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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마니굴&향운대&빈막골능선지리 산행기 2023. 4. 24. 08:23
# 언졔: 2023년 04월 23일 일요일
# 산행지: 최마니굴,향운대,빈막골능선,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1.19km 07시간17분
# 산행루트: 광점동 - 추성둘레길 - 성안 - 국골 - 최마니굴지류 - 최마니굴 - 두류능선 - 향운대 - 향운대길
빈막골능선 - 추성들레길 - 지산대 - 광점동
성안
추성 산성지
추성산성지(楸城山城址)는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87-2번지 일원, 해발 667m에 위치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이 성은 성안 마을의 동쪽편 구릉에서 시작하여 반대편 구릉까지 연결하여 쌓은 흔적(성벽)이 남아
있다. 이 추성은 삼국시대에는 마천성(馬川城)이라 하였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추성(楸城)으로 바뀌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잔여 산성의 주위는 약 1㎞에 이르며, 면적은 4.300㎡ 정도이고, 남쪽 성벽은 가로 30cm,
세로 20cm, 높이 35cm 정도 크기의 할석(割石)들을 사용하여 쌓았다.
축성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두 가지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하나는 가락국 양왕 때 신라의 공격으로부터
도피장소 겸 군마(軍馬) 훈련장소로 쓰기 위해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이는 인근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전 구형왕릉과 관련된 일련의 유적지로 보는 견해이다. 또 하나는 삼국시대 신라가 백제와의
싸움을 위해 쌓았다고 보는 설이 있다. 산성지역 위에는 신라군들 또는 화랑들의 군마 훈련장이었던으로 추정
되는 ‘말달린평전’이 있다. 또 석성의 통로이었던 동문과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성의 내부에는 군마 조련길을
비롯하여, 수비군의 초소 내지는 망루터로 보이는 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 또 서쪽 끝에는 “망바위”라 불리는
높이 약 10m 정도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함양,산청에서 마천을 거쳐 남원으로 이르는 도로의 상황을 살피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추성산성지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갖고 있다. 성의 서남 방향으로는 험난한 국골과 초암능선이 성의
위치를 숨겨 주고 있으며, 그 뒤에는 창암산 줄기가 외곽으로 둘러쳐져 있다. 또한 성의 동북쪽으로는 벽송사
능선이 막아주고 있고, 그 능선 너머에는 엄천강이 흐르고 있다. 사방에 트인 곳이라고는 오직 마천에서 운봉으로
나가는 길 뿐이다. 트인 길 끝으로는 신라와 백제가 수차례 혈전을 치렀던 운봉지역이 보인다.
지리산 북쪽, 현재의 남원 운봉지역과 아영면 아영고원에 위치한 아막산성지(阿莫山城址)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으로서, 서로 차지하기 위해 여러 번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격전장이었다. 즉, 남원지역은 백제
땅이었고, 함양은 신라 땅이었기에 국경 경계에 있었던 운봉과 아영지역은 공방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따라서 수도가 멀리 경주에 있었던 신라에서는 유사시 신라군들을 즉시 출동시킬 수 있는 이 추성지역에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주둔시키거나, 군사훈련장으로 쓸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624년경, 백제는 지금의 함양인 신라의 속함성(速含城)을 비롯한 5성을 공격하여 결국 추성을 비롯한 지리산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다.
추성산성지와 신라.백제 간 격전지 모산성(아막산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모산성에서는 AD 189년에서 624년까지 5세기에 걸쳐 신라 백제 간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여러 번 벌어졌다. 특히 제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 때에 이르러 무려 다섯 차례의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수많은 신라 군사들이 전사하였다. 당시 최고의 명장인 김서현 장군(김유신의 아버지)도 전쟁에 출전
하였지만, 백제 무왕이 보낸 8천여 명의 군사들에 의해 모산성이 함락되면서 함양의 마천과 수동, 산청의 생초 등
지리산 동북부지역이 백제한테 점령당하였다. 여러 번에 걸친 모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패한 원인 중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모산성이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너무 멀었던 것이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입장에서 모산성 전투에 신속히 군대를 출동시키기 위하여 운봉 지역 인근에 군사주둔지가 필요하였을
것인데, 그 군사 주둔지가 이 추성과 말달린 평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마니굴
최마이굴의 어원이 지역민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고 수소문을 한 결과 광점동에서 대대로 살아오다 지금은 부산으로 이주해서 병상에 계시는 한 어르신으로부터 당시 국골이 한바탕 난리가 났었고, 수 일이 지난 후 격전의 현장(최마이굴)을 둘러보러 갔더니 석벽 앞에 시체가 있어 부근에 대충 묻어주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간지 기사와 증언을 토대로 추정을 해 보면 석벽 앞의 시체가 ‘최덕만’이라는 자이며, 지역민들 사이에서 ‘최만이굴’이로 회자되고 불리어져왔음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한편 현장에서 사살된 ‘최덕만’과 생포된 그 일행들의 출신 지역 및 활동근거지를 보면, 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병단장:이현상)을 편성하여 지리산에서 무장투쟁을 벌여오던 동부 지리산 담당 제6연대(연대장:이현상) 소속의 빨치산 대원이었든 듯합니다. -퍼온글-
향운대(香雲臺1,348m)
지리산에는 큰바위가 있는 곳을 신성시 여겨 기도처로 활용하는데 그런곳을 "대"라고 한다. "대"는 높은 언덕이라는뜻을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 전망이 좋고 풍수지리상으로는 명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향운대(香雲臺)는 구름향기란뜻이니 즉 부처님의 말씀을 뜻한다. 이곳에는 미륵암이란 암자가 있었고, 암자에서 수행하였던 스님의 법명이 향운이었다는 설도 있다.
빈막골능선
지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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