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지리산 둘레길 구간[걷기] 2025. 5. 23. 08:38

    # 언제: 2025년 05월 18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주천-운봉(14.7km)

    # 산행시간: 14.7km   05시간 00분

    # 산행루트: 주천면 – 내송마을(1.1km) – 구룡치(2.5km) – 회덕마을 (2.4km) – 노치마을(1.2km) –

                    가장마을(2.2km) - 행정마을(2.2km) – 양묘장(1.7km) – 운봉읍(1.4km)

     

    지리산 둘레길 1구간(주천 - 운봉) 안내도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주천-운봉(14.7km)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7km의 지리산둘레길.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하면서, 해발 500m의 운봉고원의 너른 들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과 제방길로 구성된다. 이 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이 지금도 잘 남아있는 구간이다. 회덕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남원장으로, 노치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은 운봉장을 보러 다녔던 길이다. 특히 10km의 옛길 중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회덕~내송까지의 옛길(6km)은 길 폭도 넉넉하고 노면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솔숲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주천-운봉(14.7km) 

    고개를 넘고 하천을 따라가며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의 외평마을과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7km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지리산 둘레길 남원 주천 안내센터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지리산 둘레길'에서 한 가지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이 루트 중 상당 부분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루트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맞아 공격하라고 명하나 장군은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4월 1일에야 다시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정은 그에게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존쟁터에 임하라는 백의 종군'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제수 받기 전까지 백의종군하며 움직인 동선動線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고 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남쪽으로 향하는데 4월 24일부터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이때 도원수 권율이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된다. 남원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다.

     

    오수교차로 - 월평 주유소 - 사매교차로 - 오리정 휴게소 - 여원재  - 운봉초등학교 - 주천 외평마을(현 위치)  - 밤재 - 구례로 이어지는 루트가 남원 구간 53.1km에 해당

     

    서울 의금부 - 경상남도 구간 161.5km, 전라남도 구간 123.2km을 포함하여 총 640.4km의 구간 중 남원 구간이 53.1km이고 남원 구간 중  운봉초교- 외평마을 - 밤재 구간인  약 20km 구간은 둘레길과 겹치게 됩

     

    원터마을 유래와 둘레길 시작점

    원터마을 유래

    1300년경 채씨(蔡氏)와 정씨(丁氏)가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조 이래 조선말기까지 응양(현재 이백면 효기리)에서 원님이 말을 갈아타고 이곳 현 파출소 앞에서 일단 쉬어가는 곳이어서 원터거리라 하였는데, 경치가 수려하여 감탄을 자아낸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때부터 교통의 중심지로서 국가에 납품하는 물자를 생산해낸 지역(원부곡)이었으며 조선조 말까지 원천원(元川院:국가에서 운영하는 숙박업소)이 있었다. 1885년(고종 22년)에 현 중앙지로서 위치를 정하고 하원천방(下元川坊)의 소재지로서 원터라는 마을명칭으로 불린다. 
    마을이 내방(內坊)과 외방(外坊)으로 나누어 있었으며 내방은 물이 많아 근심이 없다 하여 무수(無愁)라 불리고, 외방은 땅이 건조하여 들의 대부분이 밭으로 구성되어 밭들, 밖들이라고 부르다 외방 외(外)자와 밭들의 전평(田坪) 평자를 따서 외평으로 바뀌었다.

     

    (외평은 원래 마을이 배모양 같다고 하여 뱃들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대성쉼터 앞의 지리산둘레길 안내판을 따라 우틀하여 내송마을 방향 소로로 들어선다.

     

     

    내송마을(안술치)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 한양 조(趙)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그 후로 경주 김(金)씨, 서산 류(柳)씨 등 여러 성씨들이 차례로 들어와 30여 호 마을을 이루면서 주위의 비옥한 농토와 산림을 토대로 부유한 마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출신 「난중잡록」 조경남(趙慶南)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개미정지 서어나무쉼터

    개미정지. 조경남 의병장의 설화가 전해오는곳

    고갯길 어귀의 개미정지는 쉼터로서 조경남 의병장의 설화가 전해오는곳,(임진왜란 때 이 곳 출신 의병장 조경남장군이 이 곳 쉼터에서 잠들었는데 개미가 발을 물어뜯어 왜군의 침입을 알려서 소탕했다는 유래) 운봉고원으로 올라가는 고갯길 구룡치(九龍峙)의 들머리인 내송마을(안솔치)은 임진왜란 때 조경남(趙慶南, 1570-1641) 의병장의 고향이다. 더불어 옛날에 남원 장으로 오가던 장꾼들이 이곳에서 무거운 짐을 풀고 서어나무 그늘에 잠시 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으며. 서어나무숲은 생태계가 안정된 원시림으로 이 나무에 크낙새가 머무르고 장수하늘소가 나무에 구멍을 내고 서식하는 생명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개미정지. 조경남 의병장의 설화가 전해오는곳

    개미정지는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다 잠든 의병장 조경남 장군의 발을 개미들이 물어뜯어 위급함을 알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솔정지

    솔정지는 20여년 전만 해도 나무하러 지게를 지고 가다가 고개를 오르기 전에 땀을 식히고 주천 들녘과 멀리 숙성치와 밤재를 바라보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던 곳이다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숙성치를 넘어 남원성을 향하는 왜군을 향해 조경남 장군이 활시위를 당겼던 곳이라고도 한다.

     

    구룡치

    구룡치는 주천면의 여러 마을과 멀리 달궁마을에서 남원 장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달궁마을 주민들은 거리가 멀어 남원 장에 가려면 2박 3일에 걸쳐 다녀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구룡치를 장길로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백중 (음력 7월 15일) 이 지나고 마을별로 구간을 나누어서 길을 보수해서 이용해 왔는데 지금도 예전의 보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시무락다무락

    구룡치에서 회덕마을 하산길 중간 비범하게 생긴 소나무 아래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돌들로 답을 쌓아놓은 사무락다무락을 만난다사무락다무락은 사망(事望)다무락(담벼락의 남원말)이 운율에 맞춰 변천된 것으로 보이는데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사함을 빌고 액운을 막아 화를 없애고자 지날 때 마다 돌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연리지 용소나무

     

    사랑은 하나 이어라
    두 소나무가 서로 접목된 이 연리지 나무는 일심동체로 남녀 이성 간의 화목은 물론 깊은 애정도 그려주고 있으며 또한 비상하려는 용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서 이 명품 용소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거나 소원을 빌면 모든 이들의 행운과 건강이 오래오래 이어진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1구간 길

    오래전 걷다보면 이곳에 구누가 방생 했는지 모르지만 금붕어 숨쉬고 있던 조그마한 둥벙,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회덕마을이 보이는 쉼터

    구룡치를 넘어서 운봉고원에 내려서면 회덕(會德)마을 보인다

    회덕마을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덕산,덕음산의 덕을 한 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 이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아 짚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둘레길에서 아주 살짝 비껴 있지만, 아기자기한 샛집도 둘러보고 잠시 다리쉼을 하고 가도 좋다.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이순신장군은 경남합천으로 백의종군하던 도중, 1597년 4월 25일 운봉(박룡 혹은 박산취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이때 권율도원 수가 전남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음 날 아침 구례로 항합니다. 구례로 가기 위해서는 여원재로 되돌아가 주천을 거처 갈 수 있겠으나, 이곳에서는 남원의 아름다운 지리산둘레길 '운봉 - 주천' 구간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여원재로 되돌아갈 경우, 이백면사무소로 내려서면 약 4km 거리에 주천면 외평마을이 있습니다. 

     

    -남원시-

     

    정자나무 쉼터

    둘레길 걷다 맛있는 파전에 막걸리 한잔하며 쉬었다 가는곳, 이번 둘레길 걷다 쉬었다 간다. 

     

    회덕마을 샛집(덕치리 초가),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5호)
    회덕마을이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는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아 짚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는 마을 전체가 억새풀로 지붕을 이은 ‘샛집’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전에는 샛집이 부잣집이었고 초가집은 가난한 집이었다고 한다. 고원지대인 운봉에는 폭설이 자주 내리니 용마루를 높이고 지붕을 경사지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숨어든 왜군 패잔병들이 처음 샛집을 짓고 살았다고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일본의 전통가옥(합장집)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지도에는 '덕치리 초가'로 표시되어 있고 ‘구석집’이라 불리는 마을 안쪽 귀퉁이의 초가집은 1895년에 지은 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전쟁 후에 다시 지었다. 이 ‘덕치리 초가’는 조선시대 형식의 샛집으로 전라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석집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집 앞 논밭 너머로 지리산의 줄지은 봉우리가 펼쳐진다. 둘레길에서 아주 살짝 비껴 있지만, 아기자기한 샛집도 둘러보고 잠시 다리쉼을 하고 가도 좋다.

     

    회덕(會德)마을

    임진왜란 때 밀양 박(朴)씨가 피난하여 살게된 것이 마을을 이룬 시초라고 한다.

    원래는 마을 이름을 남원장을 보러 운봉에서 오는 길과 달궁쪽에서 오는 길이 모인다고 해서 “모데기”라 불렀다.

    그 뜻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 곳에 모아 이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으며 현재도 두 가구가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서북능선 조망 정령치, 만복대, 고리봉 , 세걸산

     

    정면 백두대간이 지나는 수정봉 아래 노치마을을 향해 진행

     

    노치마을

    조선초에 경주 정()씨가 머물러 살고 이어 경주 이()씨가 들어와 살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옛 이름이 갈재였던 노치마을은 해발 550m의 고랭지로 비가 내려 왼쪽 주천면으로 빗물이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 운봉읍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수분령(水分嶺) 마을이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백두대간 능선이 통과하는 마을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약 1,470Km(남한 지역 680Km)의 산줄기로 우리나라 땅의 모든 물줄기를 동과 서로 갈라놓은 근골(筋骨)이다. 일제는 백두대간의 목을 눌러 기운을 끊는다고 이 마을 앞 들녘에 큰 구덩이를 파고 100kg이 넘는 거대한 목돌 6개를 설치했었고 6.25 전쟁 때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으로 마을이 완전히 불타버린 아픔을 간직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백두대간과 지리산 둘레길을 찾는 이에게 쉼터를 제공하며 민족의 정기와 역사의 교훈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노치마을 목돌. 목조임돌 또는 잠금돌이라고도 하는 이 목돌은 일제의 간교함을 증언하는 역사적 유물이다.

     

    목돌(목조임석)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1910년부터 백두대간은 물론 한반도 주요 길지 혈맥에 쇠말뚝을 박거나 인위적으로 길을 내어 우리 민족정기의 기(氣)와 맥(脈)을 끊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남원문화원에 따르면 이 목줄 역시 일제가 백두대간의 맥을 끊기 위해 노치마을 앞들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0m의 방죽을 파 지맥을 끊었고 그 안에 목돌 3기(6개)를 설치했다고 한다.

    노치마을 앞들은 덕음산에서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으로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면 목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이곳에 목돌을 설치, 숨통을 조이도록 했다.

    목돌은 가로 120cm, 세로 95cm, 두깨 40cm 크기의 반원 두 개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조임석이 되는데 노치마을 앞들을 경지정리를 하던 중 땅속에서 5개가 발견되었다. 그동안 가정집 정원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13년 8. 15 광복절을 맞아 남원문화원이 목돌을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고 일제의 만행과 악행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표본으로 삼고 있다.

     

    노치 마을회관 옆에 위치한 쉼터엔 백두대간 표지석과 500년 느티나무 보호수와 대한민국의 상징 호랑이 조각상 두 점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고 일제의 간교한 만행의 증거인 목돌(목 조임돌, 목 조임석)이 보관되어 있다. 목 조임돌에 대한 안내문 있다.

     

    덕산저수지

    주천면,운봉,산내, 사람들이 남원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이다.

     

    지리 서북능선 조망 된다

     

    질매재

    질매재 숲길로 들어서면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자연환경은 운봉읍이 멀리 보이고 더 멀리 전북 장안산을 조망하며

    걷게 된다.

     

    운봉고원

    중앙에 운봉의 진산 성산533.5m이 보이고 그 뒤로 장안산1237.4m 조망

     

    지리 바래봉 조망

     

    동복오씨 우암공가족묘원(同福吳氏 牛岩公家族墓園)앞 팔각정(心修亭)

     

    가장마을 쉼터

     

    가장마을

    가장(佳庄)마을은 풍수지리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아름다울 가(佳)' 자에 '단장할 장(粧)' 자를 써서 가장리(佳粧里)라 불렀는데, 지금은 들녘에 농사짓는 움막 터를 뜻하는 '농막 장(庄)' 자를 써서 가장리(佳庄里)로 쓰고 있다. '아름답게 단장하는 선녀의 마을'이 '아름답게 농사짓는 움막 터의 마을'로 바뀌게 된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가장마을이 '옥녀봉 아래에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錦)의 천하명당'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마을이 뱀 형국으로 마을 앞에 입석을 세워 뱀의 기를 눌러 마을의 액 막음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300여 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동복 오(吳)씨와 강릉 유(劉)씨라고 하며, 그 후 창녕 조씨와 김씨, 박씨 등이 입주하게 되었다.

     

     

    행정마을

    공안천 둑길을 걷다 보면 하천 건너편에 ‘제1회 아름다운 숲’ 대상 수상지인 행정마을이 있다. 원래는 은행나무가 숲을 이루어 은행몰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100년 이상 된 80여 그루의 아름드리 개서어나무로 이뤄진 마을숲으로 유명하다. 행정마을 서어나무숲은 모자람을 채우는 비보림이다.   공안천을 끼고 자리한 삼산마을은 운봉향교가 있는 곳으로 마을 안길 사이사이로 천이 흐르고 돌담이 정겹다. 행정마을과 삼산마을은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 촬영지 이기도 하다.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안내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 행정마을은 거대한 지리산 자락을 따라 흩어진 120개 마을을 이어 주는 트레킹 코스 21개 코스 중 2코스 구간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쪽으로는 마을사람들에 의해 조성된 200년 수령을 가진 10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서어나무 숲은 2000년에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았고, 2022년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생태녹생 관광지로도 선정이 되었다. 

    -남원시-

     

     

    행정마을 서어숲

    행정마을의 자료에 따르면 숲이 조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0여 년 전. 당시는 한두 집씩 모여들어 마을이 막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인데, 이때 마을을 지나던 한 스님이 "들 한가운데는 마을 터로 좋지 못한데 왜 하필 이곳에 터를 잡으려 하는가?"라며 말렸단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스님의 말을 무시하고 마을을 이뤄 살았고, 스님의 말이 맞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전염병 때문에 죽게 된다.

    그 무렵 또 다른 한 스님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북쪽에 성을 쌓으면 마을의 액운을 막아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액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비책을 알려준다. 그와 함께 "만약 성을 쌓지 못하면 나무라도 심어 숲을 이루면 숲이 액운을 막아 마을에 더 이상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나무를 심게 한다.

    행정리 서어나무 숲은 이렇게 조성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말대로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자 더 이상 질병이나 전염병 등으로 죽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일제강점기나 6·25때도, 빨치산이 횡행하던 혼란기에도 행정마을 사람 중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 숲은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년) 중 춘향이 그네 뛰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제비같이 몸을 차고, 나비같이 날개 벌려 높으락 낮으락 왔다갔다 하니...'
    '저기 저 건너 장림 숲속에 울긋불긋 오락가락하는 저 게 무엇이냐?'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서어나무 숲 옆으로 람천이 있다

     

    람천

    람천은 운봉벌을 적시다 인월에서 풍천을 만나 광천이 되어 산내에서 만수천을 만나 임천이 됩니다.

    두류전지를 보면 "동천은 정령 아래에서 흘러나와 운봉읍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광천에 합류한다. 광천은 운봉의 적산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황산을 지나 풍천에 합류한다. 풍천은 비조치에서 흘러나와 운봉현을 지나 인월역에 이르러 광천과 합류하여 남쪽의 산내동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람천의 옛 이름은 동천이었군요.

    두류전지는 지리산의 물줄기를 세 개로 봅니다.

    위 동천을 첫 번째 물로 보고, 두 번째 물줄기는 수분재에서 발원하는 섬진강 그리고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청천이 되었다가 남강에 합류하는 물줄기를 세 번째 물줄기로 보는 게 그것들입니다.

     

    운봉읍,雲峰邑

    운봉읍(雲峰邑)은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의 동부에 위치한 읍이다.

    운성지에 의하자면 운봉읍은 진한의 영토로 신라 때에는 모산현이었다고 기록되었으나, 757년(경덕왕 16) 운봉현으로 바뀌었다. 

    고려 때 남원으로 병합되었다. 1380년에는 황산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조선 때 남원에서 독립해 다시 운봉현이 되었다.

     

    1995년 남원군과 남원시가 통합되어 남원시가 되면서 읍으로 승격했다. 읍소재지는 서천리이다. 사방이 덕두산(1,150m)·바래봉(1,165m)·고리봉(1,305m)·수정봉(805m) 등으로 둘러싸인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읍의 중·북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했다. 배추·고추·마늘 등의 고랭지채소가 많이 생산되며, 화훼재배도 활발하다. 예로부터 유명한 운봉목기가 지금도 활발히 생산되고 있다.

     

    유물·유적으로는 화수리 황산대첩비지(사적 제104호)와 서천리 당산(중요민속자료 제20호), 산덕리 운봉향교(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50호)가 있다. 동남부는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한다. 행정구역은 서천리·주촌리·덕산리·공안리·행정리·산덕리·동천리·용산리·북천리·준향리·장교리·권포리·임리·신기리·매요리·가산리·화수리 등 17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33개리). 읍사무소 소재지는 운봉읍 황산로 1083이다. 면적 69.52㎢, 인구 3,659(2024).

    운봉읍 행정구역

     

    운봉읍(雲峰邑)은 

    운봉은 구름雲에 산봉우리峰을 씁니다.

    두류전지에 의하면 "운봉은 원래 신라 모산현이었다. 운봉 고을은 두류산의 뒤편 허리등성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고도를 헤아려 보면 3분의 1 정도에 위치하여 항상 운기가 조망을 가린다. 그래서 운봉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지리지 고령군조에 기록되어 있는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鼓王)의 어원을 근거로 운봉이란 지명에 대해 그 유래를 추정하여 보았다. 

    이(伊)는 다스린다는 위(上) 즉 최고의 뜻이다. 진(珍)은 우리말 고어의 ‘들’또는‘지역’의 한자 표기이고, 아시(阿鼓)는 작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진아시(伊珍阿鼓)는 여러 작은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伊)의 수장(首長)으로 대가야 왕을 뜻하고, 진아시(珍阿鼓)는 이하 대수장 또는 상위 수장이 다스리는 가야의 작은 분국을 의미한다.

    소국가를 뜻하는 진아시(珍阿鼓)는 진아지(珍阿只) → 진아기(珍阿己) → 진애기→지내기로 음전(音轉) 되었다.

    이러한 고어는 아영면 월산리에 마을 지명으로 남아 있다. 구지(舊至), 신지(新至), 외지(外至) 마을이 그것이다. 구지는 구지내기, 신지는 신지내기, 외지는 바깥지내기로, 각각 옛날(舊) 지내기, 새(新) 지내기, 바깥(外) 지내기 마을이란 뜻이다.

    가야 연맹체는 소국가들이 강한 혈맹 관계를 유지하던 형제국가 들이었다는 점과, 마을 부근에 위치한 두락리 고분은 규모나 출토 유물로 추측컨대 가야의 상위 수장급 고분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임을 상기할 때, 가야연맹체의 상위 수장급 소국이 존재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아영면 월산리에 존재했던 집단도 맹주국인 고령의 대가야에서 혈연적으로 분파한 소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운봉의 지명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문헌에 기록된 운봉의 고호(古號)는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아영성(阿英城)․아막성(阿莫城)․운성(雲城)․운막(雲莫)․운봉(雲峰)․경덕(景德) 등이다. 이 중에 무산․아영․운막․경덕 등은 오기이며, 운성은 조선 초기 태종의 사위인 운성부원군 박종우의 작호이다. 

    또는 아시는 여신(女神) 또는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후에 여성 또는 모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다. 즉 진아시는 지역을 다스리는 어머니(여신)를 뜻한다.

    고대에는 산신을 엄산이라고 했는데 엄은 암컷 자(雌), 즉 어머니의 뜻으로 아막의 지명 유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이진아시→ 높은 평원을 다스리는 여신 → 고원의 성모→ 산신→ 엄산 → 어미산 → 암악(雌岳) → 아막(阿莫)

    운봉의 고호인 아막(암악)은 모산(母山)으로 차자(借字)되고, 운봉(고원)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모두 이진아시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운봉의 지명 변천 과정은 다음 세 가지로 추정된다.

    ① 아막(阿莫) → 아막산성(阿莫山城)→(莫→오기→暮)→아모산성(阿暮山城)→(阿 탈락)→모산성(暮山城)→(훈차)→모산성(母山城)

    ② 아막(阿莫)→(莫→오기→英)→아영(阿英)

    ③ 아막(阿莫) → 모산(母山) → 운봉(雲峯)

     

    지리산 둘레길 1구간 14.7km 마침 

    전방  지리산 둘래길 2구간 서림공원 100m 

    '지리산 둘레길 구간[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둘레길 2구간  (1) 2025.05.23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