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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2022년 04월 10일 일요일
# 산행지: 지리 품속 문수골, 큰진도사골, 문수대(문수암),에서 놀다.
# 산행거리: 11.00Km 07시간 16분
# 산행코스: 신율마을 - 문수골 - 복호폭포 - 질매재길 - 큰진도사골 - 문수대(문수암) - 왕시루봉능선 - 질매재 -
질매재골 - 신율마을 - 문수암
# 문수골 : 지리산 노고단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며, 진도사골, 매박골, 질매골, 복호골 등이 합수됨
# 문수골 : 큰진도사골, 작은진도사골, 질매골, 밤나무골, 복호골등 많은 계곡이 합수됨
# 질매골 : 지리산 질매재와 질등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며, 대부분이 마른 너덜지역 계곡임
1960년 문수대(문수암)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신율마을 쌍둥이민박 주차 해발 510m
신율마을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신율....新栗....
지척인 월령봉(형제봉)능선 上 밤재...
밤과 관계되어 유래된 지명인것 같다.
마을 앞으론 문수골이 흐리고
동남면은 왕시루봉능선이
북서면은 월령봉(형제봉)능선이 감싸안은 마을...
오늘 산행지는 문수골과 복호폭포 큰진도사골을 통해 문수대(문수암)에 오르고, 하산길은 왕시루봉능선을 따르다가 질매재에서 질매재골로 하산하는 일정이다...ㅎㅎㅎ
작년가지 없었는데 문수골 연행 안내도
(좌),정방향 반달곰 자연적응장 & (우), 산에사네농장, 문수골, 복호폭포 방향
문수골
노고단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왕시루봉능선과 월령봉능선 사이의 계곡으로 지리산 12대 계곡중 하나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최초 입산했던곳이며 기나긴 기간동안 지난한 빨치산 투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또한 그해 11월 중순 월동을 위해 질매재를 넘어 피아골, 연동골, 목통골 등으로 이동했던 곳이 바로 이 골짝이다.
복호폭포
신율마을에서 15분거리 자동 우량경보 시설이 있는 지점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이란 글씨가 새겨진 너럭바위
居然我泉石(거연아천석)'이란 글씨가 새겨진 너럭바위, 초서체(草書體)라 뭐가 뭔지 알아볼 수도 없지만, 주자(朱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중 한 구절이라는데,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함양 화림동계곡의 거연정(居然亭)도 같은 맥락이라나?
(좌)진도사골 & (우)질매제골
진도사골
진도사 바위
진도사바위
진도사바위에 관한 전설
진도사골 계곡 한가운데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는데 옛날 진도사가 이 골에서 도를 열심히 닦는 도중 해가 지려고 하면 그 바위구멍에 깎은 나무를 꽂아 해가 넘어가지 않게 매달아 놓고 도를 연마한 후 그날 닦은 도가 충분하면 해를 풀어 주었다고 한다. (1997년 2월 진도사골 산행시 고로쇠 수액 채취 중인 주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 한다.
(좌) 작은진도사골 & (우) 큰진도사골 큰진도사골 고고싱
(좌) 작은진도사골 & (우) 큰진도사골 합수부에서 휴식
큰 진도사골 분위기
구들장
석문에 걸친 막대기를 들추고 들어선 문수암, 노고단 아래 자리 잡은 문수대가 병풍처럼 버티는 가운데, 왕시루봉능선 너머론 삼신봉과 형제봉을 잇는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문수대는 지리 10대의 하나이자 우번대, 서산대, 무착대, 묘향대와 더불어 반야 5대라 부르기도, 화엄사의 부속암자인 문수암, 땅주인은 서울대학교이고 관리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한다는데, 문수대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로 컬컬한 목을 축이고, 우린 오늘 석간수 앞자리에 점심 식사자리를 만든다.
아름드리 구상나무 아래의 돌방석
석간수로 목을 축이고 사색하듯 주변을 돌아본 후, 돌탁자에 둘러앉아 한동안 여유를 가져본다.
[문수대 文殊臺 (1.280m)]
약 190여 년 전 화엄사 스님이시던 <초운대사>가 창건한 문수암(文秀庵)터가 빨치산 토벌 시에 소실되었다가 돌담장으로 엮은 스님의 거처는 세월을 잊은 듯 경이롭기까지 하다.문수대를 품은 노고단은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神壇)이 있었다 하여 노고단으로 부르게 되었다. 예전엔 길상봉(吉祥峰)으로도 불렸다는데 길상은 묘길상, 즉 문수(文殊)보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암자가 있는 골짜기도 문수골이고 그 아래 마을 이름도 문수리니 이 일대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셈이다. 문수란 '지혜의 완성'을 의미한다.
문수골은 지리산에서 비교적 큰 계곡 가운데 하나로, 화엄사계곡 동쪽능선인 월령봉능선과 피아골 서쪽능선인 왕시루봉능선 사이에 패여 있으며, 그 상류를 진도사골이라 한다.
아래 지도 합수점에서 큰 진도사골(右)과 작은 진도사골로 나누어진다. 또한 이 골짝은 여순병란 때 김지회가 지휘하는 패잔병들이 1948년 10월 25일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지리산 유격 투쟁이 시작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문수암의 유래는 이렇다. 엄동설한에 수도정진하기 위해 스님 세분이 이곳 문수사에 칩거하여 수도를 하고 있는데 한분 보살이 찾아와 자기도 같이 수도 할 것을 청하자 다들 먹을 식량이 세 사람 밖에 양식이 없어 한사코 거절을 하자 자기는 알아서 해결 할 테니 걱 정하지 말라고 해서 같이 수도를 하게 되었단다. 수도하는 중 세 스님은 졸고 있는데 보살이 옆구리를 찔러 깨우기도 하고 삼세끼 밥도 같이 먹고 지냈지만 양식은 부족함이 없었고 수도도 끝나고 해동이 된 뒤 하산을 하는데 금방 있던 그 보살이 바람과 같이 사라지자 가로 늦게 깨우쳐 문수보살이 성불했다는 것을 크게 뉘우치고 수년간 수도한 결과 성불했다는 이야기 줄거리다.
문수대는 50m가 넘는 아찔한 벼랑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부터 육산에는 바위가 있는 곳이, 골산에는 부드러운 흙이 있는 곳이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했으니 문수대는 육산인 지리산의 바위 벼랑 아래의 부드러운 대지에 터를 잡았으니 애써 명당이라 말할 필요가 없다. 한두 사람이 머물기에는 물도, 땅도 넉넉하니 예부터 수도하기에 좋았던 것이다. 이곳에 암자가 처음 들어선 건 1803년 경 화엄사의 초운대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알 도리가 없다.
이 고요한 암자도 지리산의 아픈 역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문수대는 항일 의병 운동의 본거지였다. 문수대가 역사에 드러난 건 구한말 지리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 때문이다. 한때 의병부대가 1700명에 달했던 의병장 김동신이 이곳 문수대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과 피의 맹세를 한 김동신은 영호남의 여러 군을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전개했고, 두 차례에 걸쳐 지리산에 들어왔다. 1907년 9월 18일, 화개를 출발한 김동신 부대는 반야봉을 거쳐 이곳 문수대로 왔다. 다음 날 문수골 아래 토지면 오미리 운조루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그 다음 날 새벽 구례읍을 습격해 읍내를 장악했다. 화개에서부터 김동신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의병장 고광순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연곡사를 기습 공격해 불태운 후 이곳 문수대마저 불태웠다. 김동신의 의병 투쟁은 1908년 6월 6일 대전 순사대에 그가 체포되자 막을 내리게 된다.
문수대 상단
암자 뜨락에 무심히 놓인 돌 방석에서 무심한 허리를 세웠다. 뒤로는 은산철벽, 앞으로는 낭떠러지. 왕시루봉이 지척이고 저 멀리 흐르는 섬진강이 가뭇없다. 이곳 문수대에서 발원한 토지천 물 줄기는 산 아래서 섬진강을 만나 토지면 일대에서 풍성한 '구만들'을 이룬다. 노고단의 옥녀가 금가락지를 흘린 곳이 금환락지의 명당 오미리 운조루이다.
사면길에서 왕시루봉 조망
(좌) 돼지령 & (우) 왕시루봉능선길
왕시루봉능선길에서 조망 되는 반야, 화개재
질매재
(좌) 피아골산장 & (우) 질매재골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매재골 너덜지대...ㅎㅎㅎ
하산길 질매재골 초입
반달곰 자연적응장
왕시루봉능선 과 질매재
문수사 - 현재 문수사가 유명해진 것은 반달곰 때문이다.
문수사 부도
문수사는 백제 성왕 25년(547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원효대사를 비롯하여 의상법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이 수행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좌청룡 우백호의 기운이 뚜렷한 문수골 문수사는 백제 성왕 25년(서기 547년)에 연기조사께서 창건하였다. 그 뒤 저자거리에서 불법을 선양한 원효대사, 해동 화엄의 종조가 된 의상법사를 비롯하여 윤필, 서산, 소요, 부유, 사명대사 등 여러 고승대덕께서 수행정진한 제일의 문수도량이다.
고당 청허당 스님 젊은 시절의 수행처이기도 했는데 이때의 한 고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불법을 깨우치기 위해 용맹정진을 거듭하던 중 걸승이 찾아와 함께 수행하기를 청했다. 처음에는 식량이 모자라는 터라 거절했지만 노승의 청이 너무 간절해 같이 수행하게 되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던 어느날, 수행하던 노승이 새벽녘에 주장자를 앞산으로 날려 황룡을 만들더니 그 용을 타고 안개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 후 문수사는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수행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왜병의 난입으로 파괴된 뒤 불당을 조성하지 못한 채 6·25사변을 맞아 전소되었고 그 후 1984년 요사채를 세우고 1988년 옛 대웅전터에 지금의 고금당선원을 건립하고 진입도로를 완성함으로써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어 문수전, 삼성각, 고봉선원, 방장굴, 설선당 등을 건립, 석축을 쌓고 삼층법당 대웅전(목탑)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문수사 대웅전
곰의 집 반달곰
운조루 입구 연지
구례 운조루 고택(求禮雲鳥樓古宅)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4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가 달려 있다. 몸채 왼쪽 끝의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채의 구성은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여기에 일반 대청이 연립하여 있다. 또, 사랑채에는 보통 큰 부엌이 없는 법인데,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더구나 본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사랑채의 오른쪽은 안채로 평면이 트인 □형인데, 중행랑채를┍ 형으로 만들어서 전체 윤곽이 몸채 뒤쪽의 날개부분까지 합쳐 □형이 되어 아주 독특한 평면이다. 중행랑채는 一자형 곳간채의 왼쪽 끝에서 2칸이 앞쪽으로 돌출하여 있다. 이 2칸은 내루형으로 처리되어 1칸은 방이 되고 1칸은 판상(板床)을 높이 설치한 다락이 되었다.
머름을 드리고 문짝을 달았으며, 서벽 밖으로는 쪽마루와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누하주(樓下柱) 서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나 있는데, 죽담에 오르는 것을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또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안채의 중심부분은 대청으로 주간(柱間)이 개방되어 있다. 대청 좌우로는 안방과 건넌방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구례 운조루 고택(求禮雲鳥樓古宅)
구례 운조루는 양택지로 유명한 곳 중 하나이다. 이곳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면서도 근대의 여러 위기시에도 불타거나 폭격을 당하지 않고 버텨온 것이 신기할 뿐이다. 지리산 자락의 절간들과 민가들이 모조리 불탄 것을 생각할 때 적덕의 미덕을 실천한 가문의 훌륭한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금환낙지의 형국이라 전한다.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을 한 뒤 다시 하늘로 오르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터를 잡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운조루는 실제로 이곳에 터를 정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집의 입지 특성은 지리산 산자락이 높은데 능압을 하지 않고 점차 박환의 과정을 거쳐 집 뒤에 작은 현무봉을 일으켜 좋은 기운을 집으로 전해주고 있으며, 집 앞의 연지와 물길이 더이상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고 특히 물길은 섬진강과 역수를 이뤄 짱짱한 기운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집 앞에 흐르는 하천의 물이 엄청나서 일부러 물길을 돌려놓지 않았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앞쪽의 조안산이 오봉산인데 넓은 명당을 사이에 두고 재물을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택리지에서 말한 '생리'에가장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옛부터 이곳에는 통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어서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덕을 배풀어왔다. 쌀독 입구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적어 누구나 필요할 때 퍼가도록 했다. 이런 적덕이 이들 가문에게 현대사의 변화 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큰 탈없이 무사히 잘 보낸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운조루는 명당을 떠나서 부자들이 살아가는 지표를 제공해 주는 곳이며, 이웃과 더불어 함께 동고동락의 생활을 해야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