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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필재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 방장문 석각 발견
    지리 박물관(역사,문화,) 2021. 3. 24. 16:36

    조선일보의 칼럼니스트 조용헌 박사의 취재 지원 산행을 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역사문화조사단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구롱(아홉 모롱이) 길을 조사하던 중, 여덟 모롱이(팔롱, 八隴)의 석문(石門)에서 방장문(方丈門) 석각을 발견하였다. 이 석문(石門)은 송대와 벽송사 그리고 엄천과 오봉리에서 천왕봉에 오르는 길목에 있다. 쉽게 설명하면 방장문(方丈門)은 지리 동북부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자연 석문으로, 내지리와 외지리를 구분하는 경계(석전 사문에는 봉전령)이다. 이 길은 신라의 화랑 영랑이 3,000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영랑대에 올랐다는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이전에 가야인들이 이미 구축한 산길로 추정된다.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명과 성터가 주변에 산재해 있음을 깊이 있게 음미(吟味)해볼 필요가 있다.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 길은 고도 1,100m, 고저 차이 약 50m 내외,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도상거리로 약 4.75km 정도 이어지는데, 고저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구롱(九隴)에서 롱(隴)은 阝(좌부변, 언덕부 = 阜)와 용(龍)이 결합한 글자이다. 롱(隴)은 용처럼 구불구불하지만, 부드럽고 편안한 모롱이 길을 의미한다. 롱(隴)은 모롱이 즉 경상도 사투리로 모랭이 또는 모래이로 이해하면 쉽다. 이 아홉 모롱이 길의 방장문(方丈門)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500년 전 가야인들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통천문(通天門)이요, 신라가 가락국을 합병(532년)한 후에는 화랑들이 영랑대로 오르는 선도(仙道)의 문이며, 조선시대에는 관료와 사대부, 유생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유람의 관문이다. 그렇다면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오는 석문(石門)과 금강문(金剛門), 통천문(通天門)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석문과 금강문과 통천문

     

    가. 1611년 유몽인의 기행시와 두류산록

    明朝我向石門去 : 내일 아침 나는 석문으로 떠날 것이고/師在頭流雲水間 : 선사는 두류산 구름과 계곡 사이에 머물겠지요.

    ○ 癸酉. 侵晨而行掠甕巖. 入淸夷堂 : 4월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 掠은 중국 漢漢字典에 '輕輕擦過'로 되어 있는데, '가볍게 스쳐 지나가다'라는 뜻. 옹암을 가까이에서 보고 지나간 것으로 이해함. 여기에서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석문은 옹암 가까이 있는 석문으로 판단함.

     

    나.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이재구 선생 譯)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過杜里之廢寺 有兩巖之交粘問奚名則曰金剛門亦禪師之權辭以拈眡

     

    ☞ 권도용의 동선을 벽송사-어름터-두리의 폐사-집터-여섯 모롱이-일곱 모롱이-여덟모롱이-방장문-아홉모롱이(쑥밭재)-청이당으로 추정하면 방장문이 금강문일 가능성이 있음.

     

    다.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이재구 선생 譯)

    드디어 차례로 서서 나아가 겨우 장구목[缶項부항]에 도착하니 갈증이 나고 침이 말랐다. 곧이어 사립재[扉峴비현]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아이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했지만 일행에게 뒤쳐질까봐 힘써 길을 올랐다. 아래위의 석문을 지났다. 문의 양쪽은 모두 바위이고 가운데로 한 줄기 좁은 길이 통하였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여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흰 글씨로 통천문(通天門) 세 글자가 석면에 쓰여 있었다. 遂序立前進纔到缶項而喉渴無涎矣迤到扉峴訪友致祚則兒言少選當返而恐其失伴努力登途過上下石門門之兩傍皆石而中通一逕巖形上合而中虛可容十餘人以白書通天門三字於石面

     

    ☞ '아래 위의 석문을 지났다.'는 독바위 인근 석문(?)을,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여인을 수용할 수 있다.'라는 문구는 방장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답사와 관찰이 더 필요하여 판단을 유보한다.

     

    라. 점필재 길 구간별 도상 거리(실제 거리와 차이가 있음) 자료제공 칠성님

    1) 엄천~거머리재~적조암 : 3.58km

    2) 적조암~고열암 : 2.90km(적조암~지장사 갈림길 : 1.77km, 지장사 갈림길~고열암 : 1.13km)

    3) 고열암~동부 샘터 : 1.93km(고열암~소림선방 : 1.01km, 소림선방~동부샘터 : 0.92km)

    4) 동부샘터~청이당 : 2.82km(동부샘터~방장문 : 1.84km, 방장문~청이당 : 0.98km)

    5) 청이당~영랑대 : 2.27km(청이당~마암 : 1.30km, 마암~영랑대)

    6) 영랑대~천왕봉 : 2.20km(영랑대~중봉 : 1.49km, 중봉~천왕봉 : 0.71km)

    7) 천왕봉~장터목 : 1.5km

    8) 장터목~영신대 : 4.22km

    9) 영신대~바른재 들머리 : 0.47km

    10) 바른재 들머리~백무동 : 4.53km

     

    1472년 김종직 점필재길 구간별 도상거리.pdf
    0.04MB

     

    방장문(方丈門)

     

    2. 구롱(아홉 모롱이) 길 방장문 석각

     

    가.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에 대하여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아홉 모롱이 길에 있는 석각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희귀한 이체자이다. 서예대자전에서 명나라 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행서와 서자불명(書者不明)의 예서에 보인다. 방장문(方丈門) 필획의 주인과 석각의 연대는 아직 미상이지만, 석각이 깊고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미루어 근세에 새긴 것으로 추정함.

     

    나. 方丈의 어휘에 대한 유래

     

    1)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지리지」의 지리산에 대한 설명

    "杜甫詩所謂方丈三韓外註及《通鑑輯覽》云: "方丈在帶方郡之南。是也。(두보의 시에서 말한 '방장산은 삼한 외지에 있다'라는 구절과 《통감집람》의 '방장산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2)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杜詩有方丈三韓外之句。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國。方丈卽智異山瀛洲卽漢挐山蓬萊卽金剛山也。"(두보의 시에 있는 '방장은 삼한의 외지에 있다'는 구절을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나라(조선)에 있다.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한라산, 봉래산은 금강산이다.'라고 한다.)"

     

    [출처] [관광자원해설] 국립공원 정리

     

     

    다. 방장문 석각의 필획과 시기

     

    1)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1923.04.01)

    함양 군수 민인호가 함양명승고적보존회(보승회)를 조직하여 동군 유지 강위수(姜渭秀)는 등산객들의 편리를 위하여 天王峯에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박노익(朴魯翊)과 영원사승(靈源寺僧)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을 건축하였으며, 이진우(李璡雨)와 벽송사승(碧松寺僧) 일동은 마암당(馬岩堂)을 건축 하였는데 두 곳이 모두 중봉이다.(兩處는 皆 中峯)

     

    2)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상봉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내명은 모두 추위에 곤란을 겪는 자들이므로 길가의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한 골짜기의 땔나무를 긁어 집으로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에 어렵지 않겠다.”고 하자, 종자가 듣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씀이 마을사람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3) 방장문 석각의 필획과 시기 추정

    ① 書者不明, 석각 시기 미상, 석각의 상태가 깊고 양호하여 근세에 새겼을 것으로 추정함.

    ② 방장문(方丈門)에서 丈(장)의 오른쪽 상단에 丶(점주)가 더해진 글자는 이체자.(왕양명 필체)

    ③ 1922년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마암당을 지은 이후에 새긴 것으로 추정함.

    ④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방장문(方丈門) 석각에 대한 언급이 없어 1924년 이후 석각했을 가능성.

     

     

    방장문(方丈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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