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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암산(갓바위), 백암산(상왕봉), 몽계폭포
    전국 산행기 2021. 9. 21. 18:50

    # 언제: 2021년 09월 20일 월요일

    # 산행지: 전남 장성 입암산(갓바위), 백암산(상왕봉), 몽계폭포, 산행

    # 산행거리: 21.19Km   07시간03분

    # 산행루트: 입암산주차장 - 은선동삼거리 - 남문 - 옛산선마을터 - 윤진순의비 - 북문(만화제갈림길) - 입암산(갓바위)

                    은선골 - 은선동삼거리 - 장성새재갈림길 - 장성새재 - 불바래기 - 순창새재 - 백암산(상왕봉) -

                    사자봉(Back) - 갈림길 - 몽계폭포 - 남창계곡 - 입암산주차장 - 원점회귀산행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입암산 편백나무 숲길

     

     

    입암산성 남문

     

     

    남문 문루 주춧돌

     

     

    입암산성(笠岩山城)

    입암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등장하는데,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 장군이 주민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으로 대몽항쟁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는 1410년(태종 10) 왜구(倭寇)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으로 주변의 여러 성들과 함께 수축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연해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읍성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1434년(세종 16) 다른 산성과 함께 혁파되면서 폐성되었다.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인 1593년(선조 26)에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다시 수축하였고,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는 1653년(효종 4)에 장성현감 이유형(李惟馨)이, 그리고 『장성부읍지』에는 1677년(숙종 3)에 부사 홍석구(洪錫龜)가 각각 확장·개축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이후에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입암산성(笠岩山城)은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해발 654m의 입암산 능선을 따라 형성되었으며, 초축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포곡식산성이다. 입암산성의 평면 형태는 북서-남동이 장축방향인 타원형에 가깝다. 성의 둘레는 성벽 외곽을 기준으로 약 5,200m이고, 총면적은 1,069,255㎡이다.

     

    입암산성에 대해서는 1871년(고종 8)본으로 알려진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수록되어 있는 『장성부읍지(長城府邑誌)』와 『입암산성진지(笠岩山城鎭誌)』에 수축과정, 성내 시설물, 군제에 대한 현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암산성도(笠岩山城圖)」와 각종의 「장성부지도(長城府地圖)」에는 입암산성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서적류의 관련 기록과 매우 흡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입암산성진지』 공해조(公廨條)에는 진헌(鎭軒), 거안관(居安館), 안국사(安國寺), 군량고 7동, 군기고 5동, 소금창고와 장고(醬庫)가 각각 1개소, 연못 10개소, 우물 10개소 등 각종 시설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함께 축성 속읍(屬邑)과 군기, 군량미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입암산성도」에는 연못 6개소가 표현되어 있다. 현재 사적 제384호로 지정되었다.

     

     

    성내리 주민들이 사용한 절구통

     

     

    성내리 모습

     

     

    진헌지(옛날 관아터. 대형 건물지가 발굴된 곳)

     

     

    이경국 · 이안국 정유재란 순절비

    증 형조판서 이덕붕의 아들인 이경국과 이안국이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기에 왜란이 발발하자 두 형제는 의병을 모아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별장 윤진을 도와 성곽을 수비했으며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경국 · 이안국 정유란 순절비 비문

    오호라 옛적 임진란을 막고자 일문 형제가 육력 분전하다가 순절한 분이 있었으니 바로 격암공(格菴公) 휘 경국(敬國)과 기제(其弟) 석암공(石菴公) 휘 안국(安國)이시다. 제공은 경주인이니 신라 개국공신 휘 갈평의 후손이며 고조(高祖)는 조정암 선생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피화(避禍)하여 나주에서 고부로 은둔 정착한 이래 증 형판(刑判) 휘 덕붕공(德鵬公)의 4남 중 2남과 3남으로 태어났다.

    격암공은 자품(姿禀)이 준위(俊偉)하고 용력이 절륜하여 만력 계유에 무과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에 부임하여 군기를 엄정하게 집행하니 권귀(權貴)의 시기를 당하고 석암공은 결성현감으로 구폐를 혁신하니 간신들의 무고를 당하여 퇴임하고 있을 때 임진에 왜구들이 대거 침입하여 국토가 초토화되고 생민(生民)이 어육이 되매 격암공이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위급한데 어찌 생명을 아끼겠는가 하고 아우 영국(榮國)과 가동 수십 명을 인솔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으니 이 사실을 들은 전라도백 이정암이 기뻐하고 이제 충신을 보았다 하고 이공 형제를 입암산성의 수장(守將) 윤진 의여소(義旅所)로 보내니 공들은 임무를 수행 중 정유년 9월 8일 밤에 왜적은 성을 포위하고 육박하여 옴에 윤진 장군은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함에 공들은 더욱 격분하고 육박전으로 적 수십 급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는 중 화살이 떨어지고 활시위가 끊어져 중과부적이라 어찌할 수 없는 천운이라고 통곡하고 계속 격전 끝에 적의 흉탄을 맞고 장렬하게 양공이 같이 순절하였다.

    아우 영국과 가동 용금(龍金)은 적탄을 무릅쓰고 시신을 안고 돌아와 안장하다. 격암공의 부인 송씨 또한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 끝에 부군의 뒤를 따르니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격암공은 병조판서 석암공은 사복시 정 영국공은 무과(武科) 부정(副正)을 추서하다. 단기 4266년 계유에 오산창의사에 추배하였다. 이제 본 창의사에서 뜻을 모아 이곳에 전적비를 세워 양공의 정충탁절을 위와 같이 약기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다.

    단기 4323년 경오 3월 오산창의사 근찬
    격암공 외예(外裔) 성균관 전학 의령(宜寧) 남대희 근서


    윤진 순의비는 임진왜란 때 입암산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윤진(尹軫, 1548~1597)을 기리는 비석이다.

    남문을 지나면 평지가 나오는데 그 길을 가다보면 성내(城內)에 있던 성내마을 터를 지나게 된다. 마을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윤진 순의비를 볼 수 있다. 윤진 순의비 옆에는 윤진의 부하 이경국과 이안국을 기리는 정유재란비도 세워져 있다.

    1742년(영조 18) 장성부사 이현윤(李顯允)이 조정의 명을 받아 세운 윤진 순의비는 높이 118센티미터, 폭 58센티미터, 두께 20센티미터로, 앞면에 ‘증 좌승지 윤공 순의비(贈左承旨尹公殉義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은 이현윤이 지었고, 글씨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이 썼다. 별다른 장식 없이 비 몸 위에 머릿돌이 얹혀 있다.

     

     

    윤진 순의비

     

    윤진

    윤진은 사간 윤강원(尹剛元)의 아들로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장성에 은거했다. 윤진은 임진왜란 발발 후 장성 남문 창의에 참가했다.

    일본군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해 올 것을 예견한 윤진은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에게 입암산성 수축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공사의 책임자가 되어 군량을 비축하기 위한 창고를 짓고 포루도 새로 구축했다.

    입암산성은 고려시대에 몽골군을 막아낸 일이 있는 산성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져 있던 것을 다시 쌓아서 쓰려고 한 것이다.  윤진은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곽 수축 공사를 마무리하여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호남지역으로 진군해 오면서 주요 도시인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자 관리들은 대부분 도피했다. 윤진은 입암산성 수장(별장)이 되어 인근 4개 읍의 수령들, 의병 수백 명과 함께 산성 방어 임무를 띠고 성에 들어갔으나 전세가 불리함을 알게 된 다른 수령들은 피신한 상태에서 윤진은 9월 8일 남아 있는 의병들과 성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부인 권씨는 품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했고, 아들 윤운구는 칼에 맞아 절벽으로 떨어졌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윤진의 충성심과 공로를 인정하여 좌승지 벼슬을, 그의 부인에게는 정려를 명했다. 지역 유림에서 그의 위패를 받들어 봉암서원에 배향했다.

     

     

    거북바위

     

     

     

    백암산 조망

     

     

    시루봉 - 장자봉능선 조망

     

     

    장성갈재, 방장산, 방면 풍광

     

     

    입암저수지 와 주변 농경지, 선운산과 곰소항

     

     

    두승산 조망

     

     

    정읍 방향 호남고속도로

     

     

    은선골 삼나무 군락지

     

     

    장성새재 길  - 달도 숨은 고개를 아시나요?

     

     

    장성새재

     

     

    순창새재 가는 길에 보리수(파리똥) 맛과함께 입 즐거운시간

     

     

    순창새재 길 옆으로 계곡 아름답다

     

     

    순창새재 - 새재봉, 호남정맥, 영산기맥, 분기점

     

     

    백운산(상왕봉)아래 전망 바위 - 대가저수지, 내장산(신선봉, 연자봉, 장군봉) 조망

     

     

    내장산(까치봉, 연지봉, 망해봉) 조망

     

     

    백암산(상왕봉)

    해발741.2m의 상왕봉을 최고봉으로 하는 백암산은 전남 장성군 북하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 정읍시 입암면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쪽으로는 입암산, 북동쪽으로는 내장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3개 산을 역삼각형으로 묶어 '내장산 국립공원'이라 부른다. 백암산의 산 이름은 산 중턱에 자리한 백학봉(白鶴峰·651m)에서 비롯되었다.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하얀 바위산이 그 상징이 된 것이다.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백암산은 옛 부터 봄이면 백양, 가을이면 내장이라 했듯이 산 하면 내장, 고적하면 백암이라 할 정도로 백암산의 절경은 내장산에 뒤지지 않는다.

     

    정작 산악인들은 오히려 백암산을 '으뜸 산'이라 평가한다. 산세와 풍광, 생태계, 역사에서 훨씬 넉넉함을 안고 있는 산으로 각광받고 있다.

     

    백학봉과 상왕봉, 사자봉 등의 기암괴석이 곳곳에 있으며, 산세가 험준한 편이다. 백암산은 사시사철 철따라 변하는 산색은 금강산을 축소해 놓았다 할 정도로 아름답다. 백암산의 으뜸은 단풍이라 할 수 있다.

     

    산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산을 물들이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다. 백암산 단풍은 바위가 희다는 데서 유래한 백학봉의 회백색 바위와 어울려 독특하기도 하다.

     

     

    인생은 한번이다

    흐르는 인생처럼
    모든 것에 느끼고 싶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인생은 한번이다..
    연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
    꼭! 한번 사는 인생.

    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간 순간의 행복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이고 싶다.

    죽도록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많고
    죽도록 일해도 형편 좋아지질 않는
    인생이라도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다.

    늘 인생의 마지막 삶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인생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느끼며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처럼 순응하며
    받아 들이며 살고 싶다.

    인생은 아름다웠다...중에서

     

     

    백암산(상왕봉)에서 남창계곡, 몽계폭포. 방장산, 입암산(갓바위) 조망

     

     

    저멀리 입암산(갓바위) 조망

     

     

    방장산 조망

     

     

    남창계곡 - 몽계폭포

     

     

    가인봉과 병풍산쪽과 장성호

     

     

    사자봉

     

     

    사자봉 직전의 바위에서본 가인봉과 병풍산쪽과 장성호

     

     

    방장산과 시루봉 방향 조망

     

     

    으름 - 한국 바나나

     

     

    하곡 정운용학사가 바위절벽에 쓴 글(몽계폭포의 이름을 붙인 학자)

     

    시대 유명한 학자이자 해동 18현에 한 사람인 성혼은 일찌기 하곡선생과 변경윤의 아버지인 변이중과 함께

    이곳의 유람하고 글을 남긴 성혼선생의 기행문

     

     

    8월 5일에 장성(長城)에 사는 참봉(參奉) 정운룡 경우(鄭雲龍慶遇)와 박사(博士) 변이중 언시(邊以中彦時)가 나란히 말을 타고 찾아와서 하루 저녁 유숙하고 갔다. 정운룡과 장성과 정읍(井邑) 두 고을의 사이에 있는 노령의 산중에서 경치 좋은 곳을 찾는데, 시냇물을 따라 산속으로 10리쯤 들어가면 온통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으며 물과 돌이 깨끗하고 그윽하였다. 채 3리를 못가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이곳에 이르면 북쪽과 동쪽, 남쪽은 모두 푸른 절벽이 천길 높이로 서있고 서쪽에는 석문이 있으며 동쪽 절벽 위에는 큰 시냇물이 흘러내려 20길 높이의 폭포가 쏟아진다.

     

    북쪽 절벽에는 돌길이 나있어 동쪽 절벽 위에 이를 수 있으며, 동쪽과 북쪽의 절벽은 모두 바위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 돌 하나가 펑퍼짐하여 수백 명이 앉을 만하였다. 물이 이 사이로 흐르는데 옥처럼 깨끗하고 빛나서 손으로 공중에 솟구쳐 나는 물을 희롱할 수 있다. 작은 암자가 북쪽 절벽 아래에 있는데 양지바른 곳에 있어 습하지 않고 밝으며 동쪽으로 7, 8십 보 지점에 폭포가 보인다.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는데 그윽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고 경치가 빼어난 것을 말로 다 기술할 수가 없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이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하며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인적이 드물지만 사방의 산이 그리 높지 않아 추운 겨울이라도 암자 앞에는 눈이 먼저 녹는다. 암자의 이름은 하곡서실(霞谷書室)이고 시내의 이름은 몽계(蒙溪)인데, 이는 모두 정운룡이 이름 지은 것으로 정군이 거주하는 장성의 개계촌(介溪村)과는 20여 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우계집)

     

     

    하곡 정운용학사가 바위절벽에 쓴 글(몽계폭포의 이름을 붙인 학자)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바위절벽의 암석

     

     

    磎瀑布 바위 각자 - 이는 몽계라는 이름을 지은 하곡선생의 글씨라고 전합니다.

     

     

     

    몽계폭포에 들러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와 물보라를 바라보며 조선조 선조때 하곡 정운용학사가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몽계폭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몽계폭포,蒙磎瀑布

    몽계폭포는 백암산 상왕봉과 사자봉 사이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합류하여 약 20m에서 덜어지는 폭포로서, 조선시대 학자인 하곡 정운용선생이 폭포의 이름을 명명하였으며, 바위에 “蒙磎瀑布” 라는 글을 새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蒙磎’는 ‘숨겨진 작은 폭포’ 라는 말.

     

     

    보리수 & 으름 산행에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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