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지리 선인들의 길따라 전람회 길 걷다.

꺼비♡꺼비 2021. 6. 10. 09:03

# 언제: 2021년 06월 06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 역사 기행산행 - 토산 전람회길

# 산행거리: 14.94Km  10시간 00분

# 산행코스: 거림(666m) - 북해도교 - 지리03-09 - 우천좌선대1(1343m) - 우천초막터 - 좌선대2,돌담장 -

                음양수,좌선대3 - 미선대(1461m) - 도솔샘터 - 가섭굴 - 전망대 - 창불대골 - 나바론골 - 전망대 -

                삼거리 - 영계 - 영신사지(1489m) - 석문 - 좌선대 - 극락왕생바위(자살바위),좌선대5,창불대,(1577m) -

                전람회길入 - 북해도교 - 거림

 

# 토산전람회길 - 퍼온글

작년에 유람록길을 복원하면서 5구간째 석가섭 전망 봉우리에서 발아래로 펼쳐진 거대한 암벽을 보며 저곳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있다가 지난 1월23일, 1차로 창불대 아래를 답사를 했다. 겨울비로 인해 조망은 별로였지만 곰 발자욱을 따라 영신사지로 길이 연결되어 있다는걸 확인했고 그후 한달만에 2차 탐사때는 날씨가 맑아 길 옆으로 전망대며 다양한 볼꺼리가 많은 곳이라 <토산전람회길>란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

 

그 길은 영신사와 음양수샘을 잇는 최단거리 길이고 영신사의 숨은 기도터 윗쪽에 진입로가 있는데 그곳에 축담의 흔적이 있는것으로 봐선 외부인은 넘나들수 없도록 조치를 하였으며 석가섭을 조망하는 2,3봉우리에는 바위 위에 돌을 세운 흔적이 있고 좌,우 조망이 좋은 곳이라 기도터로 적합한곳이다. 창불대 아래에 있는 거대한 절벽 사이로 좁다란 길은 아는 사람들만 다니는 비밀 길이고 음양수 샘을 지나면 거림옛길과도 바로 이어진다.

 

유두류록을 쓴 김종직 선생은 창불대에서 영신사로 내려와 하루를 묵고 다음날 한신능선을 타고 백무동으로 하산했다.

전람회길도 선생이 내려온 지름길을 따라 영신사에서 창불대로 거슬러 올라서 음양수샘으로 원점회귀 하는 코스로 되어 있다.

 

아울러 김종직 선생의 하산길에 대한 <도솔산인>선생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곧은재능선과 오공능선]

"서복 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은 1953년 백무동에서 태어났고, 백무동에서 평생 살아온 토박이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현 느티나무 산장 자리에서 장사를 하셨고, 문회장님께서 물려받아 1978년부터 43년 동안 느티나무 산장을 운영하셨다. 작년 10월 말 문회장님과 점필재 길 산행을 함께하면서 '곧은재 능선'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한신 능선은 누군가 새로 지은 이름이고, 바른재 능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곧은재 능선 맞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느티나무 산장에 김경렬 선생과 최화수 선생, 성낙건 선생이 자주 오셨다고 한다. 이분들 입에서 나온 곧은재 능선 누군가 와전하여 바른재 능선으로 기록하였고, 지리산길 지도에 한신 능선까지 보태서 지명의 혼란이 있는 듯하다.

 

문회장님 선고(先考)께서도 '곧은재'라고 불렀고, 영신대로 제물(통돼지)이나 쌀을 올리는 길이라고 기억하셨다. 당시에 세석을 오르는 주통로인 셈이다. 한신 계곡길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계곡을 많이 건너기 때문에 위험해서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람록에 나오는 '직지(直旨)'가 '지름길(곧은길)'이란 의미로 '곧은재'라고 설명하셨다. 현재 곧은재 능선의 경사가 심한 곳은 산죽밭 속으로 우회길이 있다. 샛골능선은 본래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오공능선(蜈蚣稜線)의 지네 바위 부근에 의령(宜寧) 여씨(余氏)(1864~1939)의 무덤이 있는데,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의중마을에 살았던 만송 '임영택(林暎澤, 1866~1925) 공 부인의 무덤이다. 나주임씨세보에 무덤의 위치가 공달비산(蚣達飛山)으로 나와있다. 현지 주민들은 '곰달비산'으로 알고있다"

<출처:도솔산연소재>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함께한 산우님 대구, 사천, 진주, 부산, 목포, 광주

 

거림에서 산행 시작해 지리03-09와 거림옛길 가기전 정등로 조망 - 지리 남부능선

 

지리03-09 기점으로 거림골 우천선생님 기도터 좌선대-1 도착

 

우천선생님 기도터 좌선대-1 -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본에서 수학하셨고 지리산이 좋아 가족(부인과 세 딸)과 생이별을 마다않고 산으로 들어와 잔돌평전(세석고원)에 터를 잡아 30년 동안 하늘을 지붕 삼아(아호 우천의 뜻) 생활하면서 칠선계곡, 한신계곡을 비롯한 다양한 코스의 등반로 개척, 조난자 구조, 등산로 정비 등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지리산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갖은 어려움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6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칠선계곡 어디 동굴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일 뿐입니다. 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하시겠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그야말로 지리산의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44년 전 유월에 신화가 되어버린 우천선생이 즐겨 다니시던 그 옛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우천선생님 기도터 좌선대-2 조망터 너럭바위 - 너럭바위에 올라 기도터를 둘러보니 조망 좋은 명당자리에 있다. 발아래 거림골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끝머리에 삼신삼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 낙남정맥이 흐르는 능선과 주산 줄기가 조망이될거고. 바로 아래에 우천 선생의 움막이 위치하며 아무래도 이곳이 우천 선생이 가장 많이 애용한 기도터로 보인다.

 

우천선생님 기도터 좌선대-2

 

전람회길 함께한 산우님 과 우천선생님 기도터 좌선대-2 단체 사진

 

2기도터를 떠나 작은 지계곡을 지나고 잠시 걸어 나와 음양수 샘 아래에서 남부능선길에 합류한다. 이곳에서 5분가량 세석방향으로 진행하면 음양수 샘에 도착하고 그 위 너럭바위에 우천 선생의 3기도터가 있다.

 

너럭바위에 올라 기도터를 둘러보니 조망 좋은 명당자리에 있다. 발아래 거림골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끝머리에 삼신삼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 낙남정맥이 흐르는 능선과 주산 줄기가 조망이될거고. 바로 아래에 우천 선생의 움막이 위치하며 아무래도 이곳이 우천 선생이 가장 많이 애용한 기도터로 보인다.

 

남부능선 정등로에 길에 있는 돌절구통(맷돌) - 음양수 샘 가지전 옛 산거촌락(散居村落), 화전민 터 자리에 있는 들절구통(맷돌)이 아닌가 하다.

 

음양수 샘 도착 -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음양수전설(陰陽水傳說) 지리산 최초의 주민이었다는 남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의 이름은 호야이고 여자의 이름은 연진인데, 이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에게 단 한 가지 한스러운 일이 있다면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호야가 과일을 따기 위해 산골 깊이 들어간 사이에 검정곰이 연진을 찾아와 세석평전에 있는 음양수를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연진은 당장 그 샘터로 달려가 물을 마셨다.


한편, 평소 곰과 사이가 나빴던 호랑이가 곰과 연진의 대화 내용을 산신령에게 고해바치니, 산신령이 대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감금하고 연진은 세석평전의 돌밭에서 평생토록 혼자 철쭉꽃을 가꾸게 하였다.


꽃밭에 피눈물을 뿌리며 언제까지나 철쭉꽃을 가꾸던 연진은 그 뒤 촛대봉의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산신령을 향해 빌다가 망부석이 되었다. 산신령은 노여움을 풀고 기적의 샘 음양수를 인간에게 개방하여 그 혜택을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자녀를 원하는 많은 여인들이 이곳에 찾아온다고 한다.

 

음양수 샘 도착해 바위틈의 석간수로 식수도 보층하고 음양수의 차가운 기운으로 몸의 열기를 식히고 발길을 기도처로 옵긴다.

 

음양수 좌선대-3기도터(음양수바위) - 음양수 3기도터(음양수바위) 기도발이 제대로 받을 듯한 명당 기운이 느껴진다. 저 멀리 삼신봉을 너머 악양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이 아스라이 조망지점은 3기도처 지리산 남북종주 길인 저 능선은 형제봉을 지나 악양 평사리 외둔에서 섬진강으로 스며들며 그 맥을 다한다.

 

우린 금줄 넘는다 - 미산대로 고고싱

 

미산대 - 남부능선 및 바른재, 창불대골, 큰세개골, 칠선봉, 창불대, 영신대, 등 주변 조망

미산대 예전에는 이름없는 조망터 였는데 이제는 미산대로 지명.

 

미산대에서 조망 되는 촛대봉, 시루봉

 

도솔샘

 

가섭굴

 

ㅋㅋㅋ 맛있는 점심시간

 

점심 식사 후 전람회길 걷는다

 

창불대, 자살바위, 병풍바위, 조망

 

협곡을 오르고

 

영신사지, 좌고대와 추강암 조망

 

좌고대, 추강암 조망

 

영신사지 터 로 가는 바위길 아래에는 영계 가 있다

 

영신사 터 가는 길

 

영신사 터

점필재 선생이 영신사 터에 머물며 언급한 가섭대를 둘러본다.
선생은 영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신사()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 한 구()가 있었다. 세조 대왕() 때에 매양 중사(使)를 보내서 향()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법당()에는 몽산화상()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에,

(두타제일 시위두수) 마하가섭존자()께서는 두수를 행하시어
(외이원진 내이리구) 밖으로는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마음의 때를 벗으셨네.
(득도거선 입멸어후) 앞서서 도(불도/불성)를 깨우치시고 뒤에는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설의계산 천추불후) 눈 덮인 鷄足의 雪山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후세에 전하리라,

하였고, 그 곁의 인장()은 청지()라는 소전()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의 삼절()이었다.'

선생은 성리학자로서 당시 지리산 자락의 절과 암자에 기거하며...

혹세무민( 惑世誣民 )하는 중과 무당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자들의 행태를 꾸짖는 대목이다.

만약 가섭전 법당 안에 걸려있던 몽상화상(중국 원나라의 고승) 족자에 쓴 글()이...

정말 비해당(안평대군)의 글이라면 이 그림은 국보급이라 하겠다.

그래서 김일손은 '속유두류록'에서 이 그림을 기보(奇寶)라고 하며 탐을 냈나보다. ㅋㅋ

안평대군은 몽산화상에서 가섭의 모습을 보았나보다. (김일손은 이 그림을 '가섭의 화상'이라 하였음)

[참고 1] 가섭(迦葉) : 마하가섭(摩訶迦葉). 석가모니의 수제자로 두타행을 행하는데 으뜸이였으며 바로 '염화미소 이심전심'의 주인공이다.


[참고 2] 두타() : 산스크리트 두타(dhuta)에서 나온 말로 번뇌를 털어내고 모든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로 경전에서는 그 투타행을 12가지를 들어 말하고 있다: 즉 1)조용한 곳에 거주한다. 2)항상 걸식한다. 3)걸식할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4)하루에 한 번만 먹는다. 5)과식하지 않는다. 6)정오 이후에는 과즙이나 설탕물을 마시지 않는다. 7)헤지고 헐은 옷을 입는다. 8)삼의(三衣)만 소유한다. 9)무상관을 체득하기 위해 무덤 결에 머무른다. 10) 주거지에 대한 애착을 버리기 위해 나무 밑에서 지낸다. 11) 아무것도 없은 한데 땅(露地)에 앉아 좌정에 든다. 12)항상 앉아 있으며 눕지 않는다.

[참고 3] 두수()는 벗어나다, 빠져 나오다, 이탈하다, 번뇌의 때를 떨어버린다는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 4] 雪衣鷄山은 눈 덮인 계족산으로 국역되나, 중국에서 한자로 계족산인 屈屈咤播陀山(kukkutapada-giri)은 인도 중부지방에 있는 산으로 실제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석가모니께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6년간 계족산에서 수행하신 것이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근거없이 와전, 곡해되어 설산 계족산이 된 것이다. 설산은 중국불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퍼온글-

 

영신사지터 주변에서 발견되는 기와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다보면 빈발암, 가섭전, 영신암이 등장한다. 빈발(賓鉢)은 가섭(迦葉)이 출가하기 전의 속명 핏발라(Pipala), 가섭(迦葉)은 출가 후의 법명 가사파(kā-śyapa)를 음차하여 한역한 것이다. 영신(靈神)은 가섭이 열반에 들기 위해 선정(禪定)에 들어간 후의 이름이다. 빈발(賓鉢)과 가섭(迦葉), 영신(靈神)은 마하가섭(Mahākā-śyapa)의 출생과 출가, 적멸(寂滅)의 시점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한다. 가섭의 출생부터 적멸까지의 이야기가 세석평전과 영신대에 담겨있다. 1487년 추강 남효온은 지리산일과에서 촛대봉은 빈발봉으로, 영신봉은 계족봉으로, 영신대에 영신암과 빈발암, 가섭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해당 안평대군이 영신암 법당에 있는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 족자에 쓴 찬(贊)을 읽어보면 이해가 쉽다. 요약하여 말하면 마하가섭존자가 설의 계산(계족봉) 아래 영신대 바위 속에 깃들어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가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인도의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吒播陁山:Kukkuṭapāda-giri)이 있다. '꿋꾸따'는 '꼬꼬댁'하는 닭울음 소리의 의성어이고, 산스크리스트어로 '빠따(pāda)'는 발(足), 기리(giri)는 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산의 모양이 닭 발의 모양을 닮았다고 한다. 석가섭은 '마하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미래에 오실 미륵불께 전하기 위해 꿋꾸따빠다산(계족산)의 바위 동굴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계족산으로 한역(漢譯)되었고, 인도에 있는 계족산을 지리산 영신대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마하가섭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영신대 바위 속에서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영신대는 미륵신앙의 성지인 것이다.

 

2017년 석가섭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최석기 교수님의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시에 대하여(遊頭流山紀行篇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이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1545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장편고시(176韻, 352句, 2516字)를 남기는데 석가섭을 이렇게 노래한다. '천 길의 가섭상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나는 황준량의 시를 읽고 2017년 9월 3일 영신대에서 가섭의 형상을 보았다. 햇빛에 드리운 바위가 가섭이 깃든 자연불(가섭상)로 보인 것이다. 이후에 여러 차례 영신대를 찾았으나 가섭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2020년 10월 25일 아침 영신대 석문 기도터를 지나 암봉 위에서 영신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마음의 문을 열면 석가섭의 형상을 친견(親見)할 수 있다. 이 위치는 점필재가 창불대에서 영신대 석문으로 내려오는 지름길의 암봉에 있다. 창불대에서 영신암으로 내려오며 석가섭을 보고 석문을 통해 영신대로 들어온 것이다.

 

 

靈神菴(영신암)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대성폭)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방장(주지승)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모름지기 촌장(은둔선비)을 불러 술이나 받아오게.


箭筈과 車箱 :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를 말하는데,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에 “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六》

方丈 : 사방 1장의 넓이(1장 : 10척) 절의 주지가 거처하는 방, 또는 그 주지. 주지스님. 삼신산의 하나(지리산) 禪 : 禪師 : 선사(선종의 고승의 칭호) 紅塵 : 붉운 먼지 속세. 湏(회)인가? 須(수)인가? 처음에는 湏(회)로 보았으나 須(수) 모름지기 꼭으로 당부하는 말로 쓰여진 듯하다. 山都 : 狒狒비비 중의 가장 큰 것. 豚尾狒狒 <爾雅, 釋獸> 狒狒. <郭璞注> 其狀如人, 面長, 唇黑, 身有毛, 反踵, 見人則笑. 交․廣及南康郡山中有此物, 俗呼之曰山都. /明, 袁宏道<新安江詩>山都吟復笑, 猩語是耶非. 山都는 猿鶴(은둔 선비)의 연장자(대표)

<출처:도솔산연소재>

 

1463년 8월 <이륙>선생의 [유지리산록]

뜰아래 작은 샘이 있는데 물이 세고 매우 맛있어서 신천(神泉)이라고 불리는데 흘러 내려가 화개천이 된다. 동쪽에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부도(浮屠) 모양처럼 생겼다. 여기 사는 승려들은 귀사(龜社)의 주인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죽지 않고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 퍼온글-

 

영신사터의 가섭대(석가섭)

 

영신사 터에서 조망 되는 비로봉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유몽인 유두류산록-

 

영계() - 영신사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 혜산()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영험한 곳이라는 영신대는 기(氣)가 세어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곳이라고도 한다. 영신대를 돌아보고 우천 선생의 영신대 기도터로 향한다. 이곳 기도터는 여타와 달리 꽁꽁 숨겨진 비밀 기도터다. 계곡을 조금 내려서서 좌측 석벽의 석문을 통과하면 숨어 있던 기도터가 나타난다. 마치 절진을 펼쳐놓아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 우천 허만수 선생 기도터 좌선대-4

 

석굴에서 캔디님

 

우천선생님 기도터 좌선대-4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

 

자살바위 - 이제 지명을 바꾸자 했다 - 극락왕생바위로

 

극락왕생바위에서 단체사진

 

우천선생님 좌선대-5

 

국락왕생바위

 

병풍바위

 

창불대에서 저멀리 상봉

 

창불대(唱佛臺)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500년전 지리산 산행기인 겸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등장하는 창불대 명칭그대로 이곳에 올라 소원을 빌거나 인근에 존재했다는 영신사 스님들의 기도처였다고 광할한 천혜의 은신터였을 세석고원일대와 멀리 상봉 반야봉 등등 조망이 가히 압권인 천하의 명당지.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 움막터

 

지리03-09지점 여기로 다리면 안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