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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귀비'楊貴妃
    공 부 방 2018. 7. 4. 12:39


    # 양귀비'楊貴妃


    양귀비는 중국 당나라 현종의 왕비로 이름은 옥환이며, 쓰촨 성에서 태어났다. 중국 역사상 3대 미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종의 비 무혜황후가 죽은 후 우연히 현종의 눈에 들게 된 그녀는 당시 현종의 열세 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였다. 하지만 현종은 당대 최고 권력가였던 환관 고력사를 시켜서 양귀비를 데려오게 하였고, 결국에는 아들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귀비로 책봉했다. 745년, 당시 현종의 나이는 61세였다.


    귀비였으나 황후가 없는 터라 양귀비는 황후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현종은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 공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그녀의 숙부와 세 명의 친오빠에게도 높은 벼슬을 하사했다. 또한 양귀비의 세 명의 언니를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여 그 세도가 매우 어마어마했다. 양귀비의 일가 친척 중에서 가장 세도를 누린 사람은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검이다. 양검은 이융기의 총애를 받아 이융기에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은 승상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양귀비는 후에 절도사 안녹산을 총애하여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녹산의 세가 커져가는 것을 불안해했던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을 모함하였으나 매번 양귀비가 끼어들어 그를 구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그녀의 죽음을 불러왔다.


    안녹산은 755년 부하인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을 타도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현종은 양귀비와 그 일가를 데리고 장안에서 피신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멀리한 탓이라고 생각했던 관군은 도망치던 도중 양귀비와 양국충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종용했다.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는 동안 군인들은 그를 끌어내 목을 베고 시체를 갈가리 찢었다.


    현종은 양귀비만은 구하려고 관군을 설득하려 했으나 군인들은 뜻을 꺾지 않았다. 고력사마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자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했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고, 군인들은 그녀가 죽었다는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양귀비(楊貴妃 719 ~ 756)

    초선(貂蟬), 왕소군(王昭君), 서시(西施)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알려져 있지요 당나라 현종의 비(妃)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귀비(貴妃)란 직함이 붙은 것이지요 양씨의 이름은 흔히 옥환(玉環)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지의 손부인이 후세에 손상향이란 이름을 얻은 것과 같은 맥락 이지요.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이며 용주(容州)에서 출생했어요 17세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지요 그러나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할때 양귀비를 선보였는데 이때 양귀비는 몰래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황제와 정사를 나누었는데 27세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봉되었어요 이게 막장이라면 막장인데 왜냐하면 무혜비의 아들이 수왕이기 때문이지요 즉, 원래 황후였던 시어머니가 죽자 며느리가 그 자리를 찾이한 셈이지요.



    한마디로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눈이 맞고 배가 맞은 막장녀 이지요 다만 시대상 양귀비가 황제를 상대로 거역할수 없는 절의를 지키려면 죽는 수밖에 없었고 다른 가족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니 양귀비를 무작정 비난할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또 전세대의 다른 여인들과 달리 양귀비는 정치에 개입하지도 않았기에 정적을 만들거나 국난을 조장하여 화를 자초한 것도 아니었지요 문제는 며느리에게 손을 댄 현종이라 봐야 하지요.



    아무튼 이 일로 인해 양귀비는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어요 양귀비는 물론 그녀의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내려진 현종의 후대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백거이가 쓴 장한가 중 '후궁에 빼어난 미녀 삼천명 있었지만(後宮佳麗三千人) 삼천명에 내릴 총애 한 사람에 내리네(三千寵愛在一身)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遂令天下父母心)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네(不重生男重生女) 라는 시를 읋었지요.




    양귀비의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어요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지요 이런 지경이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리가 없지요 그러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강요했어요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그녀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지요.



    중국의 4대 미인 또는 5대 미인의 한 명으로 정사(正史)에선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적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뜻이지요 요즘 같은 시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물론 요새라고 풍만한 걸 좋아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듯이 양귀비는 풍만한 육체를 자랑하고 있었지요.



    여기서 중국의 4대 미인들을 살펴보면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마지막으로 동양의 클레오파트라라고 일컫는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를 꼽고 있어요.


    이들 미인들은 각 시대마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같이하며 인구에 회자되었기 때문에 시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많은 전설과 기담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지요.



    수화(羞花)라고 일컷던 양귀비(楊貴妃)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어요 어느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지요 그러자 함수화는 바로 꽃잎을 말아 올렸어요 당명황이 그녀를 보고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수화(羞花)라 했으며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지요.



    38세의 꽃다운 나이고 자결하여 안타까움을 주고 있지만 양귀비묘는 서안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섬서성 흥평시(興平市, 싱핑스) 마외진(馬嵬鎭, 마웨이전)에 자리잡고 있어요 양귀비 묘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에서 멀리 떨어진 흥평시에 묻히게 된 데에는 안록산(安錄山)의 난과 연관이 있지요 당나라의 국운을 쇠퇴시킨 계기가 되었던 안록산의 난은 양귀비의 사촌오빠였던 양국충(楊國忠)과 대립했던 안록산이 755년 11월 8천명이 넘는 기병을 이끌고 장안을 진격하면서 시작되었어요.


    당나라 황제였던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는 안록산의 난을 피해서 지금의 사천(四川, 쓰촨)지방으로 피신했는데 수행했던 근위병들이 모반을 일으켜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를 죽이라고 현종을 위협하였지요 결국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양귀비는 흥평시의 한 길가 불당에서 목을 매어 38세의 나이로 화려하면서 기구한 삶은 마감했어요.


    안록산의 난이 끝나고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양위한 현종은 따가운 세인의 눈초리 때문에 성대한 장례를 치룰수는 없었지만 은밀히 양귀비의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황실묘소와 멀리 떨어진곳에 조용히 작은 묘소와 작은 사당을 지어 양귀비를 추모했다 하네요.


    섬서성의 황토고원 마외진에 자리잡은 양귀비묘는 다른 당나라 황실 무덤과 달리 아담하고 소박하지요 청대에 이르러 성역화되기 이전에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던 양귀비묘는 지금은 무덤과 더불어 6m 높이의 대리석으로 된 양귀비상과 사당, 시비당 등으로 조성되어 있어요.


    양귀비의 무덤은 중국의 다른 무덤양식駭?달리 높이 3m, 지름 5m 정도의 초라한 반구형 벽돌무덤이지요 양귀비의 무덤 위에 벽돌을 쌓게 된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마외진 근처에 얼굴이 너무 못생겨 시집을 못 간 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양귀비의 무덤에 쓰러져 울고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처녀의 얼굴에 무덤의 흙이 묻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못생겼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예쁘게 변해 있었어요 그래서 옥골선풍(玉骨仙風)의 새신랑에게 시집을 갈수 있었지요.


    뒤 사람들은 양귀비 무덤의 흙을 '귀비분'(貴妃粉)이라 믿으며 너도나도 퍼가기 시작하여 봉분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지요 결국 청나라에 이르러 지방관청이 벽돌을 쌓아 이를 방지하게 되었어요.


    원래 초라했던 양귀비의 무덤 주위에는 후대의 많은 시인들이 찾아서 양귀비에게 바치는 시를 남겼지요 이를 모은 비석들이 지금도 많은 관광객의 눈길을 끄는데 그 가운데에는 당 희종이 쓴 '행촉경마외'(幸蜀經馬嵬)와 청말 임칙서가 쓴 '제양태진묘'(題楊太眞墓) 등의 시비가 유명 하지요 언제 한번 중국 섬서성 흥평시에 가면 양귀비묘릉 찾아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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