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산행기

묘향암(묘향대),박영발비트

꺼비♡꺼비 2023. 7. 2. 11:43

# 언제: 2023년 07월 01일 토요일

# 산행지: 노고단,반야봉,묘향암(묘향대),박영발비트,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22.51km   09시간51분

# 산행루트: 노고단 - 반야봉 - 묘향암(묘향대) - 박영발비트

 

노고단(老姑壇)

노고단이라는 지명은 할미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할미’는 도교(道敎)의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일컫는다. 통일 신라 시대까지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 기슭에 ‘할미’에게 산제를 드렸던 할미당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져 지명이 한자어인 노고단으로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노고단 위치에서 서쪽으로 2㎞ 지점에 있는 종석대(鍾石臺, 1,361m) 기슭으로 할미당을 옮겨 산제를 드렸다.

 

노고단(老姑壇)은 한문을 직역하면 늙은 할망구에게 제를 올리는 단이라는 뜻이다.

다음백과의 설명을 빌리면 「노고단이라는 지명은 할미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할미’는 도교의 국모신인 서술성모 또는 선도성모를 일컫는다.

통일 신라 시대까지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 기슭에 ‘할미’에게 산제를 드렸던 할미당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져 지명이 한자어인 노고단으로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노고단 위치에서 서쪽으로 2㎞ 지점에 있는 종석대 기슭으로 할미당을 옮겨 산제를 드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배움은 끝이 없다.

할미에게 산제사를 지내던 노고단이 신라 때는 천왕봉, 고려 때는 지금의 노고단, 조선시대 때는 종석대에서 산제사를 올렸다고 하니 시대에 따라 장소가 바뀌었음을 알 수가 있다.

 

지리10경 중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로 노고단 위에서면 사방이 구름바다에 쌓인 풍경이 시름을 잊게한다고 한다.

시인 이원규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에서 - 노고단 구름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 라고 했다.

 

돼지령

돼지령의 유래는 노고단 능선 안부에 진달래와 철쭉 산행지로 유명한 돼지 평전에 멧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종종 파먹던 곳에서 유래되었다. 

 

지리산 노고단(老姑壇.1502m)에서 천왕봉쪽 백두대간 능선상에 대판,돼지령,대소골이 있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이곳 일대가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글레와 원추리 뿌리가 많고 멧돼지들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돼지평전 혹은 돼지령(嶺)으로 불리어져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지날때마다 옛날에 돼지를 희생(犧牲)으로 써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던 역사를 떠올리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듣고 읽어본 여러 전래지언(傳來之言)이 있기 때문이다.

 

대판은 경사가 거의 없이 길게 뻗은 평지인데 여기에서 제사를 지낼때 바칠 돼지를 깨끗하게 키우던 돼지판(坂),즉 대판이 있었던것 같고, 인근의 돼지령은 돼지를 네 발로 묶어 물에 빠뜨려 희생으로 삼았던 큰 웅덩이인 돼지소(沼)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리고 대소골은 옛날 심원마을에서 이곳 높은곳으로 오르내리던 골짜기인데 돼지소와 가까우니 대소골로 불리면서 전래된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돼지를 희생으로 썼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있고, <민족문화백과사전>과 <종교학대사전>에 그 설명이 있다.

종교적 의례(儀禮)에서 동물 등의 살해나 공물(供物)의 파괴를 수반한것을 일반적으로 희생(犧牲. sacrifice)이라 한다. 의례적인 의미에서 단순한 제물(祭物)과는 다르게 희생이라는 말이 있는것이다. 거기에는 성(聖)스러운 세계와 속(俗)스러운 인간 세계와의 일종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존재한다고 보는것이다.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祭典)에 희생으로 쓰여진 동물이였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희생으로 교시(郊豕.제물용 돼지)에 관한 기록이 여러번 나오는데, 유리왕이 제천(祭天)할 희생을 상하게 했다고 도리어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제천의 희생으로 돼지를 길렀으며 그 돼지는 매우 신성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구릉(丘陵)에 모여 사냥하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한다고 하였다. 한때 산간지방 수령들은 산돼지를 잡으려고 온 군민을 동원하던 폐단이 있어 정조 때부터는 포수들을 시켜 산돼지를 사냥해 오도록 하였다고 한다.

 

15세기 조선초기 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종묘(宗廟)에서는 소,양,돼지를 쓰고 사직(社稷)에서는 소,돼지만을 쓰고 선농(先農.농업신인 神農과 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드리던 국가 제례의식),선잠(先蠶.누에치기의 풍요를 기원하던 국가적 제례의식)에서는 돼지만을 썼던 때도 있었다 한다. 《연려실기술(별집4권)》에 의하면 명산과 대천은 나라의 사전(祀典)에 올려두고 국왕이 제문을 짓고 관리를 보내 제사지내게 했는데 가물때에는 망제(望祭)를 올렸다.

 

그리고, 사제희생(賜祭犧牲)은 모두 거세(去勢)한 양과 돼지를 썼는데 크고 작은 제향에 쓰는 양이나 돼지는 모두 다 거세한 것을 미리 깨끗한 곳에서 기르게 하고, 그 거세한 불알은 땅에 묻었다고 한다. 즉, 담을 쌓고 문을 달아 다른 짐승들과 섞이지 않게 하여 깨끗하고 살찌게 하고 바칠 때 소[祭牛] 이외의 염소,양,돼지는 수레로 실어 바치게 했다.

오늘날에도 큰 굿에서나 제사에는 돼지를 희생으로 쓰거나 돼지머리를 제물로 쓰는 관습이 이어지고 있다.

 

일년 내내 풍부한 수량을 내밷고 있는 임걸령 샘터의 물맛은 지리산 최고라고 하는데 - 선비샘과 더불어 지리산 종주 산행에 있어서 - 있어야 할 곳에 꼭 있는 목마른 등산객에게는 반가운 오아시스임에는 틀림없다.

'임걸령'은 조선 명종때 '임걸년(林傑年)'이란 산적 두목의 근거지로 - 그 이름에서 유래되어 '임걸령'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꽤나 유명한 산적이었나 보다.

 

임걸령(林傑嶺)
高嶺인데도 불구하고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능선이 동남풍을 막아주니 녹림속에서 천혜의 요지이며,샘터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조선 명종 때의 초적두목 임걸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임걸령이 되었다. 이곳에 진을 치고 말을 길렀다고 하고 실제로 마구와 철촉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노루목

노루목 - 여기서 등장하는 "노루목"이란 지명의 유래도 흥미롭다. 노루목이란 독특한 이름은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뜻도 있지만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가 이 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지켜들고 있는 형상의 바위 모양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반야봉

반야봉에서 동쪽으로 발원되는 계곡은 뱀사골이 되고, 북쪽으로 발원되는 계곡은 달궁계곡이 되어 흐르다가 반선에서 2물줄기가 만나 만수천계곡을 이룬다. 또한 서쪽으로 발원되는 계곡은 피아골계곡으로 내서천이 되고, 남쪽으로 발원되는 계곡은 범왕천으로 흐르다 화개천과 만나며 화개천이 되어 흐르다 각각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반야봉의 유래는 어떠할까?

 

반야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일반적 판단능력인 분별지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의미하는 불교교리라고 한다.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불교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반야봉의 유래를 한동안 찾아보았지만 알 수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고할미와 마고할미의 남편 반야라는 인물을 내세운 전설을 퍼나르고 퍼날라 도배를 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전설일 뿐이고 유래라고 볼 수는 없다.불교가 왕성했던 시대에 지리산 아래 절에서 승려들 간에 부르던 불교이름의 봉우리 이름이 굳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반야봉 지리10경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곳이다.

지리10경 중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로 반야봉에서 저녁노을이 깃든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지리10경의 제4경으로 반야낙조는 지리산 반야봉(1,732m)에서 보는 저녁노을 또는 해넘이를 말하는 것이다.반야봉은 지리산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일출보다는 일몰이 더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는데 해가 질 무렵 반야봉에 오르거나 아니면 반야봉이 보이는 지리산 주능선에 올라 반야봉을 배경으로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든 노을이나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는 게 반야봉 낙조의 진정한 의미다.

 

이러한 반야낙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갑설은 반야봉에 올라서 보는 노을이라는 설이고, 을설은 반야봉이 보이는 곳에서 반야봉을 배경으로 보는 노을이라는 설이다.사실 갑설의 반야낙조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반야봉에서 낙조를 보려면 늦은 시간에 입산을 해야 하는데 국공이 입산시간을 제한하고 있어 어려움이 있고 통제되기 전에 입산한다고 해도 어두워지면 하산할 때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에 갑설의 반야낙조는 힘들다는 설이다.

 

묘향대(妙香臺) & 묘향암(妙香庵)

반야봉은 두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어서 천왕에서 바라보면 여인의 둔부를 닮았다. 묘향대는 두 봉우리중 낮은 봉우리인 반야중봉 동쪽 아래 해발 1450m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토굴이었으나 화엄사 불사를 완성한 도광스님이 절집의 모습을 갖춘 한국 불교의 마지막 전설로 불리는 곳으로 개운조사(開雲祖師)의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지리산 마이아들 사이에서는 200살이 넘은 개운조사가 신선이 되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금강대가 지리산 제일의 수행지였다고 전해지나 찾을 길 없는 지금은 이곳을 으뜸으로 치고 있다.

여인의 이름 같은 반야의 참뜻은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이다.
『아함경』에 나오는 내용에는 계향(戒香),문향(聞香),시향(施香) 이 세 가지 향을 묘향(妙香)이라 하는데,
남의 마음에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향,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향, 나눔의 향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지리 토굴들이 철거되었지만
묘향대는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현재까지 지리 최고의 수도처로 남아 있으며, 지금은 호림 스님이 그곳에서 수행, 정진을 하고 계신다.

 

묘향대 석간수

암자 옆 암벽 아래에는 묘향대 명물 석간수가 있다. 바위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상당하다. 한 바가지 떠서 들이켜니 물맛이 깊고 청량하다.

 

박영발비트

2005년 2월 14일에 박영발과 함께 일했던 박남진(83)의 증언을 바탕으로 두 차례의 탐사 끝에 소년빨치산 출신인 김영승(73세)이 잊혀졌던 박영발 최후의 비트를 발견했다.
반야봉 아래에 폭포수골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향암과도 가까운 곳이다. 밖에서 보면 굴이 있다는걸 알수 없고 어마어마한 바위 안쪽에 복층으로 형성된 자연동굴이다.

 

박영발비트

반야봉 아래, 남한에선 제일 높은 곳에 자리잡은 묘향암에서

300미터 거리에 있는 이 비트가 발견된지 16년이 지났다.
아무도 다니지 않던 험한 이곳이 그사이 지리산꾼들이라면
한번쯤 다녀와야하는 곳이 되었다. 덕분에, 표식기도 많이 달리고
길도 뚜렸이 나버려... 길 잃을 염려는 없어졌다.
하지만 박영발비트에 관한 여러 잘못된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다.
최초 발견자이기도 하고 생존 빨치산 증언을 들었기에
그동안의 잘못 기록된 것들은 바로잡고자 적는다.
 
  <모스크바 유학을 떠날 즈음에 촬영한 36살 박영발. 임경석 제공>
박영발(1913~1954) / 경북 봉화 출신. 전쟁 이전 전평에서 활동. 남로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정치아카데미에 유학. 전쟁기 전남도당위원장으로 부임. 후퇴 후 전남유격투쟁과 지하당 사업을 이끌었음. 제5지구당 창설과 함께 상임부위원장.
제5구당 해체 후에는 조국출판사를 맡아 일함. 1954년 2월 21일 지리산 뱀사골에서 전사

#1

박위원장의 죽음에 관한 이전의 기록들은 이렇다.
1954년 4월 12일 [동아일보] 는 '수색작업을 벌이던 모부대 박상옥 중사에 의해 비트가 발견돼 사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88년 이태의 '남부군'과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 창작과비평사),
2007년 '이현상평전' 에서는 1954년 1월 뱀사골에서 자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겨레21에 보도된 임경석교수의 글에서도 박위원장의 전사일를 1954년 3월19일로 적었다.
 
 
#2
박영발의 죽음을 선전하는 삐라.
‘지리산 특보 제30호’
54년 3월 19일 군경이 비트를 발견하고 사살한 것으로 선전한다.
이 삐라에는 세 사람의 실명이 나온다.
조국출판사 사장 박영발, 무전사 남호일, 담당의사 박갑수
전남빨치산이었던 정관호선생이 남긴 <전남유격투쟁사>에는 남호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남호일-도당 보도과장, 어려운 시기에 중앙통신 등 무전을 수신하는 일에 헌신.
1954년 2월 21일 지리산에서 전사.
박갑수는 박갑서의 오기라고 했다. 그리고
<전남유격투쟁사>에는 남기지 않았다. 지독한 배신 때문이다.
 
 
#3

2005년 2월 14일 비트 발견

박남진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5지구당 위원장이 빗점골에서 전사하자 박영발 위원장의 보위대가 암벽 지대가 많은 반야봉 아래에 비트를 마련해
그 해 10월 말부터 다음 해인 1954년 2월 박 위원장 전사까지 약 4개월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했다.
박남진선생은 19살 때 결혼, 1947년 나주시 영산포에서 서점 '우리서원'을 운영하던 중에 
3살난 딸과 임신 5개월째인 부인을 남겨두고 
1950년 입산한 후 빨치산으로 활동, 조국출판사 필경사로 일했다.
54년 12월 지리산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3회에 걸친 수색 끝에 박영발 전남도당위원장의 최후 비트를 발견했다. 
어마어마힌 바위 안에 형성된 자연동굴이 있다
. 밑으로 내려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하는 복층구조다.
 이곳에서 '조국출판사' 라는 이름으로 각종 유인물들을 발행했다.
동굴안에는 무전 통신에 사용됐을 전선줄, 흰색 주사용 앰풀, 깨진 갈색 유리병, 수십 개의 폐배터리, 낡은 검정 고무신짝 등이 뒹굴고 있었다.
 
 


 
박남진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를 주로 사용했다. 박 위원장은 이곳 비트에서 '조국출판사'를 운영하며 유인물 등을 발행했다. 이 동굴에서는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다. 식량이 떨어지고 토벌대의 수색작전이 점점 비트에 까지 다가오자 비트를 옮여야만 했다. 그러나 총상으로 인해 이동이 불가능했던 의사는 장소를 옮기게 되면 혼자 버려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같이죽자는 심정으로 1954년 2월 21일 비트 보초 중 칼빈소총을 난사했다. 갑작스런 총격으로 동굴에 있던 박 위원장과 무전사가 죽었다. 그러자 이모 여성비서가 몸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져 의사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여성비서는 동굴에서 버티다가 다음날 22일 식량을 전해주러 온 조국출판사의 대원을 만나 목숨을 건졌다.
그 배신자가 박갑서(삐라에선 박갑수)다.
삐라에선 군경이 사살한 것으로 나오지만 거짓이다.
이미 2월 21일 전사한 빨치산들을 발견해 자신들의 공적으로 삼은 거다.
정관호선생은 이 ‘흑역사’를 굳이 기록하진 않았지만 내게 말은 전해줬다.
 
박영발 / 경북 봉화 출신. 전쟁 이전 전평에서 활동. 남로당 중앙위원.
모스크바 정치아카데미에 유학. 전쟁기 전남도당위원장으로 부임.
후퇴 후 전남유격투쟁과 지하당 사업을 이끌었음.
제5지구당 창설과 함께 상임부위원장. 제5지구당 해체 후에는
조국출판사를 맡아 일함. 1954년 2월 21일 지리산 뱀사골에서 전사
<전남유격투쟁사>정관호
비트를 가 본 사람은 안다.
그 안까지 군경이 들어올수가 없다. 빨치산들이 살아있었다면.
 
 
#4
2005년 5월 2일 등사기 발견
'박영발 비트' 에서 50미터 쯤 아래 호위대트 옆에서 등사기를 발견했다.
깡통에 담긴 검은 잉크, 부식되긴 했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등사기 본체 그리고 놋쇠 숟가락(당증이기도 했던)이 함께 바위틈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놋쇠 숟가락은 끝을 갈아 등사지에 글을 쓰는 철필로도 사용되었다.
아마 밥을 먹을 때 보단 철필로 쓰였던 시간들이 더 많았으리라..
48년 겨울, 제주 4.3항쟁 당시, 제주 성산국민학교에서 없어진 등사기 하나 때문에, 산사람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군경토벌대에 의해 15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성산일출봉 앞 광치기해변에 이 학살에 관한 비가 세워져 있다.
등사기는 전남대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5, 2021년 6월 13일
금속탐지기를 지니고 동굴비트에 들어갔다.
수류탄으로 무너진 천장 바위들 사이로 총알2, 탄피7, 밧데리들이 발견되었다.
총알 하나는 끝이 휘어져있다. 바위에 부딛혀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의 찢어진 옷, 안경알 조각, 용도를 알수없는 철사 ...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좋은날 따스한 햇살 아래 두런두런 머물렀을 호위대 비트 앞에서 강곤동무가 산사람들의 노래를 불러주었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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