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구간[걷기]

지리산 둘레길 7구간

꺼비♡꺼비 2025. 6. 23. 10:25

# 언제: 2025년 06월 22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산 둘레길 7구간 (성심원 - 운리 구간경유)

# 산행시간: 13.5km   04시간57분 (여유로운 휴식시간 포함)

# 산행루트: 성심원 – 아침재(2.3km) – 웅석봉하부헬기장(2.5km) – 점촌마을(6.4km) – 탑동마을(1.5km) –

                단속사지 - 운리마을(0.7km)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7구간인 성심원-운리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60.2km)로 이루어진 산청 권역의 세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3.4km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 미터도 넘는 웅석봉의 8부 능선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지리산둘레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으로 꼽힌다. 대신 산청의 지리산둘레길 중 가장 호젓한 구간이라는 점도 기억해 두자.

 

지리산 둘레길 7구간(성심원 - 운리 구간경유)안내도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마을 성심원과 단성면 운리를 잇는 13.4km의 지리산둘레길. 이 구간은 웅석봉 턱밑인 800고지까지 올라가야하는 힘든 오르막과 탑동마을로 가는 긴 내리막 임도를 품고 있다. 풍현마을과 어천마을을 이어주는 아침재, 웅석봉에서 흘러 경호강에 오르는 어천계곡,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청계저수지가 아름답다. 단속사터였던 탑동마을에서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산청 삼매 중 하나인 정당매를 만나 역사와 걷는 길이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성심교 다리, 성심원 정문 지리산 둘레길 7구간 들머리 시작점 이다.

들레길 7구간은 산청읍 내리의 성심원에서 단성면의 운리 까지, 거리는 13.4km 밖에 되지 않으나 웅석봉의 턱밑인 800m고지까지 올라가야 하는 힘든 구간이다. 또한 탑동마을까지 내려가는 임도도 지루할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에 둘레길 산꾼들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아 하는 편이다.

 

산청 성심원 정문

경남 산청군 산청읍 산청대로138

지리산 둘레길 7구간의 시작점은 성심원의 정문이다.

 

산청 성심원 

진주 이현동 서쪽에 개신교에서 설립된 한센인 마을인 구생원에 1954년부터 가톨릭 신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57년 6월 구생원 내 가톨릭 신자의 요청으로 진주성당의 전교회장이었던 이태규씨가 파견되어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58년에는 18명의 환우들이 영세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구생원 내 종교 갈등이 더욱 심화 되었고, 가톨릭 신자 환우들을 위한 삶의 터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1959년 진주성당 주임신부인 작은형제회 주콘스탄시오 신부의 도움으로 초가1채, 기와1채, 부지 2만 8천평을 매입하여 고통 받는 60여명의 사람들이 1959년 6월 18일에 이주하여 6월 19일 예수성심 대축일을 기념하여 ‘성심원’이라 명명하였다.

 

참고로 성심원은 가톨릭 재단법인 프란체스코회(작은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이다. 당초 프란체스코회 중심의 ‘한센인 정착 자립마을’이었으나 현재는 한센인 생활시설과 중증장애인시설이 하나로 통합돼 운영되고 있다.

 

산청 성심원

 

철선(1984년~1988년)은 성심원의 세번째 배이자 마지막 배이다. 초기에 미군으로부터 보트를 얻어서 경호강을 건넜고, 1962년 소나무 나롯배를 이용하였다가, 1984년 태풍으로 다리가 소실되어 급하게 철선을 구입하였고, 어려운 시기에 성심원 생활인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배이다. 현재는 지금의 성심원으로 옮겨져 고단했던 그들의 삶을 증언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7구간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내리 마을 성심원을 출발한다.

 

어천마을 방향으로 걸으면서 남강 및 주변 경치를 눈여겨 본다.

 

나루터

다리가 놓이기 전 성심원은 철선(鐵船) 한 척이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참고로 음성 나환자들의 집단 정착촌인 풍현마을(성심원)은 1959년에 문을 열었다. 성심원 시간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갈등과 치유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고 사람의 편견으로 사람이 사람을 냉대하던 시절이 우리 주변에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리도 1972년이 되어서야 놓인다. 섬 아닌 섬에 갇혀서 죄인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

나루터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1972년에 놓인 다리는 두 번이나 유실되었고, 덕분에 이 나루터는 세 번째 다리가 놓인 1988까지 제 몫을 수행했다함.

경호강 - 남강 래프팅 즐기는 팀

 

경호강 - 남강 래프팅 무더운 여름 시원한 피서를 주는구나.

 

남강을 왼편에 두고 강변길로 곧게 뻗어나가던 둘레길

 

여기 어디쯤 일까 궁금...!

 

둘레길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고, 다른 하나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나무다리를 건너란다. 다리를 건너면 어천마을로 연결된다. 예전엔 ‘어리내’라 하고 우천(愚川)으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어천(漁川)으로 변한 산골마을이다. 웅석봉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마을 앞을 지나는데 이 개울에 쏘가리며 뱀장어·가재·메기·꺽지 등이 바글바글 했기 때문이란다.

 

이제 임도길을 걷는다. 산골짜기를 숨 가쁘게 거슬러 올라간다.

 

임도 포장 길가엔 벌통도 놓여있다.

 

정수산, 둔철산, 조망

 

숨 가쁘게 오르다 뒤 돌아보니, 확 트인 조망으로, 정수산과 둔철산이 눈에 쏙 들어온다. 그 산자락에는 다랑이논으로 둘러싸인 범학마을이 들어앉았다. 국보 제105호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 이 발견된 곳으로, 탑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아침재

어천마을에서 성심원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길 정상에 자리한 ‘아침재’에 올라섰다. 아침재-풍현과 어천을 넘나드는 고개, 이곳은 아까 어천마을로 나뉜 순환코스가 다시 합쳐지는 ‘삼거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천마을로 빠지는 삼거리, 정면으로 어천마을 건너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792.8봉 이다. 

 

아침재 임도 길 에서 어천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저 일대는 한국전쟁 때 웅석봉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삘치산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던 곳 가운데 하나이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특이한 표지석이 눈에 띄인다. 119 농원, 표지석인데 농원의 이름과 전화번호는 그렇다 치고 주인장의 인물사진까지 자연석에 그려 넣었다. 둘레길은 좌측...

 

웅석사(熊石寺) 입구 조그마한 대(臺)

 

웅석사(熊石寺) - 1

 

웅석사(熊石寺) - 2

 

임도는 포장과 비포장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을 걷다보면 붉고 보드라운 흙이 속살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때 산청을 대표하던 특산물인 ‘고령토’다. 질 좋기고 소문난 산청의 고령토는 선별 과정을 거쳐 많은 양이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웅석봉으로 올라가는 여러 등산로 가운데 하나인 어천마을 코스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1983년 11월 23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웅석봉은 이밖에도 밤머리재와 지곡사, 바람재(성심원), 청계리 등 다양한 곳에서 오를 수 있다.

 

어천계곡 운리 9.5㎞/ 성심 3.1㎞

 

어천계곡 상류 이곳은 대통골이 맞을 수도 있겠다.

 

어천계곡 웅석봉이라는 거대한 산줄기의 계곡

계곡 건너 이제부터 진짜 오르막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 둘레꾼들에게는 '상급' 구간이다.

 

깨금(개암나무) - 개암나무라는 이름의 뜻은 밤나무보다 못하다는 뜻에서 ‘개+밤나무’가 변한 이름이라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깨금'이라고도 한다.

노각나무(금수목, 錦繡木 )열매

 

갈 지(之)’자 로  오르막 길 이다.

 

오르막 길 오르며, 호흡도 가다듬을 겸해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그때마다 정수산과 둔철산을 품은 산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난다.

 

오르고 걷다보니, 하늘이 활짝 열린다, 이제 계단만 오르면 된다.

 

올라선 웅석봉의 하부 헬기장은 정자를 세워 쉼터

 

웅석봉 하부 헬기장 쉼터 정자

 

웅석봉으로 오르는 주요 길목 가운데 하나이다. 어천마을이나 어천고개, 청계리를 시점으로 삼은 등산로가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정면으로 웅석봉 전위봉

그 경계에 웅석봉1099.9m이 있다. 웅석봉은 지리의 동쪽을 책임지고 있다. 예전에는 동부능선이라고 많이 불렸으나 1980년 산경표가 알려진 이후로는 덕천지맥(대한산경표) 혹은 웅석지맥(신산경표)으로 불리고 있다. 이 지맥은 지리태극종주 코스가 일부 지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웅석봉을 조선지도에는 유산楡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웅석산 정상에 곰바위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옛말에서 그 유래를 찾고 싶다. 즉 옛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신성’, ‘신령’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신神이나 그 정도로 신성하고 높은 존재를 뜻하는 우리말에 ‘ᄀᆞᆷ’이라는 단어가 있다. ‘감’, ‘검’, ‘곰’, ‘고마’, ‘구마’ 등이 거기서 나온 변형어이다. 그러니 지금의 ‘고맙다.’라는 말이다 ‘감사하다.’라는 말이 다 그런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신성한 바위가 있는 골이며 ‘가마골’, 그런 신성한 곳 즉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면 ‘검산’, ‘검암’ 등이었을 것이니 그들의 한자어는 ‘劍巖’, ‘劍山’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그런 발음을 가진 동물들 중에 우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 바로 ‘곰’이다. 그 한자어가 ‘熊’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 신성한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신성한 산 즉 ᄀᆞᆷ바위 〉 곰바위〉 웅석이 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웅석산은 그저 ‘신성스러운 산’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퍼온글-

 

임도 포장 길 우측 웅석봉 오름 길 들길은 임도 포장 길

 

좌측은 지리산 둘레길 7구간 청계리임도 길, 우측은 웅석봉 올라가고

 

달뜨기능선 지류

둘레길을 겸한 임도는 ‘달뜨기능선’을 오른편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로 이어진다. 여순사건으로 지리산으로 향하던 남부군의 사령관 이현상이 웅석봉을 바라보며 ‘동무들! 저기가 바로 달뜨기 산이요! 이제 우리는 살았소!’라며 오랜 행군에 지친 부하들을 독려했다는 그 능선이다. 웅석봉에서 감투봉까지의 능선을 일컫는데, 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바라보면 웅석봉 쪽에서 달이 떠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임도 길 걷다, 뒤돌아볼라치면 웅석봉(1,099m)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웅석봉은 산청의 중앙에 솟아 홀로 떨어진 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리산 자락이다. 천왕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중봉 하봉을 지난 다음,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높이 솟아오르는데 그게 웅석봉이다.

 

산 딸나무 꽃 - 들매나무, 미영꽃나무, 소리딸나무, 굳은산딸나무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 산기슭이나 산골짜기에서 흔히 자란다. 키는 10m 정도 자라고 가지들이 층을 이루며 달린다. 잎은 마주 나고 4~5쌍의 잎맥이 양쪽으로 나오며, 잎 뒷면에는 털이 밀생한다. 꽃은 6월 무렵 가지 끝에 무리 지어 핀다. 열매는 10월에 붉게 익는다. 꽃받침이 씨를 감싸는 과육으로 자라는데, 단맛이 나고 날것으로 먹을 수 있다. 응달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지만, 반그늘 또는 양지바른 곳에서도 자란다. 효능으로는 소화불량 완화 등이 있다.

 

임도차단기  탑동마을까지의 임도 구간은 상당히 길다

 

성불정사(成佛精舍)라는 글이 눈에 띈다, 매달린 깃발로 보아서는 신흥종교가 아닐까 싶다.

 

성불정사 - 1

 

성불정사 - 2

 

성불정사 들리고, 포장된 임도 둘레길 걷는다

 

들레길 임도 걷다보니 또 차단기로 길을 막아놓았다. 막아놓은 사람 누굴까.

 

임도를 벗어나자 잘 지어진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왼편은 청계저수지(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점촌마을’의 아픈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둘레길은 오른편으로 간다.

 

앞의 508.8봉 뒤로 석대산 줄기

 

점촌마을 입구 우측으로 들어가면 청계저수지가 나오고 바로 점촌마을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시야가 툭 트이면서 운리(雲里) 일대의 들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운리, 雲里

이방산에 위치하여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원정, 탑동 등이 있다. 원정마을은 탑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큰 정자가 있 었다 하여 원정이라 하였다. 탑동마을은 원정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단속사삼층석탑이 있다 하여 탑동이라 한다. 문화재로는 신라 경덕왕 7년에 대내마 이준이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어 창건했다고 하는 단속 사터가 있으며 절터에는 보물 제72호의 단속사지동삼층석탑과 보물 제73호의 단속사지서삼층석탑이 있다.

 

오거리 - 5시 방향의 금계사 쪽으로 크게 휜다. 다섯 중 가장 좁은 길로 들어선다고 보면 된다.

 

금계사(錦溪寺)

탑동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금계사 가 있다. 암자 형태의 작은 사찰인데 단속사의 옛 이름인 금계사(錦溪寺)를 차명해왔지 않나 싶다. 금계사가 누렸다는 성황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시주는 넉넉한 듯. 큼지막한 대웅전은 단청까지 입혔다. 참고로 금계사로 불릴 당시 단속사는 중들이 수도하기도 힘들 정도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수도정진을 위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도승의 도움을 받아 ‘단속사(斷俗寺)’로 이름을 바꿨고. 절간은 인적이 끊기면서 불까지 나 망해버리고 말았단다. 말이 씨가 되었다고나 할까?

 

단속사지 전경

 

단속사지의 삼층석탑에시 이름을 빌려온 듯한 탑동마을은 벽화부터가 예스럽다. 고전적인 동양화를 그려 넣어 탑동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준다. 거기다 돌담인지 외벽인지 모를 옛집들이 고향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탑동마을 - 운리(雲里)는 탑동, 본동, 원정 등 3개 동네를 말한다. 탑동마을은 원정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단속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하여 탑동이라 한다. 단속사(斷俗寺)는 말 그대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으로, 신라 경덕왕 때의 신충이라는 대신이 지리산으로 출가해지었다는 설이 있다. 경덕왕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신충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단속사를 짓고 속세를 떠났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때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하는 단속사터에 현재 절집은 없고, 보물인 동서 삼층석탑 2기와 당간지주 2기가 남아 과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탑동마을 조그마한 소류지

 

단속사지(斷俗寺址)

단속사지(斷俗寺址)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단속사터를 말한다.

 

단속사지(斷俗寺址)는 지리산 자락 옥녀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옛 절터이다. 단속(斷俗)이란 끊어질 단(斷)자와 풍속 속(俗)자를 써서,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부처님만을 바라보고 살겠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新羅本紀 경덕왕 22년' 기사에는 '대직장(大奈麻) 이순(李純)이 세상을 피해 산 속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살았다'고 적혀있다

한편 '삼국유사 신충계관 조(信忠掛冠 條)'에는 신충(信忠)이 벗과 함께 벼슬을 사퇴하고 남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충(信忠)은 신라 효성왕(孝成王)때 살았던 충신이다

신라 34대 효성왕(재위 737~742)이 왕이 되기 전에 궁궐 잣나무 아래에서 어진 선비 신충과 바둑을 두면서 "훗날 만약 당신을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하자 신충은 일어나 절을 하였다.

몇 달 뒤 효성왕이 왕이 되고 공신들에게 벼슬과 상을 주면서도 정작 맹세했던 신충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신충은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향가 '원망가'를 지어 그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시들어 버렸다. 왕이 그제야 잊어버렸던 약속을 떠올리고 신충에게 벼슬을 내려주자 시들었던 잣나무가 다시 소생하였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효성왕이 죽고 동생 경덕(景德)이 왕이 된 22년(763년)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악으로 들어간 신충을 경덕왕이 두 번이나 불렀으나 신충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속세를 떠났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이 원래의 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3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뿐만 아니라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이다.     

 

단속사지(斷俗寺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속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 신라 경덕왕(景德王) 22년 계묘(753년와 당(唐) 천보(天寶) 7년 무자748년), 두 개의 설이 실려 있다. 전자는 효성(孝誠) - 경덕왕조(朝)의 인물인 신중(信忠)이, 후자는 경덕왕대의 직장(直長) 이준(李俊)이 단속사를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충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경덕왕 16년(758년)부터 22년까지 상대동(上大等)을 지냈다고 했고, 이준은 같은 책에 등장하는 대나마  이순(李純)과 동일인물로 보이는데, 일찍이 나이 쉰에 출가해 절을 짓겠다는 서원을 따라 조연(曺淵)에 있던 작은 절을 크게 중창한 것이 바로 단속사이며, 이준 자신도 공굉장로()라는 이름으로 승려로써 20년을 머물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단속(斷俗)이라는 이름에는 신충의 입산과 관련해 '세속(과의 인연)과 절연한다'는 뜻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때의 유명한 화공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당에서 복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 신행이 혜공왕(惠恭王) 15년(779년)에 이곳 단속사에서 입적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 5년 계사(813년)에 당시의 병부령 김헌정이 비문을 지은 신행의 비석이 세워졌다(비석 자체는 후에 유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단속사가 위치한 골짜기 입구에는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과 함께 최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그 독서당은 훗날 고려 시대의 고승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의 영당(影堂)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대감국사비》는 고려의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비문을 짓고 탄연 자신이 글씨를 쓴 비석이었다. 이 밖에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도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의 비문에는 혜심이 고종(高宗) 7년(1220년)에 단속사에 주지로 머물렀던 적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인 세종(世宗) 6년(1412년) 당시 단속사는 원속전 1백 결에 주석하는 승려가 1백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姜淮伯, 1357년  - 1402년)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면서 심었던 매화가 경내에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강회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의 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는데, 매화나무가 말라 죽으면 그 후손들이 그 자리에 다른 매화를 이어 심었다고 하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추강 남효온(南孝溫)부터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탁영 김일손(金馹孫), 지리산에 자주 올랐던 조선 중기의 문인 조식(曺植)이 정당매를 보고 지은 시가 남아 전한다.

 

단속사는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단성면 운리의 단속사 절터에 뿌리를 내린 정당매政堂梅의 수령은 640여 년. 여말선초의 문신인 통정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어릴 적 수학하던 단속사에 심었다고 전한다. 훗날 그의 벼슬이 정당에까지 오르자 붙인 이름이다.  정당매는 원래 4개의 줄기 였던 것이 3개의 줄기는 고사하고 1개의 줄기 밑둥치에서 나온 곁가지가 씩씩하게 자라 아쉬운대로 고매의 운치를 이어가고 있다. 경남도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신라의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 단속사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왜적의 방화로 불탔다. 지금은 당간지주와 2기의 석탑만 남아 쓸쓸함을 더한다.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매화가 상징하는 지조를 닮고 싶어했던 젊은 날의 강희백은, 고려 조정에서 종2품에 해당되는 높은 벼슬을 했고  고려가 망한 후 조선에서도 관직을 얻었다.

 

정당매는 남명이 살아생전에 이미 수령이 무려 200년 가까이 된다. 매화로서의 기품을 짐작할 수 있지만 강직한 남명에게는 나무를 심은 주인이 못마땅하였다. 강회백은 고려와 조선의 두 왕조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는 우왕, 공양왕, 이태조 3명의 임금을 섬겼다. 지조를 잃은 인물이 매화를 심었으니 명과 실이 어긋나지 않는가.  그래서 남명은 이런 시를 남겼다.

 

강회백( 姜淮伯) - 백보(伯父), 통정(通亭) - 조선건국

고려후기 추충협보공신에 책록된 공신. 문신.

시대: 고려

출생: 357년(공민왕 6)   사망: 1402년(태종 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강군보(姜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명나라에 갔다온 김유(金庾)를 찬성사(贊成事) 우현보(禹玄寶)와 함께 국문하였다. 혐의는 김유가 명나라에서 우왕의 혈통 문제를 발설했다는 것이다. 이후 12월 명나라에 갔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 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막내아우인 강회계(姜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通亭集)』이 있다.

 

강회백(姜淮伯)의 문집인 [통정집(通亭集)] 권1에는 

그가 젊은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때 손수 심은 매화를  찾아가 읊었다는

단속사(斷俗寺)에서 손수 심은 매화를 보며>라는 7언 절구 2수가 실려 있다.

 

-1-

우연환방고산래 偶然還訪故山來   우연히 옛 동산에 다시 오르니

포원청향일수매 蒲院淸香一樹梅   뜰 가득 맑은 향기 한 그루 매화에서 나네.

물성야능지구의 物性也能知舊意   매화는 옛 사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은근경향설중매 慇懃更向雪中梅   은근히 바라보며 눈 속에 피어 있네.

 

-2- 
일기순환왕복래  一氣循環往復來  천지기운 돌고돌아 오고 가나니

천심가견납전매  天心可見臘前梅  천심(天心)을 매화에게서 볼 수 있네.

자장은정조갱실  自將殷鼎調羹實  다만 솥을 가지고 매화 열매 조리할 것인데

만향산중낙우개  만向山中落又開  부질없이 산 속을 향해 지었다 또 피네.  

 

 

단속사 정당매(斷俗寺政堂梅)  -남명 조식-

 

寺破僧嬴山不古   절은 부서지고 중은 파리하고 뫼는 옛 산이 아니로다

前王自是未堪家   전 왕조는 왕가의 신하에게 절의를 단속하지 못하였는데

化工正誤寒梅事   조물주마저 한매(寒梅)의 지조를 그르쳤다네

昨日開花今日花   어제도 꽃이 피더니 오늘도 꽃이 피지 않는가 

 

정당매  - 자료 -산청군청-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줄기가 힘차께 뻗어 내려오다가 멈춘 옥녀봉 아래 남향으로 자리한 단속사 절터에는 동.서의 삼층석탑과 주춧돌이 어지러이 놓인 가운데 매화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매화나무로서는 수령이 가장 오래된 정당매(政堂梅)이다.

 

인재 강희안(1419~1464)의《양화소록(養花小錄에)》에 보면 우리 선조 통정공께서 소년시절에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공부를 하실 때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뜰 앞에 심어놓고, 시 한 수를 읊었다고 씌여 있다.(위 2번째 詩) 여기서 인재가 말하는 선조는 고려 말기의 문신인 통정(通亭) 강회백(1357~1402)으로 우왕2년(137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점점 높아져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성과 문하성의 종2품 벼슬)겸 대사헌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된 뒤 진양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다. 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강희안(姜希顔)의 조부이다,

 

그후 통정 강회백의 증손(曾孫)되는 강윤범(姜允範)이 문종 때 경상감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증조부가 심어 놓은 정당매를 찾아와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觀梅 追慕 那時栽  매화를 보고 심은 때를 헤아려 추모하도다

獨守 春光 任自開  홀로 봄 빛을 받아 스스로 피어 났네,

風雨 多年 無恙否  오랜 세월 비 바람 속에 평안이 있었구나

漢陽 千里 有人來  한양 천리 먼 길을 너를 보러 왔노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대로2897번길 10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대로 2909-3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정당매각(政堂梅閣)

 

정당매(政堂梅옆에는 정당매각(政堂梅閣)이라고 하는 비각(碑閣)이 있고 석비의 비문에는 정당문학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비(政堂文學通亭姜先生手植政堂梅碑)’라고 새겨져 있어 정당문학 통정 강회백선생이 직접 매화를 심었음을 알게해 준다.

 

우측의 비는 1915년 새로 지은 것으로 이 비를 세울 때 비각

 

좌측의 통정대부 강선생 수식 정당매비를 1847년에 후손인 강세주, 강택주가 세웠다. 자신들의 선조인 강회백이 이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절의 뒷뜰에 심었던 매화라고 합니다. 강회백의 손자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우리 조부 통정공께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조부께서 정사를 바르게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기에 단속사 스님들도 조부의 덕을 생각하고 그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조부를 본 듯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도록 정당매라 부른다.

 

단속사지 동서 쌍탑

 

탑이 있어 탑동이라 불리는 마을 앞에는 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인데 동네 어른들은 그냥 수탑과 암탑이라 이른다. 동쪽에 있는 탑은 꼭대기 머릿돌이 거의 깨어지지 않아 관(冠)을 쓴 것 같다고 하여 수탑이라 부르고 많이 깨어진 서탑은 모자를 쓰지 않은 민머리 같아서 암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재명은 동쪽(오른쪽)에 세워진 탑이 보물 제72호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山淸 斷俗寺址 東三層石塔)"이고, 서쪽(왼쪽)에 세워진 탑이 보물 제73호 "산청 단속사지 서삼층석탑(山淸 斷俗寺址 西三層石塔)"이다.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부가 올려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동·서 쌍탑을 이루고 있다. 두 탑은 세부 표현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전체적인 형식은 동일하다.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동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상층기단 탱주 수가 1개인 점, 결구방식이 간결해진 점 등으로 보아 9세기 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속사지 서삼충석탑(斷俗寺址 西三層石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 남쪽 기슭인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 남아 있는 쌍탑 가운데 서탑으로,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같은 사지에 남아 있는 동탑에 비하면 기단부의 훼손 상태가 심하며 상륜부의 부재도 많이 결실되었다.

 

단속사 창건 이후 탑의 정확한 건립 연대나 유래 등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두 탑의 규모나 제작수법에서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건립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행선사(神行禪師碑)의 제자인 삼륜대사가 신라 왕실의 협력으로 절을 중창했을 때인 813년을 전후한 시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탑은 1976년 완전 해체·수리되었는데, 이때 초층 탑신 상면에서 원형사리공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리장엄구는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斷俗寺址 東三層石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리산 남쪽 기슭인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 남아 있는 쌍탑 가운데 동탑으로,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 석탑이다. 상륜의 일부가 결실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옥개석의 체감과 비례가 알맞아 단아한 양식의 석탑으로 평가된다.

 

탑이 위치한 단속사는 경덕왕 7년(748)에 대나마 이순(李純)이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22년(763) 신충(信忠)이 창건했다는 2가지 설이 전한다. 신행(神行)의 제자인 삼륜이 헌덕왕 5년(813) 헌덕왕비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는데, 석탑은 이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초 유생들에 의해 가람의 일부가 훼손되고 불상과 경판이 파괴되기도 하였으나, 명맥을 유지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된 것으로 전한다. 지금도 최치원이 쓴 것으로 전하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의 명문이 남아 있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비(眞定大師碑)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99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서 사지 일부를 발굴하여 일부 건물지 확인과 여러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단속사지 동서 쌍탑

 

단속사지 당간지주(斷俗寺址 幢竿支柱)

산청 단속사지 당간지주(山淸 斷俗寺址 幢竿支柱)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운리, 단속사지에 있는 당간지주이다. 2018년 8월 9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636호로 지정되었다.

 

산청 단속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72호와 제73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약 106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993년 동쪽 당간지주 상부가 파손된 채 1915년에 건립된 政堂梅閣 보호벽의 문주석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을 1996년에 접합한 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3.73m이고 두 지주의 간격은 50cm이며 상부는 31cm, 하부는 44cm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차 넓어진 형태이다. 다만 마주보는 안쪽 면의 경우 폭 50cm로 상·하가 균일하게 치석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상부 끝부분은 2단 弧形이며 그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진 돋을새김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고 마주보는 면의 바깥 면 중앙에는 위에서 아래로 세로 홈이 나있다. 지주 상·하에는 방형의 간공이, 중간에는 원형의 간공이 뚫려 있는데, 대부분 꼭대기 안쪽 면에 뚫려있는 간공을 포함하여 3개를 지니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른 형태이다. 다만 두 지주 모두 중간의 간공과 아래쪽 간공 부분이 각각 절단된 후 접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사명대사 유정에게 주었다는 남명 선생의 시비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시비(詩碑)

단속사지 들어가는 입구의 길 오른쪽에 남명 조식선생의 시비(詩碑)가 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은, 합천군 삼가면 토동 출신으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명종과 선조로부터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고 한다.

 

비석에 적혀있는 시는 남명 선생이 단속사에 머물 때, 단속사를 방문한 사명대사에게 지어준 시(詩)라고 한다. 

 

증 산인유정(贈 山人惟政) - 단속사에 들린 사명당(유정대사)에게 준다

 

화락조연석(花落槽淵石)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춘심고사대(春深古寺臺)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별시동기취(別時動記取)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청자정당매(靑子政堂梅)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

 

※ 조연(槽淵)-단속사 앞에 있었던 작은 연못

 

단속사지 아래 용두마을 뒷산의 예사롭지 않은 개울가 큰 바위에는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廣齊巖門)'이란 큰 글씨와 '숭정 기묘 8월(崇己卯八月,1879년)에 썼다' 각자가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 못하였다.

 

단속사지(斷俗寺址) 입구 정자

 

단속사지 들어가는 입구

 

청계 - 운리 - 입석(버스정류장)

청계리(淸溪里  )- 석대산과 이방산 자락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하여 산지로 부터 내려오는 물들이 모이는 곳이다. 깊은 골의 맑은 물이 흐르므로 청계라 하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개당, 웃개당, 아릿개당, 가운데개당, 대현동, 점촌, 용두마을 등이 있다. 개당은 용두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깨금징이라고 도 불린다. 개당 윗쪽의 마을을 웃개당, 아랫마을을 아릿개당이라고 하 며 그 사이에 있는 마을을 가운데개당이라 한다. 대현동은 청계 서북족 에 있는 마을로 대현고개 밑이 된다 하여 대현이라 한다. 용두마을은 아릿개당으로 넘어가는 용두고개 밑이 된다 하여 용두라 한다. 점촌마 을은 용두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운리(雲里) - 이방산에 위치하여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원정, 탑동 등이 있다. 원정마을은 탑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큰 정자가 있 었다 하여 원정이라 하였다. 탑동마을은 원정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단속사삼층석탑이 있다 하여 탑동이라 한다. 문화재로는 신라 경덕왕 7년에 대내마 이준이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어 창건했다고 하는 단속 사터가 있으며 절터에는 보물 제72호의 단속사지동삼층석탑과 보물 제73호의 단속사지서삼층석탑이 있다.

 

운리로 들어서기 직전 다물민족학교의 평생교육원

다물민족학교’는 구한말 대성학원과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잇는 자생적 민족교육기관으로 1990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물(多勿)은 ‘되돌려놓는다, 되찾는다 는 의미로 고구려 동명성왕의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한다 는 취지를 본뜬 ‘다물정신’으로,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건강한 민족혼이 교육 이념이란다.

동명성왕(BC 58-BC 19)은 수천 명의 고조선 유민들로 다물군 을 조직해 한나라를 물리치고 고구려를 세웠다. 그 정신은 발해의 건국정신, 고려의 북진정책, 조선의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내리초등학교를 리모델링했다는 다물민족학교의 평생교육원 

 

운리마을 - 1

 

운리마을 - 2

 

운리마을 - 3

 

 날머리는 운리마을 주차장

 

지리산 둘레길 8구간 시작 들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