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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妙香帶(묘향대), 반야봉, 지리능선 천상의화원 야생화 꽃길 산행
    지리 산행기 2021. 8. 9. 11:12

    # 일시: 2021년 08월 07일 토요일

    # 산행지: 妙香帶(묘향대), 반야봉, 지리능선 천상의화원 야생화 꽃길 산행

    # 산행거리: 19.5Km  07시간57분

    # 산행루트: 성삼재 - 노고단고개 - 돼지령 - 피아골삼거리 - 엄걸령 - 노루목 - 반야봉 - 중봉 - 연안김씨묘 - 묘향대(암)

                    박영발비트 - 성삼재 (원점회귀산행)

    # 무더운 8월 지리 능선 천상의화원 길 걷다.

      여름의 지리산은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이 온통 산꽃으로 가득하다. 앙증맞게 작은 산꽃으로 보랏빛을 띠

      는 이질풀부터 여름 지리산을 대표하는 노란 원추리의 군무가 화려하다. 종모양의 보랏빛 잔대꽃이 하늘거리고, 잎에서

      느끼는 생명력을 그대로 꽃으로 밀어올리는 비비추, 주황빛 나래를 펼치며 하늘로 오르려는 나리꽃, 늘 그리움으로 다

      가오는 주황빛 동자꽃, 가장 신선한 신사의 꽃 산수국 등 지리산은 온통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노고단의 선교사 휴양지터

     

    노고단은 지리산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등뼈의 중간에 우리의 민초들은 단을 세우고 국모(성모)한테 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곳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와 조차협정을 맺고 노고단에는 교회 강당 영화관 테니스장 수영장을 비롯한 50여채의 현대식 석재 별장단지를 개발하고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었다.

     

    이 노고단에 별장을 지었다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민간신앙과 정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었으며,철저한 유린이었으니, 우리 민족의 지리산은 청학동이었으며, 골짜기마다 도량(道場)을 짓고 고행을 감행했던 구도의 산이었고,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영매(靈媒)의 산인 이곳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별장을 짓고 말았다. 화엄사 계곡을 통해 수많은 조선인 일꾼들이 그 무거운 석재를 지고 노고단을 오르내렸을 장면과, 왜소한 조선인이 몇푼의 돈에 육중한 몸집의 서양인들을 상전처럼 가마에 태우고 좁은 계곡길을 오르내렸을 그때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분통 터질일이다.!

    그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노고단의 별장을 적산가옥으로 정리해 경매에 붙여 처분하자 이곳은 인근 부호들 의 별장으로 바뀌게 되었다가,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은 파괴되었는데, 1960년초 다시 돌아온 외국인 선교사들은 앙상한 건물 뼈대만 남은 이곳에 움막을 치고 허물어진 별장을 복원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왕시루봉으로 장소를 옮기 된것이다.

     

     

    북한군이 빨치산이 되어 숨어들어가자 국군토벌대가 주둔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이며 민족상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뱀사골을 지나 갖가지 야생화가 천국을 이루고 있는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면 노고단 정상 바로 밑 매점.대피소옆에 일제강점기시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어놓은 50여채의수양관들이 들어서 있던 장소가 있다. 이곳 수양관지대는 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선교사들이 심신의 피로을 풀고 치료하는 안식처로 혹은 영적 재충전하는 장소로 또한 풍토병에 시달리던 선교사에게는 쉬면서 치료를 받던 주요한 곳으로 사용되어 졌던 곳이다. 1920년대 당시 한국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질이나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이 심하여 선교사 자녀 중 9명이 사망했다. 이 수인성 질병을 막는 방법이 6.7.8월 기온이 서늘한 고온지대를 생각한 것이, 적격지로 노고단을 택했던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특히 한글 성경번역과 주요 성경공부 교재의 번역이 이루어졌고 선교전략 계획을 수립하는 장소의 역할로 크게 기여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14연대 사건(일명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하던 것을 국군토벌대가 점령하였고 6.25 전쟁 시에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 노고단 밑의 수양관들을 모두 태워 버렸고 건너편 왕시루봉에 있는 몇 채의 집만 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그 후 노고단에 조금 남았던 수양관의 흔적들도 사라호 태풍에 모두 훼손되었고 지금은 교회건물의 흔적만 남아있다. 1925년에 지어진 옛 건물인데도 서양벽난로 등이 설치되 있어 현대적인 건물 구조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 흔적만 남은 이 유적지는 신앙교육, 선교사들간에 단합, 그리고 교회지도자의 수련활동을 하던 곳으로 변요한(DR.Preston)선교사의 책임 하에 세워졌다.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삼면의 벽을 중심으로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페허된채 남아있는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의 외국인 휴양소를 유적지로 복원해 미국 장로교회 한국 선교역사 현장으로 보유하고 교육의 장으로 삼으려고 계획중이다.

     

    노고단 유적지 복원에 대한 이견 (월간 산 [생활/문화, 매거진] 2004.10.18(월)    -빌려온 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문화재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10만 평 지정 신청

     

    폐허로 남아 있는 노고단(해발 1,507m) 건물폐허터가 문화재 가치가 높다는 주장과, 외국 선교사의 피서용 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지난 3월 폐허된 채 일부 남아 있는 지리산 노고단 외국인 휴양소 유적지를 복원해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 현장으로 보전하고, 교육의 장으로 삼겠다며 남은 건축물의 전남도 문화재 지정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10만 평을 지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전남도청에 접수시켰다. 이에 따라 전남도는 훼손을 우려해 노고단과 왕시루봉의 건축물을 3월10일부터 9월10일까지 6개월간 가지정문화재로 지정했다. 가지정기간이 만료되어오자 기독교계는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보전본부’(대표회장 이남식 전주대학교 총장, 사무소 서울 여의도동 소재)를 발족시키고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다시 전남도에 제출했다. 문화재 지정신청 대상은 3면의 일부 벽만 남아 있는 노고단의 석조 건축물과 왕시리봉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12동이다. 그리고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노고단 일대 10만900평(33.63ha)을 지정해 달라는 것이다. 신청서에 기재한 노고단 선교유적지 건설 내력을 보자. 일제시대인 1920년대에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교육, 단합, 수양, 풍토병 극복을 위해 1925~1926년 노고단에 건립했다고 한다. 수양관 규모를 보면, 1922년 움막에서 시작, 925년 도쿄제국대학과 정식 조약을 체결, 1928년 한 해에 강당(예배당)을 포함한 18채의 석조건물을 건립했으며, 그 후 58동으로 늘었다. 사용 내역을 보자.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수양과 수련회, 기도회가 주로 열렸으나 차츰 지리산 수양관의 명성이 알려져 한국교회 지도자 및 동남아의 많은 선교사들이 찾아와 선교 전략장소로 활용했다. 또한 1936년까지 여름에는 성경번역 장소로도 활용했다. 그러다 1940년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총독부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2차대전 말기 미일 관계가 악화되어, 1940년 11월 대부분의 선교사가 귀국하자 일본 경찰당국은 선교사를 비롯한 외부인들의 노고단 출입을 금지시켜 폐쇄했다. 해방 후 1948년 여순반란사건의 좌익 빨치산 저항 근거지가 되었다가 6·25 이후 국군의 패잔병 토벌작전 시 노고단에 폭격을 가해 크게 훼손됐다. 그래서 1962년 왕시리봉에 교회와 거주용 목조건물 12동을 지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토병 피하려 노고단휴양지 조성

     

    문화재 지정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장로교회는 1892년에 한국에 첫발을 디뎠고, 전주에 온 것은 1893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의 기독교 역사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을 문화재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우리나라와 세계 기독인의 성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유적지를 복원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측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지리산기독교유적지보전본부’는 5월21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 연수실에서 ‘지리산 기독교유적지 보전을 위한 제1회 심포지움’을 열었는데, 풍토병에 대한 대책으로 휴양지가 필요했으며, 성경을 번역한 장소로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한국교회사)는 주제발표 ‘지리산 기독교유적지의 역사적 의미’에서 수양관이 생기게 된 연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물은 수구 정치세력이나 완고한 토착종교가 아니라 위생과 질병이었다. 풍토병인 설사와 열병은 면역이 약한 선교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기후와 풍토, 문화와 환경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에게는 휴식과 회복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다”며, “소래나 명사십리 수양관은 일반 주민들의 통제가 어려우나 노고단은 주민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고산지대라는 점도 노고단 선택 이유의 하나였다. 3대 수양관 위치가 한국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설명했다. 한세대 강명희 교수(동양사)는 주제발표 ‘문화재 지정의 당위성’에서 “성경의 한국어 번역작업은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했고, 1910년 신약과 구약이 완역되어 1911년 구약 전체가 인쇄되어 시판됐다. 시판 이후 구약의 개역(개정)작업은 1920~3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평양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는데, 서울과 지리산도 중요 지역이다”라며, “여름철에 개역작업을 한 노고단수양관을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노고단 휴양지, 비서양인 사용불허

     

    반면 보존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종교시설이라기보다 주민들의 인권을 무시한 호화 별장단지 성격이 농후하다는 주장이다. 구례군지 편찬위원장인 문승이씨(82)는 “내가 구례국립보통학교 4학년(10살), 6학년(12살) 때 전교생이 노고단에 소풍갔었다. 호텔도 있고, 전깃불도 켜져 있고, 풀장과 테니스장도 있었다. 전부가 네모반 듯한 돌로 만든 돌집이었다”고 증언했다. 당시의 시설물은 영빈관(호텔), 강당(2층 높이, 33평), 발전실, 상점, 진료실, 목공소, 주택 등 58동인데, 33.5평, 33평, 31.6평 등의 규모가 큰 건물도 있었다. 흰색 석영이 박힌 난로도 있었다. 남장로회 선교사 27명의 소유 건물은 41동인데, 당시 시가로 53,477엔(16,043달러)라고 한다. 노고단 수양관 건설비가 적지 않은 액수라는 걸 짐작케 한다. 김모씨(55·구례군 황전리)는 “당시 마을 주민들이 일당을 받고 1인이 40kg의 모래를 저울로 재고 져 날랐으며 시멘트와 함석도 옮겼다”고 말했다. 돌과 목재는 현장에서 조달했다. 체육시설로는 풀장, 테니스장, 골프장, 농구장, 배구장 등이 있었고, 테니스대회, 음악연주회 등도 열었으며 사냥, 스키, 등산도 했다. 이러한 시설을 이용하는 외국인들은 노고단까지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화엄사 일주문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가마나 지게를 타고 오르기도 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직접 오르는 코스는 하나 있었는데, 한 사람이 지날 정도의 희미한 급경사 오솔길이었다. 문승이씨는 “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선교사를 올려 앉히고 4명이 들고 올랐다. 선교사는 거의 드러누운 자세에서 책을 보고 있더라”고 당시 목격담을 말했다. 해방 후 등산객이 이용하는 노고단대피소를 관리했던 함태식씨(80)는 “가마나 지게를 부녀자와 어린이 등이 노임을 주고 이용했으며 젊은이들은 걸어서 올랐다. 지게는 반대방향으로 걸터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인은 이곳을 이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지간한 지역 유지도 숙박을 거절당했다고 한다. 서춘(徐椿·19??-19??)은 1936년 8월6일자 조선일보에 ‘남조선 편력기행(三) 노고단의 피서지’에서 “發電所까지 설치햇고, 游泳場(풀장), 庭球場도 만드러 노코, 멀리서 오는 손님을 위하야 호텔까지 잇다. 이 호텔은 西佯人만 드린다”며 “노고단 경내에는 서양인이 아닌 타민족은 별장 짓기를 불허한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구역경계에 ‘非西佯人 出入不許’라고 써부치고 일체로 타인을 드리지 안엇는데 이에 인근 주민들은 분개하야 주민 거주구역 경계에 ‘西洋人 出入嚴禁’이라 써부처 상호간 교통을 단절해 버렷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구례문화원장 박하운씨(68)는 “저들만의 휴양을 위해서 고산 정상에 대단위 마을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가마 타고 오르내리는 게 선교정신에 적절할까?”라며 “여름 한 철 성경번역작업 했다고 문화재 지정까지 한다면, 구례군의 3·1운동 때 태극기를 만든 장소인 박경현씨의 사랑방부터 문화재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분개했다.

     


    고려 조정이 남악산신제를 지내던 곳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통계연보는 노고단 수양관을 종교시설이라 표현하지 않고 ‘노고단 외인 피서지’라고 적고 있다. 문승이씨는 “지리산은 우리나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고려 조정 등은 노고단에서 남악산신제를 지냈다. 이곳에 피서지를 만들더니 이제는 피서지 복원을 기독교 유적지 복원이라 하는 것은 한민족을 모욕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1699년 숙종 25년에 작성한 용성지에 의하면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는 소의방(노고단에 속함)에 있다. 매년 봄과 가을, 그리고 정조에 임금께서 향을 내리시어 치제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승이씨는 또한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의 주산이 노고단이다. 불교의 성지 주산 머리에 타 종교가 폐허가 된 피서지를 복원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한다. 이러한 수양시설로 인한 자연훼손은 없는가 보자. ‘지리산기독교유적지보전본부’는 왕시리봉 건물 12동도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해방 후 노고단 휴양시설이 파괴되자 선교사들은 1961년에 왕시리봉에 주택 5동과 수영장, 테니스장을 허가 없이 불법으로 만들었다. 그 후 토지 소유주인 서울대학교의 양해로 금년 2월29일까지 임대계약했으며, 계약기간이 끝나자 서울대는 철거를 요청한 상태다. 왕시리봉 일대는 자연휴식년제 구역으로 등산객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선교사와 선교사 2세 가족 등은 특히 피서철이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이들의 휴양을 위해 10개 난로와 온돌용 장작을 주변 숲에서 조달하면서 천연림을 훼손시켰다. 노고단 수양관도 조성 시에 돌을 캐고 나무를 베어냈고, 해마다 100여 명이 수십 개의 난로용 땔감으로 주변 산림을 훼손하고 계류를 오염시켰을 것이다. 자연공원협회 지리산남부지부장 김종복씨는 “공원 관리사무소는 왕시리봉 입구 2개소에 초소를 세워놓고 등산객의 입산을 막고 있다. 그러면서 선교사 가족들의 피서를 위해 왕시리봉의 자연을 훼손할 수는 없다. 또한 노고단이 기독교 유적 문화재로 지정되면 복원할 건축물을 이용하려는 종교순례 행렬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시루봉이나 노고단의 건물 잔해를 철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빌려온 글-

     

     

    1930년 노고단에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 별장지 모습....
    (자료 출처 :향토 사학)

     

     

    노고단 고개 도착

     

     

    함께한 산우님 들과 단체 사진 남기고

     

     

    샛길 - 삼거리(샛길갈림) - (왕실봉1260m-질매재-왕시루봉 능선길)

     

     

    아름다운 지리 능선 길

     

     

    무더운 8월 지리 능선 야생화 천국 천상의화원 길

     

     

    천상의화원 길에서 즐거운 시간 만들며 다양한 ‘꽃의 향연’을 즐길 며...?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라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 어디 있으라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라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라..

     

     

    산수국

     

     

    원추리

     

     

    긴산꼬리풀

     

     

    동자꽃

     

     

    꽃며느리밥풀

     

     

    둥근이질풀

     

     

    구절초

     

     

    참취

     

     

    일월비비추

     

     

    이고들빼기

     

     

    하늘나리

     

     

    반야봉 오르며 왕시루봉, 운무에 가린 광양 백운산 조망으로 한장...ㅎㅎㅎ

     

     

    노루오줌

     

     

    여로

     

     

    황금(금마타리)

     

     

    아수리

     

     

    흰진범

     

     

    큰까치수염

     

     

    여긴 반야봉..힘들게...오름에...멋진 지리 풍광 맛을 본다

     

     

    모싯대

     

     

    산오이풀

     

     

    반야봉,般若峰 높이:1.32m 위치: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반야봉의 지명유래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반야가 지리산의 산신이면서 여신인 마고할미와 결혼하여 천왕봉에서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어떤 영험한 스님이 뱀사골에 있는 이무기를 불도와 합장으로 쳐부수고 절의 안녕을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반야심경에서 이름을 따 반야봉이라고 지었다는 설이 있다.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천신의 딸인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반야를 만나서 결혼한 뒤 천왕봉에 살았다. 슬하에 여덟 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 뒤 반야가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처와 딸들을 뒤로 하고 반야봉으로 들어갔다.


    마고할미는 백발이 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남편 반야를 기다리며 나무껍질을 벗겨서 남편의 옷을 지었다. 그리고 딸들을 한명 씩 전국 팔도로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리다 나중에 지쳐 남편을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때 갈기갈기 찢겨진 옷은 바람에 날려서 반야봉으로 날아가 풍란이 되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으로 불렀으며, 그의 딸들은 팔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사람들은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서로 상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전라북도에서 가장 높으면서 지리산 일대에서 두 번째로 높은 해발고도 1,731.8m의 높은 산이다. 구례군 산동면과 남원시 산내면이 마주하고 있는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반야봉을 중심으로 뱀사골을 이루는 만수천 지류가 동북쪽으로 흐르고 심원계곡을 이루는 지류는 남서사면에서 시작하여 반야봉을 좌로 돌아나간다.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주능선에선 벗어나 있다. 노루목에서 좌측능선을 따라가야 반야봉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반야봉은 예전부터 반야낙조와 운해의 절경은 지리산 8경의 하나로 손꼽히며, 특히 서쪽으로 지는 석양에는 반야봉 주변의 하늘이 온통 연붉은빛으로 물들어 장관을 연출한다.

     

     

    단체사진

     

     

    반야봉에서 풍광  - 지리 주능 - 그리고 상봉

     

     

    # 妙香帶(묘향대) - 산중 절해고도의 수행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집이 있는 지리산 묘향대, 그곳을 찾아가기란 여간 녹록지 않다. 반야봉 자락의 깊은 산중에 위치해 찾아가는 길도 멀고 험하다. 그래서 묘향대는 뭇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반야 성지로 불리며 지리산 최고의 수행지로 알려져 있다. 묘향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아예 지리산 주능선에 올라서서 접근하거나 아니면 뱀사골에서 험한 계곡을 치고 올라야 한다.

    그나마 편한 길은 주능선 상의 삼도봉에서 반야봉 북사면 허리 길로 접근하는 것이다. 아니면 반야봉으로 올라 반야중봉 정상에서 북사면을 타고 내려 접근할 수도 있다. 뱀사골에서 접근하려면 뱀사골 상부에서 폭포수골이나 함박골을 타고 올라야 하는데, 길이 제대로 없고 험해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찾는 사람 많지 않은 마치 절해고도 속의 수행지 같은 묘향대다. 특히 겨울이 되면 묘향대는 고립무원이 된다. 한 번 눈이 쌓이면 길과 길 아닌 곳의 구분은 사라지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도 없을 만큼 온통 하얀 눈뿐이다. 그래서 한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일쑤여서 이곳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

     

     

    묘향대(암) 단체사진

     

    개운조사 머물렀던 반야성지 묘향대

    반야봉 자락의 반야성지 묘향대, 병풍같이 늘어선 암벽 자락에 제법 넓고 편평한 조망 좋은 터가 있고 그 한쪽에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묘향대의 묘향암이다. 묘향암은 지리산 반야봉 북동자락 해발 1480m 고지에 위치한 은둔의 암자이다. 원래 사방 험로로 둘러싸여 인적조차 드문 곳이었지만 지금은 지리산 명소 중 한 곳이 돼 찾는 산객이 더러 있다.

    묘향암의 역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전부터 토굴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많은 도인들의 참선 수행지였다고 한다. 특히 죽음으로부터 해탈한 도인으로 알려진 개운조사께서도 한때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는데, 그는 지리산에서 182세까지 살다가 나뭇가지 하나 붙잡고 꼿꼿이 선 채로 열반한 전설적인 도인으로 산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지금의 암자는 1970년대에 화엄사 한 스님이 불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향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암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고색창연한 모습의 암자가 북향으로 고즈넉이 앉아있다. 오랜 세월 거친 풍우 속에 빛바래고 허름한 암자의 모습이 오히려 참선수행 도량으로서 이곳 형세에 더 조화롭게 어울려 보인다. 색이 바랜 양철 지붕도 올해 새로이 황금색으로 도색했다. 산중 오지에 번쩍거리는 황금색 지붕이 이채로워 보이고 암자 앞의 너른 잔디마당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조망 또한 멋지다. 앞쪽에는 명선북릉이 바라다보이고 동쪽으로 토끼봉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고스란히 조망된다.

    암자 옆 암벽 아래에는 묘향대 명물 석간수가 있다. 바위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상당하다. 한 바가지 떠서 들이켜니 물맛이 깊고 청량하다. 험한 폭포수골을 힘들게 오른 후에 접하는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의 묘향대, 일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이런 곳이 길지가 아니면 어디이랴. 암자 옆 뜰에 수북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의 향이 코끝으로 스며드는데, 어느 향수보다도 더 향기롭고 구수하다. 이곳 묘향암에는 호림스님이 십수 년째 지키고 계시는데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보니 스님도 지리산 산중의 혹독한 긴 겨울 날 채비를 이미 마쳤는가 보다. 오늘따라 속세로 출타하시는 스님, 스님도 여느 산꾼처럼 험한 길 내려가기 위해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있다. 탐방팀은 스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법당에 들러 예를 차린 후 앞뜰에서 한동안 여유를 가진다.

    지리산에는 대(臺)라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대표적인 곳을 일컬어 ‘지리 8대’라고 하거나 10대, 24대 등으로 부르고 있고, 한편으로 천왕 5대, 반야 5대, 혹은 7대 등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천왕 5대에는 통상적으로 영신대, 향적대, 문창대, 소년대, 향운대 등을 꼽고, 반야 5대에는 이곳 묘향대를 비롯해 우번대, 문수대, 서산대, 무착대를 일컫는다.

    묘향대는 반야봉 정상에서 묘시 방향에 위치해 묘향대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지리산의 대(臺)는 통상 전망이 아주 좋고 높은 언덕이나 바위 자락에 위치하는데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으로 꼽히는 곳들이다. 흘러간 역사 속에 각 대마다 나름의 사연들을 품고 있고 그곳에 들면 대부분 경관이 일품이다. 또한 좋은 기운이 흐르고 있어 탐방한 산객의 마음마저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곳이 지리산의 대(臺)이다. -퍼온글-

     

     

    묘향대 석간수

    암자 옆 암벽 아래에는 묘향대 명물 석간수가 있다. 바위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상당하다. 한 바가지 떠서 들이켜니 물맛이 깊고 청량하다.

     

     

    묘향대 석문

     

    묘향대(암)에서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로 향한다.

     

     

    박영발이 사용했던 구들자리 -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

     

     

    "흔적"

    속칭 호박돌 박힌 폭포에서 좌측으로 쳐 비트 앞쪽에 위치한다.

    구들장 형태로 석축도 비교적 온전하다.

    아랫부분은 돌을 쌓고 지붕은 수풀로 얽어매었을 것이다.

    박영발 조선노동당 전남위원장을 호위했던 빨치산들의 감시초소였단다.

    그들의 용어론 "호위대트" "비트" 에서 "비"를 빼고

    환자비트는 환자트, 무기비트는 무기트 이런식이었다.

    장기수로 복역 후 석방된 빨치산(박남진) 출신이

    기억을 더듬어 이곳을 05. 2. 14.에 최초 찾았다.

     

    아래 자료는 박영발비트 발견 경위 유품 등 관련 자료

     

    1. 2005년 2월 14일

    3회에 걸친 수색 끝에 박영발(1913-1954.2.21)전남도당위원장의 최후 비트를 발견했다.
    어마어마한 바위 안에 형성된 자연동굴이 있다
    밑으로 내려가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하는 복층구조다.
    이곳에서 '조국출판사' 라는 이름으로 각종 유인물들을 발행했다.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를 주로 사용했다.
    이 동굴에서는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다.
    그리고 여성비서를 제외한 일곱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박남진(54년 12월 체포)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5지구당 위원장이 빗점골에서 전사하자

    박영발 위원장의 보위대가 암벽 지대가 많은 반야봉 아래에 비트를 마련해
    그 해 10월 말부터 다음 해인 1954년 2월 박 위원장 전사까지 약 4개월 동안 이곳을 이용했다고 했다.

     

    2. 2005년 5월 2일

    '박영발 비트' 에서 50미터 쯤 아래 호위대트 옆에서 등사기를 발견했다.

    1953년 9월 '제5지구당' 해체 이후 전남도당위원장을 내려놓은 박영발은

    이곳에서 '조국출판사'를 운영했다.
    그 때 사용했던 등사기였다.

    박남진, 19살 때 결혼하여 1947년 나주시 영산포에서 서점 '우리서원'을 운영하던 중에
    3살난 딸 아이와 임신 5개월째인 부인을 남겨두고
    1950년 입산한 후 빨치산으로 활동, 조국출판사 필경사로 일했다.

    깡통에 담긴 검은 잉크, 부식되긴 했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등사기 본체 그리고 놋쇠 숟가락(당증이기도 했던)이 함께 바위틈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놋쇠 숟가락은 끝을 갈아 등사지에 글을 쓰는 철필로도 사용되었다.
    아마 밥을 먹을 때 보단 철필로 쓰였던 시간들이 더 많았으리라..

    지금은 '전남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등사기

     

    무전 통신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전기줄

     

    주인을 잃은 고무신과 스피커 등의 유품들

     

    빨치산 부대원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용 앰플

     

     

    실재 비트 진입을 아랫쪽에서 올라갔다고 한다

     

     

    비트입구 사다리

     

     

    역사의 현장 박영발 비트 주변을 살피는 함께한 산우님 들

     

     

    산행 중 오랜 산친구 상봉, 쉬며 담소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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