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국골, 이끼(천상)폭포, 두류봉, 마암, 청이당, 천례탕, 허공달골, 우중산행
    지리 산행기 2021. 8. 2. 09:26

    # 일자: 2021년 08월 01일 일요일

    # 산행지: 국골, 이끼(천상)폭포, 두류봉, 마암, 청이당, 천례탕, 허공달골, 우중 산행, 지리,智異의 품속에서 놀다.

    # 산행거리: 00.00Km   10시간20분

    # 산행루트: 추성주차장 - 국골 - 이끼(천상)폭포 - 두류봉 - 태극(동부)능선길 - 마암 - 청이당옛길 - 청이당터

                    천례탕 - 쑥밭재 - 허공달골 - 두류암부도 - 두류암터 - 석상용장군묘 - 품계동 - 어름터 - 광점동주차장 -

                    추성주차장

     

    # 국골,國谷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국골(國谷)은 가락국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피난처였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당들이 굿판을 많이 벌여 굿골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가야시대 왕이 피난 차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데서 국골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피난 당시 두지터는 가야국의 식량창고였으며, 광점동 얼음터는 석빙고터였다. 구형왕은 이곳에서 50리쯤 떨어진 왕산(王山) 기슭에 별궁인 수정궁(水晶宮)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추성동 염소농장 바로 아래서 칠선계곡에 합해지는 계곡이다. 이 사실과 관련지어 김경렬옹(작고)도 국골의 천연요새를 막다른 최후의 피난처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였으며, 그는 또 달궁에 도성을 쌓고 72년간 명맥을 유지했던 마한(馬韓) 최후의 왕조가 달궁을 버리고 40리 거리인 국골로 옮겨 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옛왕조의 파천설이 있을 만큼 추성동 일대는 천연요새임에 틀림없다.

     

    국골은 초암능선을 사이에 두고 칠선계곡과 이웃해 있다. 추성산장에서 시작한 등산로는 본류를 두 번 건넌 다음 고도 890m 지점의 좌측 지계곡을 건너 능선과 사면을 거쳐 국골사거리로 이어진다. 이 등로를 따른다면 아쉽게도 국골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고도 1,050m 이상에서 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골짜기의 중, 상단인 - 고도 1,050m 지점에서 두 개의 골짝으로 갈라진다.


    지형도엔 하봉과 두류봉 사이로 올라가는 좌측 골[날끝산막골]이 본류임이 분명하지만실제 현장에는 우측 골[선골]이 본류 형세를 하고 있는 듯하다. 우측 골로 오르면 초암능선 촛대바위 아래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거의 협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계곡이 곧추 섰다고 [선골]이라고 한다.

     

    한편 호리병처럼 숨어 있는 듯한 좌측 골은 초입에서 조금만 오르면 폭이 넓고 수량도 많아진다. 고도 1,350m 합류점을 만날 때까지 폭포가 잇달아 나타나면서 폭포의 향연이 시작되는데, 산행 걷다 느끼지만 지리산의 마지막 숨은 비경이라고 극찬하고싶다. 능선 상의 날머리에 산막이 있었다고 [날끝산막골]로 부른다.

     

     

    인생사 별거 없다

    인생사 인생별거없고 별난사람없다.

    인생사 수레바퀴처럼 돌고도는 법

     

    인생사 한번 왔다 한번 가는 것

    인생사 머 그리 불편하게 사는 지

    인생사 걱정이 태산 같으나 한 번 소리쳐 웃으면 그만인 것을...하 하 하

     

    인생사 인생사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을

     

    세상사 내려다보며 배 잡고

    낄낄대며 웃고살자구요...ㅎㅎㅎ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삼봉산 조망

     

     

    금줄을 넘는다.

     

     

    국골 쌍폭

     

     

    해발 880m 지점 합수부 벌떡선골 방향 풍광

     

     

    국골, 선골, 날끝산막골, 방향 풍광

     

     

    합수부 좌(날끝산막골), 우(선골)

     

     

    날끝산막골 폭포, 이끼의향연, 풍광

     

     

    합수부 석굴(하봉)굴, 방향의 아름다운 폭포

     

     

    두류능선 가는 방향 암석, 우린 사이에 있는 나무를 가로 질러 이끼(천상)폭포로 고고싱

     

     

    석굴(하봉)굴 방향의 폭포 풍광 멋지고 아름답다.

     

     

    해발 1,470m에 위치한 고산 이끼대폭, 언제봐도 그 모습이 장관이다.

     

     

    이끼(천상)폭포에서 힐링의시간 보내고 오르는 사태 골

     

     

    지리에 피어 있는 꽃들의 향연 걷는 길에 아름다울 따름

     

     

    태극(동부)능선 길 도착

     

     

    두류봉 해발 1617m

     

     

    운무 속에 초암능선, 국골, 풍광

     

     

    영랑대 조망

     

     

    함께한 산우님 들 

    우린 먼저 마암, 청이당, 허공달골, 방향으로 고고싱

     

     

    마암(馬巖)

     

     

    【馬巖의 위치와 역사

    지리산 동부능선 쑥밭재에서 하봉으로 가는 길, 일명 하봉 옛길이라고 불리는 등산로의 기슭에 위치한 馬巖은 지리산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일개의 큰 바위이다.

     

    전형적인 대()의 모습을 한 높이40m에 너비가100m정도 되는 바위의 상단부에 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馬巖 이라는 곳을 쉽게 알 수 있으며 바위 하단에는 인공으로 다듬어진 샘이 있고  바위아래 평지에는 구들장 및 허물어진 축대들의 흔적이 있기도 하다.

     

    馬巖이 세간에 알려진 역사는 1472년의 기록물인 지리산유산기 김종직의<유두류록>으로 부터이다.

    이후 조선 중기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망라해서 여러 선인들의 유산기에서 馬巖이 등장한다.

     

    한편 馬巖에는 일제강점기 1923년에 함양 유지 이진우(李璡雨)라는 사람이 희사를 하고 벽송사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마암당(馬巖堂)이라는 산막을 지어 다음해 봄에 낙성식까지 했다고 한다.(1923개벽지 34호에 기록) 당시에 마암당(馬巖堂)은 순전히 함양지역에 부임해온 일본인 순사들과 관리들 및 함양유지들의 천왕봉을 오르는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지역민들은 馬巖堂을 말바우 산막이라고 불렀다.

     

    그 후 마암당은 60년대 초까지도 벌목꾼들의 목기막으로 사용되어 오다 그 곳에서 상주하던 어느 주사가 심한 약초꾼에 의해 불 질러졌다고 전한다.

     

    지금도 바위의 우측 하단에는 그때 불에 그을 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바위 아래에는 집터의 흔적이 있어 산막이었던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유두류록과 馬巖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馬巖을 최초로 기록한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의 馬巖에 도착한 정황을 기록한 문단이다.

    馬巖의 위치에 대한 오류가 감지되는 문단으로, 馬巖의 위치 파악에 많은 혼돈을 가져오게 하는 기록이다.

     

    본문에서의 여기는 중봉이며,"샘물"은 지금의 중봉샘이다.

    이 바위는 기우제를 올린 바위이다.

     

    그러니까 본문의 기록으로 본다면, 김종직일행은 하봉을 지나 중봉아래에 위치한 중봉샘에 도착을 하고서 그곳을 馬巖이라고 오인을 한 정황이다.

    김종직 일행이 중봉샘을 馬巖이라고 오인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샘이다.

    중봉과 馬巖 두 곳에 샘이 있다는은 지형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중봉샘과 馬巖의 위치를 혼돈 한 것으로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한편,본문에 언급된 또 한 곳의 지형물 이 바위즉 기우제를 올린 바위의 실체가 기록의 오류라고 해석을 하게하는 한 이유이기도하다.

    중봉샘 근처에는, 사람이 올라가서 배회를 하면서 기우제를 올릴만 한 바위를 찾을 수 가 없다.

     

    당시( 14728),함양군수 이었던 김종직은 고을 원의 자격으로 지난 해 와 금년 여름에 두 번씩이나 사람을 시켜서 기우제를 올렸던 馬巖의 대략적인 형승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작 馬巖을 찾은 것은 이번 산행 길이 처음인 탓으로,역로(하봉옛길)에서 벗어나 있는 馬巖을 지나쳤던 것으로 보아진다.

     

    선인들의 유산기 전반에서 지명위치에 대한 오류는 흔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의 馬巖의 위치 오기로 인한 정황은

    이후 10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거슬러 1610년 박여량의 유산기인 두류산일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박여량 역시 중붕샘 부근을 馬巖으로 오인을 하게 되면서 이후 여정들에 등장하는 지명들의 위치에까지 오류가 보인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수친서(안내서)로 해서 지리산을 등반한 박여량이었기에 馬巖의 위치 오인은 당연한 결과라고 봐야한다.

     

    이후 조선후기대의 선인들의 지리산유산기에서 馬巖의 위치가 정립이 되면서 일제강점기와 근대 산행기 등에서 馬巖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빌려온글-

     

     

    점필재가 쉬어간 청이당 앞 계석

     

     

    청이당,伊堂

    1)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8월 15일,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위에서) 찾이하고 않자서 잠깐 쉬었다. ☞ 占堂 : 청이당

     

    2) 1611년 유몽인 선생의 두류산록

    [원문]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穿森木亂石叢. 至永郎臺

    1611년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3) 1871년 배찬 선생의 유두류록

    [원문] 小憇于嶺上. 過艾峴. 到天女堂平田. 從者進午飯. 遂環坐於澗邊石上. 各執匏器. 折木爲匙. 足爲免飢. 各吟一律拈平田之田字.

    1871년 9월 5일, 산마루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애현(艾峴)을 지나 천녀당평전(天女堂平田)에 이르렀다. 시종(侍從)들이 점심을 내와서 마침내 모두 계곡 옆의 바위 위에 빙 둘러 앉아서 각자 바가지 그릇을 잡고 나무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어 밥을 먹으니 배고픔을 면할 만하였다. 각자 평전의 ‘전(田)’ 자를 끄집어내어 시 한 수씩을 읊었다.

     

     

    天禮碭 추정

     

    4)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원문] 漸漸前進置艾峴. 路於左便而取右. 路踰麓. 則天禮碭也.

    1924년 8월 18일(송대 출발)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었다. [출처 지리99, 국역 이재구 선생]

     

     

    이 지점은 지리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청이당터(쑥밭재 아래 평평한 터)라고 하는 곳과 유람록의 청이당터는 청이당 옛길 마암 가는 방향 거리(약100m)가 있다. 내 자신도 동안 이 지점이 청이당 터 자리로 알고 있었다.

     

     

    쑥밭재

    쑥밭재의 어원에 관하여 논의가 있다. 즉 혹자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약쑥이 많은 곳이라 그렇게 불러온다고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은 여전히 믿을 바 못된다. 오히려 지리산 전설 중 한 분인 ‘성산’ 선생께서는 이곳이 옛날 마천사람들이 진주장에 갔다가 돌아오며 하루를 묵었던 곳이라 하여 ‘숙박재>쑥박재>쑥밭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곳이 마천과 시천면 덕산(지금은 산청군이지만 예전에는 진주 관할이었음)을 잇는 고개였으니 마천 사람이 진주 장에 가서 소금을 지고 올라오면 밤이 되어서야 고개에 도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곳에서 하루 자고 갈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이유에 수긍이 간다. 더군다나 예전에는 암자나 당집이 이런 숙박을 치기도 하였으니 조선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이들을 상대로 숙박업소가 있었음도 능히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니 ‘성산’ 설에 한 표를 던진다.

     

    청이당이라는 당집 터가 있던 쑥밭재이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쑥밭재는 사거리이다. 쑥밭재가 주목받는 이유는 교통의 편리함 때문이다. 즉 이 루트가 함양과 산청을 이어주는 지름길이었고 고개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추성리-광점동-어름터-쑥밭재-유평리-덕산을 잇는 루트는 곧 벽송사와 대원사를 이어주고, 주능선인 쑥밭재에 청이당이라는 당집마저 자리하고 있었으니 더없이 좋은 산길이었으리라. 좌측으로 내려가면 청이당 터이고 직진하면 국골이나 두류능선을 탈 수 있는 이른바 국골사거리로 갈 수 있고 우회전하면 석상용 장군 묘와 어름터가 있는 허공다리골(=허공달골)로 가는 길이다. 점필재가 쉬던 청이당 터는 덕천강이 발원하는 곳이어서 이곳을 지나는 꾼들에게는 요긴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빌려온글-

     

     

    두류암터 부도탑

     

     

    최화수님은 지리산 1994(최화수기자 대하르포) - 하동코스 중...전망대에서 연전히 평탄한 오솔길을 잠시 돌아가면 절터를 만난다, 추성동의 한 불자가 사찰 복구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잡초만 무성하다,

     

    지리산365일에 소개된 부도탑이다. 그때는 넘어져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이 조립해 놓았다 신다.

     

     

    두류암지(頭流庵址)          위치: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6

     

    # 문헌에서의 두류암

     

    # 천령지(天嶺誌) 鄭秀民 編

    정수민(鄭秀民)이 효종 7(1656)에 편찬한 함양(咸陽) 지역의 읍지(邑誌)로써,저자 정수민이 평생동안 직접 답사하고 수집한 것을 작고 2년 전에 쓴 함양군의 옛날 군지이다. 편자 정수민(鄭秀民, 15771658)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일두 정여창의 증손이다.

     

    [기록내용 및 해제]

    두류암 군자사동쪽 30리 지점에 있다.동쪽에 송대가 있는데,운치가 그윽하고 한적하다.지금은 없다.[頭流庵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 幽閑(今無)]

     

    두류암의 폐사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써, 이후 역대로 간행 된 함양군지에서는 두류암의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참고로 천령지 이후 역대 함양군지 발간 역사는 1788년 경.1956.1981.1995.2012년 5차례 정도이었다.

     

    # 함양군사(咸陽郡史)

    2012년 함양군이 주관하고 함양군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함양의 역사.문화.인물등의 향토지로써,역대에 발간된 함양군지(咸陽郡誌)들을 저본으로 하였다.

     

    [기록내용]

    郡史 3권 문화 편의 없어진 절(弊寺) 편에서 두류암 추성(頭流庵.楸城)”이 폐사지 목록에 있다.

     

    역대 발간된 함양군지에서는 보이지 않음에도 여기서는 간략하게나마 언급을 해 둔 것을 보면 천령지두류암부분을 참고한 듯 하다.

     

    #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1582~1610년에 걸친 일기형식의 기록.

    내용 - 15971124/정유년 만력 25, 선조 30(1597)

     

    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陰里)까지 추격하여 178명을 사살하고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여 구()나 되었다. 이때에는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왜놈과 싸워온 경험이 있는 자 10여 명을 구례에 있을 때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에 내 수하에는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당벌촌(唐伐村)에 이르니, 온 마을이 텅 비어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둘 녘에 한 사람이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頭流菴)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에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馬川谷)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선인들의 유산기 기록(이하 인용한 유산기 문장들은 옛 산행기방에서 본문보기가 가능하기에 관련 문단만 제시한다.

     

    # 변사정 유두류록.1580(선조 13) 4.5~11.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 박여량 두류산일록.1610(광해 2) 92~ 98.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 몽인 두류산록. 1611(광해 3) 329~ 48.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 김영조 유두류록. 1867(고종 4) 826~829.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 배찬裴瓚 유두류록. 1871(고종 8) 94~98.

    비현(扉峴)*[현 사립재]을 넘으며 굽어보니 두류암(頭流庵), 벽송암(碧松庵)인데 이는 함양(咸陽)의 경계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암의 산막으로 돌아왔다. 시종이 먼저 도착해서 조반을 이미 지어놓았다. 밥을 먹은 후에 마침내 바로 두류암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오봉촌 뒤의 산촌에 이르렀는데...

     

    # 권도용 방장산부. 1922(일제강점기) 422~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 폐사지의 형승

    대략 천 여평이 훨씬 넘을 듯 한 사지의 군데 군데 기와파편이 너부러져 있으며,계단식으로 층층히 쌓은 축대들과 샘터의 흔적은 물론 배수구의 모습도 완연하게 남아있다.생활도구로 활용했던 돌 절구며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든 멧돌등의 석조물도 보인다.

     

    본당 터 추정지 북쪽에는 의탄천(일명 허공다리골)의 계곡미를 완상할수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 조망대가 있기도 하다. 이부분은 유몽인이 언급한 암자 북쪽에 대()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문장과 일치한다. 한편 본당터의 남쪽에는 석종형 부도 1기가 있어 절의 창건연대를 짐작해 주기도한다.

     

    # 절집의 창건연대 및 폐사연대 추정.

    절집이 남긴 관련 문서가 극히 미비하기에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대개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했던 석종형 부도와 진한 흑갈색을 띄는 기와파편등을 참조하면 고려말 혹은 조선초기에 창건된 절집으로 추정이 되며,폐사시기는 1656년 정수민의 천령지에 지금은 없다의 기록과 변사정.유몽인의 유산기를 참고해 보면 조선중기대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유몽인이 다녀온 1611년 이후 약 20~30년 간에 폐사가된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다.

     

    # 두류암 폐사이후 근대까지의 두류암지 현황

    두류암 사하촌 마을 광점동 추성리 사람들은 두류암지 그곳을 두람동이라고 부른다.“두류암동의 줄임말로써 폐사이후 두류암은 일개의 부락명 두람동으로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두람동에는 근대 70년도 중반까지 사람이 거주했으며,당시 거주자 중의 한 분은 지금도 광점동에 살면서 두류암지 근대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유몽인 이후 250 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쓰여진 김영조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고 한 기록에서 폐허의 절터에 산민들의 집단부락이 형성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절 주변 척박한 골짜기의 환경을 보면 수 십호의 농가와 절집이 공존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하면, 김영조가 언급한 두류암은 당시 절을 명칭한 것이 아니고 일개의 부락명으로 일컬은 것으로 보인다. 김영조 4년 후, 배찬이 비현(사립재)에서 보고,하산중에 들러서 쉬었다는 두류암 역시 산간마을의 명칭 이었을 것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등은 두류암 지척 상내봉능선 너머의 절집들이다.천령지의 기록에는 이 들 절집들도 금무(今無) 즉 지금은 없다고 했다.

     

    추측컨대,지리적 요소로 인해 한 때는 천왕봉 등정 유생(儒生)들의 숙박장소가 되기도 했던 두류암을 비롯한 지리산 암자들이 배불정책의 조선의 역사에서 견딜 수 없어 사라졌다고 보아진다.

     

    조선 후기,진주민란 을미사변 등 나라의 어지러운 난세를 피해 대책없이 지리산으로 흘러 들었던 조선 유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곳이 두류암 사지이다.    -빌려온 글-

     

     

    의병장 석상룡 선생(의병장석상용지송공비)

    석상룡 선생은 1907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게 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성삼재, 벽소령, 쑥밭재 전투 등을 통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린 선생은 1912년 일본군에 체포될 때까지 5년 간 지리산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생의 13대 조부가 석성石星이라는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으면서 이여송의 군대가 조선을 지원토록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결국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으로 처형되고 그의 자손들 또한 귀양을 가거나 처형을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맏아들 담潭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조선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 하여 '수양군'에 봉하고 조선에서 살게 하였는데 이 석상룡 대장이 바로 그 자손이라는 겁니다.

     

     

    묘비의 배면에 기록된 내용.

     

    "공의 자는 용견이라했고,세칭 비호장군이라 불렀다.

    용력이 뛰어나 국가멸망의 위기에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중에서 왜경을 참(斬)한것이 심히 많았다.

    필경에 투옥되어 5년뒤에 나와싸웠으나 옥중 고질로 경신년 10월에 울분을 머금은채 세상을 떠났다."

     

     

    허공달골 풍광

     

     

    품개동 마을터 - 이 곳 주위에는 곳곳에 대숲과 화전밭 등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석축들이 산재해 있으며 규모도 상당히 넓고 크다.

     

     

    우측방향 향운대 오르내리는 갈림길

     

     

    어름터(독가촌)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누가 들어 올까 궁금하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