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연기암
연기암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소재 화엄사 내에 있다. 화엄사 원찰로서 백제 성왕 때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었던 것을 1989년 중창했다.
화엄사,華嚴寺
사적 제505호.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 인도승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시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라는 승려가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구례속지 求禮續誌〉에 의하면 543년 연기조사가 세운 절로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머물게 했으며 642년(선덕여왕 11)에 자장율사가 건물을 중수했다고 하는데, 신라승이 백제지역에 있는 절을 중건했다는 사실은 의심스럽다. 한편 〈봉성지 鳳城誌〉에는 670년(문무왕 10) 의상법사가 왕명을 받아 3층의 장륙전을 건립하고 사방 벽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으로 장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원본사십화엄경 貞元本四十華嚴經〉은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장륙전이 건립될 당시에 석경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화엄사의 창건이나 창건주,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발문에 의하면 754년(경덕왕 13) 황룡사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절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졌으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서 2자를 따온 것이다. 그뒤 신라말 이곳에서 출가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 고려 광종대에는 홍경선사가 당우와 암자를 중축했으며, 문종대에는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사고 2채를 일주문 밖에 건립했다. 인종대에는 정인왕사가 중수했으며, 충숙왕대에는 조형왕사가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1424년(세종 6)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때 장륙전의 벽을 장식했던 석경도 파손되어 지금은 각황전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1630년(인조 8) 벽암대사가 중건하기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완공되었다. 1702년(숙종 28) 벽암선사의 제자였던 성능이 장륙전을 중건하고 다음해에 삼존불과 보살상 4구를 완성하고는 경찬대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숙종이 각황전이라 사액하고 화엄사를 선교양종대가람이라 했다.
가람배치는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황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서로 직각을 이루고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동서5층석탑이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 절은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화엄사상을 펼쳐나간 곳이기도 하다. 현재 경내에는 17세기 이후의 건물만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각황전(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대웅전(보물 제299호)·영산전·나한전·원통전·명부전·적조당·노전으로 사용되는 삼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4사자3층석탑(국보 제35호), 동5층석탑(보물 제132호), 서5층석탑(보물 제133호), 석경,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노주 등이 있다. 이밖에도 선조가 벽암선사에게 하사한 교지 1매, 예조사격 1매, 예조홍각대사첩 1매, 겸팔도총섭첩 1매, 예조대선사각성첩 1매, 인조하사 어석 1건 및 가사 1령, 어작 1대, 선조 어필각본 1권, 선조하사 서산대사 발우 1좌 및 향합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 1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