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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장산,內藏山&영은산,靈隱山 눈꽃산행-21년01월03일(일요일)
    전국 산행기 2021. 1. 5. 16:33

     

    # 언제: 2021년 01월 03일 일요일

    # 산행지: 내장산,內藏山&(영은산靈隱山)@눈꽃 산행

    # 산행거리: 13.44Km  09시간13분

    # 산행코스: 서래탐방지원센터 - 서래봉(Back) - 불출봉 - 망해봉 - 연지봉 - 까치봉 - 호남정맥갈림길 - 신선봉

                   용굴암(Back) - 은적암(Back) - 실록길 - 금선휴계소 - 내장사 - 우화정 - 내장사탐방지원센터

     

    내장산,內藏山&(영은산靈隱山)

    내장산은 원래 본사 영은사(本寺 靈隱寺)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이라고 불리었으나 산 안에 숨겨진 것이 무궁무진하다하여 내장(內藏)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지명도 내장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내장산의 최고봉인 신선봉(神仙峰)의 높이는 763.5m이고, 노령산맥의 중부에 위치하며, 북쪽에서부터 월령봉(420m)·서래봉(624m)·불출봉(622m)·망해봉(640m)·연지봉(蓮池峰, 669m)·까치봉(715m)·연자봉(675m)·장군봉(將軍峰, 696m)의 내장구봉이 동쪽으로 트인 말굽형으로 분포하는 호남 5대 명산의 하나이다. 특히 가을철 단풍이 아름답고, 조선 8경의 하나로 꼽혔다. 백제 무왕 37년(636년) 영은조사가 세운 내장사와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쌓았다는 동구리 골짜기의 내장산성이 있으며, 금선폭포, 용수폭포, 신선문, 기름바위 등의 명소가 있다. 내장산과 백암산을 묶어 1971년도 내장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내장사,內藏寺&영은사(靈隱寺),벽련사(碧蓮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6년(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때의 가람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1098년(숙종 3) 행안(幸安)이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다. 1468년(세조 14) 정혜루를 건립하였다.

     

    1539년(중종 34) 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장사와 영은사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 1557년(명종 12) 희묵(希默)이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1639년(인조 17) 영관(靈觀)이 법당 등을 중수하고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1779년(정조 3) 영운(映雲)이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하였다. 1923년 학명(鶴鳴)이 절을 벽련암(碧蓮庵)의 위치로 옮겨 짓고 벽련사라 하였으며,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1938년 매곡(梅谷)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51년 1월 12일 불탄 뒤 중건을 보지 못하다가, 1957년 요사인 해운당을 건립하였고, 1958년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1960∼1962년과 1974∼1977년에 중건하였고, 1992년 요사인 향적원(香積院)과 종각을 건립하였으며, 1997년 해운당을 중건하였다.

     

    용굴암,龍窟庵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4대 사고는 조선 전기 신록을 보관하던 곳인데 성주, 충주, 춘추관 등 3개 사고가 전소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만은 의병의 끈질긴 저항으로 무사했다. 그러나, 왜군은 제육진을 전라도 심장부인 전주로 진격시킬 예정이었고 전주사고마저 전소의 위기에 처하자. 하지만, 5월 말부터 전운이 감돌자 전라감사 이광을 비롯해 최철견, 권수, 홍기상, 윤길, 유인, 이정란 등이 모여 왜군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신록과 태조의 어진을 산속으로 옮기기로 한다.


    오희길, 유인, 안의, 손홍록, 김흥무, 한춘, 희목과 승려들은 조선왕조의 역대 실록 30여태, 나머지들 20여태 즉 궤짝으로 따지면 약 60여 궤, 책 수로 따지면 실록이 830책, 기타 전적이 538책 분량을 수십 마리의 말과 인원을 동원해 7일 동안 고생해 내장산 은봉암(隱峰庵)으로 옮겼다. 7월 1일 태조의 어진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7월 14일 다시 더 깊은 비래암(飛來庵)으로 실록을 옮겼다. 이 때 오희길과 안의, 손홍록, 내장산의 승려들은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켰다.

     

    오희길은 어진을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 52일, 안의 혼자 수직한 일수 174일, 손홍록 혼자 수직한 일수가 143일이었다. 이는 그들이 신록을 지키면서 기록한 수직상체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1593년 4월, 왜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7월 9일 정읍 현감 유탁의 주도 아래 신록은 정읍현으로 운반되고 안의와 손홍록은 배행 차사원이 되어 7월 11일 아산까지 신록을 배송한다. 아산에서 의정부로 인계된 신록은 해주로 운반되어 3년 동안 보관되다가 부본의 인쇄를 위해 1596년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강화도로 옮겨질 때까지 동행했는데 당시 안의의 나이 64세, 손흥록은 56세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강화도 마니산에 있던 신록은 평안도 영변 묘향산의 보현사로 옮겨지고, 1604년 묘향산에 있던 실록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렇게 지켜진 전주사고분 신록은 사본으로 인쇄돼 새로 세운 사고에 보관하게 됐는데 춘추관을 제외하고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마니산 등 조선신록을 깊은 산에 보관하도록 한 이유는 임진왜란 중 내장산에 신록을 보관한 것에서 착안한 신록 보존 방법이다.

     

    인생은 한번이다

    흐르는 인생처럼
    모든 것에 느끼고 싶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인생은 한번이다..
    연습도 복습도 없는 인생
    꼭! 한번 사는 인생.

    힘들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단 한번의 인생이기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순간 순간의 행복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삶이고 싶다.

    죽도록 노력해도 안되는 일도 많고
    죽도록 일해도 형편 좋아지질 않는
    인생이라도 순간 순간의 행복은 있다.

    늘 인생의 마지막 삶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후회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인생 하나하나에 모든 것을 느끼며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인생도 자연처럼 순응하며
    받아 들이며 살고 싶다.

    인생은 아름다웠다...중에서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서래탐방 지원센터 주차장

     

    남부지방 내장산 적설량30cm 내렸다해 눈꽃산행

     

    내장저수지

     

    서래봉 오름 계단 힘들다...ㅎㅎㅎ

     

     

    서래봉 해발622m

     

    사천 배완식 동생 멀리서 왔다

     

    내장산 장군봉 조망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치봉, 조망

     

    내장산 아름다운 풍광

     

    내장사, 백련암, 조망

     

    내장사 - 내장사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가 세운 내장사가 있었다.

     

    백련암(碧蓮菴) - 이 사찰은 내장산의 서래봉 중봉 330m 고지에 있었는데 원래는 내장사(內藏寺)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을 백련암(白蓮菴)이라 하였고 다시 벽련암(碧蓮菴)이라 칭했다.

     

    불출봉 오르며

     

    불출봉 해발622m

     

    불출봉에서 조망되는 정읍시

     

    망해봉 오르며

     

    망해봉 해발640m

     

    용산호에서 망해봉을 올려다 보면 한 여인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형상이 나타난다. 

     

    실루엣 장면으로 산등성을 전체적으로 보면 누어있는 여인의 섬세한 형상과 너무도 흡사하다.  이곳 주민들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채 기다리다 끝내 망부석이 돼 버린 정읍사 여인의 정한이 나타난 것이라며 숭고한 사랑의 상징물로 간주한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이어져오고 있는 부부애를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실감나는 '여인상'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데크를 설치하고 망해봉(望海峰) 이름을 망부봉(望夫峰)으로 바꾸는 작업도 검토하고 있다. 

     

    연지봉 해발669m

     

    연지봉에서 삼겹살, 따뜻한라면에, 약주 한잔 맛있는 점심

     

    까치봉 해발715m

     

    까치봉 - 내장산 까치봉의 까치샘이 동진강 발원지

    동진강의 본류인 태인천을 위주로 진행된 탐사에 대한 설명에서 박래철 선생은 “국토해양부에 문의해본 결과 조선시대까지 정읍천이 동진강의 본류였으나 일제시대 이후 섬진강댐, 동진강도수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태인천의 수량이 정읍천의 수량보다 많아져 지금은 태인천이 본류가 되었다”고 소개하고 “대신 발원지는 여러 가지 설에도 불구하고 내장산 까치봉의 까치샘에서 흐른 물이 발원지로 인정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까치봉에서 내장산 주변 풍광, 조망

     

    멋진 포즈 취하는 사천 배완식

     

    멋진 풍광

     

    지나온 길 뒤에 까치봉

     

    호남정맥길, 순창새재, 백암산(상왕봉)갈림길

     

    내장산 신선봉 해발 763m

     

    내장산의 최고봉인 신선봉(神仙峰)의 높이는 763.5m

     

    갈림길 - 직진 연자봉, 장군봉, 좌틀산행루트 용굴암, 은적암, 내장사

     

    실록길

     

    용굴암,龍窟庵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4대 사고는 조선 전기 신록을 보관하던 곳인데 성주, 충주, 춘추관 등 3개 사고가 전소되고 유일하게 전주사고만은 의병의 끈질긴 저항으로 무사했다. 그러나, 왜군은 제육진을 전라도 심장부인 전주로 진격시킬 예정이었고 전주사고마저 전소의 위기에 처하자. 하지만, 5월 말부터 전운이 감돌자 전라감사 이광을 비롯해 최철견, 권수, 홍기상, 윤길, 유인, 이정란 등이 모여 왜군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신록과 태조의 어진을 산속으로 옮기기로 한다.


    오희길, 유인, 안의, 손홍록, 김흥무, 한춘, 희목과 승려들은 조선왕조의 역대 실록 30여태, 나머지들 20여태 즉 궤짝으로 따지면 약 60여 궤, 책 수로 따지면 실록이 830책, 기타 전적이 538책 분량을 수십 마리의 말과 인원을 동원해 7일 동안 고생해 내장산 은적암隱寂庵,은봉암隱峰庵으로 옮겼다. 7월 1일 태조의 어진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7월 14일 다시 더 깊은 비래암(飛來庵)으로 실록을 옮겼다. 이 때 오희길과 안의, 손홍록, 내장산의 승려들은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켰다. 오희길은 어진을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 52일, 안의 혼자 수직한 일수 174일, 손홍록 혼자 수직한 일수가 143일이었다. 이는 그들이 신록을 지키면서 기록한 수직상체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1593년 4월, 왜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7월 9일 정읍 현감 유탁의 주도 아래 신록은 정읍현으로 운반되고 안의와 손홍록은 배행 차사원이 되어 7월 11일 아산까지 신록을 배송한다. 아산에서 의정부로 인계된 신록은 해주로 운반되어 3년 동안 보관되다가 부본의 인쇄를 위해 1596년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강화도로 옮겨질 때까지 동행했는데 당시 안의의 나이 64세, 손흥록은 56세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강화도 마니산에 있던 신록은 평안도 영변 묘향산의 보현사로 옮겨지고, 1604년 묘향산에 있던 실록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렇게 지켜진 전주사고분 신록은 사본으로 인쇄돼 새로 세운 사고에 보관하게 됐는데 춘추관을 제외하고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마니산 등 조선신록을 깊은 산에 보관하도록 한 이유는 임진왜란 중 내장산에 신록을 보관한 것에서 착안한 신록 보존 방법이다.

     

    은적암隱寂庵,은봉암隱峰庵터 - 천해의 요새

     

    내장산 금선휴계소 - 2008년 즘 인가 유도선수 왕기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산속의 작은 주막이였다 겨우살이 막걸리 생각난다.

     

    내장사,內藏寺&영은사(靈隱寺), 벽련사(碧蓮寺)

     

    내장사에는 636년(백제 무왕 37) 영은조사가 50여 동의 대가람으로 창건한 영은사와 660년(백제 의자왕 20) 유해선사가 세운 내장사가 있었다.

     

    내장산 우화정(羽化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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