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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골, 날끝산막골, 석굴(하봉굴), 이끼폭포(천상폭포), 영랑대지리 산행기 2021. 7. 24. 10:23
# 언제: 2021년 07월 23일 금요일
# 산행지: 국골. 날끝산막골, 석굴(하봉굴), 이끼폭포(천상폭포), 영랑대, 하봉(소년대굴),
# 산행거리: 15.99Km 11시간00분
# 산행루트: 추성주차장 - 국골 - 날끝산막골 - 석굴(하봉굴) - 이끼폭포(천상폭포) - 동부능선(태극종주길)
영랑대 - 하봉(소년대),소년대굴(Back) - 초암능선 - 초암농원 - 추성주차장
# 국골 : 영랑대 주변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며 초암능선과 두류능선 물줄기가 합수됨
# 국골좌골 : 두류능선 영랑재 주변에서 물줄기가 시작되고 두류능선 물줄기가 합수됨
# 국골우골 : 초암능선 촛대바위 주변에서 물줄기가 시작되 초암능선 물줄기가 합수됨
# 국골좌좌골 : 두류능선 1,460m 주변에서 시작되고 두류능선의 많은 물줄기가 합수됨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고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운전중 멋진 자연에 취해 잠시 정차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에서 풍장+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 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우리 죽을 때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며...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꺼비-
추성산장 국골 가는 길 - ㅎㅎㅎ
경남 함양군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마을의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양군편 ‘천왕봉 고성’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산속에 옛 성이 있는데 일명 추성(楸城) 또는 박회성(朴回城)이라 한다. 의탄에서 5-6리 떨어졌는데 우마가 갈 수 없는 곳이다.” 함양군 자료에는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가락국 양왕(구형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추성”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추성리 주위엔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했을 때 양왕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피란처로 이용했다는 성터가 있다. 그 밖에 추성과 지명이 비슷한 ‘성안’ 마을과 양왕이 진을 쳤다는 ‘국(國)골’이 있다. 국골 옆의 어름터는 석빙고로 쓰였고 두지터는 식량 창고로 이용되었단다.
-두지터 마을은 옛날 신라가 가락국을 침범했을 때 식량창고로 이용됐다고 한다.
삼봉산이 뾰족하게 조망되고
추성리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 칠선계곡 들머리 제일 뒤에 있는 집 왼쪽으로 가로 질러 가면 된다.
창암능선 끝자락, 창암산으로 이어지는 장구목 주변능선, 칠선계곡 눈에 들어오고
점점 길어지는 여름 날씨 더워도 너무답다 날씨 적응 하기 힘뜰때는 시원한 계곡으로 염천시하의 더위 속에 오늘은 국골로 파고들어 본다.
국골,國谷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국골(國谷)은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피난처였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당들이 굿판을 많이 벌여 굿골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가야시대 왕이 피난 차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데서 국골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피난 당시 두지터는 가야국의 식량창고였으며, 광점동 얼음터는 석빙고터였다. 구형왕은 이곳에서 50리쯤 떨어진 왕산(王山) 기슭에 별궁인 수정궁(水晶宮)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추성동 염소농장 바로 아래서 칠선계곡에 합해지는 계곡이다. 이 사실과 관련지어 김경렬옹(작고)도 국골의 천연요새를 막다른 최후의 피난처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였으며, 그는 또 달궁에 도성을 쌓고 72년간 명맥을 유지했던 마한(馬韓) 최후의 왕조가 달궁을 버리고 40리 거리인 국골로 옮겨 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옛왕조의 파천설이 있을 만큼 추성동 일대는 천연요새임에 틀림없다.국골은 초암능선을 사이에 두고 칠선계곡과 이웃해 있다. 추성산장에서 시작한 등산로는 본류를 두 번 건넌 다음 고도 890m 지점의 좌측 지계곡을 건너 능선과 사면을 거쳐 국골사거리로 이어진다. 이 등로를 따른다면 아쉽게도 국골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고도 1,050m 이상에서 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의 중, 상단인 - 고도 1,050m 지점에서 두 개의 골짝으로 갈라진다.
지형도엔 하봉과 두류봉 사이로 올라가는 좌측 골[날끝산막골]이 본류임이 분명하지만실제 현장에는 우측 골[선골]이 본류 형세를 하고 있는 듯하다. 우측 골로 오르면 초암능선 촛대바위 아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거의 협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계곡이 곧추 섰다고 [선골]이라고 한다.한편 호리병처럼 숨어 있는 듯한 좌측 골은 초입에서 조금만 오르면 폭이 넓고 수량도 많아진다. 고도 1,350m 합류점을 만날 때까지 폭포가 잇달아 나타나면서 폭포의 향연이 시작되는데, 산행 걷다 느끼지만 지리산의 마지막 숨은 비경이라고 극찬하고싶다. 능선 상의 날머리에 산막이 있었다고 [날끝산막골]로 부른다.
국골 사면 길에 있는 별통 집
국골 쌍폭포 시원하다
분기점(합수부)지점 영룡봉에서 추성리로 조금 내려선 두류능선(1440m)으로 이어진다는 벌떡선골, 벌떡선골을 건너 지능선으로 붙으면, 얼마 안 가 오른쪽 사면으로 난 길을 따라 국골 사거리로 방향
분기점(합수부) 해발약880m 지점에서 바라본 국골 상류부 방면으로 펼쳐지는 풍경
이어지는 국골 분위기
국골 좌골(날끝산막골) 초입부 분위기
합수부 지점 - 고도 1050m 국골 좌우골이 만나는 합수지점에서 좌골로, 우골인 선골이 아닌 좌골인 날끝산막골이 국골 본류이며, 본류처럼 보이는 선골은 초암능선 촛대봉 아래 안부로 이어진다는데, 거의 협곡으로 이루어진 곧추선 계곡이라 하여 선골이라 부른다고, 호리병 주둥이처럼 초입이 비좁은 날끝산막골은 조금만 오르면 진면목이 드러나며, 그전에 능선으로 올라서는 날머리 부근에 산막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던가?
이제 날끝산막골의 이끼계곡, 폭포, 풍광에 취해보자
날끝산막골 계곡 풍광
층층연폭포
짙은 숲과 초록이끼 가득한 계곡,
그 속에서 층층이 소폭들이 흰 포말을 만들며 쏟아진다.
말이 필요없는 비경중 비경이다. 한걸음 두걸음 옮길 때 마다
새로운 폭포가 나타나니...계곡은 온통 폭포 뿐이다.
날끝산막골 이끼폭포 계곡풍광
멋진 곳이였는데 이끼폭포 이끼가 별로없다
쌍폭 이끼폭포
폭포 상단부 방면으로 올라가면서 내려다보고 담은 풍경
합수부(해발약1340m) 지점이며, 걸려있는 폭포는 (날끝산막골) 방면으로 합수되는 지계곡 날머리이며, 이 지계곡은, 석굴 (초암능선) 방면으로 이어져 간다.
석굴(하봉굴) 초입 거대한 암벽
시커먼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하봉 서사면 자락 해발 1,450m지점이다.
석굴(하봉굴) 내부모습
함께한 산우님 석굴(하봉굴) 탈출구를 빠져나오는 모습
석굴(하봉굴) 상부의 거대 암굴
이끼폭포 방향 으로 내려오며 조망되는 짝궁댕이
국골 좌골 (날끝산막골) 마지막 이끼폭포(천상폭포) 풍광
해발 1,470m에 위치한 고산 이끼대폭, 언제봐도 그 모습이 장관이다.
이끼폭포에서 즐거운 오찬, 폭포 풍광을 즐기고, (날끝산막골) 마지막 폭포인 (가칭) (천상폭포) 에서 윗쪽으로 탈출하는 오름길은 좌측 방면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뜬돌 낙석위험이 많은 현재진행형 가파른 사태 산사면으로 형성되어 있다.
오름길을 탈출 하면 두류능선 상 동부능선(태극종주)길 나온다 우린 영랑대 방향으로 고고싱
영랑대를 경유 또는 우회하는 하봉 옛길이 나뉘는 곳에 자리 잡은 무덤, 그 무슨 사연으로 이 높은 곳에 묻혔을까
영랑대,永郞臺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지리 주능선의 장관과 발 아래 골을 만들고 있는 산줄기가 한눈에 잡히고, 1백리 주능선의 이상적인 전망대라 할만한 위치에 솟아 있는 봉우리, 발 아래 초암능선의 촛대봉과 암봉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암릉을 이룬 바위들은 거칠고 무뚝뚝하며, 전체적인 균형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촛대처럼 길쭉하게 솟은 바위들이 있는가하면 두루뭉슬하게 솟은 바위도 있다. 바위 사이사이에는 구상나무가 어울려 운치를 더하고, 이런 암릉 구간에도 아름다운 야생화가 예쁘게 꽃을 피워 웃고있다.
영랑대에 올라 지리 조망을 살펴보며 생각한다, 옛 선인 들 영랑대 산행 길 추억 여행은 어떠했을까, 영랑대 오르는 길 영랑대 올라, 1백리 주능선 이상적인 전망을 하며, 아마 선인들 우리 와 똑같은 생각 마음 이였을 것이다.
이길은 이미 500년 전 점필재 김종직선생 일행이 하봉능선을 따라 중봉, 천왕봉(상봉)을 오른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는 길이다, 그의 [유두류록]에 생생한 등정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그의 기록 가운데 하봉부분을 살펴보면 영랑고개와 소년대란 지명이 나온다. [유두류록]에는 능선 안부에서 하봉까지 접근하는데도 상당히 애를 먹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함양에서 이 봉우리를 보았을 때는 가장 높고 빼어났는데, 여기에 오르고 보니 다시 천왕봉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영랑이란 사람은 신라 때 화랑의 우두머리였는데,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와서 산수간을 노닐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영랑고개란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소년대는 봉우리 한쪽에 있는 높은 바위를 두고 부르는 것인데, 나무와 덩굴, 이끼에 덮여 접근이 힘들었다, 소년대란 영랑의 무리를 기념하여 부른 것인데, 내가 바위를 보듬고 아래를 내려다 보려 하자 종자가 가까이 와서 위험하다면서 붙잡았다,
바로 그때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발아래에서 드러나면서 동쪽과 서쪽의 계곡이 안겨들었다, 골짜기를 이룬 곳에서 활엽수 등의 접목은 없고, 침엽수인 구상 나무가 주종을 이룬가운데, 말라죽은 나무가 3분의 1은 되었고, 단풍나무도 띄염띄염 섞여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점필제 김종직 선생은 영랑대를 함양에서 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우뚝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영랑고개는 두류봉과 하봉 사이의 험준한 길에 있는 국골 사거리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영랑대에서 바라본 하봉(소년대), 중봉, 상봉
초암능선 국골 두류능선
하봉(소년대)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 。
○ 8월15일,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가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2. 1586년 양대박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 9월 초6일(정유). 간신히 폐허가 된 제석당(帝釋堂) 터에 이르렀다. 천왕봉을 올려다보니 보다 더 높은 것이 없고 보다 더 큰 것이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없는 하늘과 같았다. 다음으로 제석봉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장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나 상봉에 비하면 발돋움을 하여도 미치지 못할 듯하였다. 상봉의 동쪽에는 소년대(少年臺)가 있는데 바위가 우뚝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형세였다. 소년대(少年臺) 조금 아래쪽에 독녀봉(獨女峰)이 있는데, 봉우리의 형세가 홀로 우뚝하여 짝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외 마음에 드는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는 말로써 형용할 수 없었다. 여러 산을 둘러보니 모두 발 밑 저 아래에 가물거렸다.
3.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원문]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俯臨陰壑. 然昏黒. 魄遁眼眩. 攀木却倚. 愕眙而不能稽. 永郎者. 花朗之魁也. 新羅時人也. 率徒三千人. 遨遊山海. 我國名山水. 無不寓名焉. 循山脊. 指天王峯而東. 山多烈風. 樹木皆擁腫. 枝柯向山而靡. 苔髮骨樹. 鬖鬖如人被髮而立. 松皮柏葉之木. 中無腸而榦四披. 枝頭下搶干地. 山益高而樹益短. 山之下. 濃陰交翠. 而至此花梢未吐葉. 尖如鼠耳. 巖罅有積雪盈尺. 掬而啗之. 可以沃渇喉. 有草纔抽芽. 靑莖者曰靑玉. 紫莖者曰紫玉. 僧云此草味甘滑可食. 擷之盈掬而來. 余曰. 僧稱靑紫玉. 乃仙家所餌瑤草也. 乃植杖手摘之. 殆滿囊焉. 前登少年臺. 仰瞻天王峯. 高出雲漢. 無雜草木. 只蒼柏聯緣而生. 被氷霜風雨所侵暴. 枯死骨立者十居二三. 望之如頒白老人頭. 殆不可盡鑷者也. 少年云者. 或稱永郞之流也. 余意天王峯. 長老也. 此峯. 奉承之如少年. 故名之歟. 下視群山萬壑.
○ 계유일 4월 4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두컴컴하였다. 머리가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마다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쌓인 눈이 한 자나 되어 한 움큼 집어먹었더니 갈증 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난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이 풀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서 한 움큼 뜯어 가지고 왔다. 내가 말하기를,“그대가 청옥, 자옥이라고 한 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일세.” 라고 하고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손수 한 아름이나 뜯었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少年臺)에 올라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서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열 그루 중에 두세 그루는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아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소년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혹 영랑의 무리를 일컬은 듯도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한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4. 1611년 유몽인의 登少年臺 기행시
登少年臺 : 소년대에 올라
柳夢寅(1559~1623)
萬古昻藏樹 : 만고토록 숨어서 자란 높다란 나무들
縣梢罥老藤 : 가지에 매달려 얽혀있는 늙은 등나무.
三春慳嫩葉 : 늦봄에야 겨우 돋아나는 연한 나뭇잎
六月逗堅氷 : 유월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견고한 얼음.
陘絶魂頻斷 : 가파른 벼랑에선 정신이 자주 아찔했고
臺危地欲騰 : 위태로운 대에선 땅이 솟구치는 듯했네.
曾颸來萬里 : 일찍이 서늘바람 만 리에서 불어왔으니
從此傲陽陵 : 이제부터 볼록한 봉우리 만만히 보리라.
♣ 柳夢寅의 詩 '登少年臺'에서 8句를 보더라도 此는 下峰을, 陽陵(볼록한 봉우리)은 中峰을 가리킨다.
5. 1849년 민재남의 산중기행(관련유람록 : 유두류록)
少年臺 : 소년대
閔在南(1802~1873)
林中失路喚前行 : 숲속에서 길을 잃어 앞서 간 일행을 부르고
行出峰頭草坐平 : 일행은 봉우리 위로 나와서 풀밭에 앉았네
奇勝每多新面目 : 기이한 명승은 곳곳에서 새로운 모습인데
須君指示認臺名 : 그대 손으로 가리키며 대이름을 알려주네
6. 1910년 배성호의 유두류록
[원문] 至法華菴. 古木參天. 叢竹護垣. 方丈下峰如對食床. 可謂上方仙境也.
○ 3월16일, 법화암에 이르렀다. 고목이 하늘로 솟아있고 대나무 숲이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방장산 下峰(하봉)이 밥상을 대하는 것과 같으니, 上方의 仙境(선경)이라고 할만하다.
7.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원문] 十月丁卯朔. 留米一斗別一囧. 發香積. 登 少年臺. 穿綿竹度鷄足. 山行三十里. 抵貧鉢庵.
○ 10월1일,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綿竹〕를 뚫고 계족봉(雜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걸어 빈발암(貧鉢庵)에 이르렀다.
8. 소년대 관련 유람록과 기행시
순 문헌 하봉 비고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소년대(少年臺) 2 1586년 양대박 선생의 두류산기행록 소년대(少年臺) 3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소년대(少年臺) 4 1611년 유몽인의 登少年臺 기행시외 1 소년대(少年臺) 5 1849년 민재남의 산중기행(관련유람록 : 유두류록) 소년대(少年臺) 6 1910년 배성호의 유두류록 하봉(下峰) 7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소년대(少年臺) : 연하봉(?)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시(최석기외) - 퍼온글 -
소년대굴
소년대굴에서 조망되는 중봉, 상봉
하봉에서 조망 되는 저멀리 짝궁댕이 서부능선 칠선계곡, 창암능선, 한신지계곡, 오공능선, 등
초암능선 초입
좌 - 초암능선, 우 - 선골 갈림길
초암능선 최고의 볼거리라고 할 수 있는 촛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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