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도장골, 시루(장군)봉, 청학연못, 촛대봉

꺼비♡꺼비 2021. 7. 29. 10:32

"도장골"

 

왜 도장골인가 ?

 

고대어에서 [산]을 나타내는 말 중에 [달]이 있으며

 

[달]을 뿌리로 하는 말 중에 지역에 따라 모음이 변하면서 [닫] 혹은 [돋]이 있다.

돋 + 안쪽 골 > 돋의 안골 > 도댠골 > 도잔골 > 도장골

결국 도장골은 산의 안쪽에 있는 골이라는 보통명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지리99)

 

 

드론 촬영 사진 (도장골, 시루(장군)봉, 촛대봉, 영신봉) & 와룡폭포

 

 

드론 촬영 사진 도장골 와룡폭포

 

 

도장골 풍광

 

 

도장골 와룡폭포

 

 

드론 촬영 사진 시루(장군)봉, 촛대봉, 운무에 가려진 연하봉, 제석봉, 상봉

 

 

시루(장군)봉, 북해도교골, 청학연못, 운무에 가려진(촛대봉, 연하봉, 재석봉, 상봉)

 

 

시루(장군)봉

 

 

시루(장군봉)

 

 

시루(장군)봉의 얼굴마담 고사목 -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 상봉, 조망

 

 

시루(장군)봉 그리고 굽이치는 남부능선

 

 

힐링 하룻 밤

 

 

청학연못 - 해발 1540m

자연적으로 생긴 연못이 아니고 청학동의 이상향을 완성시키려는 옛 선조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연못

 

 

[청학연못] 지명에 관하여

 

1. [청학연못]의 역사

 

그곳에 연못이 있었다는 기록은 [문화유적명소방]의 2005년 5월 3일자 게시물 번호 1번 <가객>님의 세석의 [청학연못]에 잘 정리되어 있다.

 

가장 앞선 기록인 <유용운>의 문집 [겸허일기] 내용을 다시 인용해본다.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면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에 이르고

그 돌문을 지나 40리 가량 가면 1천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호 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가 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

 

2005년 <가객>님의 [청학연못]에 관한 글이 발표될 때만 해도 <유운룡>이 보았다는 각자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가 세석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했지 찾지 못했는데, 그 뒤 끈질긴 탐구 끝에 결국 2009년 촛대봉 주변에서 찾아냄으로써 1570년대 <유운룡>이 보았던 ‘돌샘’이 청련거사의 글이 새겨진 세석평전에 있는 것임을 밝혀낸 것이다.

 

‘돌샘’이 지금의 청학연못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세석에 돌샘이라 할 만한, 그리고 기록에 남길 만큼 특이한 다른 샘이 없는 만큼 청학연못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외에도 1800년대 몇편의 기록이 <가객>님의 글에 소개되어 있으므로 참고가 될 것이다.

 

2. [청학연못] 명칭의 유래

 

청학동 혹은 학동은 우리나라에서 이상향을 일컫는 지명으로 전국에 많은 곳에 있다.

우리나라 유사이래 이상향으로 손꼽혀 온 지리산 자락에 유독 널리 알려진 청학동이 많은데,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록] 기록을 보면 대체로 세석평전과 불일평전 일대를 청학동으로 믿어왔다.

세석평전 청학연못이 기대고 있는 와석에도 오래전부터 학동임[鶴洞壬] 각자가 새겨져 있으며, 산자락 청암면에 학동(이 있으며, 거림의 은암 아래에도 학동이 있었고, 불일평전에는 협곡 좌우의 봉우리를 청학봉 백학봉으로 불렀으며 그 사이를 흐르는 협곡에 형성된 소를 학담(鶴潭), 학연(鶴淵)으로 이름을 붙일 만큼 이상향으로 삼았던 것이다.

 

지명(地名)이란 사람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과 분별하여 고유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므로, 구분하여 불러줄 필요성이 있었던 주체가 불러 지어진 것이다.

즉, 지명의 작명권과 전승권은 전적으로 그 지역에 삶을 뿌리내리고 살아오면서 어떤 특정한 곳을 특정지어 불러줄 필요성이 있었던 주민들에게 있다.

 

따라서, 지리산 지명의 유래를 탐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자 가장 먼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주변 주민들을 통하여 구전을 채취하는 일이다.

 

[청학연못] 지명 추적 또한 논리적으로 그곳이 청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추정할 일이 아니라 그곳을 청학연못이라 불러주었던 옛 사람들의 증언을 전승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구전을 채취하는 일이다.

옛사람들이 그곳을 [청학연못]이라 불렀고, 마을 주민들을 통하여 그렇게 계속 전해져 온다면 그곳은 [청학연못]이다.

 

이글을 쓰게 된 동기는 <도솔산인>님의 최근 산행기 [청학연못 혹한속으로]를 읽고 많은 분들이 세석에 있는 청학연못은 잘못된 지명이며, 일찍이 남명의 [유두류록]에 불일협곡에 있는 소를 학담과 학연이라 불렀으므로 이곳이 근거가 있는 진짜 청학연못이라고 <도솔산인>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오해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오해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다.

 

자주 언급을 하는 일인데, 지리산에 자빠진골이 몇군데 있는 중에서 산꾼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 거림의 자빠진골과 법천골 자빠진골이다.

거림의 자빠진골은 한벗샘 덕분에 산행코스로 잘 알려져 있었고, 법천골 자빠진골은 한참 뒤에 산꾼들이 들어가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법천골 자빠진골 산행이 막 시작될 무렵 어느 가벼운 젊은 산꾼이 인기 있던 산행기를 쓰면서 기왕의 자빠진골이 거림에 있으니 법천골의 자빠진골을 구분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엎어진골이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 뒤부터 많은 산꾼들이 덩달아 엎어진골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부근의 깊은골을 마음대로 숨은골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 가벼운 산꾼이었다.

 

고유명사는 작명권을 가진 사람들이 불러주는 그대로 불러야한다.

다만, 깊은골을 짚은골이라 발음하는 것처럼 사투리의 경우 주민들 마다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상식선에서 통일하는 정도야 허용될 수 있지만, 저 동네에 자빠진골이 있든 말든 이 동네에서 그 만한 이유가 있어 주민들이 자빠진골이라 불렀다면 저 동네든 이동네든 무조건 자빠진골이다.

 

불일협곡에 학연과 학담은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그 만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불러 주어 이름을 얻은 것이고, 세석에 있는 [청학연못] 또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그 만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불러 주어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퍼온글-

 

 

청학연못 암반암벽 위에서 드론 촬영

 

 

 

청학연못 & 암반암벽

 

 

청학연못 주변 영신봉, 자살바위, 반야봉, 조망

 

 

촛대봉 가는 길

 

 

촛대봉

 

유몽인 유두류산록

 

1611년 4월 5일 갑술일(양력 5월16일)

<전략>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촛대봉의 [宣人羅州鄭氏之墓]

지리자락에 머무노라면
종종 전설같이 떠도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데
언뜻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둔 것으로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는 탐구산행의 단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와 같은 이야기에서
실 날 같은 진실의 끈을 잡고 지리산의 깊이를 캐는 일도 흥미진진하거니와
덧붙여진 허구에서도 민초들의 시대적 정서를 읽을 수 있으니
지리산에 오르거든 떠도는 전설 한편 정도는 귀동냥 해둘 일이다.

자갈돌이 많은 세석평전에 쌓인 자갈만큼이나 전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래와 같은 <정걸뱅이>에 관한 전설이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유불선을 망라해서 걸출한 도인들을 배출한 민족의 영산이라고들 일컫는다.
지리산에는 여러 곳의 수도처가 전해 오는데 그 중에서 세석은
지리산 수도자들의 이상향이요, 그 들이 청학동이라 믿고 많은 수도자들이 보금자리를 틀었던 곳이다.

청학동은 전설상의 장소임에도 모든 지리산 선도인 들이 꿈꾸는 곳이라 한다.

 

조선조 말엽 <정걸방>이라는 異人이 홀연 지리산에 나타났다.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거지행세를 하여
누가 이름을 물으면 姓은 鄭이고 이름은 거랭이(擧止)라고 자처했고
밥을 빌어먹으며 지리산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세석의 음양수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지리산에는 수도하러 입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정걸방>을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정걸방>을 찾아가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리하여 <정걸방>한테 제자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여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지리산 사람들은 <정걸방>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거랭이도인>이라고 불렀다.

<정걸방>은 꼭 필요한 때 가끔 한번씩 異蹟을 행사했다.
제자들을 데리고 마을에 갔다가 단숨에 음양수까지 올라오기도 했고
소나기가 퍼붓는데 제자들로 하여금 비 한 방울 안 맞게도 만들었다.
제자들은 이런 이적들을 목격하고 더욱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정걸방>이 대단한 異人이라는 소문이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널리 퍼져나갔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정걸방>이 혹시 救世聖人으로 예언서에 등장하는
<정도령>이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일제하의 민중들의 삶은 정신적 방황과 일제의 침탈에 거의 무기력해져 있었고,
특히 난세를 피해 지리산을 이상향이라고 믿고 찾아든 사람들에게는 道力을 지닌
<정걸방>이 救世聖人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정걸방>의 도력과 그의 제자들의 일거일수에 촉각을 곤두세운 곳은 구례경찰서 이었다고 한다.
행려 지리산에서 무슨 민중봉기 음모라도 꾸미는가 해서
순사들이 총을 들고 음양수까지 와서 <정걸방>을 잡아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순사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죄로 <정걸방>을 잡으러 오기 전날이다.

<정걸방>은 제자들에게

“내일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다. 왜인들이 나를 잡으러 올 터인데 그들을 따라가면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부디 수련에 힘써 새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 너희들과의 인연은 끝났다.
너희들은 나를 보지 못하고 너희 제자들은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다음날 일본 순사들에게 잡혀 갔다고 한다.

그런데 왜경들과 경찰서장은 대단히 기대를 하고 <정거랭이> 도인을 잡아와 취조를 했는데
도인이 아닌 영락없는 미친 노인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행색도 남루하고 말도 횡설수설하여 도무지 정상인이 라고 볼 수가 없었으며
너무도 여러 가지 황당한 행동을 해서 진즉에 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서 앞마당까지 나온 <정거랭이>도인이
갑자기 왜경들이 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안개처럼 흐려지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정걸방>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 이후 제자들이 선생을 기리면서 선생이 다시올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또 그날이 오면 인간 세상이 仙界와 같은 이상향으로 변하리라 굳게 믿고 있다.

_이상은 국선도 홈의 [선인들의 수련기]d에서 발췌하여 각색 편집하였음_

 

이렇듯 세석고원은 청학연못이 말해주듯이
예로부터 이상향 혹은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 선경지로 지목되어 왔으며
동시에 그 곳에서 난세를 구원할 鄭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지리산 구도자들은
가졌던 것이다.

鄭인에 대한 민초들의 염원이 담긴 이상의 설화는 허구가 많이 덧붙여져 있지만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닌 불과 100 여 년 전의 지리산 구전이기에<정걸방>선생의 존재는 사실인 듯 하다.

그렇다면 세석 어디쯤에
풍문으로 들려주는 그의 존재를 증명해줄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을까?

넓은 세석평원을 아우르며 수호하듯 굽어보는 촛대봉에 올라서면
암봉들 중의 한 바위 면에 다음과 같은 희미한 각자가 있다.

 

- 퍼온글 -

 

 

꽁초봉 에서 연하봉, 일출봉 제석봉, 상봉 조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