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상봉, 천왕동릉, 암법주굴, 광덕사골, 광덕사터, 지리품속으로...ㅎㅎㅎ

꺼비♡꺼비 2021. 12. 12. 12:38

# 언제: 2021년 12월 11일 토요일

# 산행지: 상봉, 천왕동릉, 암법주굴, 광덕사골, 광덕사터, 지리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0.00Km   05시간30분

# 산행루트: 순두류 - 법계사 - 상봉 - 천왕동릉 - 암법주굴 - 광덕사골 - 광덕사터 - 기도터 - 순두류

 

#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서 풍장+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우리 죽을 때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며...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 산행지도

 

# 산행사진

법계사 일주문

 

법계사,法界寺

해발 1,450m에 위치한 지리산 법계사는 로터리 산장보다 약 115mm높은곳에 위치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높은 해발 1450m에 자리잡은 지리산 법계사가 최근 문화관광부에 의해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경남 산청군은 최근 법계사가 율곡사, 심적정사, 정취암, 대원사, 지곡사, 심적사, 내원사 등에 이어 산청군 내 8번째 전통사찰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태백산 망경사보다 20mm낮지만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높이 있는 절이라 하며 적멸보궁중에서는 최고 높은곳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에 속하지는 않지만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절이라 법당에는 불상이 없고 보물 제 473호인 삼층석탑을 향해 보고 있습니다.

 

산신각 뒤편 능선에는 사자바위와 연꽃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나 함부로 들어 갈수가 없는 곳이라 합니다.

 

(법계사는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에 패배한 왜군에 의해 불탔고, 1405(태종 5)년에 정심선사가 중창했으나,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다시 소실되어 방치되는 등 여러 차례 소실됐다가 지난 1981년에 다시 중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는 예부터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법계사에는 거대한 자연암석을 기단 삼은 2.5m 높이의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있다.

 

공양간 옆 한켠에 커다란 쇠말둑이 전시 되어 있는데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조선의 정기를 꺽기 위해 지리산

옥녀봉에 박은것을 2005년 음력5월1일 과 2006년 10월3일 제거한 것이라 합니다.

본래 2개가 전시 되었다는데 제가 본 것은 하나였습니다.

 

1961년의 법계사

 

 

왜구들이 혈을 끊기 위해 박았다는 철 심

 

 

삼층석탑

해발 1400m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화재로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을 지으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당 왼쪽에 위치한 이 탑은 바위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넓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에는 포탄모양의 돌이 얹혀있는데 나중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바위를 기단(基壇)으로 이용한 탑은 신라 이후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아래 기단부를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양식이 간략화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인 신라석탑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문창대 조망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알려져있는 진짜 (구)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때 법계사에 자주왕래하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설치해두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 , 최치원이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따서 문창대(文昌臺)로 개칭 하였다고 합니다.
 
지리산 문창대를 세간에 처음 알린 사람은 조선중기 영남 사림의 중심 인물이었던 진주선비 부사 성여신(莩査 成汝信)입니다.

 

그는 1617년 중산리 법계사 코스로 천왕봉을 등정한후 칠언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유두루산시(流頭流山詩)를 통하여 법계사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문창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중략)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
 
바위에 고운의 필적이 새겨 있다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길이 없네.(하략)”
 
이렇게 성여신에 의해 문창대가 알려지면서 그이후 칼바위-법계사 코스로 지리산을 등반하고 남긴 여러 선비들의 기록에 문창대가 등장하면서 법계사주변의 명소로 자리 잡혀져 왔던 것입니다.
 
(구)문창대는 1489년 김일손의“속두류록”,1896 강병주의 “ 頭流行記“등에 자세히 언급되고있으며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 오르는 길 내내 뒤돌아 보면 세존봉의 우측에 보이는 바위로서 형상또한 특이하고 뚜렷하여 예사로운 바위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가짜(신)신문창대가 지상에 등장하기 전까지 당연한 문창대로 알려졌으며, 지상의 소식에 민감하지 않은 지리산 자락 주민들에게는 현재도 유일한 문창대로 알려진 구문창대는 법계사 남쪽 500M 지점에 위치한 세존봉아래에 있으며, 법계사를 가장 극명하게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입니다. 절집의 가람 배치는 물론 자연석 바위에 안치된 유명한 3층 석탑 까지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지리산에서 명소로 이름난 석대들 중 최고의 높이를 지닌 곳으로 약30여M 의 거대한 바위가 우뚝 서있습니다.
 
겨우 사람하나 지나갈 정도의 석문형태로 이루어진 대의 하단부분을 지나 올라서면 사람 수십명이 앉을수있는 반석지대가 나옵니다. 중대라 일 컷는 반석지대에는 석천이라고 부르는 물이 고여 있는 장정 무릎 높이의 돌구덩이 2곳이 있으며,주변에는 5~6개의 작은 구덩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덩이는 오랜 세월동안 풍우로 인해서 자연적으로 생긴 일종의 바위의 혈(穴)인것 같은데, 구전에 의하면 이 우물은 7년 대한(大旱)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령스런 샘물이라 하며,만일 이 샘물을 퍼서 마르게하면 3일내에 소나기가 내려 석천의 물이 채워 채워진다는 설이 있어서 가뭄이 계속되면 이곳에 올라 석천의 물을 퍼 없애고 기우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전합니다.
 
상대라고 부르는 문창대의 꼭대기 부분은 하늘을 향해 곧추선 두 개의 바위가 서로 이마를 맛 대고 서서 반석지대의 광배(光背)와도 같은 형상으로 자연석이라 믿기 어려우리 만큼절묘합니다.판형의 우측 바위에는 근세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굵은 각자가 새겨저있습니다.각자는 법계사 주변은 물론 절집의 경내에까지 어지럽게 남겨놓은 박정민(朴正民) 각자로서 문창대의 이름을 빌려 [文昌聖祖]운운 했으나 뜻은 알수가 없습니다.
 
가짜 (신)신문창대는 법주사일주문을 지나서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곧 나타나는 나무게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비킨 곳에 위치해 있는 바위 지대입니다.즉 천왕봉에서 내려올때 법주사 나무계단이 시작되기 직전 우측으로 비킨곳에 서있는 바위지대를 말합니다.
 
가짜 (신)신문창대의 생긴 형상은 통상적으로 알고있는 石臺의 조건에 부합하는 모습이 아니고 그냥 지리산 산길 아무데서나 흔하게 만날수있는 두루뭉실하게 생긴 바위덩어리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바위의 남쪽 상단에 고은 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가 새겨있으며, 글씨는 수려하지 않고 조잡하며 각자를 새긴 연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 각자가 이곳을 문창대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약 30 여년전 1977년 로타리산장 공사중에 발견 된후 이곳을 문창대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사자바위

 

 

개선문

 

 

무등산, 노고단, 반야봉, 지리주능, 촛대봉, 연하봉, 장터목, 제석봉, 조망

 

 

중산리 정등로 오르며, 상봉 조망

 

 

합천 황매산, 천왕동릉, 웅석봉, 달뜨기능선, 황금능선, 조망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시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저멀리 조망되는 광양 백운산

 

 

상봉에서

 

 

함께한 두발로(홍운)선배님 지리 700회 산행기념

 

 

지리 멋진 풍광

 

 

지리산

김지하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그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천주,天柱

천왕봉(天王峰)의 천왕은 제정일치시대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군장(君長)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듯...천왕봉은 군장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스러운 곳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진 이유이다.

 

 

일월대,日月臺

옛날엔 천왕봉 정상을 운치있게 (日月臺)라고 헸다.

일월대(日月臺)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수있다는 곳이다. 행서체이 글씨로 일월대의 각자를 새긴 정태현은(1858-1919)은 일두 정여창의 후손이며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함양선비이고 그가 남긴 죽언집을 보면 각자를 새긴지가 최소 222년 쯤으로 보인다고 전해진다

 

 

지리산(智異山)

지은이= 김돈중(金敦中)

제(오를 제)擧直上最高峰(제거직상최고봉) 산을 올라 곧바로 최상봉에 이르러,

回首塵寰一片紅(회수진환일편홍) 풍진 세상을 돌아보니 한 조각 구름일세.

徙倚烟霞得幽趣(사의연하득유취) 연하 속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 얻으니,

風流不愧晉羊公(풍류불괴진양공) 풍류는 진나라의 양공에게 부끄러울 것 없네.

김돈중(金敦中, ?-1170) : 고려 의종 때 명신.

 

지리산에서 노닐다(遊智異山)

지은이=이인로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두류산 저 멀리에 저녁구름 나직한데,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 회계산과 비슷하다.

策杖欲尋靑鶴洞(책장욕심청학동) 지팡이 들고 길을 나서 청학동 찾으려는데,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건너편 숲 속에서 흰원숭이 울음만 들려오네.

 

樓臺縹渺三山遠(누대표묘삼산원) 누대는 아늑하고 삼신산은 멀리 보이고,

苔蘇微茫四字題(태소미망사자제) 이끼 낀 빗돌속에 네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네.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도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落花流水使人迷(낙화유수사인미) 꽃잎 뜬 시냇물이 길을 잃게 하는구나.

 

 

천주암터에서 700회 기념사진

 

 

천주암터

 

 

진주 월야산, 사천 와룡산, 조망

멋진 풍광이다.

 

 

천왕동릉 길 걷다 지리에서 볼수 있는 멋진풍광

 

 

중봉 조망

 

 

천주암터 암벽

 

 

천왕동릉 하산 길에 진주 정대장

 

 

써리봉 조망

 

 

암법주굴(岩法主窟) - 큰 바위가 성곽처럼 둘러싼 천연요새

이성계와 암법주굴(岩法主窟) - 암법주굴은 조선 건국 전, 이성계(1335~1408)가 머물렀던 지리산 천왕봉 자락의 천연 기도처다. 이성계는 여기서 마음을 닦고 기도하며 무엇을 얻었을까. 역성혁명, 조선건국의 큰 그림을 그렸을까.

 

 

광덕사터-광덕사지

"광덕사는 또 하나의 잃어버린 암자이다. 어느 시대에 세워져 어느 때 소실 되었는지 문헌으로는 찾을 수 없음에도.,중산리 주민들은 광덕사를 잘 알고있다 한다. "절터가 기가 쎄서 주지가 바뀌면 반드시 불이났다는 전설까지 전한다. "여럿의 큰 바위가 산재하여 있어 절묘하게 형성된.,석관수.,옹달샘이 있다. 주변의 형세를 보면 큰 사찰은 아니더라도 암자 규모의 작은 절집이 있을 조건은 충분하다."

 

 

광덕사터-광덕사지(석간수)

 

 

광덕사터-광덕사지 아래 불과 몇백미터 있는 기도터

 

 

광덕사골, 천왕샘골, 합수부

 

 

광덕사골 분위기

 

 

 

금줄넘어 정등로 순두류 방향으로 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