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2구간
# 언제: 2025년 05월 18일 월요일
# 산행지: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운봉-인월(9.9km)
# 산행거리: 9.90km 03시간 17분
# 산행루트: 운봉읍 – 서림공원(0.2km) – 북천마을(0.8km) – 신기마을(1.1km) – 비전마을(2km) – 군화동(0.8km)
흥부골자연휴양림 (2.9km) – 월평마을(1.5km) – 구인월교(0.2km) – 인월안내센터(0.4km)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안내도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운봉-인월(9.9km)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와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9km의 지리산길. 운봉-인월 구간은 오른쪽으로 바래봉,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고 왼쪽으로는 고남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며 운봉고원을 걷는 길로 옛 통영별로 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9.9km 전 구간이 제방길과 임도로 되어 있어 길 폭이 충분히 넓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고, 황산대첩비, 국악의성지, 송흥록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즐기면서 걷기에 좋은 곳이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운봉-인월(9.9km)
들머리는 운봉읍사무소 앞 사거리(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2구간인 운봉-인월 구간을 걷는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원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운봉고원(해발 500m)의 너른 들녘과 마을길을 걸으며 즐기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이 자랑거리이다. 특히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비전마을은 2구간의 하이라이트,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창시자인 송홍록 선생과 국창(國唱) 박초월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지리산 둘레길 제2구간 운봉-인월 구간 출발
남원시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운봉읍 서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9km 길이의 둘레길이다. ‘통영별로(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과 한양을 잇는 옛길)’와 람천의 둑길을 따라 걷게 되는데, 이때 좌우로 펼쳐지는 고리봉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고남산·수정봉 등 백두대간의 준봉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황산대첩비,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은 덤이라 하겠다.
서림공원 입구에는 이곳이 당산이라는 안내판
남원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
남원 서천리 당산(南原西川里堂山)은 중요민속자료 제20호로, 마을 사람들은 흔히 「벅수」라고 부르며, 당산나무 또한 지금은 없어진 솟대(짐대라고도 부름)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왔다.
마을의 서쪽 길가 양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하나에는 방어 대장군(防禦大將軍), 또 다른 하나에는 진서 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그 위치와 진서(鎭西)ㆍ방어(防禦)라 표기된 것으로 보아 마을의 허전한 방향을 막아준다는 풍수신앙에 바탕해서 세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재질은 양쪽 모두 화강석으로, 방어 대장군은 높이 220㎝, 너비 50㎝이고, 벙거지를 쓰고 귀가 없으며 수염 한 가닥이 있는 남 신상이다. 진서 대장군은 방어 대장군의 남쪽 맞은편에 서 있으며, 높이 195㎝, 너비 58㎝로 벙거지를 쓴, 그리고 귀가 달린 여신상이다. 이 한 쌍의 돌 장승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 형식이나 표현 수법 등이 다르다. 진서 대장군의 경우 실제 인간의 모형에 가깝게 귀가 달리고 얼굴 표정이 사실적이며 수수한 노인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장승은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떨어진 것을 접합시켰는데,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 부부 장승이 어느 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여신상인 진서 대장군의 목이 부러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동짓달 초에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 이들 돌 장승에게도 간단한 제의(祭儀)를 행한다. 돌 장승은 마을 수호의 부수적인 신이지만 당산나무·솟대·장승이 복합되어 마을을 수호한다는 민간신앙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제의를 행하는 것이다.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던 기물 운봉 석장승
북쪽의 것은 남자로서 남장승 방어대장군 이라 각자 되어 있다.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던 기물 원봉 석장승
남쪽의 것은 여자로서 진서대장군 이라 각자가 되어 있고
서림공원(西林公園)
운봉 읍민들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당산(느티나무 숲)을 중심으로 운동장과 충혼탑, 그리고 식수대·모정·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당산(堂山)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문화적 가치(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와 아름다운 경관(남원의 숨은 보석 10선)을 동시에 인정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황산 방향으로 흘러가는 람천
람천(濫川)
람천(濫川, ‘넘칠 람’자를 쓰는 걸 보면 옛날 속깨나 썩였던 모양이다)’이 흐른다. 지리산의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산내면을 지나 함안군 마천면에서 임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람천은 중간에 소하천(주촌천·운봉천·준향천·풍천·만수천)을 보태 몸집을 불린 다음 임천으로 흡수되고, 이어서 남강과 낙동강을 거쳐 남해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초봉(草峰)이라고 이름 붙은 각자
풀숲인지 나무숲인지 조그만 봉우리
신기(新基)마을>
지리산의 봉우리가 바라보이는 자리에 운봉고원이 마을을 보호하는 듯한 명당에 자리 잡았다는 신기마을은 새터라는 의미를 지녔다. 임진왜란이 휴전상태에 접어들던 때에 비교적 전란의 피해가 적은 정착지를 찾았던 입향조들이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다. 소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고개)이 움푹 들어가 북동풍을 막지 못한다 하여 그 자리에 쇠한 기운을 막고자 마을 주민들이 직접 토성을 쌓고 숲을 조성했다. 이 숲은 마을 당산제를 올리는 당산숲이기도 하다.
람천 하상에 드러난 거대한 바위 암반
둘레길 2구간은 좌틀하여 람천 건너편 황산대첩비지와 비전마을로 건너가는 다리
우측 동편제 마을 표지판이 있는 '반달곰의 새참'이란 카페 옆 벤치에서 여유로움시간 즐기며 약주 한잔...ㅎㅎㅎ
대첩교를 건너서 우측 비전마을 방향이 둘레길 2구간, 좌측의 황산대첩비지를 둘러본다.
남원 황산대첩비지
이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고려 우왕 6년(1380)에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군은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 지휘자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 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선조 10년(1577년) 운봉 현감 박광옥이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 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비각에는 ‘황산대첩사적비(荒山大捷事蹟碑)’가 들어앉았다.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 중건한 것이란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적혀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황산대첩은 변방의 무명 장수에 불과하던 이성계를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황산 싸움의 승리는 결국 그에게 ‘새로운 꿈, 새로운 세상 조선 건국’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 발판이자 꿈을 이룬 요새로 작용했다.
황산대첩비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이곳에 대첩비를 세웠고, 현종 8년(1667) 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 다시 고쳐지었으며 이때 어휘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 보호각을 세웠다.
세 개의 비각(碑閣)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이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왕명을 받아 고려사와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고증해 세웠다고 한다.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중종의 사위 송인이 썼으며, 운봉 현감 박광옥이 비를 세웠다. 하지만 1944년 9월 패망을 직감한 일제가 비문을 폭파해버렸고, 현재의 빗돌은 1957년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운 것이다.
일제가 파괴한 원래의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한 파비각과 황산대첩기념비
동편제 마을' 표석이 있는 비전마을로 들어서는데, 입구 좌측에 '송흥록 선생 생가터'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고
비전(碑殿) 마을
비전마을은 고려 우왕 때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건립한 곳이다. 마을 앞에 ‘황산대첩비각’이 있어 비전(碑殿)마을로 불린다. 대첩비에는 당시 전투를 같이 했던 8원수와 4종사의 이름이 새겨졌다 하나 일제강점기 일본은 이 비를 파괴하였고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서편에 '하마(下馬)정'이라는 2층 정자가 있어 구한말까지 주변의 주막의 기녀와 소리꾼, 가마꾼이 상주하던 곳이었으나 수해로 소멸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비전마을을 역촌이라고도 했다.
비전마을의 첫 번째 집은 가왕 송흥록의 집
판소리는 조선 영조․정조 때 가장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동편제의 특징은 묵직하고 장엄한 소리에 막힌 가슴이 뚫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장수의 호령소리를 실감케 한 것이다. 판소리의 제(制)에는 동편제와 서편제 또 중고제와 보성제 등으로 크게 나눈다.
동편제는 지역적으로 지리산을 끼고 운봉을 비롯하여 남원․순창․구례와 같이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함양․하동․진주까지를 포함시킨다. 동편제는 장단도 길게 빼지 않고 짧게 그리고 분명히 끊어지며 리듬 또한 단조롭고 담백한 맛이 있다. 동편제의 시조가 가왕(歌王)이란 칭호를 받은 송흥록(宋興祿) 명창이 바로 운봉출신이란 점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동편제와 구별되어 일컫는 서편제는 남성적인 동편제 소리와는 달리 애절하며 섬세하여 여성적인 맛을 가진 소리다. 동편제의 무뚝뚝한 맛과는 달리 서편제는 수식과 기교가 많고 자상하며,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감상적인 면이 강조되는 소리이다. 주로 섬진강을 넘어 광주․담양․나주․목포․보성․고창 쪽으로 보고 있다.
운봉은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을이다. 바로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 그의 아우이며 자신의 고수였던 송광록(宋光祿), 송광록의 아들 송우룡(雨龍),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萬甲)으로 이어지는 송문일가(宋門一家)는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큰 계보인 것이다.
운봉에서 살다가 구례로 이사한 송광록과 송우룡은 물론 송만갑 역시 비록 구례에서 살았다고는 하나 결국 운봉에 뿌리를 둔 운봉인이다.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를 받았으며 운봉의 비전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집과 함께 마을 입구에 그의 탄생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운봉은 송문일가의 고향임과 동시에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의 고향이며, 그녀가 살았던 집이 아직도 비전마을에 남아있다. 이밖에도 운봉은 남원이나 구례등과 접해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서로 오가면서 공부도하고 친히 지냈던 명창들이 대단히 많다. 유성준․김정문․배설향․이화중선․박봉술․강도근 등 많은 명창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안숙선․정춘실․이난초․전인삼 등의 젊은 명창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정춘실은 운봉면 권포리 출신이다. 운봉은 국악인들의 고향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속의 고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송흥록 선생 생가터
이곳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는 명창 송흥록(宋興祿)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계면(界面) 우조(羽調) 진양조 등 가조(歌調)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춘향전의 옥중가에서 귀곡성(鬼哭聲) 등 많은 곡을 남겨 판소리의 큰 유파(流波)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어 당대의 가왕(가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송홍록 생가터 앞에는 '소리쉼터'라는 정자
비전마을 앞 람천 제방길
비전마을
보이는 산은 ‘황산’이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황산대첩의 장소이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지리산의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이 지역의 문화·역사 유적을 함께 볼 수 있다.
군화마을
군화동(軍花洞)은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들의 가옥을 군인들이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란 뜻으로 군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군화동은 황산대첩을 이룬 황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군화동을 지나 둘레길을 왼편으로 조금 벗어난 국도변 하천에 ‘피바위’가 있다. 고려 우왕 때 왜장 아지발도가 팔량재를 넘어와 이성계와 대치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아군의 분별이 힘든 그믐날 밤에 달이 뜨도록 기원하여 마침 떠오른 달빛에 아지발도를 화살로 쏘아 죽였는데 그 핏자국이 람천 피바위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달을 끌어 왔다는 뜻의 인월(引月)이란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하였고 인월면 월평마을의 영월정도 이와 관련된 유적이다.
또한 이곳은 조선말 동편제의 시조이자 가왕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그의 후손인 송만갑이 태어난 곳이며, 송만갑의 지도를 받은 명창 박초월의 생가가 송흥록 생가 옆에 나란히 복원되어 있다. 이를 기념해 동편제의 고향에 ‘국악의 성지’가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되는 남원은 국악의 산실이다. 국악의 성지에서는 많은 공연과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황산벌의 말발굽소리와 판소리 가락이 교차하는 비전마을 느티나무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자
람천을 넘는 화수교
옥계호 제방(둑방)
옥계저수지(玉溪湖)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쌓아올린 저수지로 둑의 높이가 무려 42m. 길이도 261m에 이른다니 심심산골에 들어있는 저수지치고는 어마어마한 규모
우측 '지리산동자삼'이라는 표석이 있는 우측 길을 두고 좌측 길로 걷는다.
흥부골자연휴양림으로 들어서서 좌틀하여 휴양림 입구 방향으로 내려감
흥부골 자연휴양림
지리산 서북능선을 마무리 짓는 덕두봉(1,150m)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시설로, 건강·오락·휴식을 위해 지난 2002년에 개장 ‘흥부골’이란 이름은 인근의 ‘흥부마을(아영면 성리)’에서 따왔지 않았나 싶다. 남부지역 최대의 잣나무숲과 바래봉 철쭉군락지까지 연결되는 등산로가 자랑거리라는데, 다녀간 이들의 평은 썩 좋지 않은 듯
서룡산과 삼봉산이 건너다 보이는 월평마을
월평마을’이다. ‘달오름 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와 싸울 때 주변이 너무 어두워 적을 분간할 수 없자, 달이 떠오르도록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자로는 ‘인월(引月)’, 우리말로 풀이하면 ‘달오름 마을’이 된다. 인월리의 옛 인월마을과 원평마을이 합쳐져 ‘달오름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는데, 지명의 유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아 달의 기운이 온 마을에 가득해진다고 한다.
월평마을 회관
월평마을(달오름마을)
월평마을은 원래 1800년대 후반 천석꾼이었던 박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 새동네로 불리다가 후에 마을형국이 반월을 닮아 월평이라는 설과, 마을이 동쪽 팔량치를 마주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고 하여 월평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소박한 민박집들과 벽화가 아기자기한 월평마을은 2010년에 달오름마을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2구간 종점이자 3구간 출발지점인 구인월교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