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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궁, 창덕궁
    카테고리 없음 2026. 3. 26. 20:00

    # 언제: 2026년 03월13일-14일(금,토요일)

    # 어디: 경복궁,景福宮

     

    경복궁,景福宮, Gyeongbokgung Palace

    사적 제117호, 북궐, 北闕

     

    조선의 정궁. 사적 제117호. 정연한 배치체계를 갖춘 궁궐로 북궐이라고도 한다.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건설한 것으로 〈시경〉의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의미를 따 이름을 지었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임금이 거주한 기간은 길지 않다. 궁궐 내부는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과 근정문과 향오문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 공간은 정사를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에는 제반시설이 자리한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여러 차례 화재 피해를 겪어 이에 대한 복구가 거듭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원래 건물을 해체하는 등 본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일부가 복구되었으며, 이후 경복궁 복원 사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다양한 국보·보물급 건축물과 석조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 보물 제812호, 서울 종로구 삼청로

     

    정의

    사적 제117호.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로도 불린다.

     

    역사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경복궁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태조 3)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궁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으며,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년(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38년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대규모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원래 있던 건물을 해체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건축자재의 방매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배치와 구조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궁궐 중 으뜸인 곳으로 다른 궁궐에 비해 전체모습이 정연한 비례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궁궐건축의 배치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복궁은 뒤에 백악(白岳)과 삼각산(三角山)을 등지고 한성(漢城) 중심 좌우에 6조관아(六曹官衙)가 있는 대로광장에 조영(造營)된 궁궐로서 중국의 고대 궁궐을 만드는 법식인 하늘의 별자리를 본뜬 오성좌 배치를 그대로 따랐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중심으로 남북축선상에 주요건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면서 정전과 편전은 앞부분에, 침전과 후원은 뒷부분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직4각형에 가까운 대지 주위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동문 건춘문(建春門), 서문 영추문(迎秋門), 남문 광화문(光化門), 북문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문을 만들었다.

     

    궁궐 안은 정문인 광화문으로부터 홍례문(弘禮門)과 금천(禁川)을 가로지른 영제교(永齊橋)와 근정전을 둘러싼 회랑의 정문인 근정문과 정사를 보던 사정전 뒤의 향오문(嚮五門)을 일직선 상에 배치했다. 이 사이의 공간은 나랏일을 보고 의식을 행하는 업무공간이다.

     

    향오문 뒤쪽에는 침전과 궁궐 내에 필요한 제반시설이 자리한 영역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과 향오문 사이에는 근정문을 경계로 다시 2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중국에서 궁궐을 구성하는 방법인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구성법을 따른 것으로 2단의 월대 위에 자리한 중층의 근정전과 이를 둘러싼 회랑을 중심으로 한 이곳은 치조(治朝)에 해당된다. 주로 신하들의 조례를 받던 곳으로 바닥에는 넓다란 박석을 깔고 좌우대칭을 이루어 보다 강한 권위를 보여준다.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공간은 외조(外朝)에 해당된다. 침전으로 통하는 노문(路門)인 향오문 뒤에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왕후의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해 그 동쪽에 왕대비가 살던 자경전(慈慶殿) 등 많은 침전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1918~20년 사이에 해체되어 창덕궁의 희정전(熙政殿)과 대조전(大造殿) 등을 보수하는 데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일부는 일반인에게 판매되기도 하는 등 대부분 없어졌다.

     

    현재는 자경전과 교태전 뒤뜰의 아미산(峨嵋山)과 벽돌로 쌓은 굴뚝만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자리한 많은 보물급 탑들은 조선의 정기를 억압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되어 옮겨진 것으로, 현재는 이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옛 모습을 되찾고자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재

    근정전(국보 제223호), 경회루(국보 제224호), 자경전(보물 제809호), 근정문 및 행각(보물 제812호), 사정전, 천추전, 수정전, 집경당, 함화당, 재수각,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의 건물과 일제강점기에 옮겨놓은 많은 국보·보물급 석조문화재가 있다.

     

    경복궁 복원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제1차 복원 정비 사업이 진행되어 강녕전, 자선당, 흥례문과 영제교, 태원전 등 모두 89동의 전각이 복원되었으며, 이 시기인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이 시기에 기존 시멘트로 복원되었던 광화문을 철거하고 전통 방식을 이용해 다시 복원했다. 제2차 복원 정비 사업은 2011년부터 시작되었으며 2045년까지 단계별로 궁중생활권역, 제왕교육 및 궁중 군사권역, 궁중 통치권역, 궁중 의례권역, 궁중 방어권역으로 나누어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강녕전

    강녕전, 경복궁 내 왕의 침전이며 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1395년(태조 4) 사정전 북쪽에 세워졌는데 〈서경 書經〉의 홍범편에서 오복 중 강녕을 당호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 중수했으며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전화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내전의 으뜸 전각으로 앞면 11칸, 옆면 5칸의 단층팔작집이며, 장대석 바른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쇠서 2개를 둔 이익공집이다. 특히 뒤에 있던 왕비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를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침전임을 상징했다. 1920년까지는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 화재로 불타버린 창덕궁의 내전을 재건한다는 구실로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어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

    경회루,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누각(1867 중건)

     

    국보(1985.01.08 지정). 외국 사신의 접대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 다시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경복궁의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작은 규모로 지었던 것을 1412년(태종 12)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해 서쪽으로 옮겨 큰 연못을 파고 4각형의 인공섬 위에 더 크게 세웠다. 이때 경회루로 이름지었고,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을 만들었다. 1429년(세종 11) 중수되었고, 1475년(성종 6) 다시 고칠 때 48개의 석주에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을 조각해 조선 3대 장관의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연못 서쪽에 만세산을 만들었다. 1592년(선조 25) 한양의 백성들에 의해 전부 불타버렸다가 1865년(고종 2) 경복궁 중건공사 때 다시 짓기 시작해 1867년 완공되었다.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重層) 건물로 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인 이 건물은 장대석으로 축조된 기단 위에 서 있다. 아래층은 외주방형과 내주원형으로 된 48개의 민흘림석주가 상층목조부분을 지탱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방전을 깔았고, 우물천장을 아름답게 단청했다.

    경회루가 갖는 건축적 특징은 평면구조·칸수·기둥수·부재길이 및 창의 수 등에 〈주역〉의 이론을 적용해 신선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1865년 정학순이 쓴 〈경회루서〉에 건물의 세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회루는 기능의 완전성과 독립주에 의한 아름다운 비례의 건축미를 자랑하며, 더욱이 주변 산봉과 서로 어울려 연못에 반영된 절묘한 경관은 누각 건축의 백미이다.

     

    교태전(交泰殿)

    경복궁에 있는 조선 시대 왕비의 침전이다. 다른말로 중궁전으로도 불렀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25)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3년(명종 8) 불탄 것을 이듬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시 불타버렸다.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는데, 1876년 다시 불탄 것을 1888년 재건했다.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서 헐려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옮겨온 석탑·부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교태전은 뒤뜰의 아미산에 남아 있는 굴뚝에 새겨진 십장생·매란국죽과 길상의 무늬로 보아 150여 채의 궁궐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1920년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 원형추정이 가능하다.

     

    경복궁 근정전(국보 제223호) 전경
     
    국보(1985.01.08 지정). 1395년(태조 4)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이다. 2층의 목조건물로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곳이다. 근정전은 이단으로 된 월대 위에 자리하며,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 새겨진 12지상은 정전 수호의 의미가 있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홍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과 사정문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 서쪽에 융무루,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과 협의문을 두었다.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곳, 국보 제223호

     

    근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문루인 근정문의 좌우에 일화문과 월화문을 두어 권위성을 보여준다. 앞면 5칸, 옆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아래층의 고주가 위층의 변주가 되는 구조이며, 창방·평방 위에 놓인 다포계의 공포는 외삼출목·내사출목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을 두었다. 공포의 전체조형은 판재화하는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천장은 대들보 윗부분부터 우물천장으로 천장 중앙에는 다포계의 천개를 설치하고, 개판에 운룡을 부조했다. 팔작지붕의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했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올려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아 위엄을 더했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크며,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사정전

    사정전, 근정전 뒤 사정문 안에 있는 건물로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정사를 보던 곳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429년(세종 11) 중수했다고 한다.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865년(고종 2) 중건되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를 세웠으며, 사면의 기둥 사이에 토벽을 치지 않고 4분의 광창과 문짝[門扉]을 짰다.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두고 내·외이출목의 공포를 놓았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했다.

    내부는 우물천장이며 작은 내부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특별한 가구법을 썼고, 어좌를 치한 뒷벽에는 운룡이 활달한 필치로 그려져 있는데, 경복궁 내의 유일한 벽화이다. 서배쪽에는 천추전이, 동쪽에는 만춘전이 있는데 만춘전은 6·25전쟁 때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편전은 정전의 측면에 있는데, 이 건물은 정전의 정북방에 있어 정궁으로서의 질서정연한 배치원칙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에 연결된 십장생 굴뚝, 보물 제810호

     

    보물 제809호. 1867년 자미당 터에 조대비를 위해 건립되었는데, 불타버려 1888년(고종 25)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면 10칸, 옆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에 앞면 1칸, 옆면 2칸의 청연루와 앞면 6칸, 옆면 2칸의 협경당, 그리고 서쪽 뒤쪽에 앞면 2칸, 옆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ㄴ'자형이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했다. 이익공인데, 주간에 운공을 3가닥씩 부가해 화려하면서도 번잡한 느낌을 준다. 앞면의 중앙 3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전각을 둘러싼 행각과 담장에 길상·장수·벽사·초복의 무늬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매우 다양하며 아름답다.

     

    집옥재

    경복궁 건청궁 안에 있는 전각,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신무문 동쪽에 있으며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맞배집이다. 연판 등으로 장식된 높은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초석 위에는 고복석을 사용해 다른 건물과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 안초공을 사용했으며, 두공은 다포식으로 첨차의 내외와 양측면에 섬세한 파연초를 조각했다. 행공첨차는 운두가 매우 높아서 소로가 다른 건물에 비해 높다. 건물 전면의 툇간을 전부 개방하고, 양측면은 박공마루까지 전벽을 쌓았고, 8쌍의 쌍공을 만들었음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경복궁 내의 다른 건물에 비해 중국적인 면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특징이다.

     

    향원정

    향원정, 경회루 서북쪽 향원지 안에 세워진 정자(1867)

     

    고종이 건청궁에 기거하던 1867년 경회루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그 중앙에 지은 것이다. 건청궁과 향원정 사이에 다리를 놓아 취향교라 했는데, 이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고 현재의 다리는 1953년 남쪽에 새로 놓은 것이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했다.

     

    # 경복궁 사진

     

    창덕궁, 昌德宮

    사적 제122호.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1405년(태종 5)에 지어져 광해군 때부터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로 몇 차례 중건과정을 거쳤고 일제강점기에 변형을 거쳤다.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이고 궁궐 내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은 양쪽의 월랑이 'ㄷ'로 감싸고 있다. 마당 안에는 임금이 걷는 길이 있고, 북쪽 끝 중앙 월대 위에는 인정전이 자리한다. 인정전의 동북쪽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창덕궁의 북쪽 터에는 금원이라 부르던 후원이 있다.
    창덕궁에 있는 인정전·돈화문·인정문·선정전·희정당·대조전·선원전 등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 사적 제122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사진만 교체

     

    사적 제122호. 1405년(태종 5)에 이궁(離宮)으로 조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7년(선조 40)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인정전(仁政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 164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며, 특히 1833년(순조 33)의 큰 화재 때 대조전과 희정당(熙政堂)이 불탔으나 곧 다시 중건되었다.

    1908년에 일본인들이 궁궐의 많은 부분을 변경했으며, 1917년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불탄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목 아래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는 이 가운데 극히 적은 재목들을 사용하여 창덕궁을 변형·복구했다.

    이 궁궐은 창경궁과 이어져 있고, 뒤쪽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7년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300여 년 간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배치는 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각들을 배치하여 조선시대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인 곳에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금천 위에 금천교가 놓여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과 그 양옆에 월랑(月廊)이 있다.

    인정문은 정전의 정문이며 그 양쪽에 있는 월랑은 'ㄷ'자형으로 인정전을 감싸고 있다.

    ㄷ자형의 마당 안에는 인정문으로부터 시작된 어도(御道)가 있고, 그 북쪽 끝에 있는 중앙의 높은 월대 위에는 정전인 인정전이 자리잡고 있다. 인정전 월랑의 동북쪽에는 편전(便殿)인 선정전이 위치해 있다. 선정전의 주위에는 여러 행각이 있는데, 그 남쪽에 있던 여러 칸의 행각들은 일본인들이 모두 헐어버렸고, 뒤쪽에 있는 행각만 남아 있다. 동북쪽에는 희정당과 내전인 대조전 영역이 서남향으로 지세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궁궐지〉에 희정당은 편전으로, 또 〈동궐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어 현재의 모습과 다르다. 희정당으로부터 구름다리 모양의 행각이 북쪽으로 뻗어 희정당 자리보다 높게 자리잡은 대조전은 침전으로 장방형의 행각이 둘러싸고 있고, 이 뒤쪽으로는 아름다운 후정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전 영역의 동남쪽에 내의원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낙선재(樂善齋), 승화루(承華樓), 백칸 안쪽에 이르는 행각들만 남아 있다.

    창덕궁의 북쪽에 있는 넓은 터에는 금원이라고 부르던 후원이 있다.

    현재 이 궁궐 안에는 건물 13동과 후원의 건물 28동 등 모두 41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인정전(국보 제225호)·돈화문(敦化門:보물 제385호)·인정문(보물 제813호)·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희정당(보물 제815호)·대조전(보물 제816호)·선원전(璿源殿:보물 제817호) 등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의 인정전(조선 후기), 국보 제225호

     

    국보(1985.01.08 지정).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중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0년에 중건했고, 1803년(순조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 기단을 쌓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다포식 건물이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순종 때 서양식 건축의 실내양식이 들어오면서 서양식의 커튼박스·전등시설·전등갓 등으로 장식되었다. 평면의 중앙 어칸 뒤쪽에는 어좌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일월오악병풍이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특히 중앙에 보개천장을 만들고 봉황새 1쌍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공포는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바깥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어 기둥 윗몸에 놓은 운공(雲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층 축부의 중앙과 뒤쪽 중앙에 문짝을 달기 위해 문지방만을 놓았으나 나머지 모든 칸에는 소슬빗꽃살창을 달기 위해 높은 머름을 짜넣었다. 상층에는 교창만을 짜넣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잡상을 늘어놓아 장식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이화무늬장[李花紋章]의 장식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것이다. 인정전과 인정문 사이의 공간에는 중앙이 높고 양쪽이 낮은 어도가 있고, 그 좌우에 18품의 품계석이 있으며 마당에는 넓고 얇은 돌을 깔아 마무리했다.

     

    창덕궁의 대조전

    창덕궁의 대조전(보물 제816호) 내부

     

    보물 제816호.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수천 칸 전각들을 헐어낸 재목으로 대조전과 그 일곽을 복원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중건으로 〈동궐도〉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중앙에 높은 돌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솟을대문이 있고, 그 좌우로 행각을 둘러 대조전 몸체를 'ㅁ'자형으로 감싸고 있다. 대조전은 대문과 마주하는 곳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월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월대와 대문 사이에는 어도가 있고 월대 네 귀에는 드무(무쇠로 만든 솥)가 있는데 물을 담아 방화용수로 사용했다. 대조전은 앞면 9칸, 옆면 4칸으로 중앙 3칸이 대청이고, 좌우에는 온돌방이 있다.

    외부로 노출된 기둥은 네모기둥이고, 안쪽에 있는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기둥 윗몸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두었는데 수서의 끝은 날카롭고,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화반과 운공들을 두어 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안쪽의 고주 위에 8각형 주두를 놓은 것이 이채롭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을 가설했다. 현재 대청은 쪽마루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를 가설하지 않아 내전임을 나타냈다.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한 다음 용두와 잡상으로 장식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행각을 두어 경훈각과 연결했으며, 또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석단들을 두고 그 위쪽으로 담장을 쌓아 아름다운 후정을 조성했다. 특히 검은색 벽돌과 붉은색 벽돌로 무늬를 놓은 굴뚝이 석단 위에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신정전

    보물 제814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이다. 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쌓기한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 그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

    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의 끝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지만, 삼제공과 사제공 끝은 운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가구는 전면에 세운 2개의 고주와 뒤쪽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바닥에는 현재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본래 전바닥이었던 것을 일제가 변형시킨 것이다.

    어칸 뒤쪽으로 가는 2개의 기둥을 세워 벽체를 만든 다음 어좌와 일월오악병풍을 두었으며, 그 위쪽은 보개천장으로 꾸몄다. 축부의 중앙 어칸에는 띠살문짝을 달았고, 나머지 칸에는 높은 머름을 두고 그 위쪽으로 띠살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성을 하지 않은 채 치미와 용두를 얹어놓았다.

     

    창덕궁의 연경당 , 창덕궁 후원

    본래 창덕궁의 후원으로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고 불렀으며,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일제 때 용어이다.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59년(세조 5)에는 후원 좌우에 연못을 만들고, 열무정(閱武亭)을 세웠다.
     

    463년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경계가 거의 성균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했다.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소요정(逍遙亭)인 탄서정(歎逝亭), 태극정(太極亭)인 운영정(雲影亭), 청의정(淸漪亭) 등을 세웠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1642년에는 취규정(聚奎亭)을, 1644년에는 뒷날 관덕정인 취미정을, 1645년에는 희우정(喜雨亭)인 취향정(醉香亭)을, 1646년에는 청연각(淸讌閣)인 벽하정(碧荷亭)을, 1647년에는 취승정(聚勝亭)과 관풍정(觀豊亭)을 세웠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과 빙옥지를, 1690년에는 술성각 옛 자리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세웠다. 1704년에는 대보단을 축조했고, 1707년에는 택수재(澤水齋)를 세웠다. 1776년에는 왕실의 도서를 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주합루(宙合樓)라 부르는 중층 누각이며, 그 아래 연못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택수재를 지금의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쳤다. 1828년(순조 28)에는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후원 안의 개금재 자리에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등의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영역은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이 들어선 지역이다. 셋째 영역은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가 있는 지역이다. 넷째 영역은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도 청심정·빙옥지·능허정(陵虛亭) 등이 곳곳에 있다. 후원의 구성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그리고 앞에 펼쳐진 편평한 땅 등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공을 가해 꾸며놓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조원(造苑)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예이다.

     

    부용정

    창덕궁 후원 안에 있는 부용정(조선 후기)

     

    1707년에 지은 택수재를 1792년(정조 16)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했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4칸의 아(亞)자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 남쪽 면의 일부가 돌출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다듬은 8각형의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우고, 기둥 위에는 주두와 익공 2개를 놓아 굴도리를 받치고 있는 이익공집이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기단 남면과 양측면에 계단을 두어 툇마루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정자 북측에 파놓은 넓은 연못[方池]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북쪽 연못에는 정자의 두리기둥 초석들이 물 속에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툇마루에는 아름다운 평난간을 돌렸다. 부용정 앞의 부용지는 네모난 모양이고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으니 이는 신선들이 논다는 삼신선산의 하나인 방장이나 봉래 또는 영주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연못에는 서북쪽 계곡의 물이 용두로 된 석루조를 채우고 넘치는 물은 연못의 동쪽 돌벽에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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