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화산12곡] - 1곡 : 용유담(龍遊潭)-21년03월14일(일요일)

꺼비♡꺼비 2021. 3. 23. 20:39

용유담(龍遊潭)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⑴ 지지(地誌=地理誌)

⑵ 고지도(古地圖)

2. 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3. 오늘날의 용유담 경관

4. 용유담의 각자(刻字)

5. 용유담의 외나무다리

6. 기우제와 용왕당(龍王堂), 성모묘(聖母廟)

⑴ 기우제(祈雨祭)

⑵ 용왕당(龍王堂)

⑶ 성모묘(聖母廟)에 대한 가설

7. 임천과 엄천

⑴ 같은 강 다른 이름

⑵ 임천(瀶川) 이야기

⑶ 엄천(嚴川) 이야기

⑷ 고지도 속의 임천과 엄천

8. 용유담과 지리산댐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언제부터 용유담이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의 기록은 역시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이다. “해공은 군자사로,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조태허․유극기․한백원은 용유담(龍遊潭)으로 구경갔다. 나는 등구재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그는 함양군수 시절(1471~1475) 용유담을 언급한 시 11편을 남겼다. 물론 그전부터 용유담으로 불렸겠지만, 용유담은 군수를 잘 만나 세상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⑴ 지지(地誌=地理誌)

 

김종직의 다음이자 서적에 최초로 실리게 된 것은 동국여지승람인데 1481년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동국여지승람을 수정·보완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인데, 이때 추가된 것은 〈신증〉으로 구분하였고 용유담은 그런 말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처음부터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양군 형승(形勝)조에서 다음과 같이 꽤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용유담(龍遊潭) :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 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중의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국역 : 한국고전번역원)

 

원래 지지(地誌)는 고을의 역사 명산 대천 호구 역원 봉수 창고 토산 군영 향교 풍속 성씨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경상도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은 워낙 정보가 소략하여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도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시문까지 덧붙여 풍부하고 상세한 백과전서식 지지를 편찬하였는데 바로 동국여지승람이다. 성종대의 찬란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라 할 것이다. 이후 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은 후대에 글쓰기의 충분한 전거로 활용되었다.

위의 내용은 영조대에 전국의 읍지(邑誌)를 모아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에 똑 같이 수록되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1777~1806)에는 요약하여 수록하였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 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국역 : 한국고전번역원)

 

정말 있다면, 가사어는 세계 유일의 어종일 것이다. 이덕무(1741-1793)는 보다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지리산(智異山) 속에 소[湫]가 있는데 소 위에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항시 그 소 속에 쌓여 있다. 거기서 나는 고기의 무늬가 매우 아롱아롱하여 가사(袈裟) 같으므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하니, 대개 소나무 그림자대로 변화한 것이다. 얻기가 매우 어려운데, 삶아서 먹으면 병이 없게 되고, 오래 살게 된다고 한다.」

 

김정호(1804-1866)의 대동지지(大東地志 *1861~1866)에는 여지승람과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배합하여 수록하였다. 그 외에도 많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한다.

 

⑵ 고지도(古地圖)

 

옛 지도(地圖)는 해당 지역의 산천 관아 역참 도로 창고 진 등을 표시하여 국방과 행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원래 목적과 다소 먼 형승 사찰 등은 지도가 풍부해진 후에야 등장하게 된다. 그것도 전국지도보다는 도별지도나 군현지도에, 또 목판본보다는 필사본에 주로 나타난다.

조선 전기의 도별지도나 군현지도는 남아 있는 게 없고, 점필재가 함양군수 시절에 만들었다는 함양군지도에 용유담이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함양군지도를 완성하고 그 위에 쓴 詩 중에 “발랄하게 뛰노는 신어는 임천에 가득한데(神魚潑剌滿瀶川)”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신어(神魚)는 가사어(袈裟魚)를 말하는 듯하고 가사어는 임천 그중에서도 용유담에 사는 고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도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공개된 고지도 범위 내에서 내가 조사한 바로는 필사본 조선지도(1750~1768)에 용유담이 처음 등장한다. 그 이후로 해동여지도·광여도·청구도·청구요람·경상도읍지·동여도· 영남읍지·1872년의 지방지도 등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조선지도(도별지도). 1750~1768. 방안식(方眼式) 필사본. 방안식은 눈금자로 거리를 가늠하는 방식이다.>
*안국사의 위치가 좀 맞지 않는다.

 

<광여도(廣輿圖) (부분). 1800년대 초. 필사본 회화식>

 

<경상도읍지, 함양. 1832년경 필사본 회회식>

 

<1872년, 지방지도 함양군.(부분). 필사본 회화식>

 

<1895년 영남읍지 함양군지도>

 

2. 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그럼 옛사람들의 유산기에 나타난 용유담의 모습을 살펴보자. 무수히 많은 기록 중에서 가장 핍진하게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5개를 발췌하였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옛것을 기술하여 전할 뿐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취사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미 作이 아닐까? 作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①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흔적이 남아 있네(靈怪千年跡 蒼崖有裂痕)”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② 1611년,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③ 1640년,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리산기(智異山記)

「그 아래 용유담은 홍수나 가뭄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유담의 물은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깊은 골짜기에 너럭바위가 있고, 양쪽 벼랑 사이로 물이 흐른다. 바위 위에는 돌 구더이[石坎 석감], 돌 구멍[石竇석두], 돌 웅덩이[石坑석갱]이 있어 마치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 듯, 규룡(虯龍)이 서려 있는 듯,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물은 깊어 검게 보이는데, 용솟음치거나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빙빙 돌거나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기도 한다.」

 

④ 1724년,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의 유용유담기(遊龍游潭記)

「먼저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하였다. 용유담은 지세가 깊고 그윽하였으며, 바위들이 모두 개의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물길이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용당(龍堂)이 맞은편 언덕에 있었는데, 나무로 엮어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하여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를 건너자니 아찔하고 벌벌 떨려서 건널 수가 없었다. 다리 옆의 바위들을 넘어서 동쪽으로 백여 보를 가니, 큰 바위가 언덕에 붙어 가로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둥글기도 하고, 타원형이기도 한 것이 패옥 같았고, 움푹 파인 곳은 술잔과 술통 같았다. 그 너머 몇 길이나 되는 바위에는 길 같은 흔적이 굽이굽이 이어졌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하였다. 갈고 다듬은 듯 반질반질하여 그 형상이 지극히 괴이하였다. ‘용유담’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략〉

지리산 북쪽에 펼쳐진 천석(泉石) 가운데 이 용유담이 가장 빼어나다. 나는 그 기세와 장관이 좋아 조우명(趙遇命)에게 바위의 남쪽 벽면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그 아래에 내가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石抉川駛龍怒神驚]”라는 여덟 글자를 적었다. 후에 석공을 시켜 새겨 넣도록 하였다.」

 

⑤ 1790년,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의 방장유록(方丈遊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들이 시내에 쌓여 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그 기괴한 형상을 이루 다 이름 붙이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로 하나의 물길이 열려 큰 돌구유에서 수만 갈래의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여울은 요란스럽게 쏟아져 요동쳤다. 아래에는 1만 이랑이나 되는 큰 못을 형성하였는데, 곧장 몇 리나 뻗어 있었다. 두 골짜기가 솟구쳐 있고 솔숲 그늘이 뒤덮여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 못을 따라 올라갔는데, 정신과 기운이 침침하여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 위 5가지 모두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에서 인용)

 

이번에 정리하느라 유산기를 다시 읽어보면서 새삼 느낀 바, 옛사람들의 문장력은 역시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옛사람들이 그렇게 감탄한 용유담과 지금 우리가 보는 용유담은 차이가 크다고 느낄 것이다. 옛사람들 특유의 과장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3. 오늘날의 용유담 경관

 

첫째, 계곡 옆으로 도로가 나면서 경관을 많이 해쳤다. 도로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올려다보면 도로공사와 홍수로 인해 무너지고 깨진 돌들이 밀려와 쌓여 있고 곳곳에 콘크리트가 볼썽사납게 바위를 덮고 있다.

 

둘째, 지금의 용유교 이전에는 쇠줄을 맨 출렁다리였고 그전에는 시내 위에 다릿발을 세운 나무다리였다 한다. 나도 출렁다리는 기억하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수량이 훨씬 많았다고 사람들은 증언한다. 지금은 평소 때 보면 용유교 아래는 흐름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한 마디로 용유담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밋밋하다. 용유담 아래 수잠탄 쪽에 돌들이 메워져 흐름을 방해하고, 또 수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도, 김일손은 속두류록에서 음력4월이지만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용유담의 풍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지리산 계곡물도 사람 사는 곳 아래로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엄천강에 나루가 제법 있었다 한다. 장항 주암 주상 자혜 동강 한남, 심지어 문정-세동간에도 줄배를 타고 건넜다 한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옛사람들은 늘상 말하였다.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즉 밑으로 스며든 물이 받쳐주어야 위로 물이 흘러갈 수 있는 법이다. 그 물을 사람들이 자꾸 빼내 쓰다 보니 계곡물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흐르는 물의 량이 적어지면 하천 바닥에 토사(+돌)가 쌓일 수밖에 없다. 물은 또 토사 밑으로 스며들고. 악순환이다. 중국에서는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쓸어내리기 위해 상류의 댐을 개방하여 인공적인 홍수를 일으키기도 한단다.

 

셋째, 지금 사람들이 용유담을 구경하는 방법은, 용유교 다리 위에서 용유담을 내려다보고 안내판 한번 훑어보고는 뭐 별거 없네 하고 지나가거나, 계곡으로 조금 들어가 용유담 각자와 김종직·정여창·김일손·조식 선생의 장구지소 각자가 새겨져 있는 곳까지 가서 용바위를 한번 구경하는 것으로 용유담을 보았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용유담을 본 것이 아니다. 그건 하용유담으로 바위에 새겨진 옛날의 물길 흔적을 보면 굉장했을 것이나 진짜는 그 위에서부터 시작된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온갖 형상의 바위, 그 바위를 꿰뚫고 세차게 흘러가는 물길, 시퍼렇고 으스스하여 용이 사는 듯한 소(沼), 용유담이 시작되는 작은 폭포까지 보아야 한다. 다시 건너편 계곡으로 넘어가 아직도 남아 있는 흐릿한 각자들을 쓰다듬고, 용의 비늘이 박혀 있는 듯한 바위, 용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자국, 용이 똬리를 틀고 있었을 법한 자리, 날아오르며 꼬리로 쳐 깨뜨린 것 같은 바위를 어루만지고, 그 바위 끝에 서서 포말을 튀기는 물을 내려다보며 통쾌함을 느껴보고,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어봐야 하리. 그랬을 때 비로소 옛사람들이 말한 용유담 풍경에 한발 다가서게 되리라.  -퍼온글-

 

 

엄천강의 상류에 있는 용유담은 마천면과 휴천면의 경계인 송정리라는 마을에 속해 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계곡들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이 곳에서 합류된다. 깨끗한 물이 용유담에 이르러서는 해가 쨍쨍 내리쬐는 화창한 대낮에 우뢰소리같은 천지폭포의 쏟아지는 소리를 비롯하여 장방형의 평평한 호수를 이루게 된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이 첩첩이 쌓인 험준한 봉우리는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이 용유담은 신선이 노니는 별천지로서 여름이 되면 각처의 피서객들이 휴식처를 찾아 모여들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강 동편의 직강 가설교와 고기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 하겠다. 여울에 높은 통방 앞에서 파닥이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경치와 풍광, 뱃놀이에 도취되어 다시 돌아갈 줄 모르게 하는 경승지이다. 또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방과 같이 패어진 수많은 바위들과 기암괴석들의 오목하고 볼록한 반석들은 절묘하여 일대 장관의 극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언덕 위에는 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용유담가에는 나귀바위와 장기판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그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엄천사로 갔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등에 싣고 오게 된다. 그 말이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한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 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용유담에서 용 아홉 마리가 놀다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용이 싸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장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장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와 자연에 도취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마적도사는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강변에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 죽었다고 한다. 나귀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곧 나귀바위다. 마적도사는 나귀가 죽어서 화를 못참고 장기판을 부수어 버렸다. 그 장기판 부서진 조각이라는 돌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용유담 맑은 물에는 등에 무늬가 있는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무늬가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다하여 '가사어'라고 불리었다 한다.이 지리산 계곡에서만 사는 물고기이다. 또 이 지방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리산 서북쪽에 달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곁에 저연이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이 못에서 그 가사어가 태어나서 가을이 되면 물을 따라 내려와서 용유담에 이르러 놀다가 봄이 되면 달궁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용유담 아래에서는 이 고기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용유담(龍遊潭) 과 용유교

 

용유담(龍遊潭)

용담입문(龍潭入門)

용유담에서 엄천 하류 방향으로 60번 지방도를 타고 약 500미터쯤 내려가다 보면 왼쪽 길가 산자락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용유담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용유대(龍游臺)

용유담 북쪽 도로(60번 지방도) 가에 있는 구룡정(九龍亭) 동쪽의 바위 벽면에 있는 각자이다. 그 밑에 여러 사람의 성명을 써 놓았다.

 

용유담 방장제일강산(사진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방장제일강산(사진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용유담(龍游潭)·방장제일강산(方丈弟一江山)

용유담 북쪽 시냇가 한 바위에 두 개의 각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뒤의 각자는 ‘방장산(方丈山, 智異山)에서 제일 빼어난 산수’라는 뜻이다.

 

용유동천(龍游洞天)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용유담 일대의 뻥 뚫린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천(洞天)은 사방에 산이 빙 둘러 있고, 중간에 허공이 뻥 뚫려 하늘만 보이는 곳을 말한다. 그러니까 동천이란 명칭은 산과 물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입체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심진대(尋眞臺)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진경(眞景)을 찾는 대’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깨끗한 곳을 심진동(尋眞洞)이라 하였다. 즉 용유담을 심진동으로 본 것이고, 그곳에 있는 바위를 ‘심진대’라고 한 것이다. 홍상준(洪相俊) 등 16명의 이름이 그 밑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구한말 이곳에서 시회(詩會)를 하고 새겨 넣은 듯하다.

 

세신대(洗新臺)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세신(洗新)이라는 말은 ‘씻어 내어 새것처럼 깨끗하다’는 뜻으로, 『주역』의 ‘세심(洗心)’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인 듯하다. 몸과 마음이 티끌을 씻어 내 산뜻한 마음을 갖는다는 의미로 근세 인근의 어떤 인물이 붙인 명칭인 듯하다.

 

독조대(獨釣臺)

용유담 남쪽 시냇가 초입의 덩그런 바위 밑에 새겨져 있다. 독조대는 ‘홀로 낚시질을 하는 대’라는 뜻으로, 용유담 아래쪽에 있다. ‘독조’라는 말은 당나라 때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강설(江雪)

 

유종원(柳宗元, 773~819)

 

千山鳥飛絶 : 온 산에는 새 한 마리도 날지 않고,

萬徑人踪灰 : 모든 길에는 사람의 발자취 끊어졌네.

孤舟蓑笠翁 : 한 척 거룻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 : 홀로 낚시질하는데 찬 강에 눈이 내리네.

 

 

조선 후기 최북(崔北)은 이를 소재로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를 그렸는데, 이 그림을 보면 유종원의 시가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연상이 든다. -퍼온글-

 

 

용유담의 각자(刻字)

각자 중에 가장 먼저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은 "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이다. 지붕돌이 받쳐주는 중심에 위치하여 이자리의 주인공임을 나타낸다. 그 대단한 점필재·일두·탁영·남명 선생조차 여기서는 더부살이하는 격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이곳은 인종임금(재위 1544-1545)이 강현(姜顯 1486-1553)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때 이태백을 한번 보고 적선인(謫仙人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한 하지장이 낙향할 때 황제 현종이 경호(鏡湖=鑑湖)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일화에 견주어, 강씨 문중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있다. 진양강씨 강지주의 문집에 나오는 얘기이다. 강현의 호는 新安이며 혜평(惠平)은 그의 시호이다. 벼슬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13세손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1800년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점필재 등의 장구소 각자는 중심 자리에서 밀려났으니 당연 그보다 더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연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조종(祖宗)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된다. 장구소(杖屨所)는 노닐던 곳이라는 뜻이다. -퍼온글-

 

 

점필재(佔畢齋), 일두(一蠹), 탁영(濯纓), 남명(南冥) 장구소(杖屨所)/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감대수(姜大遂)의 영귀소(詠歸所)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이 각자가 있는 곳이 용유담 기암괴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각자의 내용은 ‘인종(仁宗 : 재위 1544~1545)이 혜평(惠平) 강현(姜顯) 공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다. 강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를 지낸 인물로, 호는 신안(新安), 시호는 혜평(惠平), 본관은 진양이다. 용유담에 이 각자가 새겨지게 된 것은 인종이 용유담을 강현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것을 드러내려고 후대에 이 글자를 새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사가 있다.

 

당나라 때 시인 하지장(賀知章)이 비서감(秘書監)으로 있다가 사직을 하고 귀향하려 하자, 현종(玄宗)이 그에게 회계(會稽)의 경호(鏡湖)와 섬천(剡川)의 한 굽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후대 이백(李白)이 「술을 대하고 비서감 하지장을 추억하며[對酒憶賀監(대주억하감]」라는 시에서 “폐하께서 조칙으로 경호의 한 굽이 물 하사해, 그대의 대와 못이 영광되게 하셨네.[勅賜鏡湖水. 爲君臺沼榮]”라고 노래하였다. 강현의 후손 강지주(姜趾周)의 『적은유고(跡隱遺稿)』에 실린「용유담수계서(龍游潭修契序)」에 “신안 선생과 같은 분은 또 임금의 신임을 받아 옛날 당나라 때 비서감 하지장에게 경호를 하사한 것처럼 왕명으로 이 용유담을 하사하셨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여 강현의 후손들이 19세기에 이 글귀를 새겨 넣은 것이다. 이 각자 밑에 ‘16세 종손 순기(順基)’ 및 ‘11세손 재성(在誠)’등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세기 말의 인물로 추정된다.

 

점필재(佔畢齋), 일두(一蠹), 탁영(濯纓), 남명(南冥) 장구소(杖屨所)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 각자 좌우에 조선 전기의 학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일두 정여창(鄭汝昌), 탁영 김일손(金馹孫), 남명 조식(曺植) 네 선생이 이곳을 찾아 노닐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후인들이 차례로 이 분들을 새겨 넣은 것이다. 오른쪽에는 ‘문충공 점필재 김선생(문충공 佔畢齋 金先生)’이라 새겼고, 왼쪽에는 ‘문헌공 일두 정선생(文獻公 一蠹 整先生)’, ‘문민공 탁영 김선생(文愍公 濯纓 金先生)’, ‘문정공 남명 조선생(文貞公 南冥 曺先生)’을 나란히 새겨 넣었다.

 

김종직은 밀양 출신으로 부친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진 도통을 이어받았으며, 15세기 후반 신진개혁 세력인 사림파의 종장 역할을 하였다.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근무하다가 외직을 청해 함양군수·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2년 특명으로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고, 그 이듬해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병조참판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별세한 지 6년 뒤인 1498년 유자광(柳子光) 등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부관참시 되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형식을 빌려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의제를 죽인 항우(項羽)에 은근히 비유해 지은 글이다.

 

김일손은 청도 출신으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교유하였다. 14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으며, 언관으로서 훈구파의 부패와 비행을 비판하였다. 그가 춘추관 기사관으로 재직할 때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 때 처형되었다.

 

정여창은 함양 출신으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굉필(金宏弼)·김일손 등과 친밀하였다. 14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안의현감 등을 지냈으며,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소학군자(小學君子)로 일컬어지며 조선 도학의 도통을 이은 인물로 평가된다.

 

조식은 경상도 삼가(三嘉) 출신으로 어려서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이후 김해 처가 근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며, 1545년 모친상을 당한 뒤 고향 삼가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강학하였다. 1561년에는 다시 지리산 천왕봉 밑으로 이주하여 산천재(山川齋)를 짓고 깊숙이 은거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는 한편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식은 이황(李滉)과 함께 조선 도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문하에서 남명학파가 형성되어 안동권의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정신과 선비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장구소(杖屨所)’라는 말은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직접 발로 밟은 곳’이라는 뜻으로, 선인들이 찾아와 탐방한 장소적 의미룰 드러내는 말이다. 흔히 ‘장구지소(杖屨之所)’라고 한다. 명승은 사람을 통해 드러난다고 한다. 예컨대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를 짓지 않았다면 중국 적벽(赤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승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유명한 선인들이 직접 찾아와 발자취를 남기거나 글을 지어 남긴 곳은 그 장소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장구지소라고 하는 것이다.

 

감대수(姜大遂)의 영귀소(詠歸所)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일두·탁영·남명 선생 각자 왼쪽에 ‘한사 강선생 영귀소(寒沙 姜先生 詠歸所)’라는 각자가 있다. 이는 강대수의 후손들이 강대수가 이곳에 찾아와 소요하다가 시를 읊조리며 돌아갔다는 고사에 의거하여 그의 유적을 기억하려고 새긴 것이다. 영귀(詠歸)는『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문인 증점()의 말에서 취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공자는 자로(子路)·증점(曾點)·염구(冉求)공서적(公西赤) 이렇게 네 명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때 공자가 “너희들은 평소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만약 누가 너희들을 알아주어 관직에 등용한다면 어떻게 너희들의 재주를 펴 볼래?”라고 물었다. 그러자 성질이 급한 자로가 불쑥 일어나 대답하길 “어느 나라가 주변국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받고, 또 기근까지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3년 만에 백성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하고, 또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공자는 “염구야 너는 어찌 해 볼 거니?”라고 염구의 포부를 물었다. 염구는 어쩔 수 없이 “만약 제가 작은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면 3년 만에 백성들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마는 예악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공서적에게 “너는 어찌 해 볼래?”라고 물었다. 공서적은 “종묘의 제사를 지내거나 임금이 다른 나라 임금과 회합할 적에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이 두 제자의 대답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인 증점에게 “너는 어찌 할래?”라고 물었다. 그때 증점은 한쪽에서 비파를 타고 있었는데, 비파를 내려놓고 말하기를 “늦은 봄날 봄옷이 지어지면 저는 어른 대여섯 명,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가서 바람을 쏘이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인정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에 가서 바람을 쏘이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고자 한다.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말은 인욕(人欲)이 다한 곳에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서 그런 삶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고 산수에 묻혀 본성을 기르며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이 삶으로 여기는 인식을 낳았다. 이런 정신을 주자(朱子)에 의해 구현되었고, 조선시대 사인(士人)들에 의해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산천의 산수가 좋은 곳에 학자들이 소요하던 곳은 어김없이 욕기암(欲沂巖)·무우대(舞雩臺)·영귀대(詠歸臺)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증점처럼 인욕을 멀리하고 천리를 보전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는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영귀(詠歸)라는 말인데, 그 속에는 앞에 있는 내용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강대수의 영대소도 마찬가지이다.

 

강대수는 합천 출신으로 강익문(姜翼文)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에게 수학하였다.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영창대군을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였고, 제주로 유배된 정온(鄭蘊)을 구원하다가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우승지 등을 지냈다. 강대수의 동생으로 강대적(姜大適)·강대연(姜大延)이 있는데, 강대연의 후손 강지주(姜趾周)가 지리산 엄천 가에 살았다.

 

용유담(龍游潭)

용유담 남쪽 중간쯤의 바위에 있다. 예서(隸書)로 참하게 쓴 각자이다. 이 각자가 있는 곳이 예전 사람들이 찾아와 기괴한 바위들을 감상하던 곳이다.

 

경화대(庚和臺)

용유담 남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경(庚)은 태어난 해를 의미하고, 화(和)는 동(同)과 같은 의미로 같다는 뜻이다. 경화는 태어난 해가 같다는 뜻이니, 동갑내기들이 모여 계회를 하고서 그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구한말에는 마을이나 고을에 동갑계가 유행하여 이런 계회를 많이 하였다. -퍼온글-

 

 

용유담 각자는 2개인데, 이것은 점필재 각자 옆에 있다. 하나는 강 건너 방장제일강산과 같은 바위에 있다.

 

상류방향 용유담이 시작되는 곳

 

경화대(庚和臺). 이때 庚은 나이, 和는 같다는 뜻이므로 동갑계를 만들고 이름을 새긴 것이다.

 

풍경

 

용유담 주변 풍경

 

영귀대(咏歸臺)

영귀대 인명 각자

 

영귀대(咏歸臺)

용유담 남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영귀대는 앞에서 언급한 영귀소(咏歸所)와 같은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영(咏)은 영(詠)과 같은 뜻으로 시를 읊조린다는 말이다. 이 영귀대는 구한말 지역 인사들이 모여 계회를 하고 붙인 것으로 그 밑에 김희곤(金熙坤) 등 10명의 이름을 써놓았다.

 

 

기도처

 

구룡정 - 용유담의 아홉 용과 마적도사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후대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 구룡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다. 통도사의 구룡지(池), 금강산의 구룡연(淵), 포항의 구룡포(浦), 남원의 구룡계곡, 치악산 구룡사(寺) 등, 그외 지명도 많다.

 

용유동천(龍游洞天)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용유담 일대의 뻥 뚫린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천(洞天)은 사방에 산이 빙 둘러 있고, 중간에 허공이 뻥 뚫려 하늘만 보이는 곳을 말한다. 그러니까 동천이란 명칭은 산과 물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입체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심진대(尋眞臺)

용유담 북쪽 시냇가 바위에 있다. ‘진경(眞景)을 찾는 대’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속세의 티끌이 묻지 않은 깨끗한 곳을 심진동(尋眞洞)이라 하였다. 즉 용유담을 심진동으로 본 것이고, 그곳에 있는 바위를 ‘심진대’라고 한 것이다. 홍상준(洪相俊) 등 16명의 이름이 그 밑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구한말 이곳에서 시회(詩會)를 하고 새겨 넣은 듯하다.

 

방장제일강산(方丈第一江山 - 공부 숙제로 남겨노은 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