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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세개골
    지리 산행기 2023. 10. 9. 11:58

    # 언제: 2023년 10월 07일 토요일

    # 산행지: 작은세개골, 선비샘골, 좌선대, 덕평남릉, 도덕봉, 원통암, 지리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1.22Km   06시간 00분

    # 산행루트: 의신(산악인의집) - 대성주막 - 원대성마을 - 작은세개골 - 도덕봉합수부 - 선비샘골합수부 -

                       선비샘골 - 토골합수부 - 선비샘골 - 좌선대사면길 - 좌선대 - 덕평남릉 - 오토바이능선갈림길 -

                        도덕봉 - 원통암 - 의신

     

     

    이 보게 친구 / 서산대사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 던가?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 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리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 에게 자네 것 좀

    나눠 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사람 마음 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 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 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 지는구나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 남이오
    죽음 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 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의신마을,義神

    ​행정구역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다. 덕평봉 남쪽 자락에 아늑하게 앉아 있다. 일제 강점기, 6.25동란 전후 상처가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평온한 마을이다. 또한 화개천 도로를 따라 벽소령 쪽으로 오르는 노선버스가 마지막으로 멎는 곳이다.

     

    마을 뒤편으로 패인 골짝은 빗점골이다. 이 골짝은 의신마을 아래서 대성골과 합해져 화개천이 된다. 또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오리정골, 천내골, 절골, 산태골, 왼골 등의 지류를 받아들이는데 이 지류는 주능선 토끼봉과 덕평봉 사이에서 흘러내린다.

     

    ​의신(義神), 신흥(神興), 영신(靈神)을 일컬어 삼신동(三神洞)이라고 한다. 현재 의신은 의신, 대성마을을 포함한 대성리, 신흥은 신흥, 목통마을을 포함한 범왕리, 영신은 덕평봉 일원과 대성골 상류를 말한다. 한일합병 이래 의병활동 근거지로 재난을 입게되자 이름을 바꾸었는데, 의신은 의신(義信)으로, 신흥은 신흥(新興)으로, 영신은 덕평(德平)으로 귀신 신(神)자를 없애거나 아에 고쳐썼다.

     

    의신마을은 하늘아래 첫 마을로 잘 알려진 곳으로, 지라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남해와 섬진강을, 북동쪽으로는 삼남지방을 연결하던 벽소령이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은, 마을의 역사를 이상향임과 동시에 전란의 땅으로 만든 배경이 되었다. 의신마을 주민들 사이에 전승되는 믿음 중에 하나로 “전란의 마지막 끝맺음은 의신마을에서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정작 전란의 사상자가 나지 않은 것은 이곳이 청학동이라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의신마을에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 후기인 임진왜란 이후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이후 정치사회적인 혼란과 생활상이 피폐해지면서 민중들이 지리산을 피난처로 인식하면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18세기 이후 지리산 골짜기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에 청학동이라는 장소에 대한 지리 정보와 장소 이미지는 지리산 유민(流民)들에게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때를 같이하여 도참사상이 유행으로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소문은 지리산 화개동 골짜기를 명당, 길지의 승지이자 “많은 사람이 살 만하고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萬人可活 三災不入]” 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하였다.

     

    화개동 골짜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의신마을이 명당, 길지의 청학동 마을이라는 이미지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재 살고 있는 일부 주민들에게까지 유지·존속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의신마을이 청학동의 실제이고, 마을 터는 ‘선학포란(仙鶴抱卵)’의 명당, 길지라는 주민들의 믿음이다. 의신마을은 동학 농민 운동과 항일 의병 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은 벽소령을 통해 하동과 함양, 남원 등지로 이어지는 고개 길목에 입지했기에 전란 시에는 혁명과 의병 활동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도덕봉(검각)

    1611년 유몽인 선생은 경유한 도덕봉을 이백(李白)의 촉도난(촉나라로 가는 험한길)에 나오는 검각(劍閣)을 빌려와 표현 하였다. 한 사람의 군사가 능히 10,000명의 적을 막아낼 정도로 요새같은 험난한 곳을 말한다.

    처음에 유몽인의 하산길을 큰세개골로 해석했지만 유람록에서 언급했던 김일손 선생의 하산 경로는 영신사에서 서쪽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고, 검각(劍閣) 다음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 의신사 직전에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는 내용으로 보아 도덕봉(검각)을 따라 내려갔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선비샘 아래로 근대까지 상,하덕평 마을이 있었는데 옛사람들은 청학동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서산대사가 의신에 있을때 비밀리에 승병 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1611년 유몽인이 기록한 유두류산록 국역본에서 영신사~의신사 구간의 기록을 발취한 것이다.

    1611년 4월 5일 갑술일(양력 5월16일)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높이 솟은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은 위에 있어,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곳에 있고 종들은 높은 곳에 처하게 되었다.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인데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 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영신암에서 (서쪽으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더 험하였다.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 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우리의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원통암(圓通庵)

    원통암은 지리산 덕평봉 아래 해발 600m 고지에 있다. [진양지]에는 옛날 의신사 일대의 31개 암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원통암은 의신사의 수많은 산내 암자 중의 하나였다. 많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이다.

     

    원통암이 자리한 곳에는 뒤로는 덕평봉을 위시해 벽소령, 칠선봉, 영신봉 등 지리산의 주능선이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좌우로 화개골의 산자락들이 겹겹으로 펼쳐지고, 그 끝으로 백운산이 보인다. 백운산은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 땅에 있지만 이곳에선 마치 지리산 연봉처럼 보인다. 암자에서 보면 섬진강으로 나뉘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구분은 없어지고 하나의 산자락이 된다. 원통무애다. 내남 구분 없는 통함이다.

     

    '원통무애(圓通無碍)'는 불교의 '십무애' 중의 하나이다. 암자 이름인 '원통(圓通)'은 '원통무애'에서 나온 말이다. [삼가귀감]을 통해 불가, 유가, 도가의 삼교융화를 원했던 서산 대사의 행적이 곧 원통이요 무애다.

     

    청허(서산) 대사의 행적을 적은 제자 경헌(1544~1633) 스님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15세에 장흥 천관사에서 출가하여 경․율․논을 섭렵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휴정의 문하에서 수행했다. 임진왜란 때 휴정과 함께 승군을 모집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공로로 선조가 좌영장에 명했으나 사양하고, 또 선교양종판사에 명했으나 역시 사양했다. 묘향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등에서 수행했으며 저서로는 [제월당대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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