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대(文昌臺)
# 언제: 2022년 04월 30일 토요일
# 산행지: 문창대골, 문창대(文昌臺), 세존봉능선, 순두류옛길, 지리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1.3Km 06시간58분
# 산행루트: 중산리 - 칼바위 - 문창대골 - 문창대 - 세존봉능선 - 순두류옛길 - 중산리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중산리
남명조식 선생 유명한 두류산가頭流山歌이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둘레꾼 혹은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될 것이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좁게는 시천천과 덕천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중심에 놓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에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한편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參考書的 풀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할 수는 있겠다.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 기념비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은 1,916년 진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일본에서 수학하셨고 지리산이 좋아 가족(부인과 세 딸)과 생이별을 마다않고 산으로 들어와 잔돌평전(세석고원)에 터를 잡아 30년 동안 하늘을 지붕 삼아(아호 우천의 뜻) 생활하면서 칠선계곡, 한신계곡을 비롯한 다양한 코스의 등반로 개척, 조난자 구조, 등산로 정비 등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지리산 사랑을 실천하시다가 갖은 어려움도 겪으셨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6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칠선계곡 어디 동굴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일 뿐입니다. 평소에 칠선계곡에서 영면하시겠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그야말로 지리산의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칼바위
함께 한 산친구 님
칼바위를 지나 출렁다리가 있는 삼거리, 우측에 있는 골로 들어선다.
문창대골은 세존봉능선 남사면, 문창대(세존봉) 우측사면에 형성된 작은 골로, 중간에 좌우골 분기된다.
골의 분위기는 아주 자연스럽다. 모난 돌들이 온통 뒤죽박죽, 분위기는 원시 그 자체다. 수량이 많지 않은 문창대골, 물의 힘이 너무 미약해 돌을 제대로 다듬을 수가 없었다.
볼거리 있는 좌우골 합수부 아레 협곡
좌골 초입 움막터
좌골 초입에는 무너진 돌탑과 움막 흔적
좌골 분위기
움막터를 지나 조금더 오르니 골을 통째로 가로막는 암벽이 나타난다.
좌골 상단에서 바라본 거림능선, 남부능선
좌골 상부 분위기
지리산 금낭화
지리산 백작약
문창대, 너른 바위암반이 있고 그 아래 괴석이 서로 맞대어 서 있다. 조망이 기막힌 곳이다. 상봉에서 법계사까지 천왕봉 남사면이 오롯이 조망된다. 건너편으로 천왕남릉과 곡점능선, 남부능선이 바라다보인다.
문창대(文昌臺), 신라의 최치원과 관련있는 곳이다. 최치원의 시호인 문창후(文昌侯)를 따서 문창대라 부르고 있는데 옛적에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도 불리었다. 시궁대는 최치원이 이곳에 올라 향적대를 향해 활을 쏘곤해서 그렇게 부르고 孤雲은 최치원의 호이다.
함양 태수로 있을 당시 최치원은 이곳 지리산을 자주 찾았던 모양이다.
문창대 석문, 각자를 찾아 오르는 암벽 틈
문창대 석문
문창대 각자 박정민
문창대 석천
문창대,文窓臺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잘 알려져 있는 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법계사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이곳을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하였다가, 최치원이 사후에 받은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따서 문창대로 개칭을 하였다고 전한다.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문창대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기록은 유람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문창대'라는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부사 성여신(1546~1632)이다. 그는 일흔이 넘은 1617년에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겼는데,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라며 문창대를 언급했다.
이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조선 선비들이 문창대를 유람록에 기록하면서 문창대는 이 일대의 명소가 되었다. 성여신보다 앞선 시기인 1489년 김일손도 문창대를 다녀갔다. 그러나 김일손은 <두류기행록>에서 세존암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이 지금의 세존봉에 있는 문창대임을 알 수 있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巘崿)를 만났는데 세존암이라고 했다.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십 리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기뻐서 따라온 사람들에게 힘내어 다시 올라가자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길이 차츰 평탄해졌다. 5리쯤 더 가니 법계사에 이르렀는데,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 나뭇잎은 이제 막 파릇파릇 자라나고 산꽃은 울긋불긋 한창 피었으니, 때는 늦은 봄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문창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유람록으로는 1902년 2월부터 3월까지 40일 동안 지리산 일대를 유람한 김회석(1856~1934)의 <지리산유상록>과 송병순(1839~1912)의 <유방장록>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유람록에서 문창대의 험함과 돌우물의 기이함, 최치원의 활쏘기 행적 등을 묘사했다. 그중 김회석의 <지리산유상록>을 보자.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文昌臺)에 올랐다. 바위 사이에 구멍이 하나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했다. 부여잡고 올라가니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나왔다. 바위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가득했고 깊이는 한 자 정도 됐다. 이 물을 감로수라고 불렀다.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으며, 긴 장마에도 넘친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둘러앉아 각자 물을 떠마셨다.
우리를 따라온 승려가 '만약 이 물을 다 떠내면 하늘이 바로 비를 보내니 다 뜨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승려가 그렇게 말하여 한 표주박의 물만 남기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도 빈틈이 없는 구덩이에 절로 물이 스며들어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는 넘치거나 줄지 않아 물을 뜨지 않았을 때와 같아졌다.
구경하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두세 번 이와 같이 해도 구덩이의 물은 이전과 같았다. 괴이하여 승려에게 물어보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이 우물은 최치원 선생이 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위 끝에는 발을 디딜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은 최 선생이 화살을 쏘던 곳입니다. 봉우리 아래에 과녁을 걸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도 화살을 줍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허황되었다. 각자 시 한 수를 짓고 벽계암(법계사)으로 내려왔다.
김회석의 글처럼 예전에는 문창대를 최치원이 활을 쏘았다고 해서 '시궁대' 또는 그의 호를 따서 '고운대'로 불렀다가 나중에 그의 시호인 문창후를 따서 문창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문창대 바위 위의 돌우물에는 '감로수' 외에도 '세심천', '천년석천' 등의 다양한 이름과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 있는 이곳에 부정한 자가 오르면 비바람이 몰아쳐 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 아랫마을 주민들이 날이 가물면 이 물을 퍼 나르는데 그러면 곧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서 이 돌우물은 끝내 마르지 않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문창대는 현재 법계사 남쪽 500미터쯤에 있는 세존봉으로 불리는 1368봉이다. 한때 문창대는 법계사 서북쪽 30m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1970년대 진주산악회 학술조사반의 답사에서 <진양지>의 '문에서 서쪽으로 수십 보쯤에 문창대가 있으니 최 고운이 놀던 곳이요.'라는 기록과 '고운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 杖屨之所,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아두었던 곳)'라고 새겨진 바위 각자 등을 근거로 그렇게 확정했다.
그러나 <진양지>가 증보 과정에서 실증 없이 보강된 점, 바위 각자 또한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는 점, 옛 문헌들에서 문창대는 법계사 가기 전의 산봉우리인 지금의 세존봉에 있던 바위로 기록되고 있는 점 등을 살펴보면 지금의 세존봉에 문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병순도 <유방장록>에서 벽계암(법계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 문창대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저 앞의 봉우리 정상이 바로 문창대입니다. 그런데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어 법계사 앞 봉우리 정상이 문장대임을 말하고 있다.
문창대 거대 암석
중산리 가까이 조망 된다
문창대에서 바라본 중산리 방향 조망, 구곡산, 주산이 보인다.
문창대
세존봉능선길 가는 길에
세존봉 능선, 법계사앞 헬기장에서 시작하여 중산리까지 어어지는 능선이다. 이길의 날머리는 중산리 7백미터 전방, 그곳에서 주등로에 합류된다. 동쪽방향으로 둥글게 우회하는 세존봉 능선은 생각보다 길다. 두시간 가량 타고 내려야 끝이난다. 유순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거칠은 길을 만나기도하고 산죽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대체로 양호한 등로이고 곳곳에 조망바위가 있어 심심치 않다. 상봉은 조망대마다 바라보여 상봉조망능선이라 불러도 될 정도이다.
세존봉능선 조망터에서 써리봉 조망
세존봉능선 조망터에서 바라본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세존봉능선 조망터에서 바라본 세존봉, 상봉
세존봉 능선 길
상봉, 중봉, 조망
세존봉능선 길 위명한 산죽
순두류 옛길 가는 방향 길에 있는 옛 지리 이정표
신선너덜 가는 방향 길
신선너덜
지리 산신제단
순두류 옛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