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점필재(김종직)길 1구간 & 동부 7폐사지(암자탐방)
    지리 산행기 2020. 12. 2. 15:16

     

    # 언제: 2020년 12월 01일 화요일

    # 산행지: 점필재(김종직)길 1구간 및 동부 7폐사지(암자탐방), 지리,智異의 품속으로

    # 산행거리: 11,91Km 09시간04

    # 산행코스: 엄천교(점필재길) - 적조암 - 산죽비트(갈림길) - 박쥐굴 - 야묘터 - 헬기장 - 상대날등 - 금낭굴 - 선열암

                    유슬이굴 - 선녀굴 - 의논대 - 고열암 - 점필재길 - 전망대 - 일강바위 -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Back) - 미타봉삼거리 - 향로봉(오뚜기바위) -  와불산 - 통락문(안락문) - 독녀암(노장대) - 신열

                    암(Back) - 환희대 - 양민거주지(노장동) - 지장사 - 돌배나무 - 적조암

     

     

     

    점필재,김종직(金宗直)

    [생졸년 : 1431(세종 13) -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자(字)는계온(季溫).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또는 一善)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 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正三品) 홍신(弘信)의 딸이다. 외가(外家)인 밀양(慶南 密陽)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에 진사(進士)가 되고, 1459년(세조 5)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사사(慶尙道兵馬詞事)등을 역임 한후,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이어서 도승지(都承旨). 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윤(漢城府尹)등을 두루 거쳤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成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文人)들을 관직에 등용 시켰으며, 기성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어 켰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바 있었는데, 사후(死後 : 죽은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第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 되었으며, 그의 문인(文人)들이 모두 참화(慘禍)를 입었다.

     

    그가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게 된 것은, 18세(歲) 때였고, 23세가 되던 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유생들과 교류 하면서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게 되었다. 길제(吉再)와. 아버지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체적 방면에 치중한 것이었다.

     

    성종(成宗) 초(初)에 경연(經筵)을 열고, 학문 있는 선비를 선발할때, 그가 가장 특출하여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그해 밀양(密陽)에 계신 노모(老母)를 위해 사직을 청하여 낙향 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제자들을 배출 하였는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 이종준9李宗準)등이 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여러가지 정치적 업적도 많았으나 문인을 다수 배출 하였다는 것이 후세의 문화유산에  더 큰 업적이라 하겠다. 그의 문인들에 의하여 후일 사대부정치(士大夫政治)가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숙종(肅宗)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하였고,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유두유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가 있으며, 통재관(摠裁官)으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5권을 증수(增修) 했으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548년전 김종직선생의 발자취는 엄천사터를 지나 엄천강을 건너 구시락재-거머리재-적조암-지장사갈림길-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숙)-의론대-1강과 구롱길-청이당-영랑대-해유령-중봉-마암-천왕봉(숙)-향적대(숙)-천왕봉-통천문-제석봉-세석-창불대-영신대(숙)-좌고대-바른재-백무동으로 내려왔다.

     

    엄천교에서 백무동 주차장까지 도상거리 30km가 넘는 먼길이다. 대부분의 길은 익히 알고있는 것과 같고 1,2구간이 명확하지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올해초부터 [도솔산인]선생님과 수차례 답사산행을 하였고 5월달에 조용헌 박사 취재산행에선 화개분소 조봉근씨가 구롱길에서 방장문 석각을 발견하면서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구롱길은 잘못들어가면 너덜로 인해 미로같이 복잡한곳이다. 그 속에서 한갈래의 길을 찾는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지만 타고난 감각으로 구롱길을 개통한 분은 <산영>형님이다. 지형도와 지적도, 위성지도등을 활용해 계획을 세우고 중복을 피해 차근차근 답사를 하면서 청이당에서 새봉사이 동부능선의 양지와 음지를 두루두루 살폈다.

     

     

    지난 9월6일 바야흐로 때가되어 유람록 산행을 계획하였고 그 내용은 김종직 선생의 유두루록을 바탕을 두었고 혹여 지루할수있는 어프로치 구간에도 여러편의 유람록을 참고하여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도솔산인]선생님과 [산영]형님의 도움으로 "김종직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인문산행을 기획하게 되었으며 이 길을 걷다가 두분의 수고로움을 한번씩만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점필재(김종직)길 함께한 부산 멋진 산친구 칠성님 글 -

     

    김종직_유두류록 (1구간 국역본)

    자랐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아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느라 나이 이미 마흔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년, 성종2년)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고개만 들면 푸르게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볼 수있었다. 그러나 흉년으로 인한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1472년, 성종 3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류산을 함께 유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생각해보니, 몸은 날이 갈수록 파리해지고 다리의 힘도 더욱 노쇠해지니, 이번 해에 유람하지 못하면 다음 해를 기약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어, 보름날 밤에는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감상하고, 다음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런 다음 사방을 두루 유람한다면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유극기를 불러 조태허와 《수친서(壽親書)》에 ‘유산에 필요한 도구〔遊山具〕’를 살펴보고, 유람에 휴대할 것을 약간 더하거나 줄였다. 

     

    1472년 8월 14일 무인일(당시42세-양력9월25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 그에게 지나온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길을 인도하게 하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1리쯤 더 가니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조태허와 한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절이 내려다보였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지어져 있는데, 절벽 밑에 두 샘이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너른 바위가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 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 되어 보였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승려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이 있는데,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리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도솔산인님 글-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엄천교 가기전 경남 함양군 휴천면(천왕봉로)

     

    상내봉(와불산)으로 불렸던 지명, 앞으로는 지명 미타봉으로 바꾸어 불릴 것이다.

     

    548년전 김종직선생의 발자취는 엄천사터를 지나 엄천강을 건너 구시락재-거머리재-적조암-지장사갈림길-환희대-선열암-신열암-독녀암-고열암(숙)-의론대-1강과 구롱길-청이당-영랑대-해유령-중봉-마암-천왕봉(숙)-향적대(숙)-천왕봉-통천문-제석봉-세석-창불대-영신대(숙)-좌고대-바른재-백무동으로 내려왔다.

     

    花巖(巖:산봉우리암)은 꽃봉산을 가리킴(연꽃의 형상임)

     

    꽃봉산은 花巖이다. 花巖은 꽃봉산 아래 특정한 바위가 아니고 꽃봉산 이름이 花巖이다.

    巖은 바위라는 뜻만 있는것이 아니라 산봉우리의 뜻도 있다.

    花巖에서 巖은 바위가 아니고 峯을 뜻한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엄천교

     

    당산나무-점필재(김종직) 쉬어간 곳

     

     

    1472년 8월 14일 봉덕사 승려 해공(解空)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여 함양 관아를 출발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과 함께 엄천 동강교를 건너 화암(花巖) 아래 당산나무에서 묘정암 스님 법종(法宗)을 만나 길 안내를 받는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구시락재

     

    적조암

     

     

     

     

     

     

     

     

     

    적조암 위의 독가(獨家)의 옆으로

     

     

     

     

    산죽비트(노장대골) - 박쥐 굴 - 갈림길

     

    지리 함께하고 경남 사천 배완식 동생 시그널

     

     

     

     

    박쥐 굴

     

     

     

     

     

    박쥐 굴 내부...박쥐 정말 살고 있다.

     

     

     

     

     

     

    박쥐 굴에서 - 함께 한 산행 친구 들

     

     

     

    우린 지장사 터로 알고 있었다 - 이곳도 지장사터 추정 - 지장사 터라고 주장하는 곳은 야묘(野廟) 터로 본다. 야묘(野廟)는 마을 사람들이 토지 신에게 祭를 지내는 사당이다. -도솔산인님-

     

     

     

    상대날등 - 폐 헬기장(1)

     

    상대날등 - 폐 헬기장(2)

     

    금낭굴 가기전 상대날등에 버티고 있는 암석

     

    금낭굴 가기전 - 노각나무 - 얼마나 오랜시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

     

     

    금낭굴

     

    주변에는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금낭굴 내부

     

     

     

     

     

     

     

     

     

     

     

     

     

     

     

     

    선열암 가는 길에 어마, 어마한 암석...

     

     

     

     

     

     

     

     

     

     

     

     

     

     

     

     

     

    이런 조그마한 석굴에 있더라...아이고 허리야...ㅎㅎㅎ

     

     

     

     

     

     

     

    그리고 선열암 오르막 로프...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掩藤 : 등나무 扃 : 빗장경 닫을경. 矗矗 : 우뚝솟을 촉. 冷冷 : 맑고 시원하다. 結夏 : 하안거를 마침. 錫 : 錫杖, 禪杖 도사 승려가 짚는 지팡이 只 : 다만. 猿鶴 : '원숭이와 학'의 의미는 猿鶴沙蟲(원학사충)의 준말로 은거하는 선비를 이르는 말. 주목왕周穆王의 군대가 몰살되어 군자는 죽어서 원숭이나 학이되고 소인은 죽어 모래나 벌레가 된다는 고사.

     

    선열암,先涅庵

     

     

    선열암 촉촉수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雲根矗矗水冷冷 :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운근(雲根)은 공기가 차가운 바위에 부딪쳐 구름이 생기고 물방울이 맺히는 커다란 바위를 뜻하고
    촉촉수(矗矗水)는 높은 곳에서 톡톡(촉촉 : 의성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인데 절묘한 시어입니다.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퍼온글- -도솔산이님-

     

     

     

     

     

     

     

    점심식사 중 막걸리 한잔 - 아마 점필재(김정직)선생께서도 쉬며 약주 한잔 하셨을 것이다.

     

     

    유슬이굴에도 주변에는 기와와 옹기그릇 파편이 흩어져 있다?

     

    유슬이굴 해발 860m

     

    함양군수로 재직중이던 1472년(성종 3년) 점필재(김종직) 선생이 이곳 폐사지를 거쳐 천왕에 올랐다는 자료가 유두류록에 남아 있다하는데, 두류는 지리의 옛이름.

     

     

     

     

     

     

     

     

     

     

     

     

     

     

     

    갈림길 사거리 - 우린 선녀굴 방향으로 고고싱

     

     

    선녀굴 폐사지

     

    마지막 빨치3人 암굴비트 - 선녀굴 
    정순덕 
    1933년 6월 20일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래리 안내원 마을에서 태어나 - 지리산에 빨치들이 활동시작한 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 인근 시천면 황점부락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음해인 50년 5월초 석성조에게 17세나이에 시집가게 된다. 그리고 다음달 전쟁이 터진다. 신랑,성조는 인민군 치하시절에 로동당 산청군 시천면 당원이 되어 인민위원회에서 일하게 된다.  부역자가된 석성조는 보복이 두려워 빨치로 입산하게 된다.이후 정순덕 신부는 경찰들의 고문,협박에 견딜수가없어 남편을 찾아 입산,  빨치산을 만날수 있었고 남편도 연락받고 ,두달만에 재회할수 있었다. 이후 정순덕은 밥하고 빨래하는 일로 도깨비 부대에조직 개편된다. 그러나 빨치산은 유격대의 경우 전투력에 지장을 준다며 연애하다가 걸리면 총살.  정순덕은 진양군 유격대에 남고 석성조는 산청군 유격대로 간다. 결국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두달, 산에서 한달여정도 같이 지낸것이 전부였다. 
    이은조
    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이홍희
    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서촌마을에서 여자형제만4명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15살에 인민군 ‘소년단’에 가입, 좌우가 뭔지 모르는 시골 소년, 가입하면 공짜로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서였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자 군경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을수 없을것 같다는생각에 입산, 이영희 부대장의 연락병을 맡게 되었다.
    61년 송대마을위선녀굴에서 이은조가 경찰 매복조에 사살, 시신은 정순덕에 의해 암장되었다. 63년 11월  안내원 마을에서 이들 2인조의 끄나풀 역할을 하던 성수복이 관할 삼장지서에 밀고.  대공경찰관은 매복한 끝에 정순덕과 이홍희가 집에 들어가는것을 포착,이홍희는 현장에서 사살,정순덕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안내원 마을에서 13년만에 체포 - 긴 세월 좌,우 이념대립으로 많은이들이 죽음의 피를 지리속에 묻었다. 마지막 빨치여인 정순덕

     

    정순덕, 마지막 빨치산들은 선녀굴에서 은거 하며, 좌측 거암의 사면을 보면 모진 지리산의 추위를 피하기 위한 흔적이 지금도 생생남아있음,  한낮에 돌을 미리 데워두었다가 껴안고 자거나 이처럼 바위를 데워 그 열기로 겨울을 지냈다는 말도있음?

     

     

     

     

     

     

     

     

     

     

     

    선녀굴 석간수 샘 - 온화한 양지에 뒷편으론 거대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사계절 마르지 않은 석간수 샘이 존재하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세입니다.

     

     

     

     

     

    이은조가 최후를 맞은곳

    함북 웅기출신, 모스크바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 6.25가 터진후 당의 지시에 따라 경남 의령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9.28 수복때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영회 부대에 합류.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3인중 위원장 직책으로 활동

     

     

     

     

     

     

     

     

     

     

     

     

    의논대 오르전 명품 소나무

     

    의논대 오르전 명품 소나무


     

     

     

     

     

    의논대 - 의논대는 주변의 암자 들, 신열암,선열암,고열암 등에 기거하던 스님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불법을 논하던 곳이라고하여 의논대, 의논대가 되었다고 한다.

     

    일강(一岡)과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 영랑대, 두류봉, 말봉, 영롱봉, 조망  벗삼아

     

    議論臺(의논대)_김종직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 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 김종직의 議論臺(의논대) 詩에 나오는 소림 선방에 대하여

     

    미타봉(1164.9m) 뒤 송대 마을 쪽에 석굴이 있는데, 석실 내부에 바닥을 평탄(平坦)하게 하기 위해 축대를 쌓았다. 그리고 상 허리길이 고열암에서 미타봉으로 연결이 되는데, 삼열암의 승려들이 이 길로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의 지명은 암자 이름은 그렇다 하더라도 화암, 환희대, 의논대, 향로봉, 미타봉, 소림 선방 등 모두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환희대는 환희지(歡喜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10地) 중 첫 번째를 말한다.

     

    ☞ 환희지(歡喜地) : 보살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열 가지 지혜의 경지 중 10지의 중 첫 번째를 말함.

     

    그렇다면 김종직의 '의논대' 시 2구에 나오는 '소림 선방'어디인가? 그동안 막연하게 '바위 사이 한 곳'을 미타봉으로 생각지만, 이번에 직접 석굴 내부로 들아가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조망 바위에 올라가니, 의논대와 고열암이 코 앞에 들어왔다. 또한 암봉 서너 곳에 일부 남아있는 석축은 수행하는 공간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담장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미타봉은 마미타불의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미타봉의 석실은 아미타불이 되기 위한 胡僧(참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김종직의 유두류 기행시 '의논대'에 '소림 선방'의 시어로 나타나 있다. '소림 선방'은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 수행을 했다는 소림굴(小林窟)을 말한다. 미타봉은 아미타불의 형상으로 붙여진 이름일 뿐만 아니라, 인도 꿋꿋따빠따기리(계족산)에 있는 가섭이 부처님 가사를 가지고 들어가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리며 선정에 들어간 석굴을, 영신봉(계족봉)의 가섭대에 옮겨다 놓은 것처럼, 달마 대사가 면벽수행했다는 중국 숭산(崇山)의 소림사(小林寺)에 있는 소림굴(小林窟)을 지리산 미타봉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송대에 사는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미타봉 아래에 인공으로 조성된 석축과 자연 동굴이 여러 개 있다고 한다. -퍼온글 도솔산인 님-

     

    아미타불(Amitabha, 阿彌陀佛) :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다. 다섯 구원불 가운데 하나로 '무한한 수명'이라는 뜻을 가졌다.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정토에 태어나 복을 누리며 산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아미타불 신앙으로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아미타경소를 계기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동의어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수불(無量壽佛)

     

     

     

     

     

     

     

     

     

     

    의논대에서 독녀암(노장대)조망

     

     

    고열암(古涅菴)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오랫동안 불가에서 수행하여 불도의 지식을 많이 쌓은 승려)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뒤에 납의(衲衣)를 입은 요주승(寮主僧)이 와서 합장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 지금 요주승은 한 낮선 노인네를 보았을 뿐인데,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少選. 寮主僧荷衲來. 合掌云. 聞使君來遊. 何在. 空目僧休說. 僧面稍赤. 余用蒙莊語. 慰藉云. 我欲煬者爭䆴. 舍者爭席. 今寮主見一野翁耳. 豈知某爲使君. 空等皆笑. 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퍼온글- -도솔산인님-

     

     

     

    고열암 샘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金宗直, 佔畢齋)

    病骨欲支撑,병골욕지탱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잠차포단숙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송도비명월 : 소나무 물결(파도소리)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오의유구곡 : 국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부운복하의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야반폐암곡 : 한밤중 바위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유장정직심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당득산영록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점필재 길 걷다보면 - 기나긴 시간,세월을 버틴 오래된 나무 조망터가 나온다.

     

     

     

    알강바위

     

     

    옛 상내봉(와불산) 정상석 있던자리

     

     

     

     

    미타봉(소림선방,좌선대)가기전, 옛 와불산 정상석

     

     

     

    드론으로 촬영한 미타봉 전경 사진

     

    소림선방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퍼온글- -도솔산인님-

     

    소림선방 내부

     

     

     

     

     

     

    조망터,좌선대(坐禪臺)

     

     

     

     

     

     

     

     

     

     

     

    한신능선, 오공능선, 반야봉, 그리고 가까이 벽송능선 창암산, 조망

     

     

    좌선대 옆 미타봉 직벽

     

     

    상내봉 삼거리 갈림길

     

    오뚜기 바위

     

     

     

     

     

     

     

     

     

     

    와불산 정상 - 독녀암(노장대), 베틀재, 공개바위, 갈림길

     

     

     

     

     

     

    안락문,安樂門 (통락문) - 근심걱정을 넘어 안락한 세상으로 가는 문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원문]

    訪新涅. 無僧. 亦負峭壁. 菴東北有巖. 曰獨女. 五條離立. 高皆千餘尺. 宗云. 聞有一婦人. 累石巖間. 獨棲其中. 鍊道沖空. 故爲號云. 所累石猶存. 柏生巖腰. 欲上者. 梯木挽其柏. 廻繞巖闕. 肯腹俱盪磨. 然後達其頂. 然不能辦命者. 不能上. 從吏玉崑聳山. 能上而超足麾手. 予嘗往來山陰. 望見是巖. 與諸峯角出. 若柱天然. 今而身跨玆地. 毛骨愯然. 恍疑非我也.


    -퍼온글- -도솔산인님-

     

     

     

     

     

     

     

     

     

     

     

     

     

    함양독바위는 독녀암(노장대)이다.

     

    함양독바위의 지명을 고문헌에 근거하여 독녀암(노장대)으로 부르자고 처음 제안한 분은 솔레이 이용훈 박사이다.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獨女巖)으로 기록하고 있고, 한말 마적동에 은거했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와 문정동에 살았던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 노장대(老將臺)라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 다른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17권 변어전고(邊圉典故)]에는 독녀성(獨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함양독바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근거했는지 모르지만, 세인들이 함양 독바위라고 하는 것은 지리산길 지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도 또한 지명의 정확성이 그 생명이다.

     

    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나. 강지주(姜趾周, 1856~190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방장산은 바다 가운데 삼산의 하나로 크고 깊고 넓기가 인간세상에서 으뜸이다. 거기서 가장 높은 곳을 천왕봉이라 하며, 천왕봉에서 시작된 높고 가파른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노장대(老將臺)가 되었고, 그 한 가지가 다시 북쪽으로 십여 리를 달려 불룩하게 솟았으니 각산(角山)‧배산(背山)이라 한다. 마을이 있고 마적동(馬跡洞)이라 하는데 내가 사는 곳이다.

     

    다, 강계형(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봉우리(향로봉)에서 곧장 뻗어 내린 것은 노장대(老將臺)(*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老將臺)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老將臺)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경상도, 산음현

     

    [고적] 개품부곡(皆品部曲) 다른 이름은 장계(長溪)이다. 현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옛날에는 단계(丹溪)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송곡소(松谷所) 현 북쪽 13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古山城)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3백46척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독녀성(獨女城) 현 서쪽 2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가 천 7백 30척이고, 시냇물과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마.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제 17 권 변어전고 (邊圉典故)폐지된 산성

     

    - 산음 고산성 :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독녀성(獨女城) :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퍼온글- -도솔산인님-

     

    드론 촬영

     

     

    독녀암(노장대)석문

     

     

     

     

     

     

     

     

     

     

     

     

     

    독녀암(노장대) - 독녀암(노장대)바위군(群), 또 다른 별세계 바위 숲, 거대한 암봉군의 [독녀암(노장대),함양독바위] [옹암(甕巖),진주독바위], [하동독바위]와 더불어 지리산 3대 독바위로 불린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독녀암’으로 등장하는데, 한 여인이 이곳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득도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돌기둥이 숲을 이룬 듯 솟아있다.

     

    독녀암 오르는 밧줄

     

     

     

     

     

     

     

     

     

     

     

     

     

     

     

     

     

     

     

     

    환희대 명품 소나무

     

    환희대 -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1리쯤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라고 읽어 점필재가 지장사에 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도솔산인 님-

     

     

     

     

     

     

     

     

     

     

     

     

     

     

     

     

     

     

    주변에 무속인 쓰고 있는 창고도 있고, 바위뜸에 인형도 보인다.

     

     

     

    점필재(김종직)길 함께 했던 부산 산친구 칠성님 글

    지장사터를 답사한 오룩스 트랙과 다음에서 제공하는 지적도를 등고선 기준으로 합성한것이다.갈림길(뽕나무) 웨이포인터 부근에 운서리 1288번지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가 보인다. 도솔산인 선생님은 유두류록에는 지장사에 대한 내용이 없는것으로 보아 지장사 갈림길에서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갔다로 판단하셨으며 아래 노진의 시에서 보듯이 박쥐굴 윗쪽에 지장사터는 물소리와 거리가 멀어보인다.

     

    <산영>형님은 운서리 1260번지까지는 말을 타고왔고 계곡과 인접한 1268,1267번지는 지금로 치면 주차장이나 여각에 다가 매어놓았을것으로 추정한다. 그 여각에서 옥계선생이 물소릴 들으며 주무신건 아닐까? 


    옥계 노진의 야숙지장암(夜宿地藏庵)_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548년전의 길이 아직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첩첩산중에도 지번이 있는건 그 전부터 사용하던 길을 일제강점기에 수탈의 목적으로 지적도를 그렸다고 본다.

     

     

     

    지장사 터 석축으로 보인다 - 지장사 터 도착

     

     

     

    지장사 터

     

     

    돌배나무

     

     

     

     

     

     

    돌배나무 두아름(대략 4.3m)

     

     

     

     

     

    하산하며 산죽비트 길

     

     

     

     

     

     

     

     

     

     

     

    ♬ Caravan Sary - T.S Nam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