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상류암터, 청이당,淸伊堂,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꺼비♡꺼비 2020. 12. 14. 17:54

# 언제: 2020년 12월 13일 일요일

# 산행지: 상류암터, 청이당,伊堂,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9.38Km  07시간 06

# 산행코스: 윗새재주차장 - 조개골 - 상류암터갈림길 - 상류암터 - 청이당옛길 - 청이당 - 쑥밭재 - 옹암(甕巖),진주,산청(독바

                위 - 석문 - 초령(새봉) - 동부(태극)능선길 - 새재갈림길 - 윗새재주차장(원점회귀산행)


상류암터 입구 배바위

 

박여량_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중에

 

6일(무신)[1610년 10월 22일 金]

[전략]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상류암은 묘운이 새로 지은 곳으로,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

[중략]

상류암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했다. 이 암자의 승려가 차와 과일을 내왔는데, 모두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묘운이 청하기를 “이곳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한 암자가 있는데, 제법 정결하며 뜰에 가득 국화를 심어 노란색, 흰색 국화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정덕옹∙박여승∙혜보와 함께 피곤함을 무릅쓰고 일어나 횃불을 들고 그 암자로 갔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왔다. 가보니 묘운이 말한 대로 암자는 정결하고 국화는 만발해 있었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비춰가며 꽃을 구경하였다. 그런 뒤에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었더니 꽃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상류암으로 간 뒤 나와 네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7일(무신)[1610년 10월 23일 土]맑음.

 

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臺(대)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그 곁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둥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혜보에게 청해 이 암자의 벽에 이름을 썼는데 모두 8명이었다.

 

상류암터 석축

진양지(晉陽誌) 산천조(山川條)의 덕산동(德山洞) 지명에도 상류암이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천왕봉의 물은 법계사에서 동쪽으로 흘러 살천촌(薩川村)을 거쳐 사제봉(社祭峯) 아래 이르러 동북쪽으로 흘러 살천이 된다. 또한 서흘산(鉏屹山)에서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이 되어 살천과 더불어 양당촌(兩堂村) 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 고 했다.

 

진양지 불우조(佛宇條)에는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 고 하였고, 산청군지(山淸郡誌) 내고장 전통(傳統)편에 상류암지는 삼장면 유평리(油坪里)에 있다, 고 하였다.

 

청이당,伊堂 석축

 

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1472년 김종직 선생이 쉬어간 계석은 청이당터 석축 앞 약 2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1711년 배찬 선생은 이곳에서 '계곡 옆의 바위 위(澗邊石上)에 빙 둘러 앉아서 밥을 먹었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있는 청이당터(숙밭재 아래 평평한 터)라고 하는 곳과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거리(약100m)가 있다. 특이한 것은 배찬 선생은 이곳을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 세석을 세적평전(細磧平田)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세석평전 또한 일제가 창지개명했다고 알려진 것도 사실이 아니다.


청이당,伊堂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찾이하고 않자서 잠깐 쉬었다. ☞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天禮碭 추정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쑥밭재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된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쑥박재>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 수긍이 간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설에 한 표를 던진다.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동부능선상에 있는 산청독바위(일명진주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독(甕)바위라하며, 문수사 위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하여,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 한다. 지리산에 독바위가 세곳이 있다.


산청(진주)독바위, 함양독바위, 하동독바위, 산청독바위는 상단부가 翼善冠(익선관, 임금이 평상복(곤룡포) 차림으로 (정사를 볼 때 쓰던 관)보인다. 이곳 산청 독바위 조망은 중봉이후 두류봉능선 조개골 저멀리 삼정산 삼봉산 윗새재마을 써리봉 자락으로 진주방향 삼천포 와룡산도 조망된다.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윗새재마을 주차장

 

윗새재마을

 

 

 

 

 

 

조개골

 

 

 

상류암터 갈림길 - 철모삼거리 150m 전, 우측사면을 타고 상류암지 들머리로 진입, 사면을 올라 능선 산죽지대를 통과하고 능선길을 더 이어가다가  사면으로 접어들어 이내 조망바위에 도착한다.

 

 

상류암지 아래 조망바위, 고요하고 깔끔한 느낌이 좋다.

 

조망각은 넓지 않지만 조개골 일대 주변 지능들의 굴곡이 선명하다.

 

비둘기봉과 써리봉,하봉동릉

 

 

상류암터 입구 배바위

 

상류암터 샘

 

 

박여량_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중에

6일(무신)[1610년 10월 22일 金]

[전략]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상류암은 묘운이 새로 지은 곳으로,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

 

[중략]

상류암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했다. 이 암자의 승려가 차와 과일을 내왔는데, 모두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묘운이 청하기를 “이곳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한 암자가 있는데, 제법 정결하며 뜰에 가득 국화를 심어 노란색, 흰색 국화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정덕옹∙박여승∙혜보와 함께 피곤함을 무릅쓰고 일어나 횃불을 들고 그 암자로 갔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왔다. 가보니 묘운이 말한 대로 암자는 정결하고 국화는 만발해 있었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비춰가며 꽃을 구경하였다. 그런 뒤에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었더니 꽃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상류암으로 간 뒤 나와 네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7일(무신)[1610년 10월 23일 土]맑음.

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臺(대)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그 곁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둥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혜보에게 청해 이 암자의 벽에 이름을 썼는데 모두 8명이었다.

 

진양지(晉陽誌) 산천조(山川條)의 덕산동(德山洞) 지명에도 상류암이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천왕봉의 물은 법계사에서 동쪽으로 흘러 살천촌(薩川村)을 거쳐 사제봉(社祭峯) 아래 이르러 동북쪽으로 흘러 살천이 된다. 또한 서흘산(鉏屹山)에서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이 되어 살천과 더불어 양당촌(兩堂村) 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 고 했다.

 

진양지 불우조(佛宇條)에는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고 하였고, 산청군지(山淸郡誌) 내고장 전통(傳統)편에 상류암지는 삼장면 유평리(油坪里)에 있다, 고 하였다.

 

 

 

 

상류암터 석축

 

 

 

상류암터 맷돌

 

상류암터 주변

 

이제 또 가야 할 루트 청이당 가는 중 지리의 산죽 길

 

 

이 지점은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청이당터(쑥밭재 아래 평평한 터)라고 하는 곳과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청이당 옛길 마암 가는 방향 거리(약100m)가 있다. 내 자신도 동안 이 지점이 청이당 터 자리로 알고 있었다.

 

여긴 청이당터 가 아니다.

 

천례탕,天禮碭 추정


천례탕,天禮碭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청이당 주변

 

청이당 석축

 

청이당 터 - 1

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이당 터 - 2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차지하고 않자서 잠깐 쉬었다. ☞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청이당 주변 둘러보고 점심 식사

 

오늘 삼겹살 준비해준 사천 사는 동생 배완식

 

완식 동생은 함께 산행 하지 못했다 - 함께 산행 하다 몸 이상태로 하산 - 맛 있는 삼겹살 준비 해준 완식 동생 감사

 

쑥밭재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된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쑥박재>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 수긍이 간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설에 한 표를 던진다.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쑥밭재 를 지나 동부(태극)능선 길 걷다보면 석굴이 한,두개씩 보인다.

 

어마어마 한 암석도 보이고

 

 

 

오늘의 루트 중 최고가 아닐까 한다. -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배경 삼아 포즈 취하는 뚜벅기 아우님

 

 

 

꺼비도 바위를 올라가 본다 - 바람 어마, 어마, 하다 내 몸 바람으로 휘청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동부능선상에 있는 산청독바위(일명진주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독(甕)바위라하며 문수사 위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하여,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 한다. 지리산에 독바위가 세곳이 있다.


산청(진주)독바위 함양독바위 하동독바위 산청독바위는 상단부가 翼善冠(익선관, 임금이 평상복(곤룡포) 차림으로 (정사를 볼 때 쓰던 관)보인다. 이곳 산청 독바위 조망은 중봉이후 두류봉능선 조개골 저멀리 삼정산 삼봉산 윗새재마을 써리봉 자락으로 진주방향 삼천포 와룡산도 조망된다.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 태양문양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정상에서 바람이 아주 세차다.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에서 춥다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에서 멋진 풍광 - 바라본 조개골 하류부와 윗새재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에서 조개골 조망


옹암(甕巖),

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중봉,하봉,국골사거리,청이당고개로 이어지는 하봉능선과 동부능선


동부(태극)능선 길 두류봉 능선 향운대 조망

 

벽송능선과 뒤로 보이는 법화산,삼봉산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바라본 백송사능선 뒤엔 금대산과 백운산, 삼봉산


초령(새봉)조망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바라본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바라본 조개골 하류부와 웅석봉,달뜨기능선

 

 

 

 

벽송사능선 뒤엔 금대산과 백운산, 삼봉산 조망


 


오늘 산행 루트 가야할 초령(새봉)을 지나 갈지자로 밤머리재로 향하는 동부능선

 

독바위 아래 조망바위의 노송

 

 

 

 

 

 

 

 

 

 

명품노송.

 

 

 

 

 

부부바위(형제바위)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초령(새봉)방향 으로 50m 좌측 사면

 

 

옹암(甕巖),산청독바위(진주독바위) 초령(새봉)방향으로 조금 이동, 좌측사면으로 내려서서 석문에 든다. 규모있는 석문이다. 수직암벽위에 큰 바위가 다리처럼 걸쳐있으니 꽤 높이 있는 석문이 되었다. 평평한 상단석은 다리의 상판과 다름없다. 조망도 있다. 허골다리골과 벽송능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좌측 반야봉에서부터 바래봉,덕두산, 삼신봉,법화산까지 서북방향의 조망이 그만이다.

 

 

 

 

 

 

 

 

 

 

 

 

 

 

 

 

초령(새봉)을 넘어 동부능선길을 걷는다.


초령(새봉)

 

 

 

 

 

 

초령(새봉)에서 바라본 사립재와 상내봉삼거리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치밭목능선


새봉 너럭바위

 

 

 

 

 

 

 

새재 갈림길 - 새재에서 오봉 임도길 접속지점 까지는 1km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