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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남산 금오봉
    전국 산행기 2024. 3. 25. 19:54

    # 언제: 2024년 03월 22일 금요일

    # 산행지: 경주남산 금오봉, 유적지 길, 걷다.

    # 산행거리: 14.49km   04시간 42분

    # 산행루트: 용장휴계소 - 용장골 - 공원지킴터 - 천우사 - 관음사 - 열반재- 천룡사지(삼층석탑보물제1188호)

                        천룡사 - 천용곡6사지터 - 천룡바위 - 고위산 - 백운재 - 봉화봉수대 - 신선대 - 칠불암(Back)

                        이영재 - 설잠교 - 용장사지 - 용장사곡석불조상(보물제187호)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보물제913호) - 남산용장사곡삼층석탑(보물제186호) - 삼화령

                        금오산 - 상사바위 - 금오정 - 포석곡제6사지오층석탑 -  부엉골 - 포석정주차장 - 포석정

     

    경주 남산

    남산은 경주시의 남쪽에 솟은 산으로 신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남산은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는 남산은 노천박물관이다. 남산에는 40여 개의 골짜기가 있으며, 신라 태동의 성지 서남산, 미륵골·탑골·부처골 등의 수많은 돌 속에 묻힌 부처가 있는 동남산으로 구분된다.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나정은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탄생신화가 깃든 곳이며 양산재는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촌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다. 포석정은 신라 천년의 막을 내린 비극이 서린 곳이다. 동남산에는 한국적 아름다움과 자비가 가득한 보리사 석불좌상, 9m 높이의 사면 바위에 탑과 불상 등을 새긴 불무사 부처바위, 바위에 아치형 감실을 파고 앉은 부처골 감실 석불좌상이 있다. 남산에는 미륵골(보리사) 석불좌상, 용장사터 삼층석탑, 국보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한 11개의 보물, 포석정터, 나정과 삼릉을 비롯한 12개의 사적,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입골석불, 약수골 마애입상을 비롯한 9개의 지방 유형문화재, 1개의 중요 민속자료가 있다. 유적뿐만 아니라 남산은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변화무쌍한 많은 계곡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며, 등산객의 발길만큼이나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워 남산을 일등으로 꼽는 사람들은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용장리 - 용장골

     

    공원지킴터

     

    천우사

     

    관음사

     

    관음사 대웅전

     

    열반곡(열반재)

    신라에 한 대신의 딸이 있었다.

    마음씨 곱고 외모 또한 출중한 무남독녀였다.

    대신과 가까이 지내는 관료들을 비롯해 뭇 남성들의 추파가 그녀를 성가시게 했다. 마침내 그녀는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부처님 세계로 가기로 마음먹고 아무도 모르게 어두운 밤 집을 나섰다.

    부모님의 사랑도, 화려한 의복도, 맛있는 음식까지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고 부처님의 세계를 찾아 들어선 곳이 바로 남산 열반골이다.

     

    계곡 입구에 들어서면서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그녀가 화려한 속세의 옷을 벗어버리고 먹빛 옷으로 갈아입은 갱의암이다.

    그리고 골짜기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숱한 맹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처음 만난 짐승이 사나운 고양이다. 고양이처럼 생긴 묘암이다.

    이어 코를 실룩거리며 나타났던 개바위, 여우바위, 심술이 묻어나는 산돼지바위, 산등성이를 올라서는 작은 곰바위, 유혹하는 뱀바위 등이 관음사까지 줄을 지어 나타난다.

    관음사 뒷산으로 더욱 큰 짐승들이 나타났다.

    맹호바위, 들소바위, 꿈틀거리는 거대한 용트림을 하는 이무기바위, 독수리바위, 거북바위 아래 용이 기거한다는 용바위가 있다.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숲을 지나 물소리도 고요하고 산도 평평해지는데 정상 쪽을 올려다보면 10m 정도 크기의 바위 위에 이상한 모양의 돌이 얹혀 있다.

    누가 대변을 본 모양으로 똥바위라고 부른다.

              (경주남산 겨레의땅 부처님땅 경주남산, 윤경렬 지음, 175쪽 용장계 유적분포도의 열반곡 부분)

     

    처녀는 이미 속세의 모든 물욕에서 벗어나 생명의 위협 따위에도 미련을 버려 평화로운 마음가짐이 되었다.

    마음속이 푸른 하늘 같았다.

    그때 서쪽 산등성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할머니가 내려왔다.

    할머니바위라 불리는데 그 할머니가 바로 깨우친 사람을 극락으로 안내하는 지장보살이다. “이제 아가씨는 진리를 깨우쳐 맑고 깨끗한 마음을 얻었으니 열반으로 안내하오리다.

    이 바위를 타십시오”라며 지장보살 할머니는 구름바위에 처녀를 태우고 흔들흔들 산등성이를 넘어 천룡사 부처님 세계로 안내했다.

    이리하여 처녀는 열반에 들었고 길게 이어지는 고갯길을 열반재라 부른다.

     

    남산 천룡사지

     

    라인들은 신라를 불국토(佛國土)로 만들려고 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시기는 고구려 372년(소수림왕 2년)에,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중국으로 부터 전파가 되었고,  약 150년 가량 늦은 528년 신라 제23대 법흥왕(14년) 때 고구려로 부터 전파가 되었지만, 이차돈의 순교로 인하여 불교를 공인하게 되게 됩니다. 하지만 삼국시대 불교가 가장 중흥 하였던 나라는 신라 입니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도입 목적은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 확립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 들였습니다.  

    당시 신라의 계림 주변과 남산에는 수백개의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불교 사적지도로 알 수 있습니다. 포항 내연산에서 경주 양동마을 사이 포항 신광면 비학산 자락의 "포항 법광사지"는 신라 진평왕 때 왕명으로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현존하는 불국사와 맞먹을 525칸의 대가람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소실된 황룡사를 굳이 건론하지 않아도 신라 땅에는 엄청난 사찰이 존재하였고 그 사찰터에 남아 있는 우리의 문화재는 손궤와 도난을 거듭하면서 천년을 견뎌 왔고, 그나마 남은 유물과 유적은 우리들에게 큰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천년 전에 목공과 석공. 화공들이 만들어 정교하고 미려한 아름다움을 지금 우리는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주 남산은 몇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틈수골, 용장골, 약수골, 국사골, 불곡, 마애곡에는 수많은 불적지가 있습니다. 이곳에 현존하고 있는 유적을 한번쯤 답사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주 왕릉 답사도 함께 해보시면 무척 재미가 있습니다.  

    『천룡사(天龍寺)는 한때 고사(高寺)라고 불렸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고위산(高位山) 천룡곡(天龍谷)에 있다. 신라 때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진 부모가 딸을 위해 창건하고 딸 이름을 한자씩 따서 천룡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위치가 묘하여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계림 땅에는 딴 곳에서 흘러온 두 물줄기와 거슬러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물들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이 생긴다.'고 했고 674년(문무왕 15) 명랑(明郞)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임시로 지었을 때 이를 조사하기 위해 온 중국의 사신 악봉구(樂鳳龜)는 '이 절이 파괴되면 곧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신라 말에 쇠잔해지다가 파괴 되었다. 그 뒤 1040년(고려 정종 6) 최승로(崔承老)의 손자 최제안(崔齊顔)이 중창하고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했으며, 조정의 명을 받아 다시 태조의 신서(信書)인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원문(願文)까지 절에 남겨두었다...中略』 - 한국불교 사찰사전(이정 著)  

    천룡사지는 신라의 호국도량으로 창건된 사찰로 풍수지리에 능하지 않는 사람도 고위봉 아래 넓게 펼쳐진 대지위에 자리한 터를 본다면 참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절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 유저물로는 삼층석탑이 있고 주변에는  석탑·초석·귀부(龜趺)·석조·맷돌 등 많은 석재가 산재하여 당시의 번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천룡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7m 정도 입니다.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 문화재청 설명

     

    경주 남산 천룡사지삼층석탑 , 慶州南山天龍寺址三層石塔 보물 제 1188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75-2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7m. 천룡사는 신라의 호국도량으로 창건된 사찰로서, 절터 주변에 석탑·초석·귀부(龜趺)·석조·맷돌 등 많은 석재가 산재하여 당시의 번성을 짐작할 수 있다.

     

     

    천룡사

     

    남산 천룡곡 6사지 석축

     

    천룡바위

     

    천룡바위에서 조망되는 남산 천룡사지

     

    경주 남산 고위봉 해발 494m

     

    남산 봉화봉수대 석축

     

    걷다보면 남산 칠불암 조망

     

    경주남산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慶州南山神仙 庵磨崖菩薩半加像

    보물 제199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칠불암 뒤쪽의 높은 절벽에 새겨진 통일신라 후기의 마애보살반가상.

     

    보물 제199호. 전체높이 190㎝. 절벽의 바위면을 주형의 감실처럼 얕게 판 안에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반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마애보살상이다. 상 주변에 가구의 흔적과 기와편이 산재하고 있어 원래는 목조 전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눈·코·입이 명확하고 부드럽게 조각되었으며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자비롭다. 두 볼은 통통하고 턱에는 살이 붙어서 풍만한 인상을 준다. 신체 비례는 어깨와 무릎의 폭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된 자세이며, 얇은 천의는 두 어깨 위에서 몸에 밀착되게 흘러내려 약간 비만한 몸체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발은 대좌 아래로 내려 연꽃 족좌를 밟고, 왼쪽 다리만 결가부좌하여 유희좌에 가까운 반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발 아래로는 평면적이지만 화려하고 장식적인 구름무늬가 표현되어 있어 마치 천상의 세계에 있는 보살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상의의 옷주름과 대좌 위로 흘러내리는 주름선들은 이 구름무늬와 어우러져 반가상 전체표현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광배는 상 전체를 감싸면서 약간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고 그 안에 3줄의 선으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다.

    이 반가보살상은 신체의 양감이 강조된 조각기법이나 섬세한 세부표현, 그리고 약간 평면적이면서 장식적인 면이 보이는 점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양식이 형식화되어 가는 단계인 8세기 후반 또는 말경의 상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 신선암

     

    칠불암 가는 신우대 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모두 7구가 모셔져 있다. 가파른 산비탈의 동쪽과 북쪽에 높이 4m 정도 되는 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을 모셨다. 머리는 소발이며,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삼존불상을 새긴 바위 앞에 있는 돌기둥에는 사방불을 새겼는데,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4번지에 있다.

     

    국보(2009.09.02 지정). 모두 7구가 모셔져 있다. 높이는 본존상 2.66m,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 2.11m, 왼쪽 협시보살 2.11m, 동면상(東面像) 1.18m, 서면상 1.13m, 남면상 1m, 북면상 72cm. 2009년 9월 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가파른 산비탈의 동쪽과 북쪽에 높이 4m 정도 되는 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을 모셨다.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했다. 본존불은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앉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양감 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소발이며,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은 입상으로 크기가 같다. 본존불과 비슷한 형태의 법의가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가 돋보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삼존불상을 새긴 바위 앞에 있는 돌기둥에는 사방불을 새겼는데,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이 주변에서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에 불상을 모시는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칠불암,七佛庵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南山) 봉화골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시대에 창건된 암자.

     

    창건연대 및 중창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들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남산 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불상을 갖춘 곳이다.

    칠불암이라 부르게 된 것도 마당에 있는 바위에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비롯하여 사방불(四方佛)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으로서, 1930년대에 지금의 암자가 세워졌다. 이 칠불은 조각수법이 빼어날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방불의 연구에 귀중한 유물이 된다. 또, 이 절의 위쪽 신선바위[神仙巖]에는 반가상(半跏像)을 한 보살상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작품이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인법당(因法堂)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요사채 등이 있는데, 산신각에는 특이한 모자를 쓴 산신탱화가 있었으나 분실되었다. 또한, 이 암자에는 칠불 외에도 폐탑의 탑재를 모아 올린 3층 석탑 1기와 옥개석으로 보이는 6개의 석재, 여덟 겹의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석재유물과 기와조각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암자는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머물면서 대안(大安)의 가르침을 받았던 도량으로 전하고 있다. 마애불상군은 국보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영재

     

    설잠교

    설잠(雪岑)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시습(1435~1493)의 법명

     

    용장사지

    용장사는 신라초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경덕왕 시기에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던 고승 대현(大賢)이 살고 있었는데, 그가 이 절에 있는 장륙상(丈六像)의 주위를 돌며 예배를 드리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훗날 조선 초에는 승려가 된 김시습이 이 절에 기거하면서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썼다.

    이 시기만 해도 용장사가 존재하였으나 이후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에 용장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용장사지임이 확인되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뒤, 읽던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29살 되던 해에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설잠(雪岑)이란 법호로 찾은곳이 경주 용장사와 은적암이 있는 용장골이다.

    용장골 은적암에서만 7년간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다.

    이후 은적암과 용장사에서 잡다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그는 말년에 부여에 있는 만수산 기슭의 무량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다가 1493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경주남산용장사곡석조여래조상,慶州南山茸長寺谷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87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

     

    보물 제187호. 총높이 456㎝, 상높이 141㎝. 특이한 3층석탑 형식의 대좌 위에 놓여 있는 좌상으로 몸과 대좌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머리부분은 없어졌다.

     

    통견의 법의는 조각이 선명하며 가슴에는 내의의 깃과 이것을 묶는 띠매듭이 굵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 어깨에 있는 또 하나의 띠매듭은 가사를 묶는 것으로 대개 승려형의 상에서 표현되는 특징이다.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형식적인 옷주름은 방형의 대좌를 덮는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데 3단으로 되어 좀더 도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좌상 밑의 대좌는 이형3층탑(異形三層塔)이라고 생각될 만큼 특이한데 기단부는 자연석이고 제일 높은 상대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왼쪽 어깨의 가사 띠매듭과 자연스러운 손 모양에 의해 승형(僧形)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삼국유사〉 권4 현유가(賢瑜珈)조에 보이는 '자씨석장육상'(慈氏石丈六像)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이 상은 전체적으로 대좌에 비해 불상이 작은 편이지만 세련되고 긴장감 넘치는 사실주의적인 면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慶州南山茸長寺址磨崖佛坐像

    보물 제913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용장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좌상.

     

    보물 제913호. 높이 162㎝. 절터의 암벽에 얕게 부조된 불좌상으로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얼굴 크기에 비해 어깨와 무릎의 폭이 넓은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머리와 그 위의 나지막한 육계에는 나발이 굵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어깨와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앉아 있는 자세에서 탄력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법의는 통견으로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가슴부분의 옷깃 속으로 접혀들어간 점은 경주 남산 미륵곡 보리사에 있는 석불좌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옷주름 표현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층단을 이루면서 부드러운 물결처럼 처리되었고 비교적 조각기법이 섬세한 편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려뜨리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중앙에 손바닥을 위로 해 올려놓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마멸이 심한 편이며 앙련의 연화좌가 얕은 부조로 표현되어 상을 받쳐주고 있다.

     

    이 마애불상은 당당한 자세의 불신 표현이나 부드러운 옷주름선의 흐름, 그리고 섬세한 조각기법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양식의 요소가 남아 있으나 시대적으로는 8세기 중엽의 석굴암 조각보다는 약간 후대로 보인다. 마애불상 앞쪽에 3층의 높은 연화대좌 위에 놓인 석불좌상이 있어 통일신라 경덕왕대에 용장사에 있었던 유가종의 개조 대현이 예배한 미륵석상과 관련짓는 설도 있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 南山 茸長寺谷 三層石塔

    보물 제186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사 계곡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탑. 보물.

     

    보물 제186호. 높이 442㎝. 현재 상륜부는 모두 파손되었고 3층의 옥개석 부분에 찰주공만 남아 있다. 하층기단 대신 자연암반 위에 상층기단의 중석을 안치한 2층 기단이며 그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1면만 1석이고 다른 3면은 2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하나씩 새겼다. 갑석은 2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갑석 밑에는 부연이, 갑석 위에는 탑신부를 받치고 있는 2단의 굄을 두었다. 1층 옥신은 2, 3층에 비해 높은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체감비율이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각 층의 옥개석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전각의 상면에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일찍이 무너져 파괴되었던 것을 1922년 재건하였고, 2층 옥신 윗면에는 세로 15.2㎝, 가로 13.1㎝의 사리공이 있다. 전체적인 비례감이나 투박한 기법 등에서 다소 시대에 뒤떨어지는 요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2층의 기단, 얇은 굄이 기단과 탑신부를 받치고 있는 점, 옥개석 등에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석탑형식을 따르고 있다.

     

    경주 남산 금오봉

    산림청 100대 명산 탐방 89번째 산행지로 아내와 함께 경주 남산 금오봉을 다녀왔습니다. 경주 남산은 경상북도 경주시 시내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하나인 남산 지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주 남산은 문화재 밀집도 매우 높은 산입니다. 100여 곳의 절터, 80여 좌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산 전체에 널려 있습니다. 삼릉계석조여래좌상,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용장사곡 삼층석탑, 용장사곡 석불좌상, 불곡 석불좌상 등 문화재가 있습니다.

    경주 국립공원남산지구. 경주 남산은 신라왕조의 영산으로 불교의 성지로서 수많은 불교유적 등이 남아 있어 신라인들의 예술 문화가 깃들어 있는 역사의 산으로 인정받아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삼릉~금오봉 코스 주요 문화재로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경주남산삼릉계석조여래좌상, 삼릉계곡마애석가여럐좌상 등이 있습니다.

     

    상사바위

     

    경주 남산 금오정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

     

    경주 포석정,慶州鮑石亭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였던 누정터. 의례시설. 사적.

     

    사적 제1호. 조성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남북국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자는 없어졌고, 포어(鮑魚)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든 수구만 남아 있다. 1915년 유구를 개축할 때 옛 석재들의 이동이 있었고, 또 새로 임의대로 돌들을 놓아 수로 곡석의 원형을 잃게 되었다.

     

    포석정지(鮑石亭址)는 경주 남산(南山) 서쪽 계곡의 포석계(鮑石溪)의 계류(溪流)가에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 망해사조(望海寺條)에 보면 “헌강왕(憲康王)이 포석금(鮑石今)에 놀러나와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보고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했다”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景哀王) 4년(927) 11월에 왕이 포석정에 나가서 잔치를 하고 놀다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의 기습을 받아 왕은 죽고 왕비와 신하들이 모두 함몰되는 비극의 기사가 실려 있다.

     

    포석정지(鮑石亭址)는 신라의 이궁(離宮)에 있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배거(流盃渠)의 유적이다. 유상곡수연의 시초는 중국 동진시대(東晋時代)까지 올라간다. 이 시회(詩會)의 서문이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이다. 이런 고사(故事)를 모방하여 동양(東洋)의 왕궁(王宮)에는 유상곡수연의 유배거(流盃渠)가 만들어졌는데 중국 베이징(北京)의 고궁(古宮)에도 있고 일본(日本) 나라시(奈良市) 헤이조궁(平城宮) 유적에도 있으며 조선의 왕궁인 창덕궁(昌德宮)옥류천(玉流川)의 소요암에도 있다.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의 유배거(流盃渠)는 굴곡진 타원형인데 긴 지름이 6.53m, 짧은 지름이 4.76m이며 타원형 수로(水路)의 구배차는 5.9cm이다. 수로(水路)의 너비는 약 30cm, 깊이는 20cm이며 타원형의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른다. 이 유배거(流盃渠)에 물을 담아 술잔을 띄워본 결과 술잔의 크기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고, 술잔 속에 술을 담은 양에 따라 다르며, 절묘(絶妙)한 수로의 굴곡진 곳에서 물이 돌면서 흐르기 때문에 타원형의 수로를 술잔이 흐르는 시간은 약 10여 분이 걸리었다. 이 시간이면 오언시(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 한 수는 쓸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유배거(流盃渠)의 머리쪽에 큰 느티나무 뿌리가 수입구(水入口) 쪽을 밀어 올려서 높아진 상태이며 흘러 나가는 배수구 쪽은 포석계의 개울에 유실되면서 급속히 낮아져 있다. 포석정지(鮑石亭址)의 전복같이 된 유배거(流盃渠)는 그간에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유배거(流盃渠)에 인수(引水)한 물은 남산 포석계의 개울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흘려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유상곡수연을 하는 장소의 풍치는 험한 산과 무성한 대숲과 맑은 개울이 여울을 이루는 경승지이다. 포석정지의 유적은 ‘어무상심무’라는 신라 춤이 생겨난 현장이며 시회(詩會)를 하는 청유(淸遊)의 장소인 것이다.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을 하던 놀이공간이 아닌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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