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대
# 언제: 2023년 10월 01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의 품속으로...문수골, 큰진도사골, 문수대(문수암),문바우등에서 놀다.
# 산행거리: 12.53Km 07시간 22분
# 산행코스: 신율마을 - 문수골 - 복호폭포 - 질매재길 - 큰진도사골 - 문수대(문수암) - 왕시루봉능선 - 질매재 -
문바우등 - 복호등 - 신율마을
# 문수골 : 지리산 노고단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며, 진도사골, 매박골, 질매골, 복호골 등이 합수됨
# 문수골 : 큰진도사골, 작은진도사골, 질매골, 밤나무골, 복호골등 많은 계곡이 합수됨
# 질매골 : 지리산 질매재와 질등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며, 대부분이 마른 너덜지역 계곡임
[문수대 文殊臺 (1.280m)]
약 190여 년 전 화엄사 스님이시던 <초운대사>가 창건한 문수암(文秀庵)터가 빨치산 토벌 시에 소실되었다가 돌담장으로 엮은 스님의 거처는 세월을 잊은 듯 경이롭기까지 하다.
문수대를 품은 노고단은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으로 부르게 되었다. 예전엔 길상봉(吉祥峰)으로도 불렸다는데 길상은 묘길상, 즉 문수(文殊)보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암자가 있는 골짜기도 문수골이고 그 아래 마을 이름도 문수리니 이 일대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셈이다. 문수란 '지혜의 완성'을 의미한다.
문수골은 지리산에서 비교적 큰 계곡 가운데 하나로, 화엄사계곡 동쪽능선인 월령봉능선과 피아골 서쪽능선인 왕시루봉능선 사이에 패여 있으며, 그 상류를 진도사골이라 한다.
아래 지도 합수점에서 큰 진도사골(右)과 작은 진도사골로 나누어진다. 또한 이 골짝은 여순병란 때 김지회가 지휘하는 패잔병들이 1948년 10월 25일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지리산 유격 투쟁이 시작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문수암의 유래는 이렇다. 엄동설한에 수도정진하기 위해 스님 세분이 이곳 문수사에 칩거하여 수도를 하고 있는데 한분 보살이 찾아와 자기도 같이 수도 할 것을 청하자 다들 먹을 식량이 세 사람 밖에 양식이 없어 한사코 거절을 하자 자기는 알아서 해결 할 테니 걱 정하지 말라고 해서 같이 수도를 하게 되었단다. 수도하는 중 세 스님은 졸고 있는데 보살이 옆구리를 찔러 깨우기도 하고 삼세끼 밥도 같이 먹고 지냈지만 양식은 부족함이 없었고 수도도 끝나고 해동이 된 뒤 하산을 하는데 금방 있던 그 보살이 바람과 같이 사라지자 가로 늦게 깨우쳐 문수보살이 성불했다는 것을 크게 뉘우치고 수년간 수도한 결과 성불했다는 이야기 줄거리다.
1960년 문수대(문수암)
문수대는 50m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육산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골산에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이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했으니 문수대는 육산인 지리산의 바위 벼랑 아래의 부드러운 대지에 터를 잡았으니 애써 명당이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물도, 땅도 넉넉하니 예부터 수도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이곳에 암자가 처음 들어선 건 1803년 경 화엄사의 초운대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알 도리가 없다.
이 고요한 암자도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문수대는 항일 의병 운동의 본거지였다. 문수대가 역사에 드러난 건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때문이다. 한때 의병부대가 1700명에 달했던 의병장 김동신이 이곳 문수대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과 피의 맹세를 한 김동신은 영호남의 여러 군을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전개했고, 두 차례에 걸쳐 지리산에 들어왔다. 1907년 9월 18일, 화개를 출발한 김동신 부대는 반야봉을 거쳐 이곳 문수대로 왔다. 다음 날 문수골 아래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그 다음 날 새벽 구례읍을 습격해 읍내를 장악했다. 화개에서부터 김동신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의병장 고광순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연곡사를 기습 공격해 불태운 후 이곳 문수대마저 불태웠다. 김동신의 의병 투쟁은 1908년 6월 6일 대전 순사대에 그가 체포되자 막을 내리게 된다.
문수골
노고단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왕시루봉능선과 월령봉능선 사이의 계곡으로 지리산 12대 계곡중 하나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최초 입산했던곳이며 기나긴 기간동안 지난한 빨치산 투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또한 그해 11월 중순 월동을 위해 질매재를 넘어 피아골, 연동골, 목통골 등으로 이동했던 곳이 바로 이 골짝이다.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이란 글씨가 새겨진 너럭바위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이란 글씨가 새겨진 너럭바위, 초서체(草書體)라 뭐가 뭔지 알아볼 수도 없지만, 주자(朱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중 한 구절이라는데,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함양 화림동계곡의 거연정(居然亭)도 같은 맥락이라나?
진도사바위
진도사바위에 관한 전설
진도사골 계곡 한가운데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데 옛날 진도사가 이 골에서 도를 열심히 닦는 도중 해가 지려고 하면 그 바위구멍에 깎은 나무를 꽂아 해가 넘어가지 않게 매달아 놓고 도를 연마한 후 그날 닦은 도가 충분하면 해를 풀어 주었다고 한다. (1997년 2월 진도사골 산행시 고로쇠 수액 채취 중인 주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 한다.
문바우등
문바우등은 문바위 봉우리라는 뜻이다.
문바위등에서 아래로 내려서는 곳에 창문같은 사각 구멍이 있는데 이런 사각 구멍이 창문같아 보여 옛 선인들이 이곳을 문바우라고 불렀을 것 같고, 문바위가 봉우리의 정상이기 때문에 문바우등이라고 불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바우는 왕시루봉 능선에서 조망이 제일 뛰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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