중봉, 천왕봉, 제석봉, 벽소령 등을 거쳐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감상하기 좋은 곳은 휴천면 오도재 너머에 위치한 지리산 조망공원 휴게소이다.
마천면 촉동마을(삼봉산 남쪽)에 가면 옛날 가야 구형왕이 거주하면서 무기를 만들던 빈 대궐터(일명 빈대굴)가 있으며, 마천면 등구마을은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 마지막에 정착해 살던 곳으로 주변경관도 절정이며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목이다.
갑장 모델이 되고, 이 지점 큰바위, 이름모를 암석 멋진 조망터 다. - 수차 왔지만 아직까지 이름 모를 암석...?
오늘 함께한 산우님들과 조망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본다.
지나온 오도재, 그리고 우측에 법화산, 아래가 마천면 구양리, 창원리인데 여기도 다랑이논...
지나온 오도재, 오도봉, 삼봉산,
우측으로 지리북부능선과 중앙의 지리 주릉을 보고, 덕전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벽소령으로 오를 수 있는 음정마을로 들어가게 되고, 좌틀을 하면 강청리로 들어가 백무동으로 가게 되겠죠. 북부지리에서 천왕봉으로 제일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곳. 바로 저 백무동이죠.
금대산에서
금대산 해발:852m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함양 금대산은 지리산에 얽힌 사연과 설화가 많은 산이다. 임천강 줄기를 경계로 지리산의 주능선을 바로 눈앞에 마주 대하고 선 지형부터가 그렇다. 날만 어둡거나 흐리지 않다면 가장 멀리 떨어진 노고단 정도를 빼고는 거의 모든 지리산의 주봉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전망대가 금대산이다.
지나온 오도재, 그리고 우측에 법화산, 아래가 마천면 구양리, 창원리인데 여기도 다랑이논...
임천이 흐르고, 상내봉(와불산), 독녀암(옛함양독바위), 그리고 그 우측 능선의 옹암甕巖(옛진주독바위),
임천 건너 마천면 군자리 마을에 '다랑이 논'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골짜기 끝에 삼정산1156.2m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 우측이 정성재 눈에 들어오고, 삼정산 능선 좌측으로 지리7암자' 중 하나인 문수암이 높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의탄교를 지나 추성리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고, 그 유명한 우리나라 최고의 계곡인 칠선계곡으로 오르는 루트. 그 뒤 우측으로 차례대로 두류봉, 하봉, 중봉, 천왕봉 그리고 제석봉이 보입니다.
아담한 절집인 금대암으로
수령은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전나무는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고 한다.
1489년, 김일손이 지리산에 다녀와서 쓴 기행문 (유두두록)에는 이곳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함께 금대암에 잠시 들렀는데 당시 이 절에는 20여 명의 승려가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다 한다. 그 스님들이 범패를 부르며 뜰 안을 빠른 동작으로 돌고 있었으며 고승의 주석지팡이를 보았다고 쓰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금대사라고도 한다. 창건한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대에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6ㆍ25때 소실된 뒤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인법당(人法堂)과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금대사삼층석탑이 있다.
이 삼층석탑은 행호가 절을 창건할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탑의 조성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금대암 나한전 주련
백운청풍자거래 [白雲靑風自去來]
흰구름 맑은바람 스스로 오가는데일락서산월출동 [日洛西山月出東]서산에 해지자 동녁에 달 뜨다천강유수천강월 [千江有水千江月]
천개의 강물에는 천개의 달이 뜨고
만리무운만리천 [萬里無雲萬里千]
만리에 구름없어 만리가 푸르른 하늘이네
하산하며, 금계마을 위에 있는 노 소나무 - 얼마나 이 자리를 지켰을까...?
금계마을
함양군 안내센터 주차장
의탄교를 이용하여 람천을 건넌다. 그리고 마천면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부터는 이 물을 임천으로 불러야 한다.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동, 의중동 등으로 형성된 의탄마을이다. 이 부근 마을이 조성된 경위를 찾아볼까? 살펴보면 마천면의 군자리나 덕전리의 ①백무동은 ‘마고할미’가 백百 명의 자식을 무당巫으로 보냈던 바, 이들과 접신을 위해 찾는 새내기 무당들과 치성을 드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기도꾼들을 위하여 세워진 마을이다. 산내의 ②입석리는 실상사의 사하촌으로 그리고 이 함양의 ③의탄리나 금계동은 벽송사, 금대사, 안국사 등의 사하촌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그렇게 형성된 마을에 이런 저런 이유로 흘러들어온 피란민들이 함께 자연스럽게 모둠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지리산 주위의 여느 마을이 안 그러겠냐마는 이 의탄마을은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인데다 경관이 빼어나 540년 전 지리산 등정에 나섰던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을 보고는 바로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점필재를 잠깐 만나볼까? 항상 지리산행에 목말라 하던 그가 함양군수로 부임한 해가 1470년이다.
무릉도원이라 여겨졌던 의탄마을
그래서 그는 1472년 음력 8월 함양성을 나와 지리산 산행에 나선다.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 그가 아끼던 제자들과 사근역을 지나 휴천계곡 50리를 거쳐 도착한 이 의탄마을은 그를 유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점필재는 동행했던 유호인에게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말로써 의탄마을의 강한 인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임천변과 의탄에는 아름드리 정자나무들이 서 있고 칠선계곡에서 흐르는 청정계류와 어우러져 으뜸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한편 1611년 4월 3일 남원부사로 근무하던 어우당 유몽인도 인월쪽에서 백장암 ~ 군자사를 거쳐 지금의 송전리 부근에서 벽송사 능선을 넘어 어름터의 두류암에 들렀다가 천왕봉을 가는 도중에 이 의탄촌을 지나면서, "옛날 점필재가 이 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으리라!"며 점필재를 회상하기도 했다.


금계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