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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선야봉(충남금산)전국 산행기 2023. 11. 29. 13:37
# 언제: 2023년 11월 28일 화요일
# 산행지: 충남 금산 백암산(육백고지), 선야봉 명품 조망산행
# 산행거리: 9.68km 05시간 21분
# 산행루트: 잣고개(육백고지 전승탑 )- 백령성터 - 독수리봉 - 백암산 - 헬기장 - 571봉
흰바위재 - 535봉 - 713.5봉(삼거리) - 761봉 - 신선봉 - 선야봉 - 남이자연휴양림
육백고지전승기념탑
산의 동남쪽 역평리와 북서쪽 건천리는 한국전쟁에서 패배한 후 퇴로가 막힌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에 의해 백암산을 중심으로 마을 일대가 요새화됐던 땅이다.
특히 건천리는 지금도 북쪽으로 해발 350m의 오항고개를 넘거나 남동쪽으로 해발 360m의 배티재를 넘어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 천혜의 요새. 마을의 남쪽은 백암산과 선야봉이 연봉을 이루며 막아서고 그 나머지는 백암산 줄기가 마을의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선야봉 줄기가 마을의 서쪽을 둘러친 가운데 북쪽은 금남정맥이 흐르며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오항고개, 배티재. 두 고개를 넘지 않고는 험준한 산을 넘어야 비로소 건천리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퇴로가 막혀 궁지에 몰린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을 터. 천혜의 요새와 같은 자연지형 덕에 백암산을 중심으로 건천리를 장악한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이 민간인과 경찰, 군인 합동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5년을 버틸 수 있었다.
1951년 5월, 마침내 우리 군은 민·경·군 3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백암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해발 650m의 백암산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는 시작됐고 이듬해 6월까지 1년여의 지리한 싸움 끝에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가 바로 금산에서 벌어진 공비토벌 작전으로 민ㆍ경ㆍ군 호국용사들이 피 흘리며 격전을 벌인 육백고지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양쪽을 합쳐 모두 2,563명이 목숨을 잃어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상흔이 남고 말았다. 빨치산 2,287명이 사살되고, 1,025명이 생포되었으며, 경찰 184명·군인 20명·민간인 72명 등이 희생된 것. 1991년 3월 25일, 금산군은 배티재 고갯마루 언덕에 '육백고지전승탑'을 세우고 전승탑 앞으로 충혼비와 육백고지참전공적비를 나란히 세웠다.
육백고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민ㆍ경ㆍ군에 대한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 전투에 참여하여 고귀한 승리의 위업을 세운 군민의 향토방위 정신고취와 반공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하는 것이 전승탑·충혼비 건립의 또 다른 취지다.
금산 백령성(錦山 栢嶺城)터
금산 백령성(錦山 栢嶺城)은 충성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에 있는 석성이다. 1990년 05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믈 제83호로 지정되었다.
백령성은 남이면 건천리와 역평리 성치산(해발 759m) 동쪽에의 정상부에 있는 석성으로,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지나 충북 영동과 옥천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는 산 정상 부분을 둘러 쌓은 두른 테뫼식이며, 성의 둘레는 207m이다. 성벽의 동쪽, 남쪽, 북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서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다. 성벽의 너비는 4m이다. 유물로는 백제시대 각종 명문와를 포함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독수리바위
백암산
백암산(654m)은 금남 정맥으로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대양리와 남이 자연휴양림이 있는 건천리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은 백제 이전부터 ‘흰바위산’으로 불려온 산으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산과 지명들을 편의대로 작명하는 과정에서 ‘흰바위’를 ‘백암(白岩)’으로 표기하면서 생긴 이름으로 보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바위 낭떠러지가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백암이라고 하는 백암산은 600 고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쪽에 솟은 서암산과 함께 이름이 말해 주듯 바위 봉우리이며 특히 매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백암산 줄기는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피로 물들었던 전적지이다.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운장산에서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큰 금남정맥 산 줄기이기 때문에 이 백암산은 빨지산의 중요한 거점이며 요새였다. 빨치산 토벌을 위한 군경 합동작전으로 양측 모두 2천 5백명 이상의 귀중한 생명이 이 산에서 사라졌다. 이 작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배티재 고갯마루에는 전승탑과충혼비가 세워졌다.
기암괴봉으로 이어진 백암산과 이웃한 서암산은 경관이 빼어나고 암릉을 걷는 아기자기한 산행의 멋도 있다. 4월 하순에는 진달래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산상의 꽃밭을 이룬다.
선야봉
선야봉은 마을에서 촛대봉이라고도 하는데 고당실기에 의하면 300여 년 전 이 산에서 선녀가 내려와 터를 닦고 집을 지어 살았다는 연유로 이 마을 이름을 고당이라 하였고 이 고당(할미마당)앞에는 말을 타고 다니거나 가마를 타고 지나가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선야봉은 첩첩 산중의 산으로 산과 산, 하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동북 쪽으로 멀리 금산의 진악산 줄기가, 서쪽으로는 대둔산 암봉 능선들이 길게 둘러쳐 있고 바로 서쪽 하늘 아래에는 선녀봉과 쎄레봉의 암봉군들이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길 게 뻗어 있다.
계곡과 폭포와 밀립지대를 헤치고 이 산의 정상 가까이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머리 위를 압도하는 가운데 바위 밑에서 뿌리 내린 큰 덩굴나무가 흡사 뱀처럼 온 바위를 휘어감고 늘어 붙어서 올라가고 있는 광경은 생명력의 강인함과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선야봉의 바로 서쪽 계곡에 터 잡고 있는 큰 피나무가 있다하여 '피목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용계천 계곡의 수원을 따라 산과 산의 험난한 협곡지대로 오르면 '싸리재'에 이르게 된다. 이 싸리재는 두 고개가 있는데 서쪽 고개를 넘으면 완주군 동상면으로 내려가 축령과 은천리를 거쳐 대아댐과 만나게 되고 동쪽고개를 넘으면 진안군 주천면 운일암 반일암으로 나가게 된다.
이 길은 옛날 신라와 백제를 연결하는 주요통로였으므로 백제가 신라의 서쪽 경계인 거창, 합천지방을 침공할 때 이 길을 사용하였고 신라가 백제를 칠 때도 이 길이 큰 역할을 했다 한다.
6.25때는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양민들이 약탈과 학살을 당하고 소탕전을 벌이면 선야봉을 비롯 근처의 깊은 계곡과 운장산으로 숨어 버리곤 하였다는 공비들의 주요 아지트이기도 하였다.
#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충남 금산에 있는 산이라면 우선 떠오르는 산이 대둔산(877.7m)과 진악산(732.3m)이다. 그러나 백암산과 선야봉에 오르는 사람들은 뜻밖에 산과 능선의 아름다움에 놀란다. 이토록 좋은 경관을 가진 산이 굴곡이 거의 없이 폭신폭신한 능선으로 연이어 장관을 이룬 데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한다.
백암산을 처음 오르는 사람은 두번 놀란다. 뜻밖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한국전쟁 때 이 산에서 숨진 2,400여 명의 전사자 수에 놀란다. 또 대전 사람들은 근교에 이토록 좋은 산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며 무척 신기해하기도 한다.
백암산은 금남정맥 줄기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옛날에는 깊은 산중으로 이름난 곳이어서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백암산 서쪽에 자리한 선야봉과의 사이에 남이휴양림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입소문으로 백암산의 아름다움이 꽤나 알려져서 서울, 대구 등지와 가까운 대전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백암산의 매부리봉은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산의 원줄기 북쪽 끝봉을 서암산이라고 하는 바, 서암산에서 보면 매부리봉의 날카로운 바위가 마치 매의 부리처럼 서쪽 하늘로 내밀고 있어 신기하다. 이 매의 부리는 공중에 떠있는 셈이다. 매부리봉 외에도 주릉 일대의 바위등성이는 주로 서쪽 휴양림 골짜기 쪽으로 천길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곳에 노송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또한 주봉의 동북쪽 아래 골짜기 높은 곳에는 '큰굴' 이라는 바위굴이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참극의 현장이긴 하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굴의 넓이가 20여 평에 이른다. 비가 내린 뒤면 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구슬을 엮어 쳐놓은 발처럼 보여 신기하다. 그리고 이 산에는 아직까지 백제의 백령성터가 남아있다.
백암산 산행은 승전탑이 있는 배티재에서 백암리고개까지로 금남정맥에 속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뜻있는 산행이 가능하다. 백암산 줄기 남쪽에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있다. 이 바위봉우리 남면의 바위벽이 아침나절 햇빛을 받으면 하얗게 빛나기 때문에 백암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바로 아래에는 '흰바위마을' 백암리도 있다.
한국전쟁 때 이 산은 '600고지' 라는 이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600고지를 중심으로 수개월에 걸쳐 밀고 당기는 격전이 펼쳐져 남북을 합쳐 2,40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퇴로가 막힌 공산군과 빨치산, 그리고 동조자들과 그들이 납치한 민간인 등 수천 명이 집결하여 험악한 산세를 이용, 이 산을 요새화했다. 운장산, 덕유산을 잇는 큰 산줄기의 통로를 이용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금산, 진안, 완주를 비롯한 인근 민가들을 끊임없이 습격하고 약탈하는 이른바 그들의 보급투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