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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내 인생 내 이야기 2024. 4. 4. 18:25
# 언제: 2024년 03월 30 일 - 04월 03일 4박5일
# 시작: 2024년 03월 30일
# 출발: 첫날 광주광역시 에서 인천국제공항
# 도착: 중국 시안
# 어디: 중국 서안(화산,숭산,운대산,) 트래킹, 진시황릉(병마용갱,소림사)순례
# 숙소: 서안 하이테크로드 홀리데이안 익스프레스 호텔(4성급)
중국 시안(西安)
서역人 왕래한 무역 중심지 - 당나라 땐 세계 3대 도시
1.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 있는 명나라 시대의‘종루’(종을 달아 두는 누각). 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중국 내 종루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2.시안의 성벽.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거예요.
3.진나라 진시황 때 만들어진 흙으로 빚은 병사와 말 병마용갱(坑·구덩이)은 진시황릉과 함께 시안의 상징적인 역사 유적지
# 진시황도 도읍으로 삼아
예로부터 시안 일대는 산맥과 고원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했고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 덕에 인구와 물자가 풍부했어요. 이 때문에 과거 중국에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차지해야 할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지요. 이런 요충지를 제일 먼저 알아보고 이 지역에 수도를 세운 중국 왕조는 주(周)나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입니다. 기원전 11세기 시안의 서북쪽인 호경(鎬京)을 도읍으로 정해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지요. 주나라는 기원전 8세기 말 이민족의 침입으로 도읍을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기는데요. 이때를 기점으로 주나라는 쇠락하고 여러 국가가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가 시작됩니다.
이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가 기원전 4세기 시안의 북서쪽에 있는 웨이수이강의 북쪽 기슭 함양(咸陽)을 도읍으로 삼으며 시안이 다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통일 후 제1대 황제에 오른 진시황(재위 기원전 247년~기원전 210년)은 함양으로 약 12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도읍의 영역을 남쪽으로 더 확장했어요. 진시황이 자신이 묻힐 무덤으로 만들기 시작한 진시황릉과 흙으로 만든 병사와 말이 대규모로 묻혀 있는 병마용갱(坑·구덩이)은 시안의 상징적인 역사 유적지랍니다.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어요.
진나라가 농민 반란으로 멸망한 뒤 중국을 재통일한 한(漢)나라의 초대 황제 고조 유방은 함양이 있던 자리에 수도 장안(長安)을 세웠어요. 장안은 ‘영원히 편안하다’라는 뜻이에요. 이후 장안은 오랫동안 중국 도읍지의 대명사가 되었답니다. 한나라의 제7대 황제인 한 무제 때는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장안을 통해 본격적인 유라시아 문화 교류가 이뤄졌어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인도의 불교도 이때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들어왔다고 해요.
# 당나라 때 가장 번성해
6세기 말 수(隋)나라 때 장안은 대흥(大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수나라 초대 황제 수 문제의 작위였던 ‘대흥군공’에서 따온 명칭이지요. 대흥은 장안의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역에 새롭게 건설되는데요. 도시 전체가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바둑판 모양의 격자무늬로 길을 낸 계획도시로 세워졌어요. 북쪽에는 황제가 거주하는 곳인 ‘황궁(皇宮)’을 짓고 궁과 성벽을 이어주면서 중심축이 되는 큰길인 주작대로를 냈어요. 모든 길은 이 대로로 통했지요.
당(唐)나라 때는 도시 명칭이 다시 장안으로 바뀌어요. 그리고 도시의 규모는 더욱 커지는데요. 동서 9.5km, 남북 8.5km 규모였어요. 장안을 둘러싸고 세워진 바깥쪽 성벽의 높이는 5m가 넘었고 가장 넓은 길의 폭은 약 150m였습니다. 장안성은 동아시아 도시 구조의 근본이 됐어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과 일본의 헤이조쿄(나라)도 장안의 구조를 모방해 건설됐답니다.
장안은 당나라 때 화려하면서도 개방적인 국제 도시로 번성해요. 많은 서역인들이 왕래하며 서역의 문물을 전파했죠. 장안성 안에서는 불교·도교·기독교·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의 사원을 볼 수 있었어요. 장안은 최전성기 때 인구가 1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번영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이스탄불),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와 함께 당시의 세계 3대 도시로 꼽힙니다.
# 오늘날 명칭은 명나라 때 지어져
하지만 당나라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장안도 여러 변란(變亂)을 겪으며 파괴됩니다. 특히 9세기 말에 일어난 10년간의 농민 반란 ‘황소의 난’으로 완전히 황폐화돼요.
당나라 멸망 후 세워진 송(宋)나라는 10세기에 개봉(開封)을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는데,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자 임안(臨安·지금의 항저우)으로 천도(遷都·수도를 옮김)합니다. 그러면서 양쯔강 이남 지역인 강남 지방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릅니다. 시안은 자연스럽게 쇠퇴기에 접어들었어요. 하지만 이후에도 장안은 실크로드 거점 상업 도시로서의 역할을 계속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元)나라를 13세기에 방문했던 베네치아의 모험가 마르코 폴로가 장안을 “번성하는 무역의 중심지”로 묘사했거든요.
한족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 왕조 명(明)나라가 건국된 후, 14세기 장안은 ‘시안(西安)’이 돼요. ‘서쪽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지요. 오늘날 남아있는 시안의 성벽은 이때 구축된 것이라고 합니다.
#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 감금됐던 곳
중국 현대사에서 시안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적이 있어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해 점령하는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일본과 중국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어요.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에서 공산당을 몰아내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내전을 멈추고 항일 투쟁을 해야 한다는 중국 내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죠.
1936년 장제스는 시안에 파견돼 있던 동북군의 지휘관 장쉐량이 공산군 토벌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를 독려하기 위해 시안을 방문했어요. 그런데 장쉐량은 시안에 온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 투쟁을 요구합니다. 이를 ‘시안 사건’으로 불러요. 장제스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상이 이뤄지며 1937년 제2차 국·공 합작이 성사됩니다.
[장안의 화제]
세간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얘깃거리를 묘사할 때 ‘장안의 화제’라는 말을 쓰고는 하는데요. 이는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수도였던 장안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시안의 옛 이름인 ‘장안’은 중국에서 수도를 이르는 대명사로 널리 쓰였거든요. 수도에서 화제가 될 만큼 큰일이라는 의미지요.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유명하다”고 생각하니 그 뜻이 훨씬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 [秦始皇陵兵馬俑坑]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병사와 말의 모형을 흙으로 빚어 실물 크기로 제작한 병마용.이는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
병마용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예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 건설에 착수한 진나라 최초의 군주 시황제가 묻힌 곳이다. 그는 죽음에 대비해 50㎢에 달하는 무덤 부지와 그 속에 묻을 부장품들을 마련해두었다. 1974년 3월 농부들이 처음으로 지하에 묻힌 방을 발견했다. 뒷날 고고학자들은 6,000구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사와 병마 도용을 찾아냈다. 실제의 마차, 철제 농기구, 청동 및 가죽 재갈, 비단·아마·옥·뼈 등으로 만든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활·화살·창·칼과 같은 무기들과 13가지 성분을 합금한 주형도 출토되었다. 3개의 방이 더 발굴되었는데, 그중 한 방에는 1,400개가 넘는 도용이 더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 하나의 방에는 진군의 정예 지휘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68개의 상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빈방이었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병마용 파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200년 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진시황릉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병마용이 묻혀 있던 갱은 진시황릉에 딸린 180개 부장 갱의 일부로, 진시황릉의 가장 바깥 둘레에 있는 지하 갱에서 흙으로 구운 병마용이 대량 출토되었다. 병마용은 진시황의 사후 세계를 지키는 병사들이었다. 놀랍게도 출토된 병사들 얼굴이 저마다 다르고, 실제 사람처럼 키가 170~180cm에 달했다. 예술성으로 따져도 현실주의를 완벽하게 따른 걸작이었다.
가장 먼저 발굴된 1호 갱에만 6,000점의 병마용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 완벽하게 복원을 마친 1,050여 점의 병사가 발견 당시의 대형으로 서 있다. 2년 뒤인 1976년에 2호와 3호 갱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병마용 갱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병마용 박물관을 관람할 때는, 갱이 발굴된 순서와 반대로 3호 - 2호 - 1호 갱 순서로 둘러보면 더 흥미롭다. 1호 갱에서 발굴된 병마용이 가장 많고 웅장해서 대미를 장식하기에 좋다.
3개의 갱에서 발굴된 테라코타 병사들과 청동 전차 및 무기를 전시해 놓은 문물 전시관도 빼놓아서는 안될 볼거리다. 특히 1980년에 진시황릉 묘역 부근의 봉분에서 발굴한 청동 마차 2량이 볼 만하다. 진품은 아니지만 진시황이 내세에서 사용할 용도로 만든 전차가 아주 멋지다.제 1호갱
2호 갱에서 남쪽으로 20m 떨어져 있다. 면적이 14,260㎡나 되어서 거대한 실내 운동장을 방불케 한다. 1,050여 명의 병사와 24마리 말이 네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맨 앞에 210여 점의 테라코타 병사들이 전위 부대를 형성하고, 그 바로 뒤에 11개 집단으로 나뉜 38열의 병사들은 보병과 마차나 말을 끌던 차부다. 병사들은 대부분 갑옷 차림으로 한 손에 무기를 쥔 자세인데, 실제로 대량의 청동 검과 창촉이 병사들 발밑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나무로 만든 손잡이 부분이 썩어 없어지면서 바닥에 흩어진 것이다. 1호 갱 지하에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병마용 5,000여 점이 잠들어 있다. 원래 병마용은 발굴 당시에 머리는 검은색, 얼굴은 연한 황색, 갑옷은 청색 등으로 채색된 상태였는데,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색상이 날아가 버렸다.
제 2호갱
병사들의 움직임이 3개의 갱 중 가장 역동적이다. 기병은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을 몰고, 한쪽 무릎을 꿇은 궁수가 전방에 포진했다. 전차는 오른쪽 측면에, 기병은 왼편을 맡았다. 중앙에는 보병이 직사각형 대형으로 분산돼 있다.
제 3호 - 4호 갱 순례 했는지 기억이 없음...ㅎㅎㅎ
# 여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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