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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12곡] - 1곡 : 용유담(龍遊潭)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3. 23. 19:33
용유담(龍遊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⑴ 지지(地誌=地理誌)
⑵ 고지도(古地圖)
2. 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3. 오늘날의 용유담 경관
4. 용유담의 각자(刻字)
5. 용유담의 외나무다리
6. 기우제와 용왕당(龍王堂), 성모묘(聖母廟)
⑴ 기우제(祈雨祭)
⑵ 용왕당(龍王堂)
⑶ 성모묘(聖母廟)에 대한 가설
7. 임천과 엄천
⑴ 같은 강 다른 이름
⑵ 임천(瀶川) 이야기
⑶ 엄천(嚴川) 이야기
⑷ 고지도 속의 임천과 엄천
8. 용유담과 지리산댐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언제부터 용유담이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의 기록은 역시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이다. “해공은 군자사로, 법종은 묘정사로 가고, 조태허․유극기․한백원은 용유담(龍遊潭)으로 구경갔다. 나는 등구재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그는 함양군수 시절(1471~1475) 용유담을 언급한 시 11편을 남겼다. 물론 그전부터 용유담으로 불렸겠지만, 용유담은 군수를 잘 만나 세상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⑴ 지지(地誌=地理誌)
김종직의 다음이자 서적에 최초로 실리게 된 것은 동국여지승람인데 1481년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동국여지승람을 수정·보완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인데, 이때 추가된 것은 〈신증〉으로 구분하였고 용유담은 그런 말이 없는 것으로 봐서 처음부터 수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양군 형승(形勝)조에서 다음과 같이 꽤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용유담(龍遊潭) :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 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중의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국역 : 한국고전번역원)
원래 지지(地誌)는 고을의 역사 명산 대천 호구 역원 봉수 창고 토산 군영 향교 풍속 성씨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보제공을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경상도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은 워낙 정보가 소략하여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도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시문까지 덧붙여 풍부하고 상세한 백과전서식 지지를 편찬하였는데 바로 동국여지승람이다. 성종대의 찬란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라 할 것이다. 이후 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은 후대에 글쓰기의 충분한 전거로 활용되었다.
위의 내용은 영조대에 전국의 읍지(邑誌)를 모아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에 똑 같이 수록되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1777~1806)에는 요약하여 수록하였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 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국역 : 한국고전번역원)
정말 있다면, 가사어는 세계 유일의 어종일 것이다. 이덕무(1741-1793)는 보다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지리산(智異山) 속에 소[湫]가 있는데 소 위에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항시 그 소 속에 쌓여 있다. 거기서 나는 고기의 무늬가 매우 아롱아롱하여 가사(袈裟) 같으므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하니, 대개 소나무 그림자대로 변화한 것이다. 얻기가 매우 어려운데, 삶아서 먹으면 병이 없게 되고, 오래 살게 된다고 한다.」
김정호(1804-1866)의 대동지지(大東地志 *1861~1866)에는 여지승람과 연려실기술의 내용을 배합하여 수록하였다. 그 외에도 많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한다.
⑵ 고지도(古地圖)
옛 지도(地圖)는 해당 지역의 산천 관아 역참 도로 창고 진 등을 표시하여 국방과 행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원래 목적과 다소 먼 형승 사찰 등은 지도가 풍부해진 후에야 등장하게 된다. 그것도 전국지도보다는 도별지도나 군현지도에, 또 목판본보다는 필사본에 주로 나타난다.
조선 전기의 도별지도나 군현지도는 남아 있는 게 없고, 점필재가 함양군수 시절에 만들었다는 함양군지도에 용유담이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함양군지도를 완성하고 그 위에 쓴 詩 중에 “발랄하게 뛰노는 신어는 임천에 가득한데(神魚潑剌滿瀶川)”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신어(神魚)는 가사어(袈裟魚)를 말하는 듯하고 가사어는 임천 그중에서도 용유담에 사는 고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도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공개된 고지도 범위 내에서 내가 조사한 바로는 필사본 조선지도(1750~1768)에 용유담이 처음 등장한다. 그 이후로 해동여지도·광여도·청구도·청구요람·경상도읍지·동여도· 영남읍지·1872년의 지방지도 등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조선지도(도별지도). 1750~1768. 방안식(方眼式) 필사본. 방안식은 눈금자로 거리를 가늠하는 방식이다.>
*안국사의 위치가 좀 맞지 않는다.<광여도(廣輿圖) (부분). 1800년대 초. 필사본 회화식>
<경상도읍지, 함양. 1832년경 필사본 회회식>
<1872년, 지방지도 함양군.(부분). 필사본 회화식>
<1895년 영남읍지 함양군지도>
2. 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그럼 옛사람들의 유산기에 나타난 용유담의 모습을 살펴보자. 무수히 많은 기록 중에서 가장 핍진하게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5개를 발췌하였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옛것을 기술하여 전할 뿐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취사선택하는 것 자체가 이미 作이 아닐까? 作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① 1586년,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
「용유담 가에 도착해 내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곳은 가까이서 구경하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좋다. 오춘간이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위대하고나, 조물주가 이 경관을 만들어냄이여. 비록 한창려(韓昌黎)나 이적선(李謫仙)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수수방관하며 한 마디도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우리들이 어쩌겠소. 차라리 시를 읊기보다는 우선 여기서 술이나 한 잔 마시는 것이 더 좋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무수히 술잔을 주고받으며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오춘간이 못내 재주를 발휘하고 싶어 시 한수를 지었다. 그중에서 “신령들의 천 년 묵은 자취, 푸른 벼랑에 흔적이 남아 있네(靈怪千年跡 蒼崖有裂痕)”라는 구절은 옛 사람들일지라도 표현하기 어려운 시구니, 어찌 잘 형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② 1611년,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층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杉)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一)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흘러드는데, 세차게 쏟아져 흰 물결이 튀어오른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불쑥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하여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어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다르니,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민간인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로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③ 1640년, 허목(許穆 1595-1682)의 지리산기(智異山記)
「그 아래 용유담은 홍수나 가뭄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용유담의 물은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깊은 골짜기에 너럭바위가 있고, 양쪽 벼랑 사이로 물이 흐른다. 바위 위에는 돌 구더이[石坎 석감], 돌 구멍[石竇석두], 돌 웅덩이[石坑석갱]이 있어 마치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 듯, 규룡(虯龍)이 서려 있는 듯, 온갖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물은 깊어 검게 보이는데, 용솟음치거나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빙빙 돌거나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기도 한다.」
④ 1724년, 조구명(趙龜命 1693-1737)의 유용유담기(遊龍游潭記)
「먼저 용유담(龍游潭)을 구경하였다. 용유담은 지세가 깊고 그윽하였으며, 바위들이 모두 개의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물길이 굽이굽이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흘러내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용당(龍堂)이 맞은편 언덕에 있었는데, 나무로 엮어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하여 위태롭게 매달린 다리를 건너자니 아찔하고 벌벌 떨려서 건널 수가 없었다. 다리 옆의 바위들을 넘어서 동쪽으로 백여 보를 가니, 큰 바위가 언덕에 붙어 가로 놓여 있었는데, 그 모양이 둥글기도 하고, 타원형이기도 한 것이 패옥 같았고, 움푹 파인 곳은 술잔과 술통 같았다. 그 너머 몇 길이나 되는 바위에는 길 같은 흔적이 굽이굽이 이어졌는데, 마치 용이 머리를 숙인 듯 꼬리를 치켜든 듯하였다. 갈고 다듬은 듯 반질반질하여 그 형상이 지극히 괴이하였다. ‘용유담’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략〉
지리산 북쪽에 펼쳐진 천석(泉石) 가운데 이 용유담이 가장 빼어나다. 나는 그 기세와 장관이 좋아 조우명(趙遇命)에게 바위의 남쪽 벽면에 다섯 사람의 이름을 쓰게 하고, 그 아래에 내가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石抉川駛龍怒神驚]”라는 여덟 글자를 적었다. 후에 석공을 시켜 새겨 넣도록 하였다.」
⑤ 1790년,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의 방장유록(方丈遊錄)
「용유담에 이르렀다. 커다란 바위들이 시내에 쌓여 있었다. 지붕의 용마루, 평평한 자리, 둥근 북, 큰 항아리, 큰 가마솥, 성난 호랑이, 내달리는 용, 서 있는 것, 엎드려 있는 것, 기대 있는 것, 웅크리고 있는 것 등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계곡에 가득 차 있어 그 기괴한 형상을 이루 다 이름 붙이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로 하나의 물길이 열려 큰 돌구유에서 수만 갈래의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내리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여울은 요란스럽게 쏟아져 요동쳤다. 아래에는 1만 이랑이나 되는 큰 못을 형성하였는데, 곧장 몇 리나 뻗어 있었다. 두 골짜기가 솟구쳐 있고 솔숲 그늘이 뒤덮여 침침하고 어두웠다. 그 못을 따라 올라갔는데, 정신과 기운이 침침하여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 위 5가지 모두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유람록》에서 인용)
이번에 정리하느라 유산기를 다시 읽어보면서 새삼 느낀 바, 옛사람들의 문장력은 역시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옛사람들이 그렇게 감탄한 용유담과 지금 우리가 보는 용유담은 차이가 크다고 느낄 것이다. 옛사람들 특유의 과장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3. 오늘날의 용유담 경관
첫째, 계곡 옆으로 도로가 나면서 경관을 많이 해쳤다. 도로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올려다보면 도로공사와 홍수로 인해 무너지고 깨진 돌들이 밀려와 쌓여 있고 곳곳에 콘크리트가 볼썽사납게 바위를 덮고 있다.
둘째, 지금의 용유교 이전에는 쇠줄을 맨 출렁다리였고 그전에는 시내 위에 다릿발을 세운 나무다리였다 한다. 나도 출렁다리는 기억하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수량이 훨씬 많았다고 사람들은 증언한다. 지금은 평소 때 보면 용유교 아래는 흐름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한 마디로 용유담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밋밋하다. 용유담 아래 수잠탄 쪽에 돌들이 메워져 흐름을 방해하고, 또 수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도, 김일손은 속두류록에서 음력4월이지만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용유담의 풍경을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지리산 계곡물도 사람 사는 곳 아래로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몇 십년 전만 해도 엄천강에 나루가 제법 있었다 한다. 장항 주암 주상 자혜 동강 한남, 심지어 문정-세동간에도 줄배를 타고 건넜다 한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옛사람들은 늘상 말하였다.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즉 밑으로 스며든 물이 받쳐주어야 위로 물이 흘러갈 수 있는 법이다. 그 물을 사람들이 자꾸 빼내 쓰다 보니 계곡물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흐르는 물의 량이 적어지면 하천 바닥에 토사(+돌)가 쌓일 수밖에 없다. 물은 또 토사 밑으로 스며들고. 악순환이다. 중국에서는 강바닥에 쌓인 토사를 쓸어내리기 위해 상류의 댐을 개방하여 인공적인 홍수를 일으키기도 한단다.
셋째, 지금 사람들이 용유담을 구경하는 방법은, 용유교 다리 위에서 용유담을 내려다보고 안내판 한번 훑어보고는 뭐 별거 없네 하고 지나가거나, 계곡으로 조금 들어가 용유담 각자와 김종직·정여창·김일손·조식 선생의 장구지소 각자가 새겨져 있는 곳까지 가서 용바위를 한번 구경하는 것으로 용유담을 보았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용유담을 본 것이 아니다. 그건 하용유담으로 바위에 새겨진 옛날의 물길 흔적을 보면 굉장했을 것이나 진짜는 그 위에서부터 시작된다. 계곡을 거슬러 오르며 온갖 형상의 바위, 그 바위를 꿰뚫고 세차게 흘러가는 물길, 시퍼렇고 으스스하여 용이 사는 듯한 소(沼), 용유담이 시작되는 작은 폭포까지 보아야 한다. 다시 건너편 계곡으로 넘어가 아직도 남아 있는 흐릿한 각자들을 쓰다듬고, 용의 비늘이 박혀 있는 듯한 바위, 용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자국, 용이 똬리를 틀고 있었을 법한 자리, 날아오르며 꼬리로 쳐 깨뜨린 것 같은 바위를 어루만지고, 그 바위 끝에 서서 포말을 튀기는 물을 내려다보며 통쾌함을 느껴보고,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어봐야 하리. 그랬을 때 비로소 옛사람들이 말한 용유담 풍경에 한발 다가서게 되리라.
나는 지금도 용유담이 충분히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그 뛰어난 풍경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데, 사진이야말로 이럴 때 아주 효과적이다. 나는 능력이 안 되니 백산 형님께 도움을 청하였다. 기꺼이 응해주셨다.
용유담의 바위들은 비에 약간 젖었을 때가 황홀한 색감으로 충만하고, 또 각자(刻字)들이 선명해지므로 비가 온 뒤에 만나기로 하고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막상 비를 기다리니 비는 또 어이 그리 더디 오는지….
그런 사연으로 여기 사진은 백산님의 작품이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럼 백산님의 작품을 통하여 용유담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일기예보와는 달리 가랑비가 계속 뿌리고 날이 흐려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한 점을 감안하시길~.)
<상류에서 용유담이 시작되는 곳. 폭포 아래 통발을 놓으면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풍경1>
<배바위>
포트홀(돌개구멍) : 하상 암반의 오목한 곳이나 깨진 곳 등에 와류(渦流)가 생기고, 그 와류의 에너지에 의하여 구멍이 생긴 뒤 다시 그 구멍으로 들어간 돌이 와류에 의하여 회전하면서 암반을 깎아내어 구멍을 더 깊고 크게 만든다.
원통형 뿐만 아니라 나선형, 약탕관형, 중발형 등이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 인용>
점필재는 "돌의 오목한 곳에 물이 고여 있었는데, 내 발이 미끄러져서 신과 버선이 모두 젖었다. 작은 것은 술동이(窪樽/와준) 같고 큰 것은 구덩이(埳空/감공) 같다"고 하였다. 작은 것은 항아리 만하고 큰 것은 집채 만하다.
<풍경2>
<두꺼비 바위. 왼쪽이 암놈, 오른쪽이 숫놈. 물은 시내 가운데 버티고 있는 숫놈 두꺼비의 똥구녕을 간질이고 있다.>
<인공이 가미된 샘. 기도처>
<용바위 혹은 거북바위. 보는 각도 및 물에 잠긴 정도에 따라 용 또는 거북으로 보인다. 자세히 보면 입에서 거품을 내뿜고 있다.>
<수달 똥>
<구룡정. 용유담의 아홉 용과 마적도사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후대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 구룡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다. 통도사의 구룡지(池), 금강산의 구룡연(淵), 포항의 구룡포(浦), 남원의 구룡계곡, 치악산 구룡사(寺) 등, 그외 지명도 많다.>
4. 용유담의 각자(刻字)
각자 중에 가장 먼저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은 "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이다. 지붕돌이 받쳐주는 중심에 위치하여 이자리의 주인공임을 나타낸다. 그 대단한 점필재·일두·탁영·남명 선생조차 여기서는 더부살이하는 격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이곳은 인종임금(재위 1544-1545)이 강현(姜顯 1486-1553)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때 이태백을 한번 보고 적선인(謫仙人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이라 한 하지장이 낙향할 때 황제 현종이 경호(鏡湖=鑑湖) 한 굽이를 하사했다는 일화에 견주어, 강씨 문중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있다. 진양강씨 강지주의 문집에 나오는 얘기이다. 강현의 호는 新安이며 혜평(惠平)은 그의 시호이다. 벼슬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13세손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1800년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점필재 등의 장구소 각자는 중심 자리에서 밀려났으니 당연 그보다 더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연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조종(祖宗)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귀중한 자산이라고 생각된다. 장구소(杖屨所)는 노닐던 곳이라는 뜻이다.
<방장제일강산(方丈第一江山)>
<용유담 각자는 2개인데, 이것은 점필재 각자 옆에 있다. 하나는 강 건너 방장제일강산과 같은 바위에 있다. *타이틀 사진 참조>
<용유동천(龍游洞天). 洞天은 화개동천 백암동천처럼 별천지 또는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심진대(尋眞臺). 심진(尋眞)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진경(선경)을 찾아간다는 정도로 보면 되겠다>
<경화대(庚和臺). 이때 庚은 나이, 和는 같다는 뜻이므로 동갑계를 만들고 이름을 새긴 것이다>
<영귀대(詠歸臺). 노래하며(또는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뜻. 논어에 나온다>
<반가운 이름이 있다. 강지주(姜趾周). 세진대(洗塵臺)와 부춘정(富春亭)에서 우리는 이미 그를 만난 바 있다.
동지들과 용유담에서 계(契)를 만들고 그 취지를 적은 글(龍游潭修契序)이 문집에 있어 분명 그의 이름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았는데 다행히 발견하였다. 용유담 각자 밑에 위치>
<세신대(洗新臺). 깨끗이 씻어 새로워진다>
<독조대(獨釣臺). 당나라 시인 유종원의 시 강설(江雪)의 한 구절.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눈 내린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질하네> ※ 세신대와 독조대 각자는 바위 귀퉁이에 작게 새겨져 있어 운이 좋아 찾았다.
<용유대(龍游臺). 구룡정 동북방향 바위벽에 위치>
<용담입문(龍潭入門). 용유담 입구 한참 전에 있다. 아마 여기기서부터 용유담이라 쳤는가 보다>
H:강현 각자(점필재 등) I:독조대 J:용유담2 K:방장제일강산 L:심진대 M:용유동천 N:세신대 O:구룡정 P:용유대>
도탄정사감회서(桃灘精舍感懷序)에서 옥계 노진이 올라 천왕봉을 바라봤다는 높은 바위 망악(望嶽)은 도로 만들고 다리 놓는다고 없앤 것 같고, 거문고 현(絃) 같은 무늬가 있는 금암(琴巖 *거문고바위)은 거북바위 위에 있다 했는데 못 찾겠다. 龍游形勝은 내용으로 봐서 龍潭入門 부근에 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또 조구명이 유용유담기에서 바위에 새겼다고 한 '석결천사용노신경(石抉川駛龍怒神驚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 여덟 글자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지만 없었다. 글자가 있었다는 흔적만 겨우 남아 있을 뿐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도 많았으니, 그것도 300년 세월에 그런 운명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생각에는 이 각자만으로도 명승으로 지정해도 되것구마. 이 외에도 바위에 새겨진 이름이 수백 명에 이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의 영령이 있다면, 그리고 그 후손들이 선조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용유담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결코 지리산댐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황당한 개꿈인가?
5. 용유담의 외나무다리
산도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풍경이 다르듯이, 용유담의 풍경을 제대로 즐기려면 계곡 양쪽을 다 오르내려봐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은 한쪽을 보고난 뒤 다시 용유교로 되돌아 나와 건너편으로 가야 하므로 매우 번거롭다. 그래서 물길 양쪽을 다 살펴보는 사람은 드물고, 한쪽만 대충 훑어보고는 용유담을 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양쪽을 다 구경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중간에 다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옛사람들도 우리와 생각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용유담의 가장 좁은 협곡 사이에 나무다리가 놓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물론 기록도 남겼다.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박여량 1610) /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 아래는 바닥을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가파르고 위험하여 무서워 건널 수 없었다.(조구명 1724)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로 건너다녔는데, 여울 바람이 불면 현기증이 나 물에 떨어져 죽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1790 이동항)」
외나무다리는 한자어로 약작(略彴) 또는 독목교(獨木橋)라 하는데, 독목교는 우리식 한자어다. 때로는 ‘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編木橋]’라고도 하였는데 사실은 그게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쪽 바위에 다릿발을 놓았던 홈이 남아 있는데, 그 너비×깊이×높이가 100×70×20㎝ 정도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무 여러 개를 묶어 만들든, 통나무 하나를 걸쳐 놓든 사람이 교행할 수 없으면 통상 외나무다리라 칭하였다.
협곡의 바위가 가장 근접한 곳에 다리가 놓였던 바, 바위 사이의 거리는 5m도 되지 않지만, 다리 길이는 흔적으로 볼 때 6.2m 가량은 되었을 것 같다. 줄을 매달아 건너편으로 던져 측정해봤다. 다리 아래는 병목처럼 좁은 대신 ‘베르누이의 정리’에 의하면 시퍼런 물결이 더 깊고 세차게 흘러가는 곳이다. 게다가 主다리(C)는 약간 경사가 질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또 지금에는 다리가 필요 없는 A, B 구간에도 보조다리를 놓았다는 사실은 과거에는 수량이 훨씬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금도 내려다보면(C) 아찔하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은 여간 간담이 크지 않고서는 힘든 일일 것이다. 더구나 물이 더 많았을 옛날에는 건너기를 포기하거나 떨어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는 얘기가 빈말은 아닌 것 같다.
△ 다리 흔적. 카메라 각도와 넓은 렌즈로 실제 거리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
△ A는 상류쪽에서 하류쪽으로, B는 하류쪽에서 상류쪽으로 촬영
△ 主다리 C 아래 물결
△ 다리로 이어졌던 바위
2
1. 옛 문헌 속의 용유담 : 지지(地誌)와 고지도(古地圖)를 중심으로
⑴ 지지(地誌=地理誌)
⑵ 고지도(古地圖)
2. 옛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용유담
3. 오늘날의 용유담 경관
4. 용유담의 각자(刻字)
5. 용유담의 외나무다리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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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우제와 용왕당(龍王堂), 성모묘(聖母廟) ↓ 2편
⑴ 기우제(祈雨祭)
⑵ 용왕당(龍王堂)
⑶ 성모묘(聖母廟)에 대한 가설
7. 임천과 엄천
⑴ 같은 江 다른 이름
⑵ 임천(瀶川) 이야기
⑶ 엄천(嚴川) 이야기
⑷ 고지도 속의 임천과 엄천
8. 용유담과 지리산댐
6. 기우제와 용왕당(龍王堂), 성모묘(聖母廟)
용유담은 그 뛰어난 풍경 말고도 기우제와 굿으로 유명하였다. 밑이 보이지 않는 협곡엔 용이 숨어 있는 듯, 뭔가 신비한 이적(異蹟)이 일어날 듯, 외경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옛 유산기에도 “무지한 백성들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한다(유몽인)”고 하였다. 또 용은 비를 부르기도 하고.
⑴ 기우제(祈雨祭)
기우제의 연원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세상의 이치를 치열한 격물치지로 탐구하는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조차도 일견 미신 같고 주술적 행위인 기우제는 국가의 공식행사로 중시되었다. 자연재해는 민생 및 국가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왕과 지방수령은 민심을 안정시켜야 했고, 먼저 자신의 부족한 덕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유교의 수양론[修身齊家治國]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다음은 십팔사략 및 순자(荀子)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즘 위정자들 이런 척이라도 좀 했으면~.
「탕(湯 *중국 은나라 시조) 임금 때 7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들었다. 재계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을 자르고 … 산천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6가지 일로서 자책하였다. “정사가 적절치 못했는가, 백성들이 생업을 잃었는가, 궁실이 화려한가, 부인들의 정치 간섭이 심한가, 뇌물이 행해지는가, 아첨하는 자들이 들끓는가? 어찌 이리도 비를 내리지 않습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비가 내렸다.」
점필재는 『7월28일. 용유담에서 비를 빌다[禱雨龍遊潭]』는 시 5수를 남겼다. 또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이곳은 점필공(佔畢公)이 군수로 계실 적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던 곳”이라 하였다. 분명 제문이 있었을 것이나 남아 있지 않고, 그로부터 약 350년 뒤 담정 김려(藫庭 金鑢 1766-1822)가 함양군수로 재임시(~1822) 지은 『용유담기우제문』이 남아 있다. 용유담 기우제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점필재와 김려의 군수시절인 1471년과 1822년 큰 가뭄이 있었다는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김려는 조선후기 소품문으로 이름난 문장가였다. 그는 명(銘)을 짓듯이 四言으로 된, 짧지만 품격 있는 글로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아주 재미있다.
「신령은 밝고 밝아 은택을 널리 베풀어 구름을 피워올리고 비를 내려 온 웅덩이를 적시게 한다네. 이에 깊고 검푸른 연못에 크게 누워 있는 신령께 제사를 드린다오.
온 군토(郡土)를 교만한 가뭄귀신이 덮어 불볕이 뜨겁게 흐르니 수원(水源)은 이미 끊어지고 시내와 봇도랑도 마르고 높은 밭은 물론이고 옥답도 거북등처럼 갈라졌네. 두루 돌아봐도 들판엔 사람 흔적 하나 없고 저 익모초조차 말랐다. 혹시라도 살릴 수 있을까 했는데 곡식의 싹은 누렇게 변하여 불에 탄 것 같다. 고을 원이 나쁘다면 멸하고 청렴하지 못하다면 쓰러뜨려 나에게 고통을 주시되, 싹을 살려 곡식이 마르고 땅이 갈라져 슬픔에 빠져 있는 우리 백성들을 웃게 해주시오.
신령께서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살핀다면 감응이 일어날 것이요, 느낌이 있다면 반응이 북채처럼 울릴 것인데, 신령은 어찌 직분을 돌아보지도 않고 맡은 일을 멀리하며 귀를 막고 눈을 닫아 백곡이 끝내 병들어가는 것을 구경만 하시는 건 신령의 허물이오.
(가뭄으로 인해) 한 사내라도 죽어 골짜기에 버려진다면 이는 신령이 더럽혀지는 것이니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은혜를 베푸소서. 뉘우치지 않는다면 신령 역시 내가 드리는 술은 굶어야 하리라. 술을 가득 따르고 살찐 돼지를 갖추었으니 신령께서는 저버리지 말고 나타나 흠향하시라.」 (국역 엉겅퀴)
가뭄으로 인한 참상을 묘사하고 수령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신령을 질책하며 비를 내려주기를 비는데, 도대체 누가 아쉬운 것인지 모를 정도로 당당하다. 듣는 신령(?)에 따라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유자(儒子)는 공자의 후예답게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으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고[敬而遠之], 쓸데없이 신에게 아부하지 않는다[曾謂泰山 不如林放乎]. 서양식으로 말하면 이성주의자·합리주의자·인문주의자라 할 수 있다.
⑵ 용왕당(龍王堂)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 용유당(龍遊堂)(박장원 1643)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조구명 1724)」
용당·용유당·용왕당, 용유담의 당집이라는 뜻이다. 굿당이다. 박여량의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 지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낡아서 새로 지은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보다 앞선 기록에 용당이 있었다고 했으니. 그런데 점필재는 『기우용유담』 시에서 "밤에는 바위 밑 의지하여 자는데 (夜依巖下宿)"라 한 것을 보면 그때에는 당집이 없었거나 있어도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거나 기도하는 정성 때문에 당집에 들지 않았거나 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용유담은 천왕봉 백무동과 더불어 무당의 성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법우화상의 설화도 한몫 한 것으로 생각된다.
「엄천사의 법우화상은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과 부부가 되어 딸 8명을 낳았는데 무당이 되어 방방곡곡을 다니며 무업(巫業)을 퍼뜨렸다. 그러므로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 번 지리산 꼭대기에 이르러 성모천왕에게 기도하여 접신(接神)한다고 한다.」
이능화(1869-1944)의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와 《조선불교통사》에 나오는 얘기다. 다리옆 지금의 반야정사 자리에 당집이 있었다 한다.
⑶ 성모묘(聖母廟)에 대한 가설
나는 지리산에서 성모묘(聖母廟) 또는 성모사(聖母祠)는 당연히 천왕봉에만 있는 걸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번에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에는 성모묘(성모사)가 용유담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성모사. 하나는 지리산 천왕봉 위에 있고 하나는 용유담 가에 있다. 고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태조의 모후 위숙왕후를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聖母祠 一在智異山天王峰上一在龍游潭上 高麗李承休帝王韻記云祀太祖母威肅王后)” 교남지(嶠南誌 1867)
◦ 성모사. 고려태조 위숙왕후의 사당으로 둘이 있는데 하나는 천왕봉에, 하나는 엄천리에 있다.(聖母祠 高麗太祖威肅王后有二祠一在天王峯一在嚴川里)” 영지요선(嶺誌要選 1876)
둘 다 地誌이다. 비슷한 내용이 권도용의 『천령악부』(1905) 및 함양군지에도 되풀이된다. 물론 이전에 없었던 기록이 조선후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이왕 굿당으로 유명한 곳이니 민초들을 끌어들이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용유당도 성모사당이라고 뻥을 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뿐일까? 점필재의 ‘성모묘 기우제’ 관련 詩 몇 편을 살펴보자.
① 明日祭聖母廟有雨(명일제성모묘유우) 다음 날 성모의 사당에 제를 지내는데 비가 왔다
1 神母廟前嵐氣熏(신모묘전남기훈) 신모의 사당 앞에 남기가 훈훈했는데
3 回頭更向山椒望(회두경향산초망) 머리 돌려 다시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5 前峯已失後峯靑(전봉이실후봉청) 앞 봉우리는 없어졌고 뒷봉우리만 푸르러라
② 禱雨聖母廟歸途遇雨(도우성모묘귀도우우) 성모묘에서 비를 빌고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다 4월 초7일이다.
1 甘霪淋漓已濕衣(감음림리이습의) 단비가 주룩주룩 내리어 벌써 옷을 적시니
2 却疑神母擅陰機(각의신모천음기) 도리어 신모의 음기 독단하는게 의아스럽네
3 村村笑語還羞殺(촌촌수어환수살) 마을마다 웃고 말하는 것 도리어 부끄러워라
4 太守今朝得雨歸(태수금조득우귀) 태수가 오늘 아침에야 비를 얻고 돌아가리니
기우제 지낼 때마다 태수가 천왕봉까지 갔을까, 사람을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용유담이란 좋은 기우제 장소를 두고 굳이 천왕봉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①-3,5는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풍경이다. ②는 정황상 가까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풍경 같다. 당시 몇일씩 걸리는 천왕봉에서 제를 지내고 오는 길이었다면 오늘 아침 비에 젖어 백성들과 만날 수 있었을까?
①-1 및 ②-2에 의하면 성모묘를 신모묘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천왕봉 뿐만 아니라 마천에도 신모묘가 있었던 것 같다.
③ 馬川記所見(마천기소견) 마천에서 본 바를 기록하다
9 雪藏神母廟(설장신모묘) 눈은 신모의 사당을 덮었고
10 雷吼蟄龍淵(뇌후칩룡연) 천둥 소리는 칩룡연에서 울리누나
신모묘는 칩룡연 옆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용이 칩거한 못[칩용연]은 곧 용유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용유담은 마천이 아니라 휴천에 있다고? 경계이기도 하거니와 당시는 마천이었던 모양이다. “도원수 권율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천(馬川)의 용유담 길을 거쳐 진주로 향했고…” 정경운의 고대일록 1593년 7월20일 기사이다.
그렇다면 신모묘가 마천의 용유담에도 있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신모묘는 곧 성모묘이고. 그래서 가설이지만 점필재가 기우제를 지낸 성모사당이 천왕봉이 아니고 용유담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용유담의 당집이 성모를 모신 사당의 하나라고 주장하려면 과거에 성모석상이라도 갖춰 놓았을 것 같아, 혹시나 싶어 넌지시 수소문해 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분명한 기록도 없는데 단지 몇 가지 정황만으로 점필재 시절부터 성모묘가 용유담에도 존재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말의 가능성은 있지 않나 싶어 조심스레 가설을 제기하는 바이다.
7. 임천과 엄천
⑴ 같은 江, 다른 이름
낙동강도 상류로 올라가면 예안 부근에서는 굽이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를테면 분내(汾川) 외내(烏川) 달내(月川) 등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정겨운 이름에는 그렇게 이름지어 부르며 그 물가에서 살다 간 또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이름은 무엇보다 소중한 문화유산인 셈이다.
그런 이름은 지리산 골짜기에도 있다. 풍천(楓川) 남천(濫川) 만수천(萬水川) 임천 엄천 등…. 통상 마천에서 용유담까지를 임천, 용유담에서 경호강까지를 엄천이라 칭한다고 알고 있다. 최초로 구분하여 표기한 것은 동국여지승람이다. 아래와 같다.
◦ 임천(瀶川) :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馬川은 옛날에 馬淺이라 썼다.)
◦ 용유담 :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 엄천(嚴川) :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이만부(1664-1732)의 식산집에서는 보다 구체적이다.
◦ 북쪽 계곡의 여러 물이 모여 임천(瀶川)이 되었고, 임천의 아랫쪽에 용유담이 있고… 용유담 아래는 엄천으로, 서쪽으로 흐르다가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흐르고 살천과 합하여 청천강이 된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도 비슷하다.
◦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내려 용유담이 된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 진주의 촉석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리산 북쪽 운봉(雲峰) 경계에서 나와서, 함양의 임천(瀶川)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용유담(龍遊潭)이 되고 엄천(嚴川)이 된다.
용유담을 경계로 삼은 것은 아마도, 옛사람들은 엄천강의 진산(鎭山)격인 화산(*법화산)이 용유담에서 시작된다고 보았고, 또 신령스런 용유담을 통과한 물은 전환점으로 삼기에 매우 적절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 생각은 그렇다.
혹자는, 같은 물길을 어떻게 인위적으로 가를 수 있느냐, 유생들의 유람기록 몇 개로 이름이 달라질 수 있느냐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앞의 예에서 봤듯이 실제로 그렇게 불리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섬진강만 해도 순자강(鶉子江 남원) 압록강(鴨綠江 곡성) 잔수강(潺水江 구례) 섬강(蟾江 하동) 등 다르게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오히려 하나로 이어진 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강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같은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렀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감?
⑵ 임천(瀶川) 이야기
그런데 보다시피 위의 임천은 모두 임천(臨川)이 아니라 임천(瀶川)이다. 임천이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점필재의 시 『윤료가 또 함양군의 지도를 작성하였기에 그 위에 절구 아홉 수를 쓰다[允了又作咸陽郡地圖題其上九絶]』인데 거기서도 “발랄하게 뛰노는 신어는 임천에 가득한데 (神魚潑剌滿瀶川)”라 하여 임천(瀶川)으로 썼다. 확인가능한 초기 문헌에는 다 임천(瀶川)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임천(臨川)이 아니라 임천(瀶川)이라는 얘기다. 임(瀶)은 골짜기 또는 골짜기의 물이란 뜻이다. 그러니 瀶川은 지리산 골짝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패수(浿水)·사수(泗水)·위천(渭川)·남계(灆溪)처럼 물이름은 삼수(氵)가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가 있는 경우 삼수(氵)가 붙은 글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瀶을 음이 같은 臨으로 단순화하여 표기하는 것은 과거의 관행으로 볼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臨을 더 복잡하게 瀶으로 쓰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원래부터 瀶이 맞다. 그러므로 臨川은 瀶川에서 온 것이지, 세간의 이야기처럼 任倉에서 왔을 것이란 추측은 맞지 않다고 본다. 임창은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일 뿐으로, 전국에 산재하였다.
한편 임천(臨川)은 글자 그대로 '시내에 임한다'는 뜻이며, 조선과 중국에도 그런 지명이 있었고, 임천서원(안동과 진주에 있다) 임천 오씨(*元나라 성리학자 吳澄/오징) 왕안석의 號 등 당시 지식인들의 귀에 익숙했던 단어라 무심코 臨川으로 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목판본의 경우 옥편에도 잘 없는 복잡한 글씨를 일일이 새기기도 힘들었을 테고.
⑶ 엄천(嚴川) 이야기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김종직, 두류록) /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암천(巖川 *嚴川의 오류)의 하류였다.(김일손, 속두류록) / 도사(都事) 이숙평이 용추(龍湫 *용유담)를 보고자 하여 길을 엄천(嚴川)으로 경유하였다.(1596, 고대일록) / 이른 아침에 용유담(龍遊潭)에 갔다. … 여러 사람을 엄천에서 만나, 서로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고 계곡을 따라 단풍이 가득한 산에 올랐다.(1604, 고대일록) / 천령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엄천 물길 따라 서쪽으로 가노라니[天嶺凌晨發 嚴川逐水西/천령릉신발 엄천축수서] (1545년, 황준량(1517-1563)의 시, 엄천촌(嚴川村 *엄천마을)」
위 문맥상 당시 엄천이라 할 때는, 경우에 따라 엄천강 또는 마을을 가리키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것이든 엄천은 대찰 엄천사에서 유래한 지명일 것이다. 사찰명은 불교용어로 짓는 것이 원칙이며, 지명을 차용하여 사찰명으로 삼았다는 얘기는 그냥 후세인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해동 강우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 흥폐 사적(海東江右天嶺郡智異山嚴川寺興廢事蹟)』(1693년)에 “(신라 헌강왕9년,883) 절이 완성되자 왕은 엄천사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 뜻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하였으니 불교식 이름이 맞다.
육당 최남선은,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고 어머니 산속을 흐르는 내는 어머니 내인데, 어머니내>엄니내>엄내로 바뀌어 엄천으로 표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기막힌 생각이지만, 선생은 아마 엄천사 사적기는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엄천강변 사람들이 들으면 억울해 할 기록들이 더러 눈에 띈다.
① 나는 최정준과 함께 임천(瀶川) 하류에 갔다. 최계형 어른과 장항촌에서 만났다.(고대일록, 1595.8.3)
② 임천(瀶川)을 건너 신광선의 정자에 도착하여…(박여량, 두류산일록, 1610)
③ 남계(灆溪) :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임천(瀶川)과 합류한다.(동국여지승람)
④ 임천(瀶川) : 군 남쪽 30리에 있으며 지리산 북쪽의 계곡물이 합쳐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의 상류이다.(天嶺誌 1656)
①-임천 하류 장항촌 부근이라면 우리가 알기로는 엄천이다. ②-박여량의 여정으로 볼 때 방곡으로 내려와 강을 건넜다면 자혜나루 근처로 역시 엄천이다. ③-남계가 위천과 만나 임천과 합류하는 곳은 강정 부근으로 역시 엄천강이다. 그럼에도 위에서는 모두 임천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여지승람의 남계에 대한 설명은 같은 책의 임천·엄천 항목과 모순된다. ④-함양군지의 전신인 천령지에는 실수인지 몰라도 임천만 있고 엄천은 아예 빠져 있다.
⑷ 고지도 속의 임천과 엄천
또 접근가능한 고지도를 열람한 결과(*주로 규장각), 임천 또는 엄천이 등장하는 지도는 모두 17본이 있었는데, 임천만 표기된 지도는 14본, 임천과 엄천이 동시에 표기된 지도는 3본에 불과하였고, 엄천만 표시된 지도는 하나도 없었다. 위 억울한 사연과 더불어 이러한 시선들이 어쩌면 현재 국립지리원 지도에 엄천은 사라지고 임천만 남아 있는 결과로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고지도에서 임천이 瀶川으로 표시된 지도는 10본, 臨川으로 표시된 지도는 7본이었다. 서책에는 거의 전부 瀶川이었다. 잃어버린 엄천강 이름찾기와 더불어 제대로 된 瀶川江 이름찾기도 같이 전개해야 할 것 같다.
<팔도분도. 필사본, 1758-1767>
<조선팔도지도. 필사본, 1775-1785>
<청구도. 필사본 방안식(方眼式), 1834>
<대동여지도. 목판본 방안식, 1861>
그런 불행한 일이 발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잘못되면 임천이든 엄천이든 물 밑으로 가라앉게 생겼다.
8. 용유담과 지리산댐
한국의 전쟁불사론자들 중 본인은 물론이고 그 자식들도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들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리산댐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댐건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보다는 그로 인해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을 누릴 만한 사람들이거나 한발 비켜 서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다수’라는 이름의 폭력이 여기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 같다.
잠깐 지리산댐 추진일정을 살펴보자.
◦ 2007. 국토부, 댐건설 장기계획에 지리산댐 포함
◦ 2008. 부산 물공급 대책의 일환으로 남강댐 수위상승과 연계한 보조댐(지리산댐) 거론. 다목적댐
◦ 2009. 기획재정부와 KDI의 예비타당성 조사 > 주민 반발로 중단
◦ 2010. (수정안) 남강댐 + 지리산댐 + 강변여과수 개발 ⇒ 부산 물 공급 > 타당성 조사결과 ‘경제성 없음’으로 판명
◦ 2011. 국토부, (경남-부산 광역상수도 사업을 별도 확정) 지리산댐은 홍수조절용 댐으로 용도변경 ⇒ 치수사업으로 규정돼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추진 가능
◦ 2012.12 댐건설 장기계획에 포함되어 추진 확정. 환경부, 신규댐 건설보다 남강댐 보강으로 홍수조절 가능하다는 의견 제시
◦ 2014. 7 경남도지사, 지리산댐을 식수댐으로 만들자고 주장
◦ 2015. 지자체(함양군 및 경남도), 댐의 규모를 줄여서 다목적댐으로 용도 변경하여 건설할 것을 주장
식수댐·홍수조절댐·다목적댐 등의 말 바꾸기는 건설 후의 용도나 활용보다는 우선 건설해놓고 보자는 식이며, 어째 결국 지리산댐은 건설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반대논리는 대강 이렇더라.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는 주로 산사태로 인한 것이고, 또 지리산댐이 없어서 하류에 홍수피해가 컸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부산 식수는 수질이 안 좋다고 낙동강을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돈을 쏟아부어 환경 파괴한다는 것이다.
꼼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지리산댐을 건설하겠다는 행정에 맞서 반대측에서 들고나온 것이 ‘용유담 명승 지정’이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의 보호를 받아 댐건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명승은 사적·천연기념물과 동급이다)
신청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2012.6.27 문화재청의 심의결과 발표
ㅇ 문화재 보존과 댐 계획 조정 그리고 찬·반 양론의 갈등조정과 국토해양부로부터 자료보완을 위해 문화재 지정 심의를 6개월간 보류한다.
ㅇ 문화재 보존은 용유담의 원형보존을 의미하며, 국토해양부·한국수자원공사는 이 기간 중 문화재에 위해가 되는 어떠한 조치나 결정도 하여서는 아니 된다. 만약 이 기간 중 문화재에 악영향을 미치는 위해 행위가 있을 때에는 문화재청은 용유담의 명승 지정을 즉시 추진한다.
이 결정문만 보면 아무리 또디라도 사실상 용유담을 명승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문화재청은 그날 이후 아직까지 아무런 결론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토부와 수자원공사의 반대 때문이다. 국가기관으로서 쪽팔리는 일이다.
당초 계획은 댐 높이 103m 길이 400m 총저수량 9400만t이었으나, 2011년에 높이 141m(*평화의 댐 125m) 길이 896m 저수량 1억7000만t으로 2배 늘어난다. 댐이 들어설 장소는 문정리 와룡대 바로 위 엄천이 꺾이는 곳으로 해발 170m이다. 넉넉잡고 댐 꼭대기(해발 170+141=311m) 5m 아래를 만수위로 본다 해도 물이 차면 수면 해발고도는 306m로 용유담(해발 200m)은 물론 의탄교(255m) 마천다리(270m) 모두 물에 잠기고 실상사 주춧돌(310m) 아래까지 물이 찰랑거릴 것이다. 칠선계곡을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규모가 어떻든 댐은 지리산에 재앙일 뿐이다. 제발 지리산을 그냥 냅둬라!
<댐 예정지>
마지막으로, 다음은 국가지정문화재 중의 ‘명승’지정 기준이다.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해보라. 이 중 용유담에 해당되지 않는 항목은 어느 것인지….
○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기준(문화재보호법시행령 별표1)
문화재의 종류 : 명승(名勝)
1. 자연경관이 뛰어난 산악·구릉·고원·평원·화산·하천 ·해안·하안(河岸)·섬 등
2. 동·물의 서식지로서 경관이 뛰어난 곳
가. 아름다운 식물의 저명한 군락지
나. 심미적 가치가 뛰어난 동물의 저명한 서식지
3. 저명한 경관의 전망 지점
가. 일출·낙조 및 해안·산악·하천 등의 경관 조망 지점
나. 정자·누(樓) 등의 조형물 또는 자연물로 이룩된 조망지로서
마을·도시·전통유적 등을 조망할 수 있는 저명한 장소
4.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명산, 협곡, 해협, 곶, 급류, 심연(深淵), 폭포, 호수와 늪, 사구(砂丘), 하천의 발원지, 동천(洞天), 대(臺), 바위, 동굴 등
5. 저명한 건물 또는 정원 및 저명한 전설지 등으로서
종교·교육·생활·위락 등과 관련된 경승지
가. 정원, 원림(園林), 연못, 저수지, 경작지, 제방, 포구, 옛길 등
나. 역사·문학·구전(口傳) 등으로 전해지는 저명한 전설지
6.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제2조에 따른 자연유산에 해당하는 곳 중에서 관상상 또는 자연의 미관적으로 현저한 가치를 갖는 것
이상으로 용유담에 대한 헌사(獻辭)를 모두 마친다. 절합니다~. <끝>
[참고 사이트]
한국고전번역원, 서울大 규장각, 경상大 문천각,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청,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국회전자도서관, 국가법령정보센터, 함양역사관, 지리99 外 다수
[참고 서적]
지리산권 고지도 선집, 지리산권 지리지 선집, 輿地圖書, 지리산 한시 선집,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조선불교통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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