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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1)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선생의 기도터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8. 2. 18:14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선생
27년 지리산 지켰던 ‘인간 산신령’의 氣찬 흔적들
지리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단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지리산(해발 1915m)은 우리 영토 척추인 백두대간의 출발점이자 마무리 지점이며, 그 줄기는 진부령과 휴전선을 넘어 백두산까지 1400㎞를 힘차게 내달리며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다.
또한 지리산은 48만3022㎢가 넘는 방대한 규모의 식생 보고일 뿐만 아니라 특유의 지리산권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내며 1967년 12월에 우리나라 최초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지리산은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유역이 방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골과 능선, 그리고 무궁무진한 청정수와 먹거리.
예로부터 알거지도 지리산만 들면 살 수 있었고 아픈 사람도 지리산에만 들면 건강을 되찾았다. 역사 이래 수많은 민초들의 ‘이상향’ 삶터이자 도피처였고 때로는 애환과 탄식으로 해가 저무는 딴 세상이었다.
이제는 흔적도 희미해 가지만 굴곡의 아픈 역사만큼이나 골골이 많은 사연이 배어 있는 지리산이다. 이러한 민족의 성산, 지리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소중함을 되새기고자 ‘지리산 역사문화 탐방’을 기획했다.
향후 일정기간 동안 월 1회 탐방 기고를 통해 어머니 산 지리산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소소한 지리산 이야깃거리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첫 일정으로 지리산 이인(異人) 중 한 분인 우천 허만수 선생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자.
허만수 선생의 제2기도터에서 바라본 지리산 거림골.사실 흔적도 거의 없다. 선생이 살던 움막은 사라진 지 오래고, 남아 있는 것은 선생의 기도터가 전부이다. 오늘은 그 기도터를 차례로 돌아보고 선생의 숨결을 느껴보기로 한다. 탐방코스는 거림 옛길을 오르며 두 곳의 기도터를 돌아보고 음양수 바위와 창불대, 그리고 영신대 등 모두 다섯 곳의 기도터를 차례로 답사하는 일정이다.
탐방팀은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거림을 출발해 세석평전을 향해 거림골을 오른다. 거림골 초입, 바위 자락의 노송이 탐방팀을 반긴다. 신록이 촘촘히 우거진 골에는 청정옥수가 소폭을 만나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투명한 소를 곳곳에 만들고 있다. 초록과 벽옥수로 무장한 초여름의 거림골은 생동감이 넘친다. 우천 선생도 이 길을 수없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우천 선생은 장년기 이후 27년간 지리산과 더불어 살다가 선생의 회갑년 1976년 어느 여름날, 홀연히 지리의 너른 품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선생은 1916년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10세 무렵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중학교와 교토(京都) 전문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산을 가까이하며, 남다른 열정으로 산악회를 만들어 일본 내 유명 산을 즐겨 찾았다.
해방 후 귀국해 진주에서 서점을 잠시 운영하다가 31세 무렵, 선생은 서점을 접고 오매불망 그리던 산으로 떠난다. 처음 머문 산은 의령 자굴산이다. 산정 가까운 곳에 토굴을 파고 2년간 산사람으로 지내다가 33세 되던 1949년께부터 지리산으로 자리를 옮겨 세석평전 자락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며 가끔 진주에 다녀오는 일 외에는 지리산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았다.
선생은 어머니 품속 같은 지리산에 살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등산로를 만들고 안내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샘터를 개발하고 험난한 곳에는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놓아 오르내리기 편하도록 했으며 길을 잃은 조난 산행객들을 구조하고 안식처를 제공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행객을 위해 지리산 등산지도를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며 누구보다도 지리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산악인들은 선생을 추모해 1980년 6월, 천왕봉으로 오르는 중산리 등산로 입구, 법계교 옆 바위 위에 그의 추모비를 세웠으며 진주산악회에서는 매년 철쭉제 행사 때마다 그곳에 제를 올리며 선생을 기리고 있다.
제1기도터
제2기도터◆제1·2기도터(거림 옛길)
거림에서 1시간 20여 분, 거림골을 오르면 북해도교에 도착한다. 거림에서 3㎞ 조금 넘는 거리이다. 이곳에 거림 옛길 들머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작은 둔덕을 넘어서 거림골 본류를 건너면서 거림 옛길이 시작된다. 거림 옛길은 예전에 세석으로 오를 때 이용하던 등산로로 북해도교 부근에서 음양수 샘까지의 짧은 구간이다.
오름길 산행 시 1시간 20여 분 소요된다. 등로는 산죽길이 많고 일부는 너덜길로 거칠지만 뚜렷한 등로가 있다. 한동안 너덜과 산죽길을 오르다 보면 허물어진 작은 기도터가 있다. 이곳을 편의상 ‘제1기도터’라고 하자. 바로 위의 제2기도터와 함께 우천선생 움막의 지근거리에 위치해 많이 애용했을 듯한 곳인데, 여러 기도터 중 유일하게 조망 없는 숲속의 계곡 가에 있다.
아마도 이곳은 여름철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이용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허물어진 기도터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을 잠시 회상하고 돌아 나와 계곡을 횡단한다. 이 계곡 물길은 세석평전에서 비롯되며 거림골의 본류를 이루고 있다.
계곡을 횡단해 다시 숲길로 접어든다. 좌측으로 우천선생의 움막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산죽만 무성하고 잠시 위쪽으로 길을 이어가다 보면 우측으로 너럭바위가 보인다. 그 위에 우천 선생의 제2기도터가 있다.
너럭바위에 올라 기도터를 둘러보니 조망 좋은 명당자리에 있다. 발아래 거림골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끝머리에 삼신삼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 낙남정맥이 흐르는 능선과 주산 줄기가 조망된다. 바로 아래에 우천 선생의 움막이 위치하며 아무래도 이곳이 우천 선생이 가장 많이 애용한 기도터였을 것이다. 탐방팀은 기도터 앞 너럭바위에서 한동안 쉬어간다.
제3기도터◆제3기도터(음양수 바위)
제2기도터를 떠나 작은 지계곡을 지나고 잠시 걸어 나와 음양수 샘 아래에서 남부능선길에 합류한다. 이곳에서 5분가량 세석방향으로 진행하면 음양수 샘에 도착하고 그 위 너럭바위에 우천 선생의 제3기도터가 있다.
양수 음수 번갈아 맛을 보고 식수도 보충한다. 바위틈의 석간수는 차고 청량하다. 음양수의 차가운 기운으로 몸의 열기를 식히고 올라선 기도터. 이곳 역시 조망이 멋지다.
기도발이 제대로 받을 듯한 명당 기운이 느껴진다. 저 멀리 삼신봉을 너머 악양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이 아스라이 조망된다. 지리산 남북종주 길인 저 능선은 형제봉을 지나 악양 평사리 외둔에서 섬진강으로 스며들며 그 맥을 다한다.
제4기도터◆제4기도터(창불대 암봉)
탐방팀은 음양수 샘의 제3기도터를 돌아보고 또 다른 기도터가 있는 창불대로 향한다. 음양수 샘에서 창불대 가는 길, 철쭉이 만개할 때쯤 가장 운치 있는 숲길이 펼쳐진다. 창불대 가기 전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푸른 남부능선이 남으로 장쾌하게 뻗은 모습이 조망된다. 시원한 남부능선 조망을 뒤로하고 음양수 샘에서 30여 분 거리의 창불대에 도착한다. 창불대 암봉에 올라 바라본 풍광은 압권이다.
영신봉과 촛대봉, 시루봉 자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초록의 바다 세석평전, 병풍바위와 자살바위, 그리고 큰세개골이 발아래 펼쳐져 있다. 창불대를 내려서서 바로 옆의 우천 선생 제4기도터가 있는 조망대에 도착한다. 이곳은 아늑하고 풍광 좋은 다른 기도터와 달리 벼랑 위에 있다. 좌우에 창불대와 자살바위가 있고 맞은편으로 병풍바위가 코앞이다. 발아래 큰세개골로 이어지는 협곡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처럼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다.
아찔한 칼 끝 위의 기도처인 셈이다. 오래전 저 자살바위에서 극한에 몰린 여성 빨치산들이 정녕 대성골을 향해 몸을 던졌을까? 우천 선생은 아찔한 벼랑들과 끝없이 펼쳐진 골과 마루금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제5기도터가 있는 영신대로 향한다.
제5기도터◆제5기도터(영신대)
제4기도터를 빠져나와 영신봉 방향으로 10여 분 오르면 영신봉 자락의 주릉 길 조금 못 미친 지점, 좌측으로 영신대 내림길이 있다. 뚜렷한 등로를 따르다가 계곡을 타고 내린다. 낙차 큰 계곡바위 위에서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곧 영신대이다. 영신봉 자락 들머리에서 15분가량 소요된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영험한 곳이라는 영신대는 기(氣)가 세어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곳이라고도 한다. 잡초 무성한 영신대를 돌아보고 최종 목적지인 우천 선생의 영신대 기도터로 향한다. 이곳 기도터는 여타와 달리 꽁꽁 숨겨진 비밀 기도터다. 계곡을 조금 내려서서 좌측 석벽의 석문을 통과하면 숨어 있던 기도터가 나타난다. 마치 절진을 펼쳐놓아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석문으로 기어올라 그곳을 통과하면 진법이 스스로 풀린다. 아무도 찾지 못할 천하절진이 펼쳐져 있었지만 사람도 가고 세월도 흘러 이제는 효력이 다했는지, 누구나 쉽게 파훼할 수 있는 평범한 진으로 변했다. 잡풀 우거지고 볼품없는 작은 공터에 불과하지만 별세계의 안온한 느낌이 든다. 옆에는 샘터도 있다.
은둔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인 곳이다. 석문이 속세와 피안의 별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인 셈이다. 탐방팀은 우천 선생의 생애와 그분의 지리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생각하며 기도터를 향해 경건한 마음으로 목례를 올린다.◆우천 허만수 선생은 어디서 잠들었을까
과연 선생이 영면한 장소는 어딜까. 아무도 모른다. 단지 평소 칠선계곡에서 영면할 것임을 자주 시사해 그곳이 최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선생은 지리산 가운데 칠선계곡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고 그곳의 원시적 자연세계에 동화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곤 했다고 한다.
칠선계곡 어딘가에서 자연의 일부로 영원히 동화됐을까? 하지만 최후지는 영신봉 자락의 이곳, 영신대 부근일 것으로 믿는 산악인도 있다. 그의 움막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세상과 단절된 느낌의 안온한 영신대 기도터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도장골과 신선너덜 지역이 거론되기도 한다.
후배 산악인들이 선생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칠선계곡과 영신대 주변 등을 탐색했지만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탐방팀은 우천 선생이 생전 마지막으로 머문 곳일 수도 있는 영신대 기도터를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보고 탐방 일정을 마무리했다.
오늘 탐방한 5개의 기도터는 우천 선생이 직접 만들었는지 아니면 일부만 조성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세석 주변은 그의 주 활동무대였고 모두 선생의 움막 지근거리에 모여 있는 등, 오랜 기간 자신을 성찰하고 사색하던 선생만의 공간이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선생은 수백 년 동안 무수한 선인들이 찾아 헤매고도 찾지 못한 지리산 어디엔가 천하절진 속에 숨어 있는 이상향 ‘청학동’을 기어코 찾아내어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지는 않을까.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 선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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