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형제봉(성제봉)

꺼비♡꺼비 2022. 12. 12. 15:02

# 언제: 2022년 12월 10일 토요일

# 산행지: 남부능선 끝 자락 성제봉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4.00km  06시간 37분

# 산행루트: 회남재 - 송신탑 - 시루봉 - 두발대 - 거사봉 - 남부능선 갈림길 - 전망대 - 원강재 -

                    활공장 - 성제봉(형제봉) - 철죽제단 - 구름다리 - 석문 - 신선봉 - 고소산성 - 한산사

 

경남 하동군 성제봉,형제봉(兄弟峯·1112m)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뻗어 내린 남부 능선의 끝자락이 섬진강에 들기 전에 헌걸찬 산세로 빚은 명산이다.

 

성제봉(형제봉)

하동 성제봉(형제봉)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악양면 매계리에 있는 봉우리이다 (고도 : 1115m)  지역 주민들은 성제봉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 삼신봉에서 남쪽으로 관음봉을 거쳐 형제봉에 이르며 섬진강까지 이어진다.ㅍ형제봉은 악양면 매계리와 화개면 부춘리의 경계를 이룬다. 

 

형제봉에서 고소산성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고소성(故蘇城, 사적 제151호)이 있다. 『하동읍지』에, "고소성은 신라시대에 축성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시대 하동의 관찬지리지나 군현지도에는 형제봉에 대한 표기가 없다. 형제봉 동사면의 기슭에 입지한 매계마을은 산수가 빼어나서 청학동으로 지목된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의하면, 악양현 북쪽의 현 매계리 청학사 골짜기가 청학동으로 비정된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에서, "매계는 옛 이름이 청학동으로, 청학동은 지금에 매계라고 일컫는데 동쪽으로 진주와의 거리가 147리이다."라고 상세한 지리적 위치를 밝혔다.

 

형제봉은 우뚝 솟은 봉우리 두 개가 우애 깊은 형제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전해진다.

 

# 산행영상

 

악양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악양면의 유래

악양면은 하동군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일찍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청동기시대 (BC 5,000년경)엔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국가의 형태로까지 발달한 단계에 놓여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진한시대 말에 변한이 이땅을 지배할 때 12국의 하나인 낙노국이 악양에서 도읍을 했을 때가 BC 108년으로 이미 국가적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가야 시대인 AD 200년경에 축성되었다는 토성이 현 악양면 정서리 솔봉 밑에 있다.
백제와 대가야는 AD 250년 부터 AD 529년까지 이 땅을 지배하다 물러 났다가 다시 지배하기를 6차례에 이르렀지만 AD 529년부터 AD 662년까지 악양을 지배하다가 AD 662년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가 한다사군이라하여 하동을 지배했을 때(675년부터 757년까지) 악양은 757년 「소다사현」이 되었다.


악양(岳陽)이란 말은 중국의 악양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는 것과 당나라장군 소정방의 고향이 중국의 악양이기 때문에 악양이란 지명이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악양은 사실상 순수한 우리말이란 것을 풀이하면 알 수 있다. 「岳」은 우리말에 「아가」또는 「岳兒」로 쓴다. 그렇다면 「岳」은 「작다」라는 뜻이기에 「소다사」의 「소」에 해당되고 「陽」은 「볕」을 뜻하므로 「따뜻하다,다사롭다」라는 뜻과 같다.


결국 「岳」은 「소」고 「陽」은 「다사롭다」에서 접미사「롭다」를 뺀 「다사」의 뜻이므로 「소다사」를 (향찰식 표기를) 한자로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다사현은 한다사군에 속했으며 AD 920년엔 「악양현」이 되었고 앞서 경덕왕 때인 AD 757년엔 한다사군이 「하동군」으로 개칭될 때 「소다사성」도 「악양성」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엔 진주목 소속이 되어서 1702년까지 진주목에 속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악양현」을 「악양리」로 고치고 화개리를 악양리에 합쳤다가 1600년에 다시 나누어졌다. 1703년 리「里」가 면「面」으로 될 때 악양동면과 악양서면을 두었고, 1825년 악양동면과 악양서면을 합하여 다시 악양면으로 부르게 되었다. 1914년 덕양면(현 하동읍)의 개치가 악양면에 편입되고, 화개면의 외둔.상평.하평.대촌.봉대.하덕.입석이 편입되었다.

資料 : '마을의 유래 및 사적전설'(하동문화원 발행)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근처에 있는 부부송!

지리산에서 굽이쳐 내린 산줄기가 이곳에서는 산사이에 약 90만평의 평지를 이룬다.

이 평지의 한가운데 나란히 서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를 금슬좋은 부부로 생각하여 붙인 이름이 하동 평사리 '부부송'이다.

 

산행 들머리 회남재

 

회남재(回南峙)

회남재를 거론할 때 맨 먼저 나오는 얘기가 남명 조식의 일화다. 지리산 자락의 살만한 곳을 찾아온 남명이 이 고개에 올랐다가 악양 들판을 내려다보니 골이 협소하고 물이 섬진강으로 곧장 빠지므로 길지가 아니라 하여 돌아선 데서 회남재(回南峙)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동군청이 발간한 마을이름의 유래에 관한 책자를 들춰보면 남명이 고개를 오르면서 얼마나 힘들었든지 걸음을 한번 떼놓을 때마다 세번식 숨을 쉬었다 하여 이 고개를 '삼아령(三阿嶺)' 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어쨌거나 회남재가 남명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그러면 남명은 이 언저리의 길지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길지의 대명사로 통하는 청학동이 바로 고개 넘어 묵계리 골짜기에 있는 데다 등촌리의 서쪽 골짜기 또한 청학이골로 불리는 곳인데 말이다. 그 당시 지리산을 무려 열여섯 번이나 올랐다는 남명은 청학동 지형과 비슷하다는 불일폭포와 세석평젼 역시 보지 못했던 것일까. 결국 고개를 내려간 선생이 자리를 잡고 여생을 보낸 곳이 시천면 덕산이었으니.
 
아쉽게도 회남재와 남명 선생의 연광성은 이것이 전부였다. 재 아래 덕기마을에 사는 유복례씨에 따르면 회남재는 오히려 묵계사람들이 화개장을 보기 위해 주로 넘어 다니던 길이다. 아들이 등촌리 이장인 유씨는 묵계 사람들이 쌀을 지고 넘어와 하동장에서 생선 등과 바꿨다는 얘기며, 사내애를 업고 하동장을 다니던 전씨 할머니는 워낙 심장이 강해 호랑이가 따라 오는데도 끄떡하지 않고 고개를 넘어가더라는 둥, 또 재 아래에는 옛 주막터가 지금도 있다는 등 옛 얘기를 마치 엊그제 일처럼 들려준다.
 
그러나 이 골짜기에서 평생을 살아온 유씨에게 하동장보다도 강심장의 전씨 댁보다도 훨씬 심각하게 각인된 기억은 6.25전쟁인 듯 싶었다. 뭐라 묻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빨치산 얘기는 아예 일손까지 멈추고 한동안 봇물 터지듯 쉼 없이 이어졌으니까.
 
"빨갱이들이 내려와 양식 좀 주면 (집을)태우지 않겠다고 해서 쌀 두 가마를 소잔등에 걸쳐 보냈는데 고개를 올라가다가 가마니가 풀려 쌀이 모두 빠져나갔데요. 쌀이 내리 쏟아지는 틈을 타 소를 몰고 가던 시아버지는 중기마을을 돌아 정신없이 도망을 칠 수 있었는데 결국 면의원이 나온 집이라고 다섯 채나 되던 집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지요. 그래도 다행히 목숨만은 건지고 땅이 있으니까 안 죽고 지금껏 살아왔지요."
 
유씨의 기억이 알려주듯 회남재는 지리산에 숨어살던 빨치산들에게는 식량이나 물자를 구하기 위해 이용하던주요 통로였으니 주민들에게는 차마 쳐다보기 싫은 끔찍하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는 곳이었을 법하다.
 
곡식 농사가 잘 되고 기후가 따뜻해 살기 좋은 이 고개 언저리는 실제로 빨치산에게는 지리산으로 드는 기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또 빨치산이 드나드는 곳인 만큼 자연 토벌대가 묵계와 악양을 넘너들며 수색 작전을 펴거나 매복 근무를 자주 벌였으니 6.25때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으리라.

 

송신탑

 

낙남 삼신지맥 

낙남정맥 삼신봉(1290.7m)에서 낙남정맥은 동쪽 방향인 외삼신봉으로 가고 삼신지맥은 서남방향으로 분기하여 화개면과 청암면의 경계를 따라 서남진한다.

 

내삼신봉,관음봉,거사봉,시루봉,깃대봉,칠성봉,구재봉,분지봉을 만나고 19번 국도를 지나 하동읍 목도리에서 횡천강이 섬진강을 만나는 곳에서 끝이 나는 도상거리 약 35.4km의 산줄기이다.

 

산죽 길 걷다보면 죽을 맛...ㅎㅎㅎ

 

시루봉

 

2007년 지리산 도사 취운선사가 이 암봉을 “두발대(956m)”로 명명을 해 둔 곳이다.

 

두발대 암봉을 바라보며

 

두발대 정상에서 멋진 풍광을 즐긴다.

 

삼신지맥에 있는 바위

 

어디가 진짜 시루봉 일까

 

거사봉 해발 1130m

 

산죽 길...ㅎㅎㅎ

 

갈림길 - 삼신지맥

 

조망바위에서 풍광 즐기며

 

또 산죽 길 걷는다...ㅎㅎㅎ

 

활공장 까지 어여지는 산죽길...ㅎㅎㅎ

 

활공장에서 즐기는 풍광

 

이제 산죽 길 없는

정등로 길...ㅎㅎㅎ

 

성제봉(형제봉)즐기는 풍광

 

성제봉(형제봉) (1)정상

형제봉의 이름은 성제봉이다. 경상도에서는 형을 성이라고 부른다 . 정상 표지석에는 성인 성(聖)자에 임금 제 (帝)자를 쓴 성제봉으로 되어있다. 이름처럼 어진 임금 같은 산이다 . 풍요로운 고장 악양의 진산으로 언제나 덕을 내리는 산이라고 한다 .

 

하동군 악양면의 형제봉은 지리산 남부능선의 끝자락이 섬진강에 잠기기 전에 우뚝 솟은 봉우리다. 멀리 천왕봉에서 제석봉 촛대봉을 거쳐 비경의 남부능선을 따라 이어져 온 지리의 산세는 비옥한 대지를 빚어내는 형제봉∼신선봉을 끝으로 섬진강에 잠긴다.

 

성제봉(형제봉) (2)정상

 

악양, 구름다리, 신선봉, 섬진강, 풍광

 

구름다리 입구

 

구름다리

 

석문(바위협곡)

 

신선봉

 

통천문

 

하동 고소성(河東姑蘇城)

해발 300m 정도의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산복식(山腹式) 산성으로, 평면은 5각형에 가까운 편이다. 현재 성 안에서는 특별한 시설물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 산성의 내력은『하동군읍지(河東郡邑誌)』에 유일하게 전한다. 읍지의 내용, 산성의 위치와 규모로 보아, 신라나 백제가 군사적 목적에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둘레가 1.5㎞인데, 바닥 너비 6m, 윗 너비 2m, 높이 4∼5m 크기의 단면 사다리꼴로 가공한 돌이나 자연석을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동쪽·북쪽·서쪽의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지만, 섬진강을 굽어보는 서남쪽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돌더미만 남은 상태이다. 서남쪽 성벽은 지리산에서 서남향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섬진강에 의해 끊어진 곳으로, 강 건너편과 함께 험준한 비탈을 이루고 있다.

 

이 산성이 위치한 곳은 뒤쪽으로는 험준한 산을 등지고 앞쪽으로는 큰 강이 자리한 천혜의 요해지(要害地)로, 특히 남해에서 호남 지방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지형을 이용하여 웅장한 규모와 견고한 축성법을 갖추어 축조된 대표적인 산성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산사(寒山寺)

중국의 한산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하동 악양면 고소성 아래에 있는 한산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한산사가 위치한 악양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모래밭 안에 있는 호수를 동정호라 했으며, 하동의 고소성 또한 중국의 고소성과 같은 이름이다.

* 창건배경 및 역사
한산사 창건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으며 사찰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엄사(544년)와 창건연대가 비슷하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당시 화엄사 스님 한 분이 중국의 악양 고소성의 지명이 같은 하동에 한산사를 지었다고 전해지며, 이후에 빈대가 많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중국의 한산사가 위치한 곳은 절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시인 장계(張繼)가「풍교야박(楓橋夜泊)」의 시를 읊어 더욱 유명한데, 하동의 한산사 또한 그 절경이 중국의 한산사를 빼어 닮았을 뿐 아니라, 지역의 모습 또한 꼭 닮았다고 한다. 1960년경에 송상형 스님이 중창 불사를 하여 대웅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전각이 오늘이 이르고 있다.

『하동한산사탱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2000.01.31)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서 19세기 중엽의 것이다. 석가불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가섭존자.아난존자 등 18제자가 석가불을 에워싸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하단에 시립(侍立)한 모습으로 구성하였다. 본래 구례 화엄사 나한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며, 해운당 익찬이 증사(證師)로 감독하였고 여러 승려와 신도들의 참여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대웅전 신중단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탱화(神衆幀畵)도 화엄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19세기 무렵의 것이다. 가운데 위태천(韋駄天)을 중심으로 천룡(天龍), 팔부중(八部衆), 사천왕(四天王)등 불법의 수호신을 그린 것이다. 위태천은 무기 모양의 금강저(金剛杵)를 가슴에 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녹색을 주조색으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