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유두류록이란 어떤 것인가.
    지리 탐구방,탐방기고 2020. 7. 22. 20:29

    # 유두류록이란 어떤 것인가.

     

     

    점필재 金宗直(1431-1492)1472(成宗 3)에 두류산(지리산)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지은 기행록이며 131의 을해자본(乙亥字本)으로 점필재집에 수록되어있다. 김종직은 1471년 봄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인 1472814일에 유호인(字 克己), 임대동(字 貞叔), 조위(字 太虛), 한인효(字 百源)와 함께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하고 돌아와서 820일에 이 글을 지었다. 체제는 遊頭流錄, 遊頭流山紀行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말에 書頭流錄後, 效國華體題頭流錄後3편의 글이 부록되어 있다.遊頭流錄은 두류산 기행문이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은 1463년에 쓰여 진 이륙(李陸) 의 <지리산기> 창작 9년 뒤에 발표된 것이지만, 간략한 보고서 형식으로 구성된 이륙의 지리산기가 별반 주목을 받지 못한 반면, 지리산의 경관과 사적들, 그리고 지나친 산길의 풍광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물론 자연 경물에 대한 진솔한 자신의 감정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담아낸 점필재의 <유두류록>은 사림(士林)들의 지리산유람 입문서가 되었다. 특히 김일손 조식 유몽인등 영호남 사림(士林)들의 지리산산행의 수친서, 즉 산행안내서가 된 작품이다.

    한편 <유두류록>은 역대의 지리산 유람록 가운데 일정한 체제와 분량을 갖춘 최초의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기도 하다.

    또 한 <유두류록>에서는 지리산 산중의 여러 곳에 관련된 전설 설화 등을 고사와 함께 풍부하게 전하고 있어 지리산 역사탐구의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기록의 내용과 흐름을 살펴보면 앞머리에 영남에서 태어나 늘 두류산을 가보려고 하였으나 관직에 얽매여 못가다가 마침내 금년(1472) 8월에 유호인 등 5인과 함께 가게 된 경위를 쓰고, 5일간의 지리산산행 행적을 날자 별로 기록하였다. 814일 함양관아를 출발하여 엄천사, 화암, 지장사, 선열암, 신열암, 의론대등을 거쳐 고열암에서 산행 첫날 유숙을 하고 15일 영랑재(永郞岾)에 올라 영랑이 이 고개에 올랐던 일을 회상하며 천왕봉과 단풍 든 산천을 보았고, 해유령(蟹踰嶺), 선암(船巖),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라 월출의 장관을 감상하였다.

     

    16일 향적사(香積寺)에 이르러 자고 다음날 아침 일출의 장관을 보았다. 다시 천왕봉에 올라 두류산 주변 산수 형세를 열람하고 일일이 기록하였고, 증봉(甑峰/제석봉)과 저여원(沮洳源.세석고원) 창불대(唱佛臺)를 거쳐 영신사(靈神寺)에 도착해서 유람 마지막 밤을 영신사에서 보낸다. 영신사에서는 가섭불과 좌고대를 본다, 산행 마지막 날인 18일에는 지름길로 해서 현재의 백무동 하산을 하여서 실덕마을에서 일행과 헤어져 등구재登龜岾)를 넘어 함양관아로 돌아온다. 말미에 두류산에 갔다 온 소감을 심도 있게 적었다.

     

    <유두류록>을 통하여 전해지는 김종직의 두류산에 대한 사상과 의식은 후대 士林 들의 지리산 유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선생은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 고향의 산으로 인식하여, 천왕봉에 올라 마음을 펴고자 하였다. 천왕봉 성모석상에 대해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으로 보는 설을 부정하고, 역사서 제왕운기를 인용하여 고려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로 본다. 유람 도중 현실적 갈등과 모순이 없는 무릉도원을 희구하였으며, 선생은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산행 도중 만나는 매를 잡는 사람들의 응막(應幕)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하였다.

     

    창불대(唱佛臺)에 올라서는,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과 고려 문인 이인로를 떠올려서 그들의 불운한 생과 문학적 가치를 언급한다. 영신사 에서는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서 훼손된 가섭불의 형상을 보면서 일본사람들은 흉악하다고 규정을 하고, 미륵세상을 꿈꾸는 가섭불의 유래를 듣고서는 숭유억불 정책과도 상통하는 승려들의 혹세무민 적 행적도 비판을 한다.

     

    산을 내려와 골짜기 입구 사당에서 하인들이 가져온 옷을 갈아입고 말을 타고 실택리(實宅里)로 가자 노인 몇 명이 그를 맞아 절을 하며, 그가 무사하게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하례했다. 그러자 그는 공무를 제쳐두고 유람하는데도 백성들이 탓하지 않으니, 그제 서야 안심이 된다.’며 백성을 두려워하는 목민관의 태도를 내비쳤다.

    유람록을 마무리 하면서, 두류산을 중국의 숭산과 태산에 견주기도 하고, 유람을 한 소감을 방장산은 삼한밖에 있다고 한 두보의 시에 대비시켜 방장산(두류산)의 위력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정신과 혼은 아뜩할 정도로 높이 난다. 고 했다.

     

    <유두류록>은 기록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인문지리서이다. 유두류록에는 지나는 노정과 그곳에 있는 자연의 모습을 지극히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산행 첫 밤을 유숙한 고열암 에서는 한밤중에 깨어나 보니 달빛이 구름에 삼켜지거니 토해지거니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일었다.’ 나는 말없이 걱정할 따름이었다. 라고 무상한 자연의 변화를 언급했고,

    구롱을 찾아서 넘어 갈 때 수풀 속을 헤치며 가는 길에 큰 나무들이 죽어 길에 쓰러져 다리가 되어있고, 반쯤 썩 은 것은 가지가 땅에 걸쳐 있어 그 위를 지나게 되자, ‘말을 탄 것처럼 출 렁거렸다라고 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구롱을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을 때는,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거나, ‘풀과 나무들은 비 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보름날 밤 흐리고 비바람 치는 천왕봉에 머물게 되었을 때는, 밤이 깊어 달빛이 어두침침하게나마 비치자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라보았으나, 갑자기 두꺼운 구름에 가려져버렸다. 보루에 의지해 사방을 내려다보니, 육합(六合, 하늘)이 서로 이어져 마치

    큰 바다 한가운데에서 작은 배를 타고 높이 올라갔다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하면서 파도 속에 빠질 것 같았다.’라고 표현을 했다.

    유두류록에 담긴 서정적인 글쓰기는 기록 끝 문단까지 이어진다. 산행이 끝나는 백무동계곡 합수점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짜기의 물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소리는 뿜어져 퍼지면서 산기슭의 수풀을 마구 흔들었다.’ 고 했다.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묘사로 인해 점필재의 유두류록은 고전에서 흔하게 느끼는 지루함이 전혀 없다.

     

    550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유두류록>의 가치는 거대한 지리산을 뛰어 넘는다.

     

    한편, 당시 점필재 김종직이 유람을 한 산행코스는 지금의 의식으로 볼 때에 하나의 개척 산행으로서 탐구 가치가 있는 지리산 산길이기도 하다.

    일자 별 산행코스는 다음과 같다.

    [814] 함양관아 출발 엄천사 화암(현 동강마을) 운서마을 지장사 환희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1).

    [815] 고열암 쑥밭재 청이당 영랑대(하봉) 중봉 천왕봉(2).

    [816] 천왕봉 향적사(3)

    [817] 향적사천왕봉저여원(현 세석고원) 영신사(4)

    [818]영신사 한신능선 백무동 실덕리 등구재 함양관아.

Designed by Tistory.