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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上院寺)터 & 박회성(朴回城)지리 산행기 2023. 5. 3. 10:00
# 언제: 2023년 04월 30일 일요일
# 산행지: 상원사(上院寺)터,박회성(朴回城)대궐터(大闕基), 대륙폭포, 칠선폭포,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1.7km 06시간 12분
# 산행루트: 백무동주차장 - 하동바위 - 빨치(창암능선)방향 - 창암능선 - 창암오거리지류 - 상원교
상원사골 - 상원사터 - 박회성(대궐터) - 빨치(대륙폭포골)방향 - 대륙폭포골 - 대륙폭포
칠선폭포 - 백무칠선길 - 창암사거리 - 인민군사령부터 - 다샘펜션 - 백무동주차장
상원사(上院寺)터
사람도가고 세월도 흘러 사지의 정확한 창건연대 및 폐사 시기는 알 수가 없지만 "상원사"라는 이름은 남아 있기에 시간
굳어버린 빈 공간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역사 한 자락을 건질 수 있었다.
지리산 상원사 사지에 가면 비운의 조선왕조 역사 한 페이지를 엿볼 수 있다.
연산군의 한 서자아들이 중종반정의 피바람을 피해 은거한 곳이 지리산 상원사라고 전한다.
연산군에게는 세상에 회자한 장녹수 말고도 여러 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그 중 이숙의(李淑儀) 의 아들 양평군(陽平君),이인(李仁)은 참수와 사사를 당한 다른 폐족들과는 달리 난리 통에 한 가노(家奴)의 기지로 궁을 빠져나와 절집의 스님에게 맡기어지면서 조선팔도 여러 절집들을 전전하다가 지리산 상원사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고 전한다다. 전하는 조선조 사료에 의하면 분명히 연산군 소생의 왕자들은 적자 서자 막론하고 모두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정사인지 야사인지 알 수가 없지만 중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자료가 기록되어져있어 소개한다. (출처)지리구구
●중종 17권, 8년(1513 계유 / 명 정덕(正德) 8년) 1월 7일(정축) 3번째 기사
만손의 추안을 정원에 내리다
만손(萬孫)의 추안(推案)을 정원에 내리며 ‘자세히 추핵(推覈)하여 계문(啓聞)하라.’ 하고, 이어 항쇄(項鎖)만 채우고 칼[枷]은 채우지 말도록 명하였다. 그 공초(供招)에, “금년 15세로, 곧 폐조의 이숙의(李淑儀) 아들 양평군(陽平君)인데, 남학동(南學洞)에서 생장했습니다. 여섯 살 때 폐조의 난이 일어나자, 가노(家奴) 보동(寶同)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는, 곧 파란 보자기로 나를 덮어서 엎고 수구문(水口門) 길로 해서 도망쳐 서울 근방 산에 있다가, 산이 서울[京都]에 너무 가까워 사세가 거주하기 어려우므로 개골산(皆骨山)으로 가, 보동 등과 함께 대선(大禪)이라고 불리우는 중에게 의탁했었고, 지리산(智異山)으로 가서는 상원사(上院寺)에서 1년을 지내다가 드디어 묘향산(妙香山)으로 가 보현사(普賢寺)에 이르러 두 해를 머물렀는데, 종 보동이 죽었습니다.
또 안주(安州) 원통사(圓通寺)에 이르러 7일을 머물며 그 절의 중 죽청(竹淸)에게 왕자(王子)인 뜻을 가만히 말해 주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죽청의 말이 ‘겁성(劫成)이라는 자는 바로 본궁(本宮)의 종인데, 지금 황회목(黃灰木)으로 돈 버는 일 때문에 곽산(郭山)에 와 있으니, 찾아가서 같이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나를 데리고 곽산 고을로 갔었는데, 겁성은 보지 못했고, 죽청의 동생인 곽산에 사는 내수사(內需司) 종 가구지(加仇之)의 집으로 가서 쉬는데, 죽청이 왕자인 뜻을 말해 주니, 가구지가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하루를 가구지에게서 머물다가 곧 죽청 등과 함께 정주(定州)에 사는 내수사 종 효문(孝文)의 집에 가서 하루를 머무는데, 효문이, 내가 왕자라는 말을 전파하니, 그 면(面)의 권농(勸農)과 색장(色掌) 등이 나를 황당(荒唐)한 사람이라고 하여 효문의 매부(妹夫) 만복(萬福)의 집으로 옮겨가 있게 했는데, 효문이 ‘아기씨[阿只氏]가 바로 왕자다.’라고 이웃과 마을에 떠들어대고 ‘만일 서간(書簡)을 고을 목사(牧使)에게 통하면, 아기씨를 반드시 선처할 것이다.’ 하고, 이어 이웃 사는 교생(校生) 홍윤평(洪允平)에게 청하여 서간을 고을 목사에게 올리도록 하니, 목사가 나를 황당한 사람이라 하며 잡아 가두고 곧 관찰사(觀察使)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그가 얻어먹으며 떠돈 곳을 일일이 진술(陳述)하매, 사람마다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가 참으로 왕자인가 의심하였다. 【원전】 14 집 635 면 (출처:가객님글) (퍼온글)상원사지에 건물 잔해(2005년도)
박회성(朴回城)대궐터(大闕基)
박회성(朴回城): 산 속에 고성이 있는데, 추성(楸城)이라 하고, 하나는 박회성이며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는 곳이라 전하 고려말, 초선초기의 피난성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한 포곡식성(包谷式城)으로 추정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1596년 조·일 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다. (孤臺日錄)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가락국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유적지가 유난히 많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추성산성터 주변의 두지터(식량저장고), 얼음터(석빙고)에서 국골은 물론이고 구형왕이 올랐다는 왕등재 그리고 왕등재 일대의 토성, 산청군 금서면의 왕산과 구형왕릉,덕양전 또한 구형왕의 증손자였다는 김유신 장군의 훈련터 등이 그것이다. 해발 1238m 부근에 완만한 계곡상류부를 좌우로 가로지르는 내성을 쌓고, 또 150여미터 아래쪽, 해발1200m 부근에 이와 똑같은 형태의 성벽을 쌓았는데 일종의 외성인 셈이다.
추성(楸城)과 박회성(朴回城)은 축성시기와 성격이 전혀 다른 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의탄소 -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성'은 추성(楸城)을 가리키고, 박회성(朴回城)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박회성(朴回城)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고대 정경운은 감수재 박여량과 함께 함양지역 의병운동에 깊게 관여했고, 박여량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한 인물이다. 그의 기록은 정유재란 때에 피난성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 기초조사 과정에서 성곽의 길이와 면적을 측정하고 샘터를 발견함으로써, 역사에 묻힌 조·일전쟁의 중요한 사료를 발굴했다고 할 수 있다. 박회성(朴回城)은 기록상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축성된 산성이다. (출처: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하봉 아래 상원사골 깊은 곳에 대궐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험지에 웬 대궐터일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주변 지명들과 연계해볼 때 예사롭지 않은 곳임에는 틀림없다. 추성과 광점동 일대에는 산성의 흔적을 비롯해 ‘성안마을’과 군마훈련장으로 추정되는 ‘말달릴 평전’이 있고 나라 국자를 쓰는 ‘국골(國谷)’도 있다. 또한 식량창고가 있었다는 칠선골 초입의 ‘두지터’를 비롯해 석빙고 역할을 했다는 광점동 ‘어름터’ 등의 지명도 유래되고 있는데, 이는 체계를 갖춘 한 세력이 웅거한 흔적이며, 이곳이 한때 격동했던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략)
외성은 내성과 달리 석축이 다 무너지고 온전한 곳이 없다. 한쪽에는 조악한 무늬의 기와 파편들을 모아 둔 것도 보인다. 이런 오지에 기와까지 얹은 건축물이 있었고 이중의 성곽과 외곽초소까지 있는 성이라니, 예사롭지 않은 미스터리한 곳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대궐터’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가야의 성터였을까. 인근의 왕산과 구형왕릉, 왕등재 등 가야의 흔적을 미루어 보면 이곳이 가야의 피난왕조 성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신라에 나라를 넘긴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쫓기다시피 도피해 이곳에 피난도성을 세우지 않았을까.# 산행영상
# 산행지도
#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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