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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당골(석남사터,관음암터)지리 산행기 2023. 12. 17. 10:50
# 언제: 2023년 12월 16일 토요일
# 산행지: 장당골,석남사터,관음암터,안장바위,치밭목능선, 눈산행...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거리: 17.8km 07시간33분
# 산행루트: 내원사(덕산사)주차장 - 우량기 - 장당골보호소(Back) - 보살나무골능선 - 석남사터
관음암불상터 - 안장바위 - 치밭목능선 - 내원사(덕산사)주차장
모든 갈망을 버려라.
입술 위에 곰팡이가 피도록 하여라.
스스로 완전히 한 가닥의 흰 실과 같이 하여라.
이 일념을 영원히 고착시켜라.
스스로 차갑고 생명 없는 식은 재처럼 되어라.
지 리산 내원사(內院寺)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와 내원리, 장당리의 경계에 있는 절로 1300여년전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국사(無染 : 801~888)가 창건하고 절 이름을 덕산사(德山寺)라고 하였으며, 이 후 10여개의 암자를 거느닐 정도로 번창하였으나 500여년전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전소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을 방치되어 오다가 1959년 3월경 원경(圓鏡)스님이 절터를 찾아 복원한 절로 이 때 절 이름을 내원사로 변경하였다.
덕산사(德山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기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959년에 중건되어 내원사로 불리웠다가 2021년 3월 덕산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심우당(尋牛堂)·비로전(毘盧殿)·산신각·요사채 등이 있으나 건물의 규모는 한결 같이 작다. 비로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2016년 국보로 지정된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1,2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석불은 이 절에서 30리 밖에 떨어져 있는 보선암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대좌 중대석에서 불상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영태이년명 납석제 사리호(永泰二年銘蠟石製舍利壺)’가 발견되었다. 또한 1992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앞의 산청 덕산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이다.
장당(長堂)골
장당(長堂)골은 그 이름처럼 골짜기가 길고 깊다. ‘장당’이란 이름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장수가 태어난 집이 있었다고 하여 원래는 ‘將堂’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또 지난날에는 이 골짜기가 큰 가람인 내원사를 비롯하여 암자가 많았던 만큼 불가에서 쓰는 용어인 ‘長燈’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음운변화하여 장당골로 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부처 앞에 불을 밝히거나, 밤새도록 등불을 켜두는 것을 장등이라고 한다. 또 대문 밖과 처마 끝에 매달아 놓고 밤새도록 켜는 등을 장명등(長明燈)이라고 한다. 이 골짜기는 아주 길고 깊어 띄엄띄엄 떨어져 있던 집집마다 어둠이 덮이는 밤중에는 장명등을 내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바깥 세상과는 완벽하게 차단된 곳이 이 장당골이다.
장당보호소 - 장당보호소는 경상대학교 연습림 관리 산막이다.
철거되어 잔해만 남아있다.
2021년 지리 산행때 장당보호소
석남사(石南寺)터
치밭 목 능선 자락 해발 750~800m 사이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석남사는 신라 때 조성된 절로 밝혀졌는데, 장당골 지류인 보살나무골 최상류부 반경 150여m 이내에 산재한 절터의 흔적으로 볼 때 상당한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주변을 살펴보니 석탑의 흔적을 비롯해 기와조각, 주춧돌, 우물터, 석축 등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특히 미려한 석탑의 잔해물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전해져오는 말로는 법계사 석탑을 닮은 3층 석탑이 근세까지 건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듯 기단석과 옥개석, 탑신 등은 부서져 여기저기 나뒹군다. 사리함을 보관했던 탑신 홈에는 사리함 대신 물만 가득 고였다. 제대로 보존돼 있다면 최소 보물급인데, 지금이라도 주변 파편들을 모아 복원할 수는 없을까.
그곳이 석남사지임을 확신하게 된 이유는 엄청나게 넒은 터에 널려있는 기와조각은 말할 것도 없고 통일신라 시대 대 사찰의 석물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석탑의 잔재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널려있는 기와조각
폐사지의 옛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절터의 면적은 대략 4~5천 여 평은 되며 여타 폐사지와는 또 다른 형태의 석축들이 거의 원형으로 띠를 두른 듯 하고 있으며, 산지 경사를 이용하여 여기저기 배치한 건물지의 흔적들로 미루어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며
해체된 삼층석탑의 석물 및 우물터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우물터
발견된 사리합의 명문을 토대로 영태 2년 (766년) 에 만들어진 석조비로자나불의 조성시기와
시대적 추정이 가능한 석탑의 양식으로 창건 시기를 추정 한다면 대략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중기에 창건된 절이 아닌가 가늠해 볼 수 있다.
흔히들 신라사찰 지리산 입산 제 1호라고 하는 화엄사의 창건연대를
경덕왕 (742년~765년) 재위 기간이라고 하니 석남사의 역사 또한 화엄사 창건 연대와 동시대인 셈이다.
*산지 사찰을 축조하기 위하여 쌓은 석축
한편 폐사된 시기를 추정해 보면
1633년도 발간된 진양지 기사에도 이미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웃한 내원사나 대원사 등은 조선시대 전후기에 유생들의 지리산 기행록에 흔히 등장을 하지만 석남사는 전혀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서는 아마 고려대에 이미 폐사가 된 게 아닌 가 추정이 된다.
그러나 188칸의 위용을 자랑했다던 사라진 신라대찰 엄천사가 주택가와 농토로 바뀌어서 고찰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것과 지장사가 수두룩한 기와 파편에 비해 석물 하나 없는 것에 비하면 장당골 깊은 골짝에 잠자고 있던 석남사지 그 곳에는 신라의 흔적과 숨결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퍼온글-관음암(觀音巖)터 - 국보 233-1호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던 관음암 불상터.
천년을 지켜온 관음암 석불(국보 제233-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불의 좌대에서 나온 사리함 명문에는 석불 조성 경위가 밝혀져 있다.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66년)에 법승과 법연이라는 두 승려가 죽은 ‘두온애랑’ 화랑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불상을 조성하고 무구정광다리니경과 함께석남암수 관음암(觀音巖)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1250년 전, 신라인들은 낭도 무리를 이끌고 지리산 산중훈련이나 인근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그를 화랑의 표상으로 삼아 이곳에 불상을 세우고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주변 정황을 살펴볼 때 관음암(觀音巖)은 암자가 아니라 불상이 앉았던 거대한 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불상은 노천에 안치했던 것 같다.불상은 1947년 이씨 형제가 발견할때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벼랑끝에서 노천풍상을 견뎌내며 굳건이 지리를 지켜왔다.
영태 2년 병오 7월 2일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스님이 함께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豆溫) 애랑(哀郞)의 원(願)을 위하여
석비로자나불(石毘盧遮那佛)을 조성하고 안에 무구정광다라니(無垢淨光陀羅尼)를 함께 넣고
석남사(石南寺) 숲 깊은 곳에 있는 관음암(觀音巖)에 둡니다
원컨대 이것은 두온 애랑의 영신(靈神)이나
두 스님이나
혹은 이것을 본 사람이나
비로자나불을 향하여 정례(頂禮)하고
멀리서 들은 사람이나 기뻐하는 사람이나
(불상의) 그림자를 지나는 무리나
불어서 지나가는 바람이 지나간 어느 곳에 일체중생이나
일체 모든 삼악도(三惡道)의 업(業)이 소멸하여
스스로 비로자나임을 깨닫고 세상을 떠나기를 서원(誓願)합니다.
영태이년명비로자나불조상기(永泰二年銘毘盧遮那佛造像記)
천년을 지켜온 관음암 석불(국보 제233-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안장바위
치밭목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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