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대(독녀암), 와불산, 상내봉(미타봉)
# 언제: 2020년 11월 24일 화요일
# 산행지: 지리 품속(독녀암(노장대),상내봉(미타봉),와불산)에서 놀다.
# 산행거리: 7.48Km 07시간 14분
# 산행코스: 송대마을(송대팬션) - 선녀골 - 선녀굴 - 의논대 - 고열암 - 신열암 - 독녀암(노장대) -
안락문(통락문) - 와불산(군계능선갈림길) - 오뚜기바위(향로봉) - 상내봉(미타봉)삼거리 -
상내봉(미타봉) - 소림선방 - 좌선대 - 783봉 - 벽송사능선 - 송대동갈림길 - 송대마을(송대팬션) -
원점회귀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천연와불성지 견불사 실상선원 - 대풍 범각스님 창건
견불사(智異山 見佛寺/650m) -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665 천연와불의 성지 견불사(見佛寺)는 국립공원 지리산 하봉(下峰) 서북쪽 기슭 해발 650m 고지에 자리한 견불사는 스님들의 전문 수행도량으로 불사중이다. 정상의 해발 1,214m 상내봉은 천연와불형상으로 함양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뒷산의 모습인데 옛부터 천연와불이라고 불리어온다. 산봉우리가 부처님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서 이곳을 향로봉, 미타암이라고, 또한 원래 신라시대 견불마을에 견불사가 있었다고 함양군지에도 전해온다.
천연와불성지(天然臥佛聖地) - 상내봉(미타봉)
송대마을 입구에 있는 말귀바위
송대동(洞) - 송대마을 -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지점인 우론 벽송사능선이 길게 장막을 치고 좌론 솔봉능선이 감싸안고 위론 상내봉(와불산)이 솟아 청정 선녀골이 흘러내리는 전형적인 산골오지마을.
구 빨치산루트안내소 건물 - 함양군에서 오래전에 야심차게 설계(설치)건물이 이젠 이젠 흉물이 된듯하네요, 백무동에서 두지터가는길 벽송사 일대 그리고 이곳 곳곳에 설치되었던 안내판, 마네킹 등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선녀골을 따라 능선에 붙어 오르다 선녀골을 좌,우에 두고 횡단을 하며 선녀굴을 찾아간다.
축대의 흔적들
샘터
선녀굴 직전 마을터
[선녀굴]
동북부폐사지 7암자의 한곳이기도 하거니와, 정순덕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
정순덕(1933 ~ 2004)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 안쪽 오지인 내원마을 중에서도, 가장 깊은 두메산골 안내원마을 출신으로, 10대 후반의 나이에 시집을 간 불과 몇달 후 공교롭게도 곧바로 전쟁이 터지고 6.25 이전부터 좌익계열(단순한 부역자였다는 주장도...)이었던 남편(성석근)이 지리산으로 입산(입산 후 곧 사망)하자 남편을 위한 겨울옷을 챙겨(정순덕의 주장) 1951년 2월에 지리산에 들었다가 붙잡힌 1963년 11월 까지 13년 동안 지리산 일대를 공포속으로 몰아넣은 여빨치산 !!!
암울한 격동기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마지막 빨치산, 지리산 여장군 등으로 미화하거나 영웅시하는 경향마저 있는듯하지만 역사에 근거한 펙트마저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북한 엘리트출신으로 이곳에서 1962년 사살된 이은조(남), (정순덕은 무학으로 이은조에 의해 사상적으로 무장된듯)같은 산청군 출신인 이홍이(남)와 함께 지리산을 훝고 다니며 쌍계사 부근에서 무고한 젋은부부와 여덟살 아들포함 3명,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정씨형제 부부 4명 - 7명의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극악무도한 장본인입니다.
생포되기 1년전인 1962년 2월 이곳에 은신하고 있다 마천지서 경찰들의 습격을 받고 리드격이었던 이은조는 총격에 사살되어 정순덕, 이홍이가 이곳에 암매장하였고 이듬해 11월 고향마을에 잠입해 있다 잠복중이던 경찰에 의해 이홍이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정순덕은 대퇴부관통상(한쪽다리 절단)을 입고 생포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며 민간인 학살 등의 죄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23년간 복역하다 특사로 석방된 후 복지원 등을 전전하다 사망하였으며 생전 북송을 원했으나 이미 전향을 했고 남한출신이라는 점에서 정부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그녀가 추위와 배고픔 그 모진 지리산에서 13년간 품속에 항시 품었던 것은 언니와 여동생의 사진이었다는 사실이 측은지심... 너무 애잔하기 그지없지만....
불에 검게 그을린 석벽은 당시의 흔적인지, 박꾼들의 자취인지는 알수 없으나 모진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돌을 데워 달구어 깔거나 껴안고 자는 방식으로 연명한것은 분명함.
마지막 빨치3人 암굴비트 - 선녀굴
정순덕 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래리 안내원 마을에서 태어나 - 지리산에 빨치들이 활동시작한 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시천면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50년 5월초 석성조에게 17세나이에 시집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달 전쟁이 터진다. 신랑,성조는 인민군 치하시절에 로동당 산청군 시천면 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부역자가된 석성조는 보복이 두려워 빨치로 입산하게 된다.이후 정순덕 신부는 경찰들의 고문,협박에 견딜수가없어 남편을 찾아 입산, 빨치산을 만날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받고 ,두달만에 재회할수 있었다.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로 도깨비 부대에조직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정도 같이 지낸것이 전부였다.
이은조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이홍희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4명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15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군경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을수 없을것 같다는생각에 입산,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61년 송대마을위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3년 11월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 대공경찰관은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집에 들어가는것을 포착,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체포 - 긴 세월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이들이 죽음의 피를 지리속에 묻었다. 마지막 빨치여인 정순덕
마름없이 한겨울에도 얼지않는 선녀굴 석간수
갈림길
의논대 오르기전 오래된 멸풍 솔.
의논대 - 의논대는 주변의 암자 들, 신열암,선열암,고열암 등에 기거하던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불법을 논하던 곳이라고하여 의논대, 의논대가 되었다고 한다.
일강(一岡)과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영랑대, 두류봉, 말봉, 영롱봉, 조망
벽송능선, 싸립재골, 허공다리골, 창암능선, 한신능선, 오공능선, 반야봉까지, 조망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의논대에서 독녀암(노장대)조망
고열암(古涅菴)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퍼온글-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金宗直, 佔畢齋)
病骨欲支撑,병골욕지탱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잠차포단숙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송도비명월 : 소나무 물결(파도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오의유구곡 : 국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부운복하의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야반폐암곡 :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유장정직심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당득산영록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고열암 샘터
고열암 흔적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원문]
訪新涅. 無僧. 亦負峭壁. 菴東北有巖. 曰獨女. 五條離立. 高皆千餘尺. 宗云. 聞有一婦人. 累石巖間. 獨棲其中. 鍊道沖空. 故爲號云. 所累石猶存. 柏生巖腰. 欲上者. 梯木挽其柏. 廻繞巖闕. 肯腹俱盪磨. 然後達其頂. 然不能辦命者. 不能上. 從吏玉崑聳山. 能上而超足麾手. 予嘗往來山陰. 望見是巖. 與諸峯角出. 若柱天然. 今而身跨玆地. 毛骨愯然. 恍疑非我也. -퍼온글- -빌려온사진-
독녀암(노장대) - 독녀암(노장대)바위군(群), 또 다른 별세계 바위 숲, 거대한 암봉군의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는 [옹암(甕巖),진주독바위], [하동독바위]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독바위로 불린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으로 등장하는데, 한 여인이 이곳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득도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돌기둥이 숲을 이룬 듯 솟아있다.
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이다.
함양독바위의 지명을 고문헌에 근거하여 독녀암(노장대)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한 분은 솔레이 이용훈 박사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노장대(老將臺)라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함양독바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세인들이 함양 독바위라고 하는 것은 지리산길 지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도 또한 지명의 정확성이 그 생명이다.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마.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安樂門(안락문)'이라 쓰여진 큰 석문(石門), 전해지는 이야기는 빨치산들이 이곳을 들락거리며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하는데,安分樂道(안분낙도. 분수를 알고 도를 즐긴다)에서 온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락문,安樂門 (통락문) - 근심걱정을 넘어 안락한 세상으로 가는 문
와불산 정상 - 독녀암(노장대), 베틀재, 공개바위, 갈림길
오뚜기 바위(향로봉)
일강바위
옛 상내봉(와불산) 정상석 있던자리에서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가기전, 옛 와불산 정상석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 드론 촬영
소림선방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퍼온글-
소림선방 석굴 내부
좌선대(坐禪臺)
좌선대 옆 미타봉 직벽
벽송능선, 창암산, 저멀리 삼정산 조망
한신능선, 오공능선, 반야봉 조망
청이당고개, 두류봉, 두류봉능선, 조망
새봉, 옹암(산청,진주,독바위) 조망
사립재, 새봉, 조망
황석산, 거망산, 조망
미타봉 정상
바위 비트
하산 원점회귀 - 송대마을(송대팬션)
선녀골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