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합천 가야산
    전국 산행기 2022. 10. 10. 13:22

    # 일자: 2022년 10월 09일 일요일

    # 산행지: 합천 가야산, 만물상, 해인사, 산행

    # 산행거리: 11.27km  05시간12분

    # 산행루트: 백운동주차장 - 만물상코스 - 상아덤 - 서성대 - 칠불봉 - 가야산(상왕봉) - 해인사 - 치인주차장

     

    만물상

    만물상은 기암괴석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암릉이 펼쳐진 가야산의 대표적인 능선이지만 안전사고 위험으로 인해 1972년 10월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출입이 금지되었다. 38년만인 2010년 6월에 데크와 계단, 난간 등의 안전 시설을 완비한 후 개방했으며 이후 명실상부한 가야산의 대표적인 코스가 되었다.

    가야산은 소백산맥의 한 갈래로 경남 합천군, 거창군과 경북 성주군에 걸쳐 있다. 해인사를 비롯하여 심원사, 마애불 입상 등의 명승고적과 흥류동 계곡, 만물상, 용문폭포 등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고려 때 호국불심으로 국난을 극복한 조상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가야산 만물상 코스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 30년 간 출입을 통제해 왔는데, 20210년 6월에 해제되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그들만의 세상을 누려왔기에 온갖 나무들과 야생화, 새들과 산짐승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길가에 분홍빛 솔나리꽃과 동자꽃이 군락을 이루며 활짝 피어 우리를 반긴다. 산자락을 조금 올라가니 굴참나무군락, 신갈나무군락, 서어나무군락들이 한데 어울려 울창하게 자랐다. 산길이 퍽 가파르다. 숨을 헐떡이며 너덜 길을 지나 첫 능선 마루턱에 올라 성터(979m)에 이르렀다. 가야성터는 큰 돌무더기들이 수십 미터에 이르도록 무너진 채 있어 천 년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해발 천 미터에 가까운 이곳 능선까지 이렇게 큰 돌들을 운반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럭바위로 끝없이 펼쳐진 능선의 암릉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철계단을 몇 개 지나니, 산마루 반석 위에 뾰족한 돌기둥(해발1,096m)이 높이 서 있다. 건너 편 바위들이 아기자기하게 여러 가지 형상을 보여준다. ‘만물상’이다. 금강산 만물상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치가 퍽 아름답다. 돌기둥 아래에서 만물상을 조망하고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노라니 한 줄기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일행들과 함께 고스락의 암릉길을 따라 철사다리도 지나고 때로는 밧줄을 잡고 암벽을 오르내리며 지나다보니 큰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다. ‘상아덤’(서장대)이다. 넓은 반석 위에 큰 바위 몇 개가 서로 경쟁하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이곳에 머물면서 천신(天神) 이실하와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큰 아들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서장대에서 바윗길을 지나 철사다리를 오르고 나서 다시 암벽의 밧줄을 잡고 오르내리며 힘겹게 봉우리에 닿으니 ‘서성재’다. 서성재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갈림길에서 상왕봉 가는 길로 들어섰다. 조금 오르니 왼쪽 건너편 마애불이 모셔진 큰 바위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인다. 산새들이 소나무 숲에서 반갑게 노래한다. 다람쥐와 고라니 몇 마리가 우리를 보고 놀라 숲 속으로 달아난다. 험준한 암릉길을 따라 철사 다리 몇 개를 지나 세 시간 만에 가야산의 제일 높은 칠불봉(1433m)에 오르니, 천하를 얻은 듯 기분이 상쾌하다.

    김수로왕의 입곱 왕자가 이곳 아래에서 불도를 닦으며 수도한 후, 생불이 되었다는 칠불암은 지금도 주춧돌 일부가 남아 있다. 건너편 봉우리가 주봉인 상왕봉(1430m)이다. 산(山)시인 문원과 함께 바윗길을 조심스럽게 걸어 정상에 올랐다. 산마루에 올라서니 가야산의 맑은 정기가 온몸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가을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저 멀리 남덕유산과 지리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주변의 능선들이 겹겹이 푸르게 이어져 있다. 표지석에 ‘가야산 상왕봉’과 ‘우두봉(牛頭峰)’이 함께 쓰여 있다. 한 봉우리에 이름이 이렇게 두 가지로 불린다.

    정상에서 봉천대를 지나 서남쪽 능선으로 내려가면 최치원이 은둔했다는 홍류동 계곡을 지나 해인사에 닿는데, 우리는 서성재로 향하는 오른쪽 길로 내려왔다.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능선을 한참 내려오니 산자락에 억새꽃들이 은빛 군락을 이루어 가을을 손짓한다. 수직 암벽에서 떨어지는 계곡의 물소리가 한결 맑다. 계곡을 따라 한참 내려오니 산모퉁이 언덕빼기에 연보랏빛 쑥부쟁이와 흰 구절초가 무리지어 함초롬히 꽃을 피워 수줍게 웃고 있다.

    칠불봉

     

    가야산,伽倻山(상왕봉)

    주봉인 상왕봉(象王峯, 1,432.6m), 칠불봉(七佛峯, 1,433m)과 두리봉(1,133m)·남산(南山, 1,113m)·단지봉(1,028m)·남산 제1봉(1,010m)·매화산(梅花山, 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 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그 부속 암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야산은 선사시대 이래 산악 신앙의 대상으로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간직한 해인사를 품에 안은 불교성지로서, 그리고 선인들의 유람과 수도처로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 이유로 가야산은 민족의 생활사가 살아 숨쉬는 명산이자 영산(靈山)이라 일컫을 만하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외에도 우두산(牛頭山)·설산(雪山)·상왕산(象王山)·중향산(衆香山)·기달산(怾怛山) 등 여섯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三災 : 旱災·水災·兵禍)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의 주장은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봉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 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 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해인사,海印寺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 귀의(歸依)를 받았다는 뜻)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寺宇)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 사찰의 승려들이 사는 집)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