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대(永郞臺)
# 언제: 2022년 01월 01일 토요일 임인년(壬寅年)
# 산행지: 영랑대(永郞臺), 쉬엄, 쉬엄, 지리 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2.12Km 06시간 56분
# 산행루트: 윗새재 - 철모삼거리 - 청이당터 - 청이당옛길 - 두류봉 - 동부능선길 - 영랑대
영랑대(永郞臺)
영랑이란 사람은 신라 때 화랑의 우두머리였는데,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와서 산수간을 노닐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영랑고개란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윗새재 주차장
철모삼거리
어느 누구 걷지 않은 길
길 산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 내 가슴도 산의 품같이 넓어진다.
청이당 골 빙폭으로 얼어있다.
이 지점은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청이당터(쑥밭재 아래 평평한 터)라고 하는 곳과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청이당 옛길 마암 가는 방향 거리(약100m)가 있다. 내 자신도 동안 이 지점이 청이당 터 자리로 알고 있었다.
天禮碭 추정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청이당 터 - 1
淸伊堂(청이당)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181006)
청이당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에 청이당(淸伊堂)과 청이당(淸夷堂)으로,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에는 천녀당(天女堂)으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곳을 지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이당 터 - 2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抵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위에서) 차지하고 않자서 잠깐 쉬었다. ☞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계석
긴 시간을 지킨 자연 의 힘
마암 갈림길 조망터
동부능선길 내린 눈
능선길 묘 자리에도 눈 내려 있네
영랑대 오르기전 조망터 에서
영랑대
영랑대에서 바라본 하봉·중봉·상봉. 신라시대 화랑들이 영랑대에 올라 지리산 풍경을 조망하며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진다.
나를 먼저 사랑하라
무엇을 하던
첫번째 의미를 나에게 두라.
나를 위해 선물을 하고
나를 위해 웃고
나를 위해 울고
나를 위해 노래 하라
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아낌 없는 지지를 보내라
가장 먼저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돌아보게 되고
좋은일도 나쁜일도 나눌수 있다.
-'괜찮은 위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