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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곧은재 능선과 오공 능선에 대하여
    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2. 9. 27. 15:18

    다음 내용의 일부는 2011년 6월 말경 지리 99 [지명탐구]방에 올리기 위해 블로그에 작성한 내용이다. 작성한 시점에 [지명탐구 Re129]방에 올렸다. 내가 올린 [지명탐구Re129]는 조용히 사라졌고 김종직 선생의 하산 길이 어느 날 슬그머니 <오공능선>에서 <한신능선>으로 수정했더라. 남의 글을 인용했으면 마땅히 출처를 밝혀야지. 구전의 채록도 증언한 사람과 일시를 반드시 병기(竝記)해야 한다. 그것은 글 쓰는 사람의 기본이다.

     

    나는 김종직의 직지(直旨)와 박여량의 직령(直嶺)을 곧은재로 이해한다. 유람록을 국역하는 분들이 현장을 답사하지 않고 원문 해석에 충실하다 보니 직지를 직지봉과 지름길로 오역한 것이다. 지리 99에서 선인들의 유람록과 주민들의 구전을 간과(看過)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임의로 지리산길 지도에 표기하여 지명을 왜곡(歪曲)하고 있다. 꼭대님의 한신능선 작명에 대한 변명은 궁색하기만 하다.

     

    백무동 원주민들은 아무도 곧은재 능선 지명을 모릅니다. 2001년 무렵 어느 지리산 사이트에서 누군가 오로지 사유에 의하여 곧은재능선은 어디고 바른재 능선은 어디로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저는 누군지 압니다만), 그 뒤부터 세월이 지나면서 네이버 지도에도 올라가고 급기야 산꾼들과 접촉이 많은 백무동 주민들도 산꾼들이 말하기를 그곳이 곧은재 능선이라 카드라” 면서 오늘날 그렇게 된 겁니다그 당시 백무동 토박이 어른들(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습니다만)을 다 확인하여 곧은재 능선이라는 지명은 없고(옛사람들 입장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능선 이름을 지어 붙일 필요가 없었기에별 다른 명칭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산길지도에 한신능선과 샛골능선으로 이름 붙인 겁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면 될 일, 당최 얼토당토 하지 않은 논리이다.

     

     

    1.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徑由直旨而下

     

    遊頭流錄 '徑由直旨而下'의 國譯에 대하여....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서(통하여) 내려왔다.

     

    * 徑 : 곧바로, * 由 : ~을 따라서, ~을 통하여 * 直旨 : 直指 빠르게 감. 빠르게 가는 길(지름길), 똑바로 향함. 곧장 나아감. * 指를 써야 하는데 旨로 빌려 씀.

     

     

    2.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 九月四日 <중략> 始達古帝釋堂舊基。登眺左右巖壑。指點山川形勢。滿山所見。非蒼檜則紅樹也。非紅樹則自枯木也。靑紫白黑。參錯相暎。如錦繡然。西望百里餘。有新刱蘭若二。在無住之西曰靈源。在直嶺之西曰兜率。

     

    ○ 九月四日 <중략> 비로소 옛 제석당(帝釋堂)에 도착하였다. 올라서 좌우의 바위와 골짜기를 조망하고,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온 산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회나무가 아니면 붉게 물든 나무였으며, 붉게 물든 나무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푸르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이 뒤섞여 서로 비추어서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다. 

     

    注 옛 제석당터는 소나무 군락이 있는 바위 전망대이다. 직령(直嶺)은 곧을직 재령으로 글자 그대로 곧은재이다.

     

     

    3.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의 의견

     

    가. 곧은재능선

     

    서복 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은 1953년 백무동에서 태어나서 백무동에서 평생 살아온 토박이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현 느티나무 산장 자리에서 장사를 하셨고, 문회장님께서 물려받아 1978년부터 43년 동안 느티나무 산장을 운영하셨다. 작년 10월 말 문회장님과 점필재길(곧은재) 산행을 함께하면서 '곧은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한신 능선은 누군가 새로 지은 이름이고, 본래 곧은재라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느티나무 산장에 김경렬 선생과 최화수 선생, 성낙건 선생이 자주 오셨다고 한다. 이분들 입에서 나온 곧은재를 누군가 와전(訛傳)하여 바른재능선이라고 하고, 지리산길 지도에 한신능선까지 보태서 지명의 혼란이 있는 듯하다.

     

    문회장님 선고(先考)께서도 '곧은재'라고 불렀고, 영신대로 제물(통돼지&떡)이나 쌀을 올리는 길이라고 기억하셨다. 당시에 세석을 오르는 주통로인 셈이다. 한신 계곡길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계곡을 많이 건너기 때문에 위험해서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람록에 나오는 '直旨(직지)'를 '곧은재'로 이해한다. 현재 곧은재의 경사가 심한 곳은 산죽밭 속으로 우회길이 있다. 샛골능선은 꼭대님 말이 맞다. 월요일(211115) 구의탄초교(마천면사 사무실)에서 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 백무동에서 지게를 지고 곧은재를 경유하여 영신대로 제물을 올렸던 분을 만났다. 백무동 고점(古店) 마을(인민군사령부 터) 출신인 이재현(반달곰펜션, 경남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로 307) 사장님이다. 한말 5대조께서 전북 진안에서 백무동 고점(古店) 마을로 이거했다고 한다. 이사장님은 장터목펜션 이봉수 사장(마천 개인택시)의 사촌형님이고, 옛고을펜션이 백무동 전주이씨 집안의 종가집이라고 한다. 아무튼 '곧은재능선'보다 '곧은재'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재(岾)에는 능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나. 오공능선(蜈蚣稜線)

     

    오공산(蜈蚣山)의 지네 바위 부근에 의령(宜寧) 여씨(余氏)(1864~1939)의 무덤이 있는데,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의중마을에 살았던 만송 '임영택(林暎澤, 1866~1925) 공 부인의 무덤이다. 의중마을 나주임씨세보에 무덤의 위치가 공달비산(蚣達飛山), 도마마을 청주한씨세보에는 공달산(蚣蟽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호성 회장님은 '곰달비산'이라고 하셨다. 함양의 치암(恥菴) 이용근(李榕根) 翁이 웅달비산비천오공결(熊達飛山飛天蜈蚣訣)에서 웅달비산(熊達飛山)이라고 한 것은 곰달비산을 한자로 바꾸면서 곰웅자를 쓴 것으로 이해한다. 금대산에서 오공능선을 바라보면 길게 뻗어 내려온 능선에 좌우로 작은 골들이 발달된 지네의 형상이다. 지네 능선은 곳곳에 그 지명이 산재해 있다. 오공능선(蜈蚣稜線), 오공산(蜈蚣山), 공달비산(蚣達飛山), 공달산(蚣蟽山)은 같은 이름이다. 蜈蚣(오공, 지네오, 지내공)은 지네라는 뜻이다.

     

     

    達飛山飛天蜈蚣訣(달비산비천오공결)

     

                         치암(恥菴)  이용근(李榕根, 1936~   )

     

    頭流一脉向坎來 : 두류 한 맥이 북쪽으로 내려와

    七丙七坤七巽開 : 칠병 칠곤 칠손으로 벌려 있네

    乾亥三相袍玉帶 : 건해방 삼상은 도포 옥대요

    乙辰倉庫品資嵬 : 을진방 창고는 품자로 높다

    庚申尖筆層巒聳 : 경신방 첨필은 층만으로 솟았고

    寅甲印岩跪揖堆 : 인갑방 인암은 괴읍으로 높네

    疊疊靑龍多字橫 : 첩첩한 청룡은 다자로 비켰고

    重重白虎似弓回 : 중중한 백호는 활같이 돌았네

     

     

    ☞ 이용근(李榕根, 1936~  ) : 본관은 경주 호는 치암(恥菴) 한학자. 의중마을에 살았던 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의 증손자. 조부는 죽포공의 次子 諱 鍾七, 父 諱 整雨(1908~1996), 가학으로 부친께 한학을 배웠고 독선생을 모셔놓고 세 분이 9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함께 공부한 분 중 한 분이 서암정사를 창건한 원응스님이다. 榕은 相자와 같은 항렬이다. 자손이 귀해서 항렬자 相대신 榕을 썼다고 한다.(圭-鍾-雨-相-熙)

     

     

    마천 당흥 부락 김수태(93세 1929생) 어르신이 첫째 임영택(林暎澤) 공을 一松, 둘째 임성택(林性澤) 공을 二松, 셋째 임응택(林應澤) 공을 三松이라고 하셨는데, 석각이 만송인지 일송인지 모르겠다. 비결파들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엉뚱한 글자를 쓴다. 임영택(林暎澤, 1866~1925) 공은 와유강산을 쓴 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장형이다.

     

     

    4. 김종직의 유두류록(하산길)

     

    壬午。早起開戶。見蟾津潮漲。久視之。乃嵐氣平鋪也。食罷。並寺之西北。憩于嶺上。望般若峯。約六十餘里。

     

    임오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에 조수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가 편평하게 펼쳐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 쪽을 따라 내려와(나란히 이동하여) 고개 위(곧은재 초입 전망바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而兩足盡蠒。筋力已竭。雖欲往觀。不能強也。徑由直旨而下。道益懸危。攀樹根。履石角。數十餘里。皆此類也。​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민족문화주진회의 국역 오류 부분]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재해석 : [徑(곧바로)由[통(경유)하여]直旨(지름길)而下(내려오는데) → 곧바로 곧은재를 따라서 내려오는데] 길이 더욱 위태롭게 매달려 나무뿌리를 더위잡고 돌 모서리를 밟고 가는데 수십 리가 다 이와 같았다.

     

    面東而仰視。天王峯若咫尺矣。竹梢或有實。皆爲人所採。松之大者。可百圍。櫛立嵌巖。皆平日所未見。​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旣下峻趾。二壑之水所合。其聲噴放。振搖林麓。澄潭百尺。遊魚濈濈。余四人掬水漱齒。沿崖曳杖而行。甚可樂也。​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을 진동시키고, 백 척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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