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숭산트레킹,소림사순례 - 01내 인생 내 이야기 2024. 4. 5. 10:35
# 언제: 2024년 03월 30일 - 04월 03일 4박5일
# 시작: 2024년 03월 31일
# 출발: 둘째날 시안 (서안역)
# 도착: 낙양역 도착(등봉이동) - 정주 숙소
# 어디: 숭산트레킹(호한파,남천문,상황채,언쳔조교,현공잔도,제자구), 소림사순례
# 숙소: 정주 풍락원 호텔(4성급)
낙양(뤄양,洛阳) 아홉 왕조의 수도
황하의 상류, 허난 성의 뤄양은 기원전 770년에 처음 주나라의 수도였습니다. 그 뒤 후한과 위 · 진 · 조 삼국 시대의 위나라, 그리고 서진과 북위, 수나라 때 양제와 무주, 오대 때의 후당 등 아홉 왕조의 수도가 되었지요. 그래서 흔히 구조 고도(九朝 古都), 즉 아홉 왕조의 수도라고 불립니다. 특히 후한 시대부터 당나라까지는 장안(지금의 시안)이 정치 행정의 도읍지였다면, 뤄양은 당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한 국제적인 도시였어요.
(삼국지)라고 읽어본 적이 있나요? 뤄양은 바로 그 흥미진진한 (삼국지)의 후한 말기 주요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었답니다. 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 황제, 당나라 고종 임금의 비로 들어와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던 측천무후와도 인연이 있어요. 측천무후가 당시 수도였던 장안보다 오히려 애착을 가지고 자주 왕래하면서 불사 를 일으킨 도시가 뤄양이거든요.
그뿐인가요?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고전 시인으로 칭송받는 이백과 두보, 백거이도 뤄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예술의 꽃을 피웠어요. 그리고 유교에 철학을 담아 새로운 학풍을 만든 주자학이라는 중요한 학문이 생겨난 곳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뤄양은 중국 내에서도 경제와 예술과 사상이 번성하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문화 도시예요.
금나라 때까지는 왕이 살았던 도시라서 시내 곳곳에 유명한 고적들이 많아요. 먼저 왕성 공원을 둘러볼까요? 왕성 공원은 주나라 때 평왕이 세운 왕궁이 있던 터에요.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한 시대의 벽화가 그려진 무덤이 지하에 보전되어 있고, 전실과 후실에 해 · 달 · 별 · 신선의 모습을 담은 신선상 등의 색채화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또 뤄양 북쪽 교외 지대에는 전한 시대부터 북송 때까지의 대표적인 고대의 무덤을 옛날 모습대로 다시 만들어 놓은 뤄양 고묘 박물관이 있어서 중국의 장례 문화를 엿볼 수 있어요. 당삼채 발굴품으로 유명한 뤄양 박물관도 있지요. 당삼채란 당나라 때 만들어진 도자기로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 걸 말해요. 무척 아름다워서 우리나라나 일본 같은 주변 국가는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 멀리 서역까지 전해졌지요.
뤄양 시내와 중국 3대 석굴 가운데 하나인 룽먼석굴(용문석굴) 사이에는 관림이 있어요. 이곳은 관우의 사당이 모셔진 곳이에요. 관우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사당은 중국 여러 곳에 있지만, 이곳 관림은 관우의 무덤이 함께 있는 사당이라서 특별하지요.
(삼국지)에서 관우는 형주 전투에서 오나라의 왕 손권의 계략에 사로잡혀 끝내 머리를 베이고 맙니다. 하지만 손권은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의 복수가 두려웠어요. 그래서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서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지요. 관우의 시신을 확인한 조조는 손권의 잔꾀를 알아차리고는 고민했어요.
“이건 분명 나를 모함에 빠뜨리려는 손권의 술수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을까······.”
그러다가 신하 사마의의 건의로 오히려 후하게 관우의 장례를 치러 주었어요. 조조가 몸소 상복을 차려입고 왕족의 예로 국장의 절차를 다한 다음, 침향나무에 관우의 형상을 새겨 머리와 함께 뤄양성 남문 밖 나지막한 산언덕에 매장하고 크게 무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관림이에요.
관림에는 최초의 관우 사당을 비롯해서 머리의 무덤 그리고 위풍당당한 관우상과 묘비 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근처에 있는 관우 기념관에는 (삼국지)의 역사적인 장면 등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길이가 2미터나 되는 관운장의 그 유명한 칼, 청룡 언월도가 남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학문과 덕의 성인으로 공자를 모셔, 그의 무덤을 ‘공림’이라 하고, 무예와 의로움의 성인으로 관우를 숭배하여 그 무덤을 ‘관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에요.이제 뤄양의 또 다른 유적 룽먼석굴을 찬찬히 살펴볼까요. 석굴이란 바위에 자연적으로 뚫린 굴이나 일부러 뚫은 것으로 불교도들은 그 안에 불상을 새겨 놓거나 모시고 부처님에 대한 기도의 마음을 담았어요. 우리나라에는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이 유명하지요.
룽먼석굴은 둔황의 둔황석굴, 다퉁(대동)의 윈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의 하나로 꼽히고 있어요. 493년, 북위가 다퉁이란 곳에서 이곳 뤄양으로 도읍지를 옮길 때 윈강석굴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 뒤 위나라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4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불상을 모실 굴을 파고 불상을 만드는 석굴 작업을 이어 왔던 것이지요.
룽먼산 등 산의 바위에 동굴 1,352개를 팠어요. 동굴에는 불상 9만 7,300개를 새겨 놓았고, 각종 비석 3,600개, 불탑 40여 좌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답니다.
또 룽먼산에는 당나라 때 측천무후가 직접 만들었다는 봉선사라는 절이 유명해요. 갈 지(之)자 형으로 구부러져 있는 수많은 계단을 오르면 널따란 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에 거대한 불상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안치된 불상의 모습이 인자하면서도 아름다운데, 룽먼석굴 불상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지요. 측천무후가 그 모델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룽먼석굴 불상들 주위에는 작은 절을 짓고 승려들이 불교 공부를 했어요. 신라의 승려들도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하고 불상을 만드는 데도 참여한 흔적도 있어요. 한 석굴 입구에 ‘신라 불감’이라고 써 있거든요. 우리나라와 중국이 불교를 교류한 것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이에요.문명 이야기 여행 - 콜럼버스보다 먼저 지구를 돈 정화 원정대
우리는 세계 최초로 바다를 통해 다른 대륙의 다른 세계를 만난 사람이 콜럼버스라고 알고 있습니다. 1492년의 일이지요. 그러나 중국 명나라 때의 정화 장군은 콜럼버스보다 80여 년 앞서 인도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 대륙까지 원정을 떠났어요.
명나라의 왕 영락제는 보다 넓은 세계의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무역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1405년부터 정화로 하여금 200여 척의 크고 작은 배와 2만 7,800명에 이르는 사람으로 원정대를 꾸리고 떠나게 했지요. 정화는 이슬람교를 믿었기 때문에 중국 서쪽에 널리 퍼져 있는 이슬람 국가들과 교역하기 알맞은 사람이었거든요.
총 일곱 번에 걸쳐 정화 원정대는 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기나긴 원정을 해냈고, 많은 나라에 명나라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답니다.정주(정저우) 중국 철도교통의 심장부
1954년 이래 허난 성의 성도이며, 지구급(地區級) 시이다. 대평원으로 진입하면서 넓어지는 황허 강[黃河] 남쪽 유역, 슝얼 산맥[熊耳山脈] 동쪽 끝에 있다. 이 도시는 남북으로 타이항 산맥[太行山脈]과 허난 성 서부 산맥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길과, 동서로 황허 강 서안을 따라 놓인 길이 교차하는 곳에 있다.
1950년대 이후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이 지역이 신석기인들의 주거지였으며, BC 1500년경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은(殷)나라의 청동기문화가 성곽도시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저우 외곽에서는 거대한 공공건물의 유적뿐 아니라 작은 주거단지도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를 은의 수도였던 오(隞)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은나라는 계속해서 도읍을 옮겼는데 BC 13세기 무렵 오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 듯하나 이곳에는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했다.
정저우에서는 주대(周代)의 묘지도 발견되었다. 서주(西周:BC 1111~771) 시기에 이 지역은 줄곧 관(管)씨 가문의 봉토였다. 여기에서 이름을 따와 BC 6세기 후반부터 관성현(管城縣)이 되었다. AD 587년 관주(管州)가 설치되면서 이곳은 주청소재지가 되었다. 605년에 비로소 정저우로 불리게 되었으며, 그후 이 이름이 계속 쓰였다.
수(581~618)·당(618~907)·북송(960~1127) 시기에 이곳은 아주 중요한 도시였다. 당시 정저우는 북서쪽으로 황허 강과 연결되는 신볜 운하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이 부근에 하음(河陰)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곡창단지가 생겨 서쪽으로는 도읍지 뤄양[洛陽]과 장안(長安)에, 북쪽으로는 변경의 군대에 곡물을 공급했다. 그러나 송대에 도읍이 동쪽에 있는 카이펑[開封]으로 옮겨가자 이 도시는 중요성을 상실했다.
1903년 베이징[北京]과 한커우 철도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고, 1909년에는 룽하이[隴海]철도의 첫번째 역이 놓여져 동쪽으로는 카이펑, 서쪽으로는 뤄양과 연결되었다.
이 철도는 나중에 동으로는 해안지대인 장쑤 성[江蘇省] 롄윈강[連運港], 서로는 산시 성[山西省] 서부와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까지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정저우는 주요 철로 교차지가 되었으며, 부근에서 생산되는 면화·곡물·땅콩과 기타 농산물의 집산지가 되었다. 1923년초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는데, 이 파업은 철로를 따라 크게 확산되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14층 쌍탑(雙塔)은 이 파업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다.
중일전쟁(1937~45)이 벌어지고 있던 1938년, 퇴각하던 국민당 군대가 시가지에서 북동쪽으로 32km쯤 떨어진 황허 강 제방을 폭파시켜 상당한 지역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이 무렵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장설비들을 내지로 옮겼다. 1949년 공산당이 중국의 패권을 차지했을 때 정저우는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였으나 산업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다.
이 도시는 인구가 조밀한 목화 재배지역의 중심지였으므로 곧 산업도시로 발전했다. 주로 북동풍이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매연이 바람과 함께 날아가도록 하기 위해 공장은 서쪽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현재 정저우에는 면방직·방적·직물기계·제분 공장과 담배 및 궐련 공장들, 그밖에 여러 종류의 식품가공공장이 있으며 석탄도 부근에서 채굴된다.
기관차와 철도차량을 수리하는 공장과 트랙터 조립공장, 화력발전소도 있다. 공업 발전으로 인구도 크게 증가했는데, 유입인구의 대부분은 북방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이었다. 예전에는 짙은 돌개바람이 자주 불어와 모래를 날리게 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60㎢가 넘는 시 전역에 나무들을 심어놓았다. 1972년 배수로 시설과 양수장이 세워져 주변 농촌의 관개를 돕고 있다.
중국의 5대 명악(名岳)인 숭산(嵩山)
日出嵩山拗 숭산위로 해가 뜨면
晨鍾驚飛鳥 새벽 종소리가 새들을 놀라게 하고,
林間小溪水潺潺 숲 속의 작은 개울물은 졸졸 흐르며,
坡上靑靑草 산기슭에 푸른 풀이 밝게 빛나네
이것은 숭산의 절경을 묘사한 유명한 시이다.숭산(嵩山)
숭산(嵩山)은 중국의 5대 명악(名岳)중의 하나로 중웨산(中岳山)이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와이팡산(外方山)·타이스산(太室山)·쑹가오산(嵩高山) 등 많은 별칭이 있었다.
허난성 덩펑시 북쪽에 있는 산으로 타이스산·싸오스산(少室山) 등 모두 72개의 산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남성 등봉시(登封市) 북쪽으로 높이는 1,440m, 동서길이는 60km로 최고봉은 위자이산(御寨山)이며 해발 1,512m이다.
산 중에는 세 첨봉이 있는데 중간을 쥔지봉(峻極峰), 동쪽을 타이스봉(太室峰), 서쪽을 샤오스봉(少室峰)이라고 한다.
중국 5대 명산, 즉 5악(岳)의 하나로 꼽히며, 당(唐)나라 때인 688년에 신악(神嶽)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산중에는 승려와 도사(道士)의 수업도량(修業道場)이 되었던 사찰이 있다.
그 중 샤오스봉 북쪽 기슭의 샤오린사(少林寺)는 선종(禪宗)의 시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면벽 9년의 좌선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황폐해질 때마다 재건하여 후세까지 선종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타이스봉 서쪽 기슭의 쑹웨사(嵩岳寺)는 수당(隋唐)시대에 북종선(北宗禪)의 중심이었던 절이다.
이 절의 12각 15층의 숭악사탑(嵩岳寺塔)은 ‘화하제일탑(華夏第一塔)’이라고도 불려지는데, 북위(北魏) 효 명제 정광연간
(520년)에 지어진 것으로 탑의 높이는 40m이며,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벽돌 불탑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중웨묘(中岳廟)·쑹웨사탑(嵩岳寺塔)·한(漢)나라 때의 쑹산싼췌(嵩山三闕)·쑹양서원(嵩陽書院)·관싱대(觀星臺)
·파왕사(法王寺) 등이 있다.
소림사, 少林寺 세계 문화유산
중국 선종 불교의 본산이자 소림 무술의 발상지
495년 북위 시대 때 불교 사찰로 문을 열었다. ‘사오스 산의 울창한 숲속에 있는 사찰’이라는 뜻에서 소림사라 부른다. 527년 인도에서 온 달마 대사가 주지로 정착해 선종을 적극 전파하면서 소림사는 ‘중국 선종의 본산’이 되었다. 달마 대사는 부리부리한 눈과 다소 험상궂은 표정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서 9년간의 면벽 수행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불교의 큰 스승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소림 무술 ‘쿵푸’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온종일 면벽 수행을 하는 승려들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동물의 5가지 대표적인 행동’을 본떠 만든 운동 동작이 소림 무술의 시초다. 수나라 때 이르러 불교가 전국적으로 성행하면서 소림사는 북방 최대의 선종 사원이 되었다.
소림 무술이 명성을 날리게 된 건 당나라 때다. 당나라를 건설할 때 이세민은 활거 세력들과의 다툼에서 무술을 연마한 소림사 승려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이세민은 태종으로 즉위하자 소림사 승려들에 한해서 살계를 풀고 육식과 음주를 허가했다. 뿐만 아니라 승병을 전문적으로 훈련시키고 자체적으로 병영을 설치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서 소림 무술이 부흥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무술을 연마하고자 모여든 승려가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소림 무술은 송나라 때 체계를 완벽하게 갖추면서 ‘소림파’로 불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소림 무술은 전폐 위기를 겪었고, 1999년에는 승려가 4명에 불과했다.빛바랜 역사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가던 소림사에 심폐소생술을 성공적으로 해낸 이는 해외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온 스융신(释永信)이란 방장이다. ‘쿵푸(功夫)의 발상지’를 키워드로 내세워 해외 비즈니스에 적극 나섰다. 세계 쿵푸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하고 할리우드와 공동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등 홍보에 만전을 기했다. 지금은 300여 명의 승려가 예불을 드리는 불교 사원이자 무술 연마를 꿈꾸는 수련생들이 대거 모여들어서 새로운 중흥을 맞이했다. 2010년에는 ‘천지의 중심(天地之中)’이라는 테마로 소림사, 숭양 서원, 중악묘가 공동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일각에서는 사원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다는 비판이 거세다.
참선하는 선종 불교의 고유한 정신을 망각하고 상업화에 짙게 물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스토리텔링의 대성공이라 할수도 있다. 산문, 종루, 고루를 비롯해 사원 내부에 장경각(藏经阁), 대웅보전(大雄宝殿), 천불전(天佛殿), 면벽영석(面壁影石)이 있다. 그중 유심히 봐야 할 곳은 천불전이다. 실내의 정교한 벽화와 무술 수련의 결과로 바닥에 움푹 파인 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입장권에 포함된 소림사 무술관에서의 무술 관람, 탑림이 가장 흥미롭다.소림 무술
소림무술이 처음 창시된 시기는 수나라 말기에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과 싸울 때 13명의 소림사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이세민은 당나라의 황제 태종이 된 뒤 소림사에 크게 보답했다. 그 후 홍건적들이 습격하여 불상을 파괴할 때 불목하니로 있던 긴나라왕(緊那羅王)이 불쏘시개 들고 홍건적을 다 때려잡은 것이 시발이라고 한다.
실제로 소림 무술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시기는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때 유대유(兪大猷)의 <정기당집(正氣堂集)> 등 일부 사료에 소림 무술이 등장한다. 정기당집에 따르면 유대유가 소림곤법(棍法)이 창시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소림사를 방문했으나 이미 소림사의 무술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에 승려 2명을 군대로 불러서 3년간 곤법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소림사의 대표무술이 곤법이 되었고, 소림사는 외부의 무술들을 받아들여서 양적 성장을 하면서, 소림사가 총괄 지휘소 역할만 하고 각 말사에서 알아서 적당한 방법을 선택하여 수련했기 때문에 당연히 소림사 사내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협소설에서 소림사만 72종 절예 운운하면서 양으로 때우는 경향이 보여주는 것도 이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탑림(塔林)
고승들의 사리탑이 한자리에 모여서 숲을 이뤘다. 면적 14,000㎡에 고목처럼 우뚝 솟은 탑 숲을 바라보노라면 비로소 소림사가 고풍스런 사찰임이 느껴진다. 791년에 세운 법완선사탑(法玩禅师塔)이 가장 오래되었고, 2002년에 세운 최근 것까지 합쳐 총 232개 탑이 들어서 있다.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로 세운 탑은 고승의 수행 정도와 따르는 제자 수에 따라서 높이와 크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가장 특이한 탑은 유공탑(裕公塔)이다. 탑림 중에서 유일하게 1m 높이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원나라 소림사 주지를 지낸 복유(福裕, 1203~1275)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성을 함락하면 투항한 백성 모두를 살해하던 악습’을 고쳐 존경받던 인물이다.# 여행사진
'내 인생 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 화산(華山) - 02 (0) 2024.04.05 중국 운대산(홍석협,천폭협,담폭협)협곡 트레킹 - 01 (0) 2024.04.05 중국 숭산트레킹,소림사순례 - 02 (0) 2024.04.05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 (2) 2024.04.04 삿포로(홋카이도 여행의 중심 삿포로) (0) 202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