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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구례지역 선비들의 지리산 산행기-유천왕봉연방축(遊天王峰聯芳軸)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2. 11. 14. 08:56
유천왕봉연방축(遊天王峰聯芳軸)
*산행일자 : 1940년 5월 24일~28일(음력 4월 18일~4월 22일)
*산행일정 및 코스 : 5월 24일. 출발. 화개 - 쌍계사 앞 점심 - 신흥 - 수곡리(1박)25일. 수곡리발-세석평전.점심-촛대봉 밑까지 등반-허소은 상봉 하산 -세석평전 숙박
26일. 세석평전 출발 - 집선대 - 제석당 - 통천문 - 천왕봉 - 성모사 예배 - 14시 하산 - 대성촌 숙박
27일. 대성촌 출발 - 신흥서 점심 - 국사암 - 쌍계사 숙박
28일. 쌍계사 출발 - 화개장터 점심 - 여비 결산 - 14시 구례행차 승차
*산행자 인적 :
◎ 이 병 호(백촌) 1870~1943 (당시 71세) 용방 두동
◎ 김 성 권(하전) 1875~1961 (당시 66세) 구례 산성
◎ 류 인 규(소계) 1875~1961 (당시 66세) 토지 환동
◎ 이 건 호(국전) 1876~196(당시 65세) 마산 하사◎ 문 재 준(문강) 1878~1961 (당시 63세) 문척 월평
◎ 이 상 숙(춘포) 1883~1944 (당시 58세) 마산 냉전
◎ 허 종(소은) 1887~1968 (당시 54세) 토지 추동
■ 산 행
5월 24일(음 4월 18일)
허소은 종의 발기로 군내의 동지 칠인과 지리산 천왕봉의 등정을 약속한 날이 오늘이라 오전 일곱시에 일찍 출발하여 읍내에 이르니 김하전 성권과 문문강 재준이 약속대로 와 있었다. 오전 여덟시에 화개행 자동차에 올랐다.
류소계 인규는 중로에서 차에 올랐고 순식간에 삼십리를 달려서 아홉시에 화개장터에 닿았다. 이국전 건호와 이춘포 상숙은 보행으로 우리보다 먼저 와서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기인 허소은은 지리산 상봉의 제명 관계로 며칠 전에 석공들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였다고 한다.
다 못 여섯이서 등반단이 되어 맑은 시내를 거슬러 십리쯤 올라가 쌍계사 앞의 주막에 이르러 몇 되의 술을 사서 마시고 각자 일금 사원과 쌀 서 되를 거두어 내왕의 여비를 마련하였다.
출발할 무렵 수곡리에 사는 하현오를 만났는데 이 분이 오는 저녁 우리가 유숙할 집의 주인이다. 이 분은 진주에서 이사 와서 우거하는 선비로 그 말씨가 퍽 정답고 친절하였다.
이 분이 쌀과 행장을 지고 또 십리를 가서 신흥의 주막에 이르렀다.
가까운 곳에 최고은의 “세이암”이라는 필적이 있다기에 건너가서 보았다.
냇가의 돌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세이암” 석자를 새겨놓았는데, 그것이 최고운의 진짜 필적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각기 돌에 걸쳐 앉아 발을 씻고 옛사람이나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제명을 보았다. 김용구 술집으로 돌아와서 점심 값을 치르고 “도중”이란 시제로 칠언절구 한 수씩을 읊었다.
화개도중 구호(花開途中 口號)
산속의 시내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마을길은 어부 초부들로 메워지고
신흥에 이르니 이미 오정인데
꾀꼬리는 울며 늦봄을 아쉬워하네.<백촌>
우리들이 산중에 들어서니
녹음 짙은 숲 속 바람만 고요한데
푸른 물결은 세이암을 감돌고
문득 선인을 추모하는구나.<하전>
풀과 나무는 옛 마을을 메꿨는데
뉘라서 뜨거운 고뇌 식히고 돌아갔는고.
철들면서 생활이 상쾌하여지니
필시 시내의 청량함을 아네.<국전>
그날 오후에 신흥점을 출발하여 하현오의 안내로 십리를 가서 화가재를 넘었다. 산길이 가파르고 길이 험하여 오르기가 퍽 힘이 들었고, 하군의 안내가 아니었던들 길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 십리를 가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하현오의 집에 당도하니 날은 이미 황혼이더라. 주인의 친절한 접대로 편히 잠을 자고 밤을 지냈으며 오는 도중에 구호로 읊었던 세이암의 칠언절구를 정리하였다.
신흥 세이암(新興 洗耳巖)
물은 시원시원히 흐르고 산은 우뚝우뚝 솟았는데
높은 하늘 우거진 숲엔 녹음이 짙었네.
곁에 친구들 쉬었다가 가는 곳 어데인 줄 모르고
멀리 영령을 향해 읍하니 얼굴빛만 숙연하여지네.<하전>
깊은 시내 높은 봉우리에
멀리 푸른색은 구름같이 짙으네
바위에 새겨진 최고운 선생의 필적은
오랫동안 풍우에 시달렸어도 옛 모습 분명하네.
<국전>
5월 25일(음 4월 19일) 무진 맑음.
하현오의 주선으로 길잡이 김창서를 얻어 짐을 지우고 일찍 떠나 십리를 갔다. 길이 험난하고 오르기가 위태로움을 붓끝으로 일일이 기록할 수가 없다.
또 십리를 가니 가는 길에 두 개의 큰 바위가 대립하여 문을 이루었다. 그 문을 지나니 길가에 철쭉꽃이 만발하였으니 이 또한 기관이 아니겠는가?
또 십리를 가서 오정 때 세석평지(잔돌평지)에 이르렀다. 산세는 평평하고 둥글며 그 둘레는 대략 수 십리 쯤이었다.
토양은 기름져서 수 백호가 살만하다. 그러나 높고 추운 지대이므로 감자만 가꿀 수 있을 뿐이고, 다른 곡식은 익지 않으니 가꿀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암석 밑에 음양 약수샘이 있는데 바위의 틈을 따라 두 곳에서 물(약수)이 흘러나오니, 그 물맛이 퍽 맑고 차가워 각자 몇 표주박씩 마셨다.
옆의 수 칸 되는 띠집에 순천사람 손재륜이 와서 산다고 한다. 재륜의 나이는 삼십인데 한문을 약간 알으므로 그와 시를 화답하였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곧 쌀을 내어 점심을 짓다.오후에 천왕봉에 오르고자 출발하여 십리쯤 가서 옥촛대봉 밑 평탄하고 넓은 곳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허소은이 상봉에서 하산하여 말하기를, 상봉에는 밤을 지날 곳이 없으니 오후에 천왕봉을 오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오. 오늘밤은 세석평전에서 유숙하고 내일 오전에 산에 올라 구경하고서 하산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운운한다.
모두들 그렇겠다고 말하다.
드디어 갔던 길을 되돌아와서 손재륜집에 이르러 길잡이 김창서에게 하루 품삯 일원 이십전을 지불하여 내려가게 하고, 전일에 약속한 칠인이 원만한 모임을 갖고 동숙하였다.
저녁에 오율의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세석평전 손재륜 집에서 자다
하늘 높이 솟은 세석평전
언제고 비구름 개일 날 적더라.
매인 돌들은 위태로워 떨어질 것 같고
오래된 넝쿨들은 대롱대롱 하네
하늘이 나직하니 북극성을 만질 것 같고
주위가 고요하니 장수할 것을 생각하네.
철쭉꽃이 늦봄까지 있으니
질서의 더딤을 실감하여라.
<백촌>
넓은 곳에 좋은 땅이 열렸는데
석문에는 봄이 늦었더라.
연기는 멀리 인가부근에 사라지고
은하수는 지붕 끝 가깝게 비치네.
아름다운 나무에는 이슬비 젖었고
구슬비탈에는 약초들이 자라네.
이 지역의 풍수가 아름다우니
너무 신비해서 발상이 더디더라.
<하전>
석문이 아득하여 길을 잃었는데
숲은 안개 뒤덮여 개일 때가 적더라.
지형은 동편으로 기울러 넓게 열렸고
하늘은 남악(지리산)을 포용하였네
해질녘엔 장수의 복령을 찾고
아침에는 구미 돋울 나물을 캐네
철쭉꽃이 지금껏 피어 있으니
높은 산의 질서는 과연 더디더라.
<문강>
좁은 골짝 중간쯤에 넓어지니
완연히 넓은 들판을 다닐 때와 같더라.
시내 길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석문에는 달빛만 처량하네
산중사람들 감자만을 즐겨먹고
나무꾼들은 채지곡을 노래하네.
하룻밤 산중에서 보내니
싸늘하여 꿈 이루기가 더디어지네.
<국전>
산중의 꽃은 늦은 봄에도 아름다우니
진실로 지금이 구경하기 좋은 때구나
학은 늙은 소나무에 깃들고
사람은 욱어진 엽고대 밭을 지나네.
구름은 바위와 골짜기에 가리워졌고
바람은 지초의 향기를 알려주네
산중의 즐거움이 무어냐고 물어오면
진지한 대화로 날 저물 때에 이르네.
<손희산 재륜>
5월 26일(음 4월 20일) 기사 맑음.
이 날은 천지가 맑고 명랑하여 묻노니 등산하기에 좋은 기회가 아닌가? 각자가 도시락을 차고 세석평전을 일찍 떴다. 다시 촛대봉밑을 지나다.
여기서부터 길은 산꼭대기에 나 있고 가파른 곳이 없었다. 좌우의 숲은 푸르고 밝게 피어 그림 속으로 들어간 것 같구나.
아득히 보이는 천왕봉은 눈아래 줄지어 있고, 이십 리쯤 더 지나서 길 옆에 집선대가 있다. 석대가 평탄하고 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옛부터 신선이 바둑을 두었던 곳이란 설이 있기로 잠시 쉬면서 구호로 오언절구 한 수씩을 지었다.
집선대(集仙臺)
바위는 몇 천자나 되는고
호기롭기가 바다 속의 배 같으네
바위 사이의 붉은 철쭉은
많은 신선들이 즐겨서 노니는 것 같네
<하전>
바람이 부니 물새소리 외롭고
구름이 흩어지니 바둑 그림자 사라지네
늦으막에 대상에 올라 쉬니 우리들도 또 한 선객 같구나.
<소은>
다시 몇 군데의 산중의 잔도를 지나다 온 산의 철쭉이 길을 따라 활짝 피었으니 등산의 고통이 잊혀지는 것 같다. 십리도 못가서 북쪽이 함양과의 경계로 통로(길)가 있고 그 길 옆에 제석당의 오래된 옛터가 있다.
동쪽으로 몇 발 안되는 곳에 맑은 샘이 있어 물을 떠서 마실 만하다.
큰 재목으로 쓰일 회나무와 삼나무가 떼를 지어 서 있고, 통로를 돌아서 천왕봉 밑에 이르게 된다. 우툴두툴한 바위가 하늘높이 솟아 있고 바위를 따라 절벽을 굽어다보면 천왕봉의 허리쯤에 <통천문> 석 자가 석각되어 있다.
큰 바위가 서로 맞서서 문추를 이루고 그 위에 한 개의 큰 바위가 이 문추를 덮고 있어서 문의 모양과 흡사하다. 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길이 끊긴다. 다시 남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단절된 곳에 백자나 되는 긴 잔교(다리)를 걸쳐 놓았고, 그 잔교를 따라 올라가면 맑게 갠 하늘의 빛을 보게 된다.문(門)의 '문'자로 연유해서 오언절구를 읊다.
통천문(通天門)
수십 길 쌍석이 서 있어
하늘로 이어진 문이 되었더라
사다리에 올라 다시 아래를 보니
경황하여 정신이 혼미하여지네.
<소계>
흰구름은 방장산 위에 높고
푸름 하늘은 돌 문 사이로 비치네
높은 봉우리에 해가 더디 지고
낮은 들판엔 연기만 자욱하네.
<문강>
*통천문(1938년 8월).
드디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서 산정에 오르니 가슴이 탁 열려서 호호(넓고 큰 모양)롭기가 가이 없고 의연하더라. 남쪽은 진주 남강으로 통하고 동쪽은 산청군 전군에 연해 있으며 북쪽은 함양, 운봉의 경계에 의지하며 서쪽을 바라보면 광주 서석산(무등산)이 구름 사이로 들쭉날쭉한다. 동쪽의 부상나라 넓은 바다는 몇 천리 밖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때 마침 피어오른 구름으로 원경을 볼 수가 없으니 한스럽기만 하구나.
무릇 사방 십 여군의 산천이 넓고 끝이 없으며 둘러있는 수많은 산봉우리들은 공손히 읍하고 엎드려 눈 아래 늘어져 있구나. 오늘에사 이곳에 와서 비로소 지리산이 크고도 웅장함을 깨닫게 되는구나.
*천왕봉(1938년 8월).산꼭대기 약간 평탄한 곳에 성모사가 있어 한 돌의 상을 모셨는데 어느 때에 만들어졌는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 태조비의 상이라고도 하고 마야부인상이라고도 하고 지리산신상이라고도 한다. 문헌이 없어서 더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무릇 부인상은 두 귀가 없고 코끝이 함 했으나 후세 사람들이 석회로 고쳐 놓았다고 한다. 또 그 옆에 있는 한 개의 석상은 그의 남편이라 한다.
이것은 필시 근세 사람의 초상으로 이것을 안치하였다는 사람도 있다.
드디어 함께 온 일행은 의관을 갖추고 성모상에 절을 드리고서 그 옆에 앉아서 가져온 약주로 몇 순배씩 돌렸다.
*성모상에 절하는 모습(<유천왕봉연방축> 기록보다 15년 뒤의 자료사진).
좌우의 돌 벽에 옛 분이나 지금 분들의 제명을 볼 수가 있다.
동쪽에 일월대가 있는데 이 세 글자를 누운 돌에 새겨놓았다. 또 남쪽의 평탄하고 험한 곳에 한 채의 작은집이 있다. 이 집은 돌로 쌓았고 회다짐을 하여 벽을 만들었고 나무기와로 지붕을 이었다.(너와집) 그 근방의 산을 동경(제국)대학의 연습림으로 만들고 십년 전에 이 학교서 이 집을 특별히 지어 등산하거나 들른 손님들을 위하여 이용하게 하였다.
지금은 풍우에 씻겨서 새므로 사람이 거처하거나 유숙할 수가 없게 되었다.
수 십 보를 남하하여 이국전과 류소계의 제명 처를 검열하였더니, 이것은 틀림없이 허소은이 며칠 전에 석공을 시켜서 파 놓은 것이다. 또 수 십 보를 내려와서 돌샘 근처에 모아 앉아서 각자 점심을 들었다. 다시 산마루에 올라 청(晴)자를 운으로 삼고 시를 지어 읊조렸더니 시간은 이미 오후 두시가 되었다.
냉기가 몸에 닥쳐 오래도록 앉아 있을 수가 없고 이곳에서 숙박할 수가 없으므로 결국 되돌아오기로 하였다. 또 올라왔던 길을 삼십리 되돌아 와서 세석평지에 이르러 맡겨 두었던 행구를 챙겨서 이십리를 더 가서 대성리에 이르니 해는 졌다. 허문오를 찾아 유숙하였다.
오늘 산길을 오르내림이 대략 팔십리이다. 각자 놀랄 뿐이다.
천왕봉(天王峰)
음침한 구름 벗겨지고 새벽하늘 맑아져
상쾌한 마음 발걸음도 가벼워지네
성모의 영혼은 해와 같고
신선이 있는 곳은 꽃으로 뒤덮혔네
천하에 아름다운 곳도 많으나
물욕 밖에 노니 감정이 풍성하여지네
고요한 솔바람이 귀 밑을 스쳐가니
아득히 옥보고의 거문고를 들은 것 같네.
<하전>
푸른 산 온통 개었는데
상쾌한 바람 발걸음도 가벼워지네
바다 빛 희미하고 구름마저 캄캄하니
넓은 지구 햇빛만 오래더라
마야성모 아득한 흔적들은
옛날 문창선생 만고의 정을 연상케 하네
몇 순배 술 마시고 갈려니
천상에 고성이 들릴까 두려워지네
<춘포>5월 27일(음 4월 21일) 경오 맑음.
대성촌을 출발하여 이십리쯤 지나서 신흥에 이르러 허모의 여관에서 쉬었는데 곧 허소은의 계씨 집이었다. 술과 밥값을 셈하고 또 십리를 더 가서 쌍계사 앞에 닿았다.
녹음 속의 맑은 시내에 둘러 앉아 하산 시 한 수씩을 읊었다.
술 한 병을 사서 마시고 석양에 쌍계사로 들어가서 다시 절 뒤를 일리쯤 가서 국사암을 잠시 구경하였다. 다시 고승당으로 나와서 허상인 정해 허소은의 일가의 환대로 그곳에 유숙하였다. 저녁에 “류(流)”자 운으로 시를 지으려 하였으나 등산의 피로로 잘 지어지지 않았다.
5월 28일(음 4월 22일).
아침에 간밤의 流자 운의 시를 지었다.
오전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십리를 가서 화개장터에 이르렀고, 오 일간을 지나는 동안 다행히 날씨가 개어서 별 탈 없이 돌아오게 되니 선인과의 연분이 우연이 아닌가 깨달아진다.
몇 되의 술을 사서 주량에 따라 마시고 취하였다.
전후의 비용을 셈하여보니 금 삼원이 남았다. 허소은을 뺀 육 명이 각기 오십전씩 나누었다. 오후 두시에 구례행 자동차에 올랐다.
집의 원근에 따라 차중에서 차차 헤어지면서 돌아왔다.
[해제]
유천왕봉연축(遊天王峰聯芳軸)은 구례지역의 옛 어른들 일곱분이 1940년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4박5일 동안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온 기행문이면서 연명시집(連名詩集), 곧 지리산 유산록이다.
평균 60대의 노령에 4박5일간의 산행을 일기체로 기술하고, 여로 중 여덟 군데를 時題로 그 감회를 읊고 있다.
이 연방축에 실린 詩는 시의 말미에 작가가 명기되어 있어 작가를 바로 알 수 있으나, 기행문의 작가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산행 첫날의 글을 보면 이 모임이 ‘소은 허종’의 발기로 이루어졌고 기행문은 ‘백촌 이병호’의 글임을 알 수가 있다.
이백촌은 조선조말 3대 시인의 한 분인 황매천의 수제자로 스승을 닮아 시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분으로, 이 산행의 날마다의 주제와 여정을 손안에 든 듯이 환히 알 수 있도록 서술하고 있다.
이 분들은 의관을 정제한 차림으로 산행을 수행하셨을 것이니 옛 선비들의 당당한 풍모가 연상되어 외경의 상념을 지울 수가 없으며 6순의 고령임에도 험산준로인 천왕봉을 정복한 그 정정(亭亭)함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야겠다.
특히 본문에서 “천왕봉의 남쪽 평평한 곳에 너와집이 있었고....” 또 정상 가까운 곳의 성모사에 봉안된 “부인 성모상은 두 귀가 없고 코가 푹 꺼져서 후인이 석회로 만들어 부쳤느니라....”란 기록은 문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옛 분들의 사물에 대한 치밀한 관찰력에 경의를 표하여야겠다.
이 연방축의 필사본은 현재 류소계의 장손이 소장중이며, 원본은 이백촌선생댁에서 소장할 것으로 추측되나 발굴하지 못하니 애석할 뿐이다.
-1997년 9월 국역자 문승이 씀.'지리 박물관(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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