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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발비트,묘향대,실비단이끼목포&(폭포수골,함박골)지리 산행기 2019. 6. 17. 13:21
# 언제: 2019년 06월 16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 뱀사골 박영발비트,묘향대,실비단이끼목포&(폭포수골,함박골)산행
# 산행거리: 14.28Km 06시간46분
# 산행코스: 뱀사골 - 와운교 - 간장소 - 유유교 - 폭포수골 - 박영발비트 - 묘향대 - 함박골 -
실비단이끼폭포 - 뱀사골
# 뱀사골
길이 약 14㎞. 지리산 국립공원의 여러 계곡 중에서 가장 수려하다. 대부분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곡을 따라 약 8㎞까지는 크고 작은 폭포와 연못이 연이어 있다. 소룡대·탁룡소·뱀소·병풍소·포암대·단심폭포·간장소 등의 명소가 이어지며, 곳곳에 100여 명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넓은 암반이 있다.
봄의 철쭉,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으로 계절에 따른 색다른 절경을 이룬다. 특히 뱀사골의 한여름은 15℃ 이하의 냉기를 항상 유지하며, 가을의 단풍은 피아골 단풍보다 더 아름답다고 한다. 뱀사골이라는 이름은 배암사라는 절이 있었고, 골짜기가 뱀처럼 사행하고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실제로 약뱀이 많다고 하며, 인근 주민들은 한해에 2만 마리 정도의 약뱀을 잡아 가계소득을 올리고 있다.
뱀사골 유래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려고 할 때, 다른 산신령들은 다 허락했는데 지리산 산신령만은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게는 는 경상도에 있던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양 보냈다. 그 지리산반선에 옛날에는 커다란 절이 있었다. 지리산의 다른 골짜기에도 절이 몇 군데 있었으나 반선의 절만 유독 번창하였다.
그런데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저녁에, 뜬금없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오더니 스님 한 명을 싸가지고 올라갔다. 스님들이 생각하기에, ‘우리 절이 좋으니까 신선이 돼서 올라가는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듬해 또 선녀가 내려와 스님을 싸가지고 올라갔다.
그렇게 여러 해를 계속해서 스님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데, 남은 스님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선녀에게 들려 올라간 스님들의 순서가 나이순이었다. 이제 스님들은 올해는 누가 올라가느니, 내년에는 누가 올라가느니, 나는 몇 년 남았느니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다들 신선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다가 한 스님의 차례가 되었다.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 이 스님은 어릴 적 동문수학했던 친구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스님의 친구는 정승이 되어 있었다. 한양으로 올라간 스님은 정승 친구를 만나서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는, 이제는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 떠나기 전에 친구가 보고 싶어서 왔노라고 했다.
정승 친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장삼을 한 벌 지었다. 장삼을 지으면서 삼베 옷감에 비상을 버무렸다. 한 겹을 그렇게 하고는 또 다른 한 겹에도 비상을 버무려 중장삼을 두툼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스님이 떠날 때 두툼하게 만든 장삼을 주면서 하늘로 들려 올라갈 때 꼭 그 장삼을 입으라고 하였다.
장삼을 받아들고 절로 내려온 스님은 섣달 그믐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날이 되어서 두툼한 장삼을 입고 앉아 있으니 과연 하늘에서 서기가 내리더니 선녀가 와서 스님을 싸가지고 올라갔다. 주변의 다른 스님들은 축원을 하였다.이튿날 뱀사골안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산천이 다 어긋나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문을 열고 나올 수조차 없었다. 하루 저녁 하루 낮을 그렇게 하더니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졌나, 산천이 무너졌나 궁금해 하며 밖으로 나와 보니 물가에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핏물을 따라 사람들이 올라가 보니 뱀소 둔덩이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보니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이상해서 이무기의 배를 갈라 보니 장삼을 입은 스님이 들어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는 조화를 부린 이무기였던 것이다. 이무기가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선녀로 변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무기가 지리산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것은, 지리산을 지키는 산신령이 귀양을 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절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무기한테 스님들이 잡아먹혀서 스님의 수도 줄었을 뿐만 아니라,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이무기한테 잡아먹힌 것이었으니 남은 스님들도 힘이 날 리가 없었다.
하루는 대처 중이 이무기를 죽게 한 스님의 친구인 정승을 찾아갔다. 이무기가 죽은 일을 자세히 얘기하니, 정승은 절을 불로 다 태워 버리고 그 골짜기를 반선(返仙), 곧 신선이 되어 올라간 곳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뱀사골이란 말은 뱀(이무기)이 죽었다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 박영발 비트
지리산군에서 반야봉은 지리산의 상징적인 봉우리다. 어쩌면 천왕봉보다 더 유명한 지리산의 봉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이도 같은 반야봉(1732m)과 반야중봉(1732m)이 나란히 서 있다. 지리주능 어느곳에 올라도 봉긋 쏫아 지리를 지키고있다. 어머니의 엉덩이같은 푸근함이, 보는이로 하여금 한없이 평화롭게하고 풍요로운 봉우리가 불과 반세기 전의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장많이 품고있는 한 봉우리이다.반야봉 중허리는 거친골짝과 암벽을 품고있어 빨치산의 비트가 많이 산재되어 있다.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비트도 반야아래 뱀사골지계곡에 있는데 알고있는 빨치산출신 장기수가 치매가 와 찾지못하고 있다한다.
그중 하나인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비트도 반야봉 사면에 있다. 소년빨치산 출신 김영승씨가 발견한 박영발비트는 발견당시 등사기 잉크통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채로 발견 되었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서 일부 훼손도 되었지만 발견당시의 천연동굴안의 통신선과 발전용 전지밧데리등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이념이 서로 다른 아픈 우리민족의 역사이고, 불과 10수년전만해도 거론조차 못했던 공산 빨치산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훼손을 막아 잘 보존시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비법정탐방로 안에 있어 일부 지리메니아가 찾는 곳이기는 하나 가능한 역사의 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
1913생 경상북도 봉화군 출신이다.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 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적색노조 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 일하던 중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었다. 미군정 초기에 좌익 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고, 전평의 집행위원도 겸임했다.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1947년 경에 월북하였고, 전문일꾼 육성 정책에 따른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도 유학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하였을 때 합법적으로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곧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전남 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박영발은 한국 전쟁 중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견제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951년에 남부군의 이현상이 제안한 유격대 개편안을 방준표와 함께 반대하는 등 이현상과는 대치되는 지점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953년에 이현상이 사망하기 직전 제5지구당이 해체될 때도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월 중순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월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2월 말에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 등 정확한 사망 시점과 경위에 대해서는 증언이 다소 엇갈린다.
토벌대를 이끈 백선엽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정신력이 대단했던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2003년 평양 애국렬사릉에 이현상, 방준표 등과 함께 박영발의 가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경상북도 봉화군출신이다.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 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적색노조 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 일하던 중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종전되었다. 미군정 초기에 좌익 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고, 전평의 집행위원도 겸임했다.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1947년 경에 월북하였고, 전문일꾼 육성 정책에 따른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도 유학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하였을 때 합법적으로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곧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전남 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박영발은 한국 전쟁 중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견제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1년에 남부군의 이현상이 제안한 유격대 개편안을 방준표와 함께 반대하는 등 이현상과는 대치되는 지점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953년에 이현상이 사망하기 직전 제5지구당이 해체될 때도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월 중순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월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2월 말에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 등 정확한 사망 시점과 경위에 대해서는 증언이 다소 엇갈린다. 토벌대를 이끈 백선엽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정신력이 대단했던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2003년 평양 애국렬사릉에 이현상, 방준표 등과 함께 박영발의 가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발견당시 관련보도자료광주=뉴시스 - 지리산에서 50여년전 빨치산들의 지휘부로 사용했던 은신처가 발견됐다.
광주.전남지역 주간지인 "시민의 소리"에 따르면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35년간을 투옥했던 비전향 장기수 김영승씨(70)가 최근 반야봉 인근에서 당시 지휘본부로 사용됐던 은신처를 발견했다.
V자 형태로 되어 있는 이 동굴은 오른쪽 꼭지점에서 중앙을 향해 2.3m 내려간 뒤 다시 3.2m 왼쪽 석벽을 타고 가야 입구에 겨우 도착할 수 있다.
동굴 내부는 3-4명이 머물 수 있어 주거공간과 통신실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또 내부에는 통신용 전깃줄이 널려 있고 무전기 배터리, 도시락 뚜껑, 고무신, 옹기그릇, 유리병, 주사용 앰플 등도 발견됐다.탐사팀을 이끈 김씨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빨치산의 역사가 복원되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며 "다만 청춘과 생명을 바첬던 당시 역사적 교훈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굴 위치를 제보한 박남진씨(83)는 "이 은신처는 1953년 10월부터 4개월 동안 지휘부로 사용됐던 곳"이라며 "당시 박영발조선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었다"고 증언했다.
박영발의 마지막 지휘소
반야봉 북사면 산중턱, 해발 1330m 부근의 바위틈에 자리 잡은 박영발 비트. 주변 지형 지물상 감쪽같이 엄폐·은폐되어 발견하기 쉽지 않은 천연의 요새다. 이곳은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1953년 10월부터 그가 최후를 맞은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가량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곳이다. 오목한 바위지대, 약 2m 깊이의 좁다란 바위 홈이 보이고 사다리로 바위 홈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비트인 바위 굴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다리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구조이며 바깥에서는 굴 입구가 보이지 않아 정말 감쪽같은 곳이다.
탐방팀은 랜턴을 준비하고 사다리를 이용해서 비트 속으로 진입해 암굴을 살펴본다. 바위 틈을 기어들어가야 하니 진입도 쉽지 않다. 암굴은 한 평 남짓한 크기로 설 수는 없고 서너 명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이다. 캄캄한 굴속을 랜턴으로 비춰보니 당시에 무전 등 통신용으로 활용하던 전선(일명 삐삐선)도 보인다. 암굴 속에 또 다른 암굴이 있다. 컴컴한 어둠 속에 무저갱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린 암굴 입구, 선뜻 진입하기 망설여지지만 비좁은 통로로 겨우 몸을 뻗어 기어서 진입하니 또 다른 좁은 공간이 나타난다. 암굴 속에 내실과 외실이 있는 셈이다. 안쪽 암굴에는 당시에 쓰던 무전기 배터리도 보인다. 액이 흘러나와 허옇게 변한 모습이다.
62년 전 이맘때의 겨울, 백설로 하얗게 변한 반야봉 북사면 중턱의 이 비좁은 암굴 속에서 그들은 혹한의 겨울을 났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이곳에는 박영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비롯해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2월경 토벌대에 사살되며 파란만장했던 청춘을 지리산에 묻었다.
박영발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좌익 항일 운동을 했고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남조선 노동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7년 남한에서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해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다. 그는 1950년 6·25 때 남하해 전남도당 위원장을 맡지만 인민군 후퇴로 지리산에 고립돼 유격전을 펼치다가 지리산에서 고혼이 되고 만다. 평양의 애국열사릉에는 지리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비롯해 전북도당 위원장이었던 방준표와 그의 가묘도 설치돼 있다고 한다.
# 묘향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집이 있는 지리산 묘향대, 그곳을 찾아가기란 여간 녹록지 않다. 반야봉 자락의 깊은 산중에 위치해 찾아가는 길도 멀고 험하다. 그래서 묘향대는 뭇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반야 성지로 불리며 지리산 최고의 수행지로 알려져 있다. 묘향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아예 지리산 주능선에 올라서서 접근하거나 아니면 뱀사골에서 험한 계곡을 치고 올라야 한다.
그나마 편한 길은 주능선 상의 삼도봉에서 반야봉 북사면 허리 길로 접근하는 것이다. 아니면 반야봉으로 올라 반야중봉 정상에서 북사면을 타고 내려 접근할 수도 있다. 뱀사골에서 접근하려면 뱀사골 상부에서 폭포수골이나 함박골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길이 제대로 없고 험해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찾는 사람 많지 않은 마치 절해고도 속의 수행지 같은 묘향대다. 특히 겨울이 되면 묘향대는 고립무원이 된다. 한 번 눈이 쌓이면 길과 길 아닌 곳의 구분은 사라지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도 없을 만큼 온통 하얀 눈뿐이다. 그래서 한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일쑤여서 이곳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탐방팀의 접근로는 뱀사골에서 폭포수골이다. 폭포가 많아 폭포수골이라 불릴 만큼 가파르고 거칠다. 탐방팀은 뱀사골과 폭포수골을 거슬러 올라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를 돌아보고 묘향대로 향한다. 박영발 비트에서 바로 위쪽의 사면길을 따라 20분가량 오르면 삼도봉 쪽에서 접근하는 허리 길을 만나고 여기서 다시 우측으로 15분가량 진행하면 묘향대에 도착한다.묘향대 석간수
개운조사 머물렀던 반야성지 묘향대
반야봉 자락의 반야성지 묘향대, 병풍같이 늘어선 암벽 자락에 제법 넓고 편평한 조망 좋은 터가 있고 그 한쪽에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묘향대의 묘향암이다. 묘향암은 지리산 반야봉 북동자락 해발 1480m 고지에 위치한 은둔의 암자이다. 원래 사방 험로로 둘러싸여 인적조차 드문 곳이었지만 지금은 지리산 명소 중 한 곳이 돼 찾는 산객이 더러 있다.
묘향암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전부터 토굴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많은 도인들의 참선 수행지였다고 한다. 특히 죽음으로부터 해탈한 도인으로 알려진 개운조사께서도 한때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는데, 그는 지리산에서 182세까지 살다가 나뭇가지 하나 붙잡고 꼿꼿이 선 채로 열반한 전설적인 도인으로 산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지금의 암자는 1970년대에 화엄사 한 스님이 불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탐방팀은 배낭을 풀어놓고 묘향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암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고색창연한 모습의 암자가 북향으로 고즈넉이 앉아있다. 오랜 세월 거친 풍우 속에 빛바래고 허름한 암자의 모습이 오히려 참선수행 도량으로서 이곳 형세에 더 조화롭게 어울려 보인다. 색이 바랜 양철 지붕도 올해 새로이 황금색으로 도색했다. 산중 오지에 번쩍거리는 황금색 지붕이 이채로워 보이고 암자 앞의 너른 잔디마당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조망 또한 멋지다. 앞쪽에는 명선북릉이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토끼봉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고스란히 조망된다.
암자 옆 암벽 아래에는 묘향대 명물 석간수가 있다. 바위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상당하다. 한 바가지 떠서 들이켜니 물맛이 깊고 청량하다. 험한 폭포수골을 힘들게 오른 후에 접하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의 묘향대, 일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런 곳이 길지가 아니면 어디이랴. 암자 옆 뜰에 수북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드는데, 어느 향수보다도 더 향기롭고 구수하다. 이곳 묘향암에는 호림스님이 십수 년째 지키고 계시는데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보니 스님도 지리산 산중의 혹독한 긴 겨울 날 채비를 이미 마쳤는가 보다. 오늘따라 속세로 출타하시는 스님, 스님도 여느 산꾼처럼 험한 길 내려가기 위해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있다. 탐방팀은 스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법당에 들러 예를 차린 후 앞뜰에서 한동안 여유를 가진다.
지리산에는 대(臺)라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을 일컬어 ‘지리 8대’라고 하거나 10대, 24대 등으로 부르고 있고, 한편으로 천왕 5대, 반야 5대, 혹은 7대 등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천왕 5대에는 통상적으로 영신대, 향적대, 문창대, 소년대, 향운대 등을 꼽고, 반야 5대에는 이곳 묘향대를 비롯해 우번대, 문수대, 서산대, 무착대를 일컫는다.
묘향대는 반야봉 정상에서 묘시 방향에 위치해 묘향대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지리산의 대(臺)는 통상 전망이 아주 좋고 높은 언덕이나 바위 자락에 위치하는데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으로 꼽히는 곳들이다. 흘러간 역사 속에 각 대마다 나름의 사연들을 품고 있고 그곳에 들면 대부분 경관이 일품이다. 또한 좋은 기운이 흐르고 있어 탐방한 산객의 마음마저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곳이 지리산의 대(臺)이다.# 지리 실비단이끼폭포
묘향대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가량 소요된다. 계곡 가에 잠시 쉬며 호흡을 고르고 다시 함박골 좌우를 오가며 하산 길을 이어간다. 계곡 길을 30분가량 걸어 내려 지리산의 비경 이끼폭포에 도달한다. 이끼폭포는 함박골 최고의 경관으로, 녹색 이끼를 타고 내리는 실폭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수량이 적당해 이끼와 하얀 포말이 제대로 어울리면 환상적인 경관을 연출하는데 오늘은 조금 아쉬운 모습이다.
태고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
별유천 녹색향기 담은 뱀사골 이끼폭포
이방 길 따라 태고의 음향 들리는
저리 고운 녹색 카페트 빛을 내는 실비단 폭포억겁의 긴긴 세월 심산유곡 바위 자락에
수많은 푸른 이끼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며
젖은 바위자락에 푸른 융단을 이루며
찰거머리처럼 연이어 붙어 있네이끼폭포엔 햇볕은 오히려 재앙
초록심연의 젖은 바위가 이끼천국 아닐까
어두워서 빛나는 촉촉한 초록웃음들이
초록신비의 젖은 바위벼랑에서 춤을 춘다푸른 융단에 실비단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환상적인 이끼폭포
깊은 함박골을 가득 덮은 파릇파릇한 이끼사이로
실비처럼 미끄러지는 하얀 폭포수태고의 신비 청렬한 물에 흩어지는 연둣빛 아지랑이
여린 초록의 안개에 파묻힌 뱀사골 이끼 폭포
그 실 비단 이끼폭포의 비경에 취해
우 - 와 !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환호성을 지르네명경지수 청정계류에 발 담그니
이네 마음까지 시원하네
청수에 담긴 구름 한 점 옷깃 속에 숨겨올까
이런 시원하고 깨끗한 선경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산행지도
#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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