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물방아골,파근사지(波根寺址)

꺼비♡꺼비 2023. 5. 28. 11:06

# 언제: 2023년 05월27일 토요일

# 산행지: 물방아골,파근사지(波根寺址),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4.37km   02시간09분

# 산행루트: 쌍교 - 물방아골 - 파근사지 - 내기마을

 

파근사지(波根寺址)

 

파근사(문화재청 자료)

 

波根寺의 창건과 폐사에 관련한 문헌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성여왕 때 ‘부흥사’라는 명칭으로 창건된 후 ‘파근사’로 개칭되었다는 설과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고, 폐사에 대해서는 빈대에 의해 폐사되었다는 설과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설,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파근사는 수련암, 연계암, 대흥사, 비선암, 호령사 등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파근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東國輿地勝覽』으로 지리산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의병장 조경남의 『亂中雜錄』의 기록으로 보아 파근사는 정유재란 때 의병활동지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承政院日記』에는 파근사의 목조 불상에서 땀이 나는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지리지인 『輿地圖書』와 『龍城誌』, 『南原邑誌』를 보면 파근사가 운영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宋煥箕의 『性潭先生集』와 李肯翊의 『燃藜室記述』에서도 파근사가 언급되고 있다. 조선후기 승려인 慥冠(조관)이 파근사에 머물렀고, 甘露寺, 實相寺, 波根寺에는 그의 승탑이 조성되었다고 하며, 승려 有一이 파근사에서 공부하는 제자에게 전하는 내용이 확인된다.

 

『日省錄』에는 남원부의 소속 사찰 중 하나로 파근사가 언급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간행된 《海東地圖》와 《廣輿圖》, 《地乘》에는 파근사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19세기 문헌인 『梵宇攷』에는 파근사의 과거사명이 ‘大興寺’라고 밝히고 있으며, 『大東地誌』, 『湖南邑誌』에도 파근사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암의 대웅보전 닫집에서 확인된 삼세불상의 발원문인 「龍株寺佛腹藏奉安文」과 「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파근사 승려 奉絃의 내용이있다.

 

이와 같은 문헌 등을 통해 파근사는 적어도 16~19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이고, 전라도에서 활동한 조각승 혜봉을 비롯한 조관과 유일 등의 많은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정유재란 때 의병활동의 거점지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퍼온글-

 

파근사 관련 고문헌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무의자 진각 혜심(1178∼1234)으로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법명은 혜심(慧諶)이고, 시호는 진각국사(眞覺國師)라고 알려진다. 전남 나주사람으로 1201년 진사에 급제, 태학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가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조계산 송광사 보조국사에 입산, 큰 바위에 앉아 밤낮으로 참선하면서 밤이되면 게송을 읊으니 그 소리가 십리까지 들렸고, 지리산 금대암에서는 대 위에서 좌선한 적에 눈이 내려 이마까지 묻히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리 흔들어도 대답이 없더니 마침내 깊은 뜻을 깨달았다. 1208년 보조국사가 법석을 물려주려 했으나 사양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가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 칙명으로 법석을 물려받아 개당(開堂), 납자(衲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1234년 월등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순천 송광사에 그의 비가 있다. 저서로는 『선문염송(禪門拈頌)(전30권)』 이 있다.

 

파근사 현판에 있는 시를 차운해서[次波根寺板上韻]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趙慶男, 1570년 ~ 1641년)이 선조 15년인 1582년 12월부터 인조 15년인 1637년까지 약 57년간 국내외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기록물. 속잡록까지 합쳐 총 8권 4책.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유년 (1597년) 9월9일

양형과 같이 그대로 파근사(波根寺)에 있었다. 본부의 아전 정대인(鄭大仁)ㆍ배입(裴立) 등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올라와 말하기를, “근자에 왜적의 형세를 보면 결코 근절될 이치가 없습니다. 겨울이 깊어져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적의 수색이 그치지 아니하오면, 불쌍한 우리 남은 백성은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아무개는 강개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본래부터 아는 터이니 격문을 사방으로 띄워 모집한다면 얼마의 장정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곳에 웅거하여 적의 오는 길을 끊어버린다면 부모 처자를 걱정 없이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내 뜻과 꼭 같다. 그러나 적의 떼가 가득 차 있어 한 장의 격문도 통과하기 어려워서 민망함을 참고 이 곳에 머물러 있자니 다만 통분할 뿐이었는데, 그대가 이토록 꾀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았다.” 하고, 서로 날짜를 약속하여 장사를 모집하기로 하였으나, 또한 왜적의 형세가 갑절이나 치열하여져 사람과 물건이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계집(東溪集)

 

정온(鄭蘊, 1569년~164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ㆍ고고자(鼓鼓子). 저서로는 《덕변록(德辨錄)》, 《동계집(桐溪集)》 등이 있다.

 

파근사에서 탄영 상인과 헤어지다(波根寺別坦英上人)

 

杖錫來遊此          석장 짚고 이곳으로 놀러 오니

頭流萬壑春          두류산 골짝 온통 봄일세

風和禽語婉          바람은 온화하고 새소리는 어여쁜데

雨過水容新          비가 지난 뒤 물빛이 새롭다

吟病爲孤客          쓸쓸한 나그네는 병에 신음하고

談詩有上人          스님은 시 이야기를 꺼내네

明朝留偈別          내일 아침에 게송 짓고 떠날 곳은

嶺路是通津          영남의 통진 길일세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 담허재 김지백

 

「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는 『담허재집(澹虛齋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김지백(金之白)[1623~1671]은 1655년(효종 6) 10월8일부터 10월11일까지 나흘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남원부 동쪽 원천원(元川院)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바로 을미년(1655) 10월 8일 무오일이다.

(중략)

서국익에게 서대숙(徐大叔)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또한 서국익과 함께 왔으니, 우리의 행차가 더욱 외롭지 않았다. 이에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大興寺)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를 구경하고, 감로사(甘露寺)를 지나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佛堂)을 구경하였다.

 

다시 구불구불한 강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쌍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알게 되었다. 백번이나 굽이돌아 시내 건너 골짜기를 찾아 저물녘에 연곡사(燕谷寺)에 이르러 묵었다.

 

상월대사시집 (霜月大師詩集)

 

상월 새봉(霜月璽篈 1687∼1767)은 속성이 손(孫)씨이며, 전라도 순천(順天) 사람이다. 15세에 선암사(仙岩寺)의 극준(極峻)에게 출가하였고, 이듬해 세진 문신(洗塵文信)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8세에 설암(雪巖)에게 참학하고 그 법을 이었다. 1748년(영조 24)에 선교도총섭규정팔로치류사(禪敎都摠攝糾正八路緇流事), 2년 후에 주표충원장겸국일도대선사(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에 임명되었다.

 

파근사의 용추에서 봄에 읊다(波根龍湫春詠)

 

澗合無絃瑟    흘러드는 시냇물은 줄 없는 거문고요

山明不畫屏    밝은 산은 그리지 않은 병풍이라

有懷千古事    아득히 먼 천고의 일을 회고하면서

獨立小沙汀    홀로 작은 모래 물가에 섰노라

 

철언 사미에게 지어 주다(贈徹彥沙彌)

 

一別波根寺    파근사에서 한번 이별했는데

重尋動樂山    동락산으로 다시 찾아왔네

道心猶未熟    도의 마음 아직 익지 못하여

愁喜在其間    슬픔 기쁨이 그 사이에 있구나

 

『연담대사임하록』 蓮潭大師林下錄卷之三

 

양 수재 보구에게 주는 서문(贈梁秀才寶龜序)

 

금상 재위 2년(정조2년, 1777년) 겨울에 나는 용성龍城에 있는 파근사波根寺에 살고 있었다. 그때 양 수재 보국 씨가 둔덕리屯德里에 있는 그의 집으로부터 찾아와서 『논어』를 읽었는데, 그는 약관의 나이로 외모가 출중하고 지기志氣가 온화하였다. 글을 읽다 여가가 나면 항상 나에게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으니, 또 내가 글을 조금 안다고 생각하여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불쑥 찾아와서 묻곤 하는 것이었다.

내가 비록 어린 시절에 그 책을 읽기는 했지만 일단 산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쪽에 치워 두고 한 번도 펴 보지 않았고, 게다가 이제는 늙기까지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선비의 공부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질문한 것을 모른 척하기는 어려워 잠시 찾아보고 연구하여 알게 되는 것은 대답해 주고, 그래도 모르는 것은 감히 대답하지 않은 채 그렇게 보름 가량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가 나에게 떠난다고 고하러 와서 이런 말을 하였다.

“산속에서 사는 것과 속세에서 사는 것이 다르니, 오랫동안 따르며 배울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어찌 이별의 회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앉아라.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다. 오늘날 과거를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 공부는 사람을 명리의 빗장 안에 잘못 묶어 놓거나 족쇄를 채워 놓거나 그 함정에 빠지게 한다. 그리하여 본래 타고난 천성을 깜깜하게 가려서, 성인의 도학道學을 멀리하도록 만드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닌가.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 문집인 <성담선생집(性潭先生集)>

 

성담이 경자년(1780년) 10월 보름 여러 사람과 함께 파근사에 오른다.

 

파근사에서 놀다(遊波根寺)

 

지리산의 경승을 찾아 출발할 때는 探勝頭流發軔初

산꼭대기에 올라 거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却思尋向上頭居

구름이 깊고 높아지니 산세가 빼어남을 알겠더라. 雲深尙識山容秀

이른 서리 내려 나뭇잎 드물게 남아 있고 霜早惟嫌木葉踈

방장은 오랜 정으로 하릴 없이 약초를 거두는구나. 方丈遐情空採藥

융화를 축원하는 글을 호기롭고 낭랑하게 읊조리고는 祝融豪氣朗吟書

돌아오는 길에 바위 못 위에서 술 한 잔 기울이니 歸程細酌巖淵上

비속에 가마 타고 임지로 가는 것 같더라. 雨裏箯輿任所如

 

일성록 日省錄

 

조선 왕조 시기 만들어진 왕의 일기. 1760년(영조 36년)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처음 시작하여 1910년(융희 4년)까지 약 151년간 저술되었다. 총 2329책. 국보 제 153호이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

 

정조 17년 계축(1793) 6월 25일(병술)

호남 암행 어사 정동간(鄭東榦)이 복명(復命)하였다.

 

남원(南原)에서 공물로 바치는 종이에 대한 폐단이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장인(匠人)들에게 지급할 급료에 값을 조금 더 쳐준 뒤에는 별다른 원망이 없었고, 영문에서 지정(卜定)하는 것에도 그 양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크게 법을 어기는 폐단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에 따라 이 공물을 맡았던 승려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6개 절 중 4개 절이 모두 비었고, 천은사(天銀寺)와 파근사(波根寺) 두 절에만 약간의 승려들이 있습니다.

 

범우고[梵宇攷]

필사본. 1책. 1799년(정조 23)에 이루어졌는데, 자세한 편찬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정조가 직접 참여하고 서문을 붙였다. 당시의 사회 이념은 유교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는 다른 논리도 필요하며, 특히 먼 지방을 다스리는 데는 불교가 힘이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작성된 책이다.

 

8도와 그 밑의 군현별로 나누어 전국의 절에 대한 존폐여부 ·위치 ·연혁 ·고사 ·관계기록 등을 수록하였는데, 당시 현존하지 않는 절이나 암자에 대해서도 수록하였다. 불교의 역사는 물론, 조선 후기 건축 ·미술이나 ·정조를 중심으로 한 18세기 정치인들의 국가 운영 이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범우고에 따르면 파근사의 옛이름은 대흥사이다.

대동지지 大東地志 卷十三 全羅道 남원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가 1861년에서 1866년 사이에 제작, 편찬한 한국의 지리지. 총 30권 15책이며, 김정호가 직접 친필로 지필한 육필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기타 필사본이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智異山(지리산)。 東南六十里(동남육십리)。 雄盤高大(웅반고대), 延袤甚廣(연무심광)。 洞府盤回深邃(동부반회심수), 土性寬厚膏沃(토성관후고옥), 一山皆宜人居(일산개의인거)。 內多百里長谷(내다백리장곡), 外狹內廣(외협내강)。 氣候溫暖(기후온난), 山中多竹(산중다죽)。 又柹(우시)、栗極多(율극다), 自開自落(자개자락), 撒黍粟於高峯之上(산서속어고봉지상), 無不茂茁(무부무출)。 ○山之南有岳陽(산지남유악양)、花開二洞(화개이동), 山水甚佳(산수심가)。 有神凝・雙溪二寺(유신흥 쌍계이사)、長興・七佛二庵(장흥 칠불이암), 竝河東地(병하동지)。 ○山之西有華嚴(산지서유화엄)、燕谷二寺(연곡이사), 蟾江九曲環其南(섬강구곡환기남), 竝求禮地(병구례지)。 ○山之北有靈源(산지북유영원)・龍遊二洞(용유이동)、君子・安國二寺(군자 안국이사)、碧雲・楸城二洞(벽운 추성이동)、鍮店村(유점촌), 俱爲勝地(구위승지), 而竝咸陽地(이병함양지)。 嚴川(엄천)、瀶川在山之北(임천재산지북), 而沿溪上下(이연계상하), 潭瀑(담폭)、巖石皆絶奇而深阻(암석개절기이심조)。 山之最高者(산지최고자), 東有天王峯(동유천왕봉), 西有般若峯(서유반야봉), 二峯相距五六十里(이봉상거오육십리)。 其外奇峯峭壁(기와기봉초벽), 不可勝數(부가승수)。 山腰或有雲雨(산요혹유운우)、雷電(뇌전), 而其上則晴朗(이기상칙청량)。 又詳晉州(우상진주)。 ○波根寺(파근사),【東三十里。】 煙觀寺(연관사),【南三十里。】 歸政寺(귀정사),【東四十里。】 天彦寺(천언사)。【南五十里。】 ○梅溪古名(매계고명), 靑鶴洞(청학동)。

 

용담 대사 행장 龍潭大師行狀

 

화상의 법휘는 조관慥冠이요, 자는 무회無懷며, 용담龍潭은 그의 호이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남원南原 사람이다. 어머니는 서씨徐氏인데, 서씨가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강희康熙 경진년(1700) 4월 8일에 낳았는데 골상이 신령하고 수승하였으니 창끝처럼 뾰족하고 산봉우리처럼 예리하였다. 9세에 입학하여 눈으로 열람하기만 하면 남김없이 암송하였고, 15세 이전에 유업儒業을 이미 완성하였다. 때로 한묵翰墨의 장에 들어가 일과제日課第에 여러 차례 합격하여 향리에서 기동奇童이라 칭하였다. 16세에 먼저 아버지를 잃고는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의 무상함을 관찰하고 새장을 벗어날 뜻을 깊이 품었다.

19세에 출가하겠다고 어머니에게 청하자 친지들이 억지로 말릴 수 없어 허락하였다. 결국 감로사甘露寺 상흡尙洽 장로에게 의탁하고 더불어 삭발하였으며, 태허당太虛堂 취간就侃 대덕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향당의 유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호랑이가 빈 숲에 들어갔으니 장차 크게 포효하겠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22세에 걸음을 나서 화엄사로 향하였고, 처음으로 상월霜月 대사를 참예하였는데, 대사가 한번 보고는 깊이 그를 그릇이라 여겼다. 수년을 복역하고는 24세에 영남과 호남을 두루 유행하며 유명한 스님들을 두루 참방하였으니, 말하자면 영해影海113)ㆍ낙암洛庵114)ㆍ설봉雪峰115)ㆍ남악南岳116)ㆍ회암晦庵117)ㆍ호암虎巖118) 등 여러 대화상들이었다. 선과 교에 있어서 오묘함에 이르지 못한 것이 없어 이르는 곳마다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져 명성이 크게 드러났으니, 이것이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면 퍼지는 향기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행각을 마치고 나서는 오직 돌이켜 관조하는 것으로 자기 업을 삼고 붓과 벼루를 거두어 바위에다 박살을 내었다. 견성암見性菴에서 지내며 『기신론起信論』을 독송하던 어느 날 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단지 이 경지일 뿐임을 홀연히 깨닫고 신비로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여명이 밝아 올 무렵에 여러 경을 손 가는 대로 잡고 살펴보니, 곧 말씀말씀이 과연 밤중에 깨달은 바와 같았다. 3일 후 꿈속에서 신비한 동자가 한 상자의 책과 열 장의 편지를 화상께 받들어 올렸는데, 그 편지 앞면에 진곡震谷이라 쓰여 있었으니, 그가 동방을 진동시킨다는 징조의 의미였을까? 화상은 스스로 깨달은 후에 더욱 명철해져 검은 장막을 추켜올리고 찾아오는 학인을 받아들여야 마땅했으나, 작은 것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갈 것을 구하였다.

 

호남에 명진당冥眞堂 수일守一 대사가 계셨으니, 곧 월저月渚 스님의 고족제자로서 종안이 명백하고 견처가 고준하며 말씀에 메아리가 있고 구절 속에 칼을 감춘 자였다. 스님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뵙고 싶어 하였다. 명진 스님 역시 스님의 소문을 듣고는 먼저 스님의 처소에 이르렀다.

이에 스님이 기뻐하며 “마침 저의 숙원이었습니다.” 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화장세계가 모든 곳에 변재하다면 현재 천당과 지옥은 마땅히 어느 곳에 있습니까?”

 

수일 장로가 대답하였다.

“회주의 소가 풀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가 터졌구나.”

 

또 물었다.

“이렇게 격식을 벗어나 서로 만났지만 진실로 단박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일전어를 청합니다.”

 

그러자 대답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의원을 찾아 돼지 왼쪽 허벅지에다 뜸을 뜨네.”

 

스님이 이에 그 오의를 간파하고는 가슴으로 복종하였으니, 가히 신비로운 기틀이 서로 투합한 것이라 하겠다. 33세에 곧장 영원암靈源菴으로 들어가 십 년 동안 그림자가 산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했던 원공遠公의 맹세로 깊이 맹세하였다. 그리고 암자 동쪽 모퉁이에 손수 흙집을 건축하였고, 또 암자 서쪽 기슭에 사社를 하나 창건하고는 그 이름을 가은佳隱이라 하였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좌선할 장소로 삼고는 극기의 공부에 더욱 힘썼다.

 

아! 검이 신령하면 빛이 쏟아져 나오고 과일이 익으면 향기가 날리는 법이라. 석덕과 고사들이 팔도에서 다투어 달려왔으니, 가히 해동의 상다리가 부러지는 회상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스님은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기반을 삼았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렇게 비록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 5리에 깔린 안개의 시장을 결국 고함으로 흩어버리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대중이 너도나도 옹립하여 저절로 등용문으로 변화했으니, 이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룩한 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이끌려 결국 본래의 맹세를 완수하지 못하고, 회문산廻門山 심원사深源寺와 동락산動樂山 도림사道林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여러 암자를 두루 유행하며 교화의 시장을 널리 열었다. 그렇게 염송拈頌의 종지로 용상龍象들을 우리와 새장에 가두고 원돈圓頓의 법으로 총림叢林을 확 뒤집어 놓은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가 단에 자리하여 법을 강설하면 그 소리의 운이 웅장한 파도와 같고 그 설명이 강이 하늘에 매달린 것 같았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한 구절 한 구절이 사람들로 하여금 설 자리를 만들게 하였기에 본 자 들은 자들이 마치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였다. 그리고 또 경론 중에서 단지 종지를 밝힐 것만을 요구하고 문장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교묘하지 않아 통발과 올가미119)만을 숭상하는 자들은 간혹 제접이 무미건조하다고 그를 나무랐다. 기사년(1749) 겨울에 상월 화상이 의발을 전하였는데, 앞뒤로 5년을 시봉하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다. 신미년(1751) 봄에 대중들에게 고하기를 “(상월 화상의) 명을 수행해 2년이 넘게 문자공부만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는 결국 율시 한 수를 지었다.

 

强吐深懷報衆知  깊은 속내를 억지로 토해 대중에게 알리니

講坍虛弄說玄奇  강단에서 헛되이 희롱하며 현묘함과 기이함 설하였네

看經縱許年靑日  경전 보는 일 비록 젊은 날에야 허락되겠지만

念佛偏宜髮白時  백발이 되었을 땐 도리어 염불이 마땅하지

生死若非憑聖力  생사에서 만약 성인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昇沉無計任渠持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를 지탱할 방도가 없지

況復世間頗閙閙  하물며 또 세간은 자못 시끌시끌해

白雲幽谷有歸思  흰 구름 그윽한 골짜기로 돌아갈 생각이네

 

이를 대중에 게시하고는 강의를 그만두었다. 그러다 무인년(1758) 여름에 문도들이 강의를 받고자 다시 청한 까닭에 다시 대암臺庵에서 교화의 장을 열었으나 다음해 겨울에 다시 그것을 철회하였다. 그때 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閱經何歲月    경전 열람한 것 그 세월 얼마던가

空費鬂邊春    귀밑머리의 청춘만 공연히 낭비했네

托病知人險    험한 인심을 알기에 병을 내세우고

藏蹤厭世紛    세상의 분분함이 싫어 종적을 감춘다

谷風時至友    골짜기 바람은 때맞춰 찾아 주는 벗

松月自來賓    소나무에 달님은 저절로 오는 손님

定中知己在    선정 가운데 지기가 있으니

於道喜相親    도를 기뻐하며 서로 가까이하리라

 

전후로 대중을 물리고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익힌 것이 자못 옛사람의 행적과 같았다. 스님은 형체와 위의가 큰 언덕과 같았고, 성품과 도량이 넓은 바다와 같았으며, 부드러움으로 일을 처리하고 관대하게 대중에 임하였으며, 걸리는 바 없이 호탕하였으니, 그 거두고 펴는 기틀의 변화를 누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문하에 노닌 제자들이라 해도 그 담장 안은 엿보질 못하였고,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간간이 찾아와 알현하고는 물러나면서 또 “직접 뵈니 소문보다 배는 더하다.”며 감탄하였다.

 

건륭 임오년(1762) 6월 27일에 입적하셨으니,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44세였다. 임종할 때 시자에게 명하여 게송 한 구를 받아쓰게 하시며 말씀하셨다.

먼저 구품 연화대 위에 올라

옛 주인 아미타불을 우러러뵈리라

그런 다음 손수 유촉을 쓰셨다.

 

“사람의 삶 일어나고 사라짐이 구름이 허공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아 원래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어찌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여길 수 있겠는가. 도우들에게 바라노니, 즉시 다비하라. …….”

문인들이 그 유교를 한결같이 준수하였다.

 

다비하던 밤에 신비한 빛이 내원의 골짜기와 하늘에 두루 펼쳐져 밖에 있는 자들이 먼저 보았다. 문인들이 5재를 지내는 밤에 사리 5과를 수습하였으니, 바로 꿈에 감응한 일이었다. 이를 나눠 세 곳에 탑을 세웠으니, 즉 삭발한 곳인 감로사와 오랫동안 노닐던 곳인 파근사와 입적한 곳인 실상사였다. 또 스님께서 읊으신 가송歌頌 약간 편이 일찍이 산실되었는데 이제 겨우 백여 수를 모아 간행한다.

 

그러나 문장은 바로 도인의 여사이다. 무릇 청이 있으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붓 가는 대로 일필휘지하는 것이 마치 형산荊山에 사는 사람이 옥으로 까치를 쫓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간혹 음률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 도탑고 명석했던 신우神宇는 아무리 우러러도 엿볼 수 없고 세차게 용솟음쳤던 법의 바다는 아무리 굽어보아도 측량할 수 없으니, 진실로 허술한 글재주로 칭술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전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그 시말을 간략히 기술할 따름이다.

무자년(1768) 8월 일에 문인 혜암 윤장惠庵玧藏이 삼가 기록하다.

 

후록後錄

 

감로사와 파근사와 실상사 세 곳에 모두 위답位畓120)을 설치하여 그 사원寺員에게 2년 터울을 두고 제사祭祀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정해년(1767)에 감로사에서 먼저 행하였고, 무자년(1768)에는 파근사가 다음 차례이고, 기축년(1769)에는 실상사가 또 그 다음 차례이다. 이와 같이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바퀴가 돌듯 끝없이 이어 가면 해와 달이 영원히 밝은 것과 같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4월 초파일은 이미 우리 석가씨釋迦氏께서 강생하신 날이다. 즉 온 천하 사람들이 함께 재계齋戒하는 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사께서 탄신한 날이기도 하다. 따라서 매년 그 날을 기일로 삼아 세 절에서 재회齊會와 다례茶禮를 지낸다. 그러나 이 역시 여러 절의 편의에 따른다. 그저 찾아오는 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문집 말미에 썼을 뿐이다.

 

선사이신 용담 화상께서 읊으신 구절과 게송이 여러 곳에 산재한 것을 문인 혜암이 한 권으로 모았는데 거의 백여 수였다. 이를 판각하는 사람에게 맡기면서 선사의 행장과 묵본墨本을 가져와 나에게 주면서 그 말미에 발문을 쓰라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한다.

 

이것이 어찌 선사의 뜻이겠는가. 때는 신사년(1761) 여름, 스님께서 (병의) 심중함을 예상하지 못하던 때였다. 불민한 내가 내원의 동사에서 탕약을 시중들다가 벗의 부탁으로 하루는 조용히 백 년 후의 탑과 진영 등에 관한 일을 물었다. 그러자 스님께서 한참을 묵묵히 계시다 희미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찌 자신을 모르겠는가. 내 일은 내가 안다. 무슨 후사가 있겠는가. 만일 있다면 우리 무리들이겠지. 어찌 세상에 알려지겠는가. …….”

또 옛날 살아 계실 때 비록 강의는 해 주셨지만 문자에 더럽혀지지 않고 속뜻의 궁구에 힘쓰셨으며, 방장실 안에서는 간혹 궤석에 편안히 기댄 것이 돌아가신 듯하였고, 문과 뜰 사이에서도 간혹 걸음을 잊고 우두커니 서 계시곤 하였다. 또 항상 “늙으신 어머님이 어느 곳에 계시다고 하지 못하는 자가 나다.”라고 말씀하시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더불어 강의까지 철회하셨고, 만년에는 정토법문을 좋아하며 매번 오직 마음의 자성뿐이라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제접하셨다.

 

스님의 뜻을 볼 때, 문자를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세상에 빛내고 유포시키려고 마음먹었던 적이 없다. 하물며 시구이겠는가? 그러나 강의와 선정을 닦는 여가에

 

간혹 사람들의 청에 화답하거나 일로 인하여 우연히 읊으시면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쓰셨다. 간간이 음률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 표현이 순숙하고, 그 맛이 오래 갔으며, 그 말씀은 충이 아니면 효였고, 그 둘이 아니면 곧 도였으니, 속마음을 밖으로 표현한 게 아닌 것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시는 성정性情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이미 성정에서 나온 시라면 시는 스님의 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스님의 도 역시 시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시가 전해지면 곧 스님의 도가 남아 있는 것이다. 스님의 도가 보존되는 것은 반드시 시의 전승에 힘입어야만 한다. 뒤에 배우는 자들이 시를 보고 스님의 도가 우연이 아님을 알기를 기대한다.

아! 스님의 시는 세상에 간행되어야 마땅하도다. 한성澣惺은 법의 비에 오래도록 목욕했기에 진실로 감동할 따름이다. 드디어 눈물을 닦고 삼가 쓰다.

용집龍集121) 무자년 8월 일

 

건륭 33년 무자년 9월 일에 지리산 대암암臺巖庵에서 판을 간행하고 감로사 영각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각공은 금탁錦卓이다.

 

113)

영해影海(1668~1754)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약탄若坦이다. 전라도 고흥 분천粉川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하여 능가사楞伽寺 득우 장로得牛長老의 제자가 되었다. 17세에 수연秀演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이후 수연의 법을 이었다. 송광사松廣寺와 능가사楞伽寺에서 화엄의 교학을 강설하였다. 저서로 3권의 문집이 있었으나 2권은 없어지고 『影海大師文集』 1권만 전한다.

114)

낙암洛庵(1666~1737)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의눌義訥이다. ‘낙암洛巖’이라고도 하고 능허凌虛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박씨朴氏로 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 해평촌海平村 출신이다. 12세에 기양基陽의 곡대사谷大寺로 출가하여 황악산 모운慕雲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8세에 용문사龍門寺 상봉霜峰의 법을 잇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입적 직전에 “유골을 부도에 간직하거나 영정을 안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제자 유기有璣 등이 행장을 짓고, 비는 현풍 유가사瑜伽寺에 세웠다.

115)

설봉雪峰(1678~173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회정懷淨이다.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며, 9세에 달마산達磨山 희명 장로熙明長老의 권유로 입산하여, 16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 후 문신文信에게 경론經論을 배우고 그의 법을 이었다. 청빈한 생활에 여러 경전에 통달하여 남방의 모든 승려들이 그를 선림종주禪林宗主라 불렀다. 법을 이은 제자로 각훤覺喧 등 16명이 있다. 다비 후 사리 1과와 영주靈珠 1매를 얻어 미황사美黃寺에 탑을 세웠다. 김진상金鎭商이 찬술한 비가 있다.

116)

남악南岳(?~1732)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태우泰宇이다. 전라도 용성龍城 출신이며, 청허淸虛의 6세손인 추붕秋鵬의 법을 이었다.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찬한 비문에 의하면, 이덕수李德壽와 매우 친하였고, 이덕수는 그를 호남의 종승宗乘이라 평하였다. 저서로는 『南岳集』 1권이 있다.

117)

회암晦庵 : 주 10 참조.

118)

호암虎巖(1687~174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체정體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지안志安의 법을 전수받았다.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 중 제10종사이고, 영남의 명찰인 통도사와 해인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만년에는 강석을 파하고 오직 선정禪定만 닦다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입적하였다.

119)

통발과 올가미(筌蹄) :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비유한다.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경론의 언구를 비유하는 말이다.

120)

위답位畓 : 위토답位土畓 또는 제위답祭位畓이라고도 한다. 제사를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운영하는 논밭을 말한다.

121)

용집龍集 : 태세太歲의 이명으로 기년紀年할 때 쓰는 말로써 연차年次, 세차歲次를 뜻한다. 용龍이라는 이름의 별은 1년에 한 번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집集은 별이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혜암윤장(惠庵允藏, 생몰년미상)

 

청허 휴정의 편양언기파(鞭羊彦機派)는 편양 언기(鞭羊彦機)1581∼1644)-풍담 의심(楓潭義諶)-월저도안(月渚道安)-설암추붕(雪巖秋鵬)-상월새봉(霜月璽篈.1687~1767)-용담 조관(龍潭慥冠)-혜암윤장-기암 이준畸庵以懏-제월 의경霽月義敬-응암 치영應庵致永-진응 혜찬震應慧燦(1873~1941, 태고 17세)-철운 종현鐵雲宗玄으로 전승된다. 선·교를 겸비한 호남 일대의 명문이나 철운 장로 이후 법맥이 끊어졌음.

 

1.

청허계의 월담 설제와 부휴계의 모운 진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은 화엄강백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1725년에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 1400여명이 운집하였을 정도였다. 이때 수많은 대중이 모인 것을 보고 누군가 지안이 역도의 우두머리라고 모함하였고, 결국 지안은 제주도로 유배 가서 입적하였다. 지안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한 동안 불교계의 대규모 법회는 위축되었겠지만, 그로부터 거의 30년이지난 1754년에 상월 새봉(霜月璽篈, 1687-1767)이 선암사에서 화엄강회를 열었을 때 1200여명이 모이기도 했다.

또한 1785년 혜암윤장(惠庵允藏, 생몰년미상)이 화엄사에서 법회를 열었을 때 1500여명이 운집하여 40리에 걸쳐 사람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윤장도 당시 전라도 관찰사에게 무고(誣告)를 당해 흑산도에 유배되었지만, 그 문도들이 조정에 상변(上辨)하여 윤장은 풀려나고 오히려 전라도 관찰사가 벌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윤장은 지안이 되살아난 것이고 관찰사는 지안을 무고했던 사람이라고 하였다

 

2.

천은사는 서기 828년 신라 흥덕왕 3년 덕운조사와 인도의 스루스님이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처음에는 감로사(甘露寺)라 했다. 감로사는 서기 875년 헌강왕 원년에 보조선사가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그 후 1610년 혜정선사가 중건하고 1679년 조유선사가 새로운 건물들을 지었다. 1773년 전불당이 실화로 인해 모두 타버린 후 1774년 수도암의 혜암선사가 재건하면서 절 이름을 오늘의 천은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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